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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2/7,8)와 그제 이틀간, 안동출신 재경교수모잌인 동연회에서 안동방문이 있었다.
안동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향인 안동을 추로지향이라고 부른다. 추는 맹자의 고향이고, 로는 공자의 조국이다.
다시말해 한국 유학의 본고장이란 뜻이다.
유학의 원향으로서 자신들의 고향인 안동이 가지는 자부심을 말한다.
한편으로 여기에서 발전하여 안동사람들은 안동을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눈발이 희끗거리는 꿀무레한 날이었으나, 날씨는 그리 춥지 않았다.
현대백화점 본부 옆 주차장에서 뻐스가 출발했다.
뻐스에 타고 보니, 회원들이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낯선 얼굴들이 많았다.
김종길(고대), 김경동(서울대), 김재은(이대), 김용직(서울대), 김하진(아주대), 김봉구(고대), 김동기(고대), 배성동(서울대),이동원(이대), 이준오(성대),유세희 (한양대) 등 기라성같은 학자들은 한분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를 75세가 넘으신 분들이다. 물론 이분들은 현직이 아니다.
대신 김광억(서울대), 조재호(서울대), 류석춘(연대), 권오남(서울대), 김승년(외대), 김용호(인하대), 김대원(경기대), 강광문(서울대),문옥표(한국학중앙연구원),이동률(동덕여대) 등 현직교수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해마다 한번씩 있었던 고향방문에는 잘 얼굴을 나타내지 않았던 분들이다.
구세대 교수들로서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로는 신명순(연세대), 배도환(중앙대), 김시업(성대), 김무성(경희대),권원오(시립대), ,필자부부(단국대, 공주대) 뿐이었다.이분들은 물론 명예교수들이다.
하루 아침에 동연회의 귀성 교수팀의 구성멤버가 일신해버린 것이다.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제천 세명대학에 있는 유필조, 이봉수 교수가 안동 현지에서 합류하였다.
12시 반쯤, 안동댐 아래 조성된 식당촌에서 안동시의회 김근환 의장 초청으로 유명한 안동 헛제사밥을 먹었다.
별로 비싸지 않으면서도 고향의 맛을 즐길 수 있는 음식이다. 양반가의 제사음식을 일반음식화 한 것으로 다른 음식은 모방이 있지만, 안동헛제사밥만은 유일한 안동브랜드를 자랑한다.
서울에서 안동헛제사밥을 파는데는 필자의 견문으로는 종로 1가 보험공제회 건물 지하에 있는 한 식당이 있고, 인사동의 한정식집 '옥정'에서 헛제사밥은 아니지만 주인이 안동사람이라 배추적같은 안동브랜드의 재래음식을 맛볼 수 있는 것같다. 그리고 안동국시라는 이름의 식당음식은 안동고유의 음식이라고 보기 어렵다.
점심을 먹은 후, 타고온 대절뻐스를 타고 안동댐을 지나 새로이 조성되고 있는 sk 고택마을 건설 현장을 둘러보았다.
SK는 안동과 무슨 관련이 있는 회사는 아니지만 우연히 안동 예안에 조성된 도산서원 선비수련원에 사원들을 보내 수련하게 하였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안동시의 고택촌 건립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안동인 출신으로 전국적인 대기업가는 없는 것같다. 풍산금속이 안동사람들이지만, 풍산금속공장은 안동에 있지를 않고 경주에 있다. 삼보컴푸터가 안동사람들이 만들었다고 하지만,대기업은 아니다.
그래서 안동에는 대기업이 들어오지 않는다고들 하고, 그 결과로 안동은 인구가 늘지를 않고 한 때 30만을 자랑하던 안동이 지금은 겨우 17만을 헤아린다고 한다.
안동으로 도청이 들어오기로 되어 있지만, 30만으로 회복되는데는 적어도 십년은 걸릴 것이라고 현 권영세 시장은 말했다.
다시 식당촌으로 내려와 월영교를 지나 강건너에 있는 낙동강 상류 호반길을 걸었다. 안동 시 승격 50주년을 맞아 조성된 이 길은 닉덩깅변을 따라 산허리에 3km 조성되어 있어서 경치의 수려함이 절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동의 새로운 명물이다. 산자수명한 이곳 안동호반 둘레길에는 전통천연염색 전시관이 있어서 둘러보았다. 관장이신 최옥자 명인의 영접을 받았다.
