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간신하면 “예! 예! 전하” 하며 왕의 뒤를 쫓는 내시가 떠올려진다. 그러나 애초 밝혔듯 간신은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니다. 능력 있고, 어찌 보면 충신으로 착각하기 쉬운 존재다. 충신과 간신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라 하였다. 물론 단순 예스맨과 같은 3급의 간신도 있다. 그런 자는 역사라는 장에서 보면 바닷가 백사장의 한줌 발자국 같은 존재다. 흔적도 없이 스러진다.
그러나 이런 미미한 존재라 하더라도 최고 권력자가 혼미하면 역사의 물꼬를 바꿔버리게 된다. 무신의 난으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뒤 3년 만에 이의민에 의해 허리가 꺾여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고려 의종의 경우가 그랬다. 무신의 난으로 사실 고려왕의 위상은 얼굴마담 수준으로 떨어졌다. 무신들이 새로 왕조를 열고자 했다면 왕씨 왕조는 문을 닫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왕조는 몰락 직전까지 갔던 것이다. 이런 의종은 환관을 총애했다. 물론 그렇다고 의종이 남색 취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변태적 관계를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의종대의 기묘한 정치적 역학관계 때문이었다.
향락과 측근에 취한 의종의 비극묘청의 난을 맞았던 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의종은 고려사에서도 보기 드물게 환락에 취한 왕이었다. 25년이라는 긴 기간을 왕위에 있으면서 그는 거의 대부분을 시간을 술 마시고 노는 데 보냈다. 즉위 초 얼마간은 간관의 충언에 귀 기울여 노는 것을 자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노는 데 빠져들었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의 의종조 기록은 의종이 이 절, 저 정원으로 놀러 다녔다는 기록으로 빼곡하다. 놀러갔다가 기상 이변이 생겼는지 날씨가 춥고 비가 심하게 내려 호위하던 군졸 9명이 얼어 죽은 일까지 발생했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알코올 중독자와 같은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얼마나 알코올중독에 빠졌는지 무신의 난이 발생했던 1170년 9월 정중부 등이 왕을 수행한 내시 10여 명과 환관 10여 명을 죽일 때도 의종은 술을 마시면서 태연자약했다고 한다. 살육의 현장에서도 의종은 악사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술에 취한 뒤에야 잠에 들었다.
의종의 측근세력 강화 정책사실 의종은 즉위 초년에는 인종조를 거치면서 약화된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서경세력을 진압한 김부식 등의 거대 문벌관료세력은 이미 왕권보다 우위에 있었다. 인종도 김부식 등을 내켜하지는 않았지만 세력관계의 추는 이미 문벌관료에게 있었다. 20세의 나이에 즉위한 의종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실권을 쥔 문신들에 대항할 세력을 키우기 위해 내시와 환관 등 측근 세력을 배양했다. 그리고 문신에 비해 전통적으로 홀대 당하던 무신세력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고려의 내시는 조선시대처럼 환관이 아니라 왕을 측근에서 모시는 승지(비서)와 같은 위상이었다. 내각을 직접 통제할 힘이 없던 임금이 측근세력을 키워서 행정부를 견제하는 구도였다. 이 내시 중에는 당대의 실력자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도 있었다. 이들은 왕의 총애를 받았다.
무신에 대한 대우도 이전과는 달랐다. 천민 출신의 군인도 재능이 있으면 중용했다. 또 의종은 궁술과 말타기에 능숙한 자를 직접 선발했으며, 그들이 활을 쏘며 훈련하는 것을 하루 종일 지켜보기도 했다. 견룡군과 시위군과 같은 왕의 친위부대는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의종의 친위세력 구축은 곧바로 문신의 견제를 받았다. 문신을 대표해 간관들은 왕의 측근 세력인 환관을 집중 공격했다. 미천한 출신으로 고자인 환관을 중용하는 것을 문벌가의 관료들은 참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왕이 무신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비판했다. 유약한 의종은 이러한 견제에 굴복했다. 아무래도 실권은 주류 문신세력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종은 이때부터 문신과 놀러다니는 것을 즐겼다. 만수정이나 보현원 같은 정원에서 벌어진 잔치에서는 시문을 농락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무신들은 이들을 호위하느라 밥을 굶고 추위에 떠는 일이 잦아졌다. 한때 임금의 총애를 받던 무신들인지라 그 상실감은 훨씬 더 컸다. 이런 불만이 무신들의 내면에 부글부글 끓고 있다가 무신의 난으로 폭발하게 된 것이었다.
