모험과 도전이 탄탄대로와 행운속에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깨지고, 뒹굴고, 좌절하고, 부딪치고....
우리 시대 명사들의 고군분투 도전기를 들어 본다.
조선희
내 글이 쓸모가 있을까, 좌절 또 좌절
나이 사십에 소설가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문화부 기자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생겨난, 문학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도전이었다.
나는 지금 소설 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그리고 고전 중이다.
이전에도 나는 글을 쓰는 일을 해 왔지만, 기자와 소설가는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일이었다.
기사는 정치적 올바름과 상식으로 쓰는 글이라면, 소설은 그 반대의 영역, 상상력과 판타지, 자신의 고유한 생각으로 쓰는 글이었다.
전혀 다른 이 직업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2000년부터 시작했는데, 좌절을 엄청나게 많이 했다.
정말 이렇게까지 좌절할지 몰랐다.
내 인생의 바닥을 쳤다고 생각할 정도다.
나는 나 스스로에 대한 가치 평가가 중요한 종류의 사람인데, 내 글이 과연 쓸모가 있을까, 실망도 정말 많이 했다.
그러나 충분히 절망하고 나면 오히려 담담해진다.
그리고 나는 이제, 내가 누구이며 어떤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래서 여전히 두렵지만 더 앞으로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고군분투 속에서도 나를 계속 도전 속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바로 제일 처음 나를 매혹시켰던, 소설적인 허구, 문자로서 표현되는 이야기에 대한 매혹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 소설가, <씨네21> 前 편집장 |
박재동
2~3년이면 될 줄 알았더니 10년이 넘어가는 오돌또기
나는 요즘 권상우 몸매에 도전하고 있다.
물론 나름대로 탄력 있는 피부와 몸매를 유지하고는 있지만(웃음), 건강하게 나이 들고 싶어서 운동 중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직접 권상우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보기엔 나보다 훨씬 호리호리한데 어깨를 만지니 그렇게 빵빵할 수가 없었다.
이거 권상우 몸매 되기 쉽지 않겠구나 싶었다.
지금도 가슴 근육은 조금씩 나오는데 배도 같이 나와서 문제다.
하지만 나이가 들다 보면 그렇게 조급해 하지 않게 된다.
천천히, 꾸준히 하는 것이 정말 잘 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10년 넘게 한국적인 장편 애니메이션 오돌또기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처음엔 2~3년이면 완성할 줄 알았다.
그러나 여러 가지 시행착오와 IMF 이후의 자금난이 겹치면서 일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다.
수익을 내는 다른 일을 해야 됐고, 그 일을 하고 나면 잠시 오돌또기에 집중할 시간이 생겼다.
하지만 이렇게 에둘러 돌아온 길도 내가 치러낸 수업료라 생각한다.
어쩔 수 없이 했던 일들은 우리 팀원들의 노하우로 값지게 남아 있다.
가끔 마음속으로 지칠 때도 있지만, 나의 거칠 것 없는 자신감은 여전하다.
시작부터 나에게는 두려움이 없었다.
커다란 스크린에서 대중들과 울고 웃는 오돌또기가 탄생할 날을 향해, 하루하루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
물론, 꿈꾸던 그 날이 왔을 때 내 몸매는 이미 권상우처럼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웃음)
| 만화가, 오돌또기 대표 |
김영옥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사소하지만 어려운 도전
‘도전’이라는 물음에 답할 이야기가 내겐 별로 없다.
모든 것이 모험이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불안하기만 했던 성장기를 기억해 보기도 했다.
서툴게 시작했던 첫 직장과 혼자 떠난 낯선 여행을 되돌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두가 내겐 도전이라기보다는 나름의 이유를 가진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이었고, 성장이었다.
내 삶에 도전이 없었다는 자각은, 무모함과 용기, 원대함이 없었던 지난 시간에 대한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다.
지금 나는 사소한, 그러나 내겐 너무 어려운 계획을 하나 세우고 있다.
내 작업에는 항상 클라이언트와 규정이 있다.
그래서 공간을 만들어 가는 작업은,
처음에는 감성과 표현의 욕구에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그것을 거르고 다듬고 맞추어 가는 조심스런 타협의 방식을 택하게 된다.
나는 이런 나의 일과 반대되는, 구체적이지 않은 감성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지난해 겨울 갑자기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인사동 필방에 갔다.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먹과 벼루, 붓 다섯 필, 그리고 한 뭉치 종이를 사들고 사무실로 왔다.
내 방 책상 옆에 작은 책상을 하나 더 붙이고, 그 위에 화포 깔판을 깔았다.
작은 나무 의자를 두고, 벽에는 붓걸이용 핀도 꽂았다.
그러나 먹을 갈고 그림 그릴 준비를 하는 그 20~30분이 내겐 너무 낯선 시간이었다.
거의 일중독에 가까운 내게 온전히 기다림과 준비를 위한 시간이 참기 어려웠을 수도 있고,
만만하지 않은 화구와 친해지는 것이 힘겨웠을지도 모른다.
지난 일 년 동안 먹을 간 것은 서너 번 정도 될까….
빈 의자가 무색하다.
한 해를 보내고 다시 주어진 새해의 첫 번째 결심은 다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느낌이 필요한 나를 위해 준비한,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도전이다.
| 건축가 |
김성주
5년 동안 일곱 번이나 줄곧 탈락
대학 졸업 무렵, 전혀 생각지도 않던 직업인 아나운서에 도전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언론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나에게, 한 친구가 바람을 넣은 것이다.
“너는 일단 목소리가 괜찮고 인상도 나쁘지 않아.”
“아나운서? 에이, 아나운서는 아무나 하냐”
그러나 그해 10월 방송사의 공고가 나자, 또 다시 이어진 친구의 강력한 권유에 나는 고민에 빠졌다.
‘에이, 고민만 하면 뭐 하나, 일단 한 번 해보자!’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하게 결과는 승승장구, 최종심까지 오르게 되었다.
기분도 좋았고, 어쩌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최종합격자에, 내 이름은 없었다.
내 생애 최초의 탈락이어서 그만큼 충격도 컸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뒤로 나는 줄곧, 내내 탈락을 맛보아야 했다.
5년 동안 일곱 번.
그동안 여러 케이블 TV에서 아나운서로 경험을 쌓으면서, 때로 매각되려는 회사에서 파업 투쟁도 하면서,
때로 최저 생계비만 받고 하루 종일 방송을 소화하기도 하면서, 계속 방송사 시험에 도전했다.
방송사별로 중간 탈락과 최종 탈락을 거듭했다.
IMF 후폭풍으로 방송 3사가 모두 신입사원 모집을 안 한 해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렀다.
하도 떨어지기만 하니까 시험 본다는 얘기를 할 수도 없었다.
나중에는 방송사 사람에게 “아직도 오냐, 웬만하면 좀 포기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토록 꿈꾸었던 아나운서가 되고 나니, 가장 비참했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귀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나는 그 5년 동안의 수험표와 각종 통지서를 모두 보관하고 있다.
언제든 내가 나태해지려 할 때 그것들을 보면서
“네가 이 일을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잊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 MBC 아나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