뻐스를 안동시내로 몰았다. 안동시 한복판에 있는 '경북분화콘텐츠진흥원' 관람과 세미니을 위해서 였다.
원장을 맡고 있는 김진한씨는 EBS 프로듀서 출신으로 안동인들의 방송문화 창달에 획기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다. 단독 건물을 가지고 있고, 사업의 번창함은 놀라울 정도였다.
문화콘텐츠라고 하지만, 주로 뮤직컬이나, 방송관련 문화물을 말함이다. 양반과 유학의 도시 안동을 현대적 감각으로 다듬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안동 시향도 조성되어 있고, 젊은이들의 기악단도 조성되어 있었다. 안동이 시골이라는 감각을 일시에 불식시키는 문화단체였다.
진흥원 세미나실에 들러, 지례예술촌장인 김원길 시인의 강연을 들었다. 강연의 요지는, 흔히들 안동을 추로지향이라 하지만, 자신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안동의 옛지명에는 도연명의 무릉도원에서 차용해온 것이 너무나 많아 추로지향이 아니라, 도연명의 무릉도원지향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산서원도 도연명의 도에서 온 것으로 본다. 퇴계의 글 중에는 분명히 청량산을 무릉도원으로 비견하는 글이 있다는 요지였다.
이 시간에 서울대학교의 권오남 교수는 자신의 모교인 안동여중고에 가서 강연하였다.
한정식집 '부숙'에서 만찬이 있었다. 안동병원 강보영 이사장이 초청하였다.
강보영 이사장은 동년회의 고향 방문 때만다 단골로 만찬을 베푸신다. 경상북도 북부지방을 전부 카바하는 대형병원인 안동병원은 안동 사람들의 또다른 긍지이다. 중병에 걸렸을 때 환자가 대구로 가기도 뭣하고, 서울로 가기도 뭣한 위치에 있는 도시가 안동이다. 그런 환자들에게 안동병원은 좋은 치료를 제공하고 있다. 한강 이남에서는 제일 크고 좋은 시설을 자랑하는 병원이라는 생각을 안동 사람들은 하고 있다고 한다.
만찬장에 안동시장이 참석하였다.
이어서 국회의원 김광림 의원이 참석하였다.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면서 안동 발전에 대한 비젼에 대해 말하였다.
안동은 지금 확실하게 어떤 흥분의 도가니속에 있다. 그것은 이번 6월로 예정된 도청이전이라는 큰 사건 때문이다. 대구에 위치하고 있는 도청이 여기 안동으로 이전하여 오는 것이다. 300 개 이상의 유관 기관이 따라서 온다고 한다.
김광림 의원은 동연회의 현 회장인 김광억 교수의 아주 가까운 친척동생이다. 경북도청의 안동이전에 획기적으로 기여하였다는 평을 듣고 있다고 한다.
사실 경북도청의 안동이전은 정말 뜻밖의 일이다. 경상북도에는 세계 제일의 철강 도시이자 인구 60만의 포항이 있고, 인근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왕조사를 자랑하는 신라의 변함없는 고도 경주가 있다. 포항은 대구를 제외하면 경북 부동의 제일도시이다. 포항사람들은 당연히 도청은 대구에서 포항이나 경주로 올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구미는 경북 수출물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신생 산업도시로서 이 지역 출신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으로서의 성가와 인구 50만을 자랑하고 있고 경부선 상에 위치하여 교통이 전국망으로 뻗어 있어서 타 도시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상주의 도전도 보통이 이니었다. 아주 뛰어난 교통망과 경상도라는 지역명에서 상 자가 상주를 가린킨다고 하는 상주의 역사성은 누구나 알고 있고, 최근 지방 도시로서 '서울 못지 않은 경제력을 자랑하는 도시'에 뽑히는 등 곶감의 고장 상주의 위상은 대단하다.
그런가하면 대구와 경주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서 경상북도의 지정학적 위치의 강점을 가지고 있는 영천의 도전도 막강했다. 영남의 웅도 대구와 천년 고도 경주를 양면에 거느리고 있어서 영천의 행정적 문화적인 이점은 분명히 인징되었다.
영주의 도전도 대단했다.영주는 봉화 예천 영양 영덕과는 달리, 안동을 경북 북부지역의 주군으로서의 위치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영주 자신이 바로 주력 군이라는 자부심이다. 영주는 과연 안동과 맞먹는 지방력을 가지고 있는 도시이다.인구도 안동과 비슷하다. 문화적으로도 퇴계가 순흥 부사를 지냈고, 퇴계의 정신적 고향이 안동이 아니라, 영주라는 것이다. 소수 서원 앞 바위에 그려진 敬 가 그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만고의 명찰인 부석사가 있고, 한국유학의 시조인 안향이 영주 사람이다. 사실 오늘날 영주에 건립되어 전국적인 성가를 얻고 있는 영주선비촌은 안동에는 없는 것이다. 사실 안동의 도청 유치에 가장 강하게 반발한 군이 영주였다고 한다.
사실 경북의 새로운 도청소재지의 결정은 경북 도민은 물론이고 전국민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어느 도나 새로운 도청 소재지가 어디냐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경북도는 더욱 그러했다. 대구는 영남의 심장부로서의 역사성이 있고 그 규모면에서 여타 도시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다.
경상북도는 넓이와 인구 그리고 역사성에서, 작은 나라라고 할만큼 전국 제일의 위력을 가진 행정단위이다. 가히 소왕국이라고 할만하다. 새로운 도청소재지의 유치는 가히 새로운 왕국의 왕도가 된다는 뜻이다. 어찌 중차대한 사안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뜻밖으로 종택과 서원의 도시, 먼지나는 고서들의 도시, 인구라고는 점점 즐어들어 채 20만이 되지 않는 안동으로 낙착이 되어 세인들을 놀라하게 하였다. 선정위원으로 뽑힌 사람들이 80명이었다고 하고, 그들의 자유투표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하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 다른 방도는 없다.
그러나 안동시민들 사이에 회자하는 말로는 김광림 의원이 크게 활약하였다고 한다. 하기야 그 지역 출신 국회의원이라면 그가 누구든 그런 일에 앞장서서 일해야 함은 당연하다. 좌우간 김광림 의원이 만찬장에 나타나 안동의 꿈에 대해서 근 한 시간 우리들과 대담하였다. 내가 그에게서 느낀 소감은 사람이 대단히 소탈하고 박식하며 인간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친척형님이 참석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는 겸손하였고, 정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러가지를 절도있게 언급하여 참석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나는 정치하고는 담 쌓고 사는 사람이라, 국회의원이라는 감투를 쓰고 있는 사람하고는 밥을 같이 먹은 기억이 거의 없다. 내 대학동기중에서 이상현 옛 자민련 의원이 있고, 나의 옛 직장인 단국대학교 교수 출신의 김현욱 의원과 밥을 먹은 기억이 있다. 이번 김광림 의원이 세번째이다. 국회원은은 말을 하여서 먹고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나 말을 시원시원하게 잘 하는지 그분의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은근히 놀랐다.
그분은 나의 고향이 안동이 아니라, 봉화라는 사실을 알고, 양반은 안동보다 봉화가 더 많고 진짜다. 그리고 봉화는 바로 안동이라고 말할 정도로 안동사람들은 봉화사람들을 가깝게 느끼고 있다고 했다. 다들 박수를 치고 웃어제쳤다. 동연회 가입 조건에는 안동처녀와 결혼한 사람도 가능하다는 것이 있고, 집사람이 안동 풍산 김씨이다. 집사람의 외가가 안동 예안이고 예안 집성촌인 진성이씨다.나의 이런 가족 내력을 알고 그들이 초청하여 가입하였을 뿐이다.
안동병원 강보영 이사장이 가져온 진짜 안동 소주를 한 모금 마신 탓인지 나는 눌변이지만 주변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퇴계가 있다고 그리고 곧 도청소재지가 된다고 안동인들 너무 자만에 빠지는 것같다. 이웃 군인 영덕에는 목은 이색이 있고, 봉화에는 삼봉 정도전이 있고, 명 예조판서 충재 권벌이 있고, 영주에는 안향이 있다. 그리고 경치로 치더라도 안동이 으쓱할 이유가 없다. 안동에 하회마을이 있다면 봉화에는 퇴계가 무릉도원이라고 했던 청계산이 있고, 영주에는 무섬이 있고, 영덕에는 주왕산이 있다고 했더니 기고만장했던 안동사람들 기가 좀 죽는 것같았다.안동이 자기 혼자 잘 나서 도청소재지가 된 것이 아니고,같이 주변에 있는 이런 여러 군과 시의 도움으로 된 것임을 잊지 말라고 했다. 김광림 의원도 전적으로 동의하였다. 사실 도청 유치에도 인근 군인 예천군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는 비사 한 토막을 알려 주었다.
숙소인 고려호텔은 특급호텔이었는데, 부부에게는 독방이 배정되었다. 모처럼 고향에서의 하룻밤은 깊은 정적감과 아울러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점철되었다. 나의 고향은 안동 바로 위인 봉화지만 집안 사람들이 전부 안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집안에서 안동 사범에 유학하면 최고로 쳤고, 환자가 생기면 전부 안동으로 가서 병원을 찾았다. 5촌 어른이신 정연우 아재는 안동사범을 나오셔서 교장까지 하셔서 집안에서는 가장 출세한 어른으로 대접을 받고 있다.김광림 의원 말대로 봉화는 말만 다르지 그야말로 안동이었다. 나는 안동을 무대로 삶을 꾸리셨던 돌아가신 부모님과 얼굴을 알고 있는 조부모님들이 생각되어 나도 모르게 경건해지는 하루밤이었다.
이튿날 조찬은 만찬을 했던 한정정식 집 '숙부'에서 했다.
뻐스를 타고 안동출신 독립투사 석주 이상룡의 고택인 군자정으로 가서 구경하였다. 안동 사람들은 석주에 대해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있다.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분이다.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승만이 상해에 오지도 않고 직를 태만하자, 대통령제를 페지하고 국무령제로 바꾸면서 석주가 초대 국무령으로 선임된 것이다.
석주는 독립군 양성기관이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회영 이시영 형제와 더부러 조국 광복을 위해서는 무장력을 길러야 한다는 점을 깊이 깨달은 선각자였고, 자신의 거대한 전 재산을 이곳 종택인 군자정 이외에는 전부 팔아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경학사 건립에 희사하였고, 초대 교장으로 추대되었다. 신흥무관학교는 이회영, 이시영, 이상룡, 이동녕 등 4인의 합작품이라고 보면 된다.이곳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서로군정서로 발전하였고, 결국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합작하여 3300 여명의 일군을 사살한 청산리전투에서 승전할 수 있었고, 일군의 시베리아 정벌군인 19사단 병력을 봉오동전투에서 격파한 홍범도의 한국독립군 부대도 그 뿌리는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
아상룡의 종택인 군자정 관람을 마치고, 바로 옆에 있는 안동 칠층 전탑을 구경하였다.
안동에는 그 안동 다운 성가와는 달리 국보가 아주 적다. 필자가 일기로는, 다섯 점의 국보가 있을 뿐이다. 엔간한 절간 하니에 있음 직한 숫자이다. 유셩룡의 징비록, 안동 법흥사지 칠층 전탑, 봉정사 극락전, 하회 탈, 봉정사 대웅전 등 다섯 점이다.
한국 유교의 원향인 안동에 왜 이렇게 국보가 적을까. 우리 나라 국보의 주류는 역시 불교 유물이거나 궁중 유물인 경우가 많다. 안동 소재의 국보도 봉정사 극락전과 대웅전과 법흥사지 칠츹 석탑이 불교 유물이다. 나머지 두개가 징비록과 봉산 탈이다. 저 유명한 하회마을도 국보가 아니고 '중요 민속 문화재'이다.
유교는 예술성과 지속성이 두드러진 예술품을 남겼다기 보다는, 서책 서원 종택 등 민속적인 차원의 값진 유물은 많이 남겼지만, 예술성이 두드러진 예숲품을 남긴 것은 아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한 안동지역에 국보의 숫자가 적은 이유이다.
안동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2,30리에 위치한 예안으로 뻐스를 몰아 퇴계종택과 한국국학진흥원과 선비수련원을 방문하였다. 퇴계 종손은 출타 중이어서 뵙지름 못했다. 퇴계사상의 핵심을 하나의 글자로 요약하라면, 흔히들 '경(敬)'이라고들 한다. 종손은 아이들이 와도 한복을 입고 갓을 쓰고 꿇어 앉아서 절을 한다고 한다. 뵙지 못해서 섭섭하였다. 나의 장모가 93세로 살아계시지만 바로 여기 진성 이씨 종가 집안 출신이시다. 친정집이 안동댐에 수몰되어 그 유구가 안동민속박물관으로 옮겨져 조카인 '이필구의 집'으로 보존되고 있다.
한국진흥원 원장은 나의 대학 동기생인 김병일인데, 기획예산처 장관을 한 사람이다. 사학과 출신으로 고향이 상주이다. 처음 부임할 때는 불과 2, 3천명이던 진흥원 방문객들이 작년에 3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들어선 건물들이 자
꾸만 불어나서 대단한 위용을 자랑한다. 제일 뒤편에는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도 있다고 한다. 전체를 다 돌아볼 수는 없고, 인쇄를 위한 목판을 모아 전시하고 있는 장판각을 둘러보았다. 김병일 원장은 서울로 출장 중이라 만나지 못했다. 해설자의 말로는 목판 하나를 만드는데는 요사이 돈으로 300만원 가량 드는데, 보통 50장 정도로 하나의 서책을 꾸몄으니 책 한권을 찍어낼려면 대략 1억 5천만원이 들었다고 했다. 옛 왕조 시절에 책을 낸다는 사실이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충신이 죽었을 때, 왕의 명령이 아니면 경제적인 문제로 문집을 내기가 아주 어려웠다.
선비 수려원이란 새로운 조직이 생겨나 있었고 꽤 거창한 건물도 갖추고 있었다. 안동의 선비정신의 전파가 목적이라고 한다. 안동 고택 마을의 조성을 담당하고 있는 SK 와의 인연도 바로 안동선비수련원이었다. SK에서 사원들을 여기 선비수련원에 보내어 수련을 시킨 결과 업무능율이 오르고 지주 집에 전화하고 지각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상사에 대해 깎듯이 인사하고 회사를 위해 헌신하는 정도가 훨씬 강화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SK 경영진의 괸심을 끌어 여기 안동 고택 마을 조성에 투자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선비수려원의 원장은 학봉 15대 종손인 김종길 씨가 맡고 있다(고대교수 김종길 시인과 동명이인이다).
선비수련원도 방문자들의 숙소 시설을 갖추고 있으나 개관이 일천하여 방이 모자라 한국학진흥원의 시설을 빌려 쓴다고 했다. 수련원 관람을 마치고서 안동으로 나와 유명한 안동불고기를 먹었다.
이어서 학봉 종택으로 향했다. 도중에 안동병원으로 들렸으나 워낙 시간이 촉박하여 뻐스에서 내리지 못했다.
안동병원은 안동시내에 남쪽을 흐르는 낙동강의 남안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에는 6.25시 유명한 안동교 폭파로 유명한 안동전투의 피비린내 나는 전사가 서려 있다.
마이크를 잡은 나는 안동교 폭파와 6.25에 얽힌 전쟁사의 한 토막을 소개하였다. 소백산에서 내성천을 따라 남하하는 인민군을 잠시라도 그 전진 속도를 늦추기 위해 안동교를 폭파하라는 워커 유엔군 사령관의 명령이 하달하였다. 당시 이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8사단은 영어로 하달 된 명령문을 정확히 해석하는데의 어려움과 후퇴에 후퇴를 거듭한 장병들의 피로감 때문에 안동지역 철수 시간을 명령받은 시간에 맞추지 못했고, 허둥 지둥 강의 다리 위를 걸어서 후퇴하다가 시간에 쫓겨 장병들을 다리 위에 놔둔 채 폭파팔 수 밖에 없었다. 당시 8사단장은 이상가 준장이었고, 참모장은 최덕신 대령이었다. 그들은 유엔군 사령관의 명령을 따라야만 했다. 그러나 그때 적군이 벌써 강의 북안에 당도하여 무차별 기관총 사격을 가하여 다리의 폭파와 함께 사격을 받은 아 사병들이 강물로 뛰어들 수밖에 없어서 약 800 여명의 전사자를 냈다고 전사는 적고 있다. 당시 낙동강은 댐 조성이 되기 전이라 수심이 3미터 정도 였다고 한다.
안동교 폭파로 인민군의 남하 속도를 사흘 쯤 늦추었고, 이 사실은 대구 함락을 목적으로 하는 적 주공격력의 낙동강 전선으로의 집중을 막아 국군 1사단 승리의 주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학봉 종택에 들렀다. 안동에 올 때마다 학봉 종택에 들러 이번에 세번 째인 것같다. 15