인사가 망사였다결국 무신란은 문신관료 출신 내시·천민 출신의 환관·무신 등 의종을 떠받치는 3대 세력에 대한 균형을 잡지 못해 벌어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애초 내시와 환관은 심각한 갈등 관계에 있었다. 의종은 친위 세력 구축을 위해 천민 출신의 환관들을 고려에서는 처음으로 조정 관원으로 등용했다. 고려에서는 거세형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궁궐의 일상 업무를 관장할 환관은 개에게 남근을 물려 고자가 된 이들 중에서 뽑아서 썼다. 당연히 백성이나 천한 노비 출신이 환관이 되었다. 이에 반해 내시는 문벌 귀족 출신의 엘리트 관료들이 출세 코스로 가는 보직이었다. 조선의 승지나 요즘 청와대 비서실의 비서관이나 수석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이런 내시직에 천민 출신의 환관을 기용한다고 하니 문벌관료의 반발은 집요했다. 의종은 환관으로서 자신의 유모의 남편이었던 정함이란 자에게 최초로 내전숭반 벼슬도 주고, 서대를 하사해 차고 다니게 했다. 서대란 물소 뿔로 만든 요대로 국정에 참여하는 조관들만 차고 다닐 수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정함은 고려 창업에 반대해 노비가 된 가문 출신으로 그 역시 공노비였다. 대간들은 정함의 서대를 강제로 빼앗아 왕의 권위에 직접 도전하기도 했다. 의종은 이런 대간들을 처벌하기도 했으나 부분적으로는 정함 편을 들었던 내시들을 철직시키는 타협책을 쓰기도 했다. 의종은 정함을 종7품직인 권지합문지후(의례를 관장하는 직무)에 임명시켰지만 대간의 관리들이 정환의 임명 고신(告身, 사령장)에 서명하지 않아 이를 관철시키는 데만 7년의 시간이 걸릴 정도로 문신귀족들의 반발은 거셌다. 어쨌든 의종의 집요한 의지 덕에 환관인 정함은 내시직에 머물 수 있었다. 환관이 양반이 된 것이다. 직급은 낮았지만 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정함은 권세가 성해져 관노인 왕광취와 백자단 등을 내시직에 올려 세력을 쌓았다. 대궐에서 동남방으로 30보 밖에 있는 그의 저택은 행랑이 무려 2백칸에 이르렀으며 구조가 왕궁과 비슷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제 정함의 힘은 막강해져 재상이나 대간도 세력에 눌려 겁을 먹을 정도가 되어 뭐라 말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정함을 기점으로 하여 환관들은 세력을 얻기 시작했다.
백선연이란 자는 남경(南京, 서울)의 관노였는데 의종의 눈에 띄어 입궐해 환관이 되었다. 의종은 양자(養子)라고 불렀다는데 왕의 침전을 관리했다. 의종이 총애하던 궁녀 무비와 관계한다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의종의 총애는 여전했다. 그 총애는 곧바로 권세가 되었다. 당연히 똥파리가 들끓었다. 내시 김헌황이 아첨하다 어사대의 규탄을 받아 내시 적(籍)에서 삭제되는가 하면 서리 진득문은 노예처럼 백선연을 섬겨 보석 판관 벼슬을 얻었다. 광주의 서기 김류는 백성의 재산을 토색하여 환관들에게 뇌물을 바쳤다. 그 역시 내시직을 얻었다. 의종은 노비 출신만이 아니라 반역자의 후손으로 점쟁이인 영의란 자 또한 중용하여 숱한 불사와 제사를 올려 국고를 고갈시켰다.
한편 문신관료 중에는 환관들과 갈등만 일으켰던 자가 있는 것만도 아니었다. 김존중이란 자는 인종 때 과거에 급제한 정통 문신관료로 태자의 시학으로 의종을 가르쳤다. 의종이 즉위한 뒤에는 내시부에 소속돼 우승선으로 발탁됐다. 김존중은 문신관료들이 꺼리던 환관 정함과 친했다. 왕의 총애를 받던 두 사람은 결탁해 왕실의 실세로 떠올랐다. 김존중은 인사권을 장악해 벼슬과 작위를 팔아 고래등 같은 집을 네 채나 소유했다. 물론 그의 형제와 친척들이 그의 권세를 믿고 교만 방자했던 것은 물론이다.
이렇듯 내시와 환관의 세상이 되었다. 환관은 의종의 최측근이었고, 내시들 상당수는 의종과 타협한 문벌귀족이었다. 이들은 부와 권세를 거머쥐었다. 다만 의종의 무력 기반인 무신들과 하급 군인들은 날이 갈수록 찬밥 신세였다. 그렇다고 당장 반란의 기운이 생겼던 것은 아니었다. 반란을 촉발시켰던 것은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었다.
의종 몰락의 직접적 계기는 내시 김돈중김돈중이 내시직에 있을 때 정중부의 수염을 불태워 그의 원한을 샀던 일은 유명하다. 자식뻘밖에 안 되는 새파란 놈에게 무인의 자랑인 수염이 불태워졌으니 이가 갈릴 만하다. 이 원한 때문에 무신란을 일으켰다고도 한다. 그러나 수염이 불태워진 것은 무신란 26년 전의 일이었다. 그 세월을 못 잊어 목숨을 건 난을 일으킬 리는 없다. 수염 사건이 아니라 김돈중은 무신란 3년 전인 의종 21년에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관등제를 하던 날 밤 의종 일행은 봉은사로 갔다가 관풍루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김돈중이 탔던 말은 조련도 덜 된데다 징과 북 치는 소리에 놀라서 뛰다가 어느 기병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 바람에 기병의 화살통에서 화살이 튀어나가 왕이 타고 가던 가마 옆에 떨어졌다. 깜짝 놀란 의종은 급히 궁으로 돌아와서는 범인 색출에 나섰다. 시내 각처에 방이 붙고 현상금이 걸렸다. 놀라고 겁이 난 김돈중은 사실을 고하지 못했다. 왕의 서슬에 무고한 이들이 체포되었다. 왕의 동생 대녕후 경의 집 하인이 지목돼 죽음을 당했다. 또한 호위병들이 태만하다 하여 견룡, 순검, 지유 등 추위와 배고픔에 떨며 격무에 시달리던 무신들 14명이 귀양 갔다. 무신들이 원한에 사무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신들의 집단적 반란의 기운은 이때 더욱 증폭됐을 것이다.
김돈중은 앞에서 기술된 환관과 내시처럼 권세 자랑은 하지 않았지만 그 폐해는 더욱 컸던 것이다. 앞서 정함이 합문지후에 임명됐을 때는 그도 문벌귀족이라고(김부식 집안은 고려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문벌귀족이었다.) 고신에 서명하지 않아 직급이 떨어지기도 했다. 시어사에서 호부원외랑으로 강직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아버지 김부식이 창건한 관란사를 중수하고 왕을 위해 복을 빌었다. 물론 소문을 냈다. 의종이 관란사를 찾았을 때는 근처의 주민을 강제 동원해 소나무, 잣나무, 삼나무, 젓나무 등 기이한 화초를 이식하고 왕이 휴식할 이궁까지 신축하였다. 섬돌은 모두 기괴한 돌로 만들었다. 장막과 그릇, 집이 모두 사치스럽고 진기한 것이었다. 강제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의 고초가 심했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김돈중이 무신들에게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무신란 직후 그는 도망갔지만 집종의 밀고로 붙잡혀 살해당했다. 일신의 안위만 살피던, 힘이 자신만 못하면 짓밟던 자의 최후였다.
측근 관리학의종은 날로 취약해지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측근 세력의 부식에 골몰했다. 그러나 원칙이 없었다. 무엇보다 문벌귀족을 견제할 대항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집단적 지지 기반이 요구되는데 측근 그룹에만 매달렸던 것이다. 게다가 문벌귀족과는 애매한 타협으로 천출의 환관그룹과 무신 그룹과의 갈등상황을 방치했다. 어쩌면 그 스트레스를 잊으려 술과 환락에 탐닉했는지 모르겠다.
일본의 경제·역사 평론가인 사카이야 다이치는 그의 명저 <조직의 성쇠>에서 좋은 보좌역의 제1 조건으로 ‘익명의 정열’을 꼽았다. 곧 자신의 공을 감추는 데서 기쁨을 느끼고 우두머리의 업무인 종합 조정의 사전 처리와 사후 처리를 매끈하게 처리해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욕심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당연히 공로 다툼이 있을 수 없다. 의종이 형성하고자 했던 측근세력은 이 같은 좋은 의미의 보좌역의 역할에 충실해야 했다. 그러나 의종에게는 단물만 빨아먹는 간신만 있을 뿐, 목숨을 거는 보좌역은 없었다. 물론 의종에게도 문제가 컸다. 좋은 보좌역을 만들기 위해 권력자는 전폭적인 신뢰를 이들에게 줘야 한다. 그러나 절반의 신뢰만 줬던 것이 김돈중 같은 비겁자나 양성했던 것이다.
권력은 균형을 잡는 저울추라 했다. 그 추를 어떻게 잡느냐가 성공과 실패를 가른다.
최용범/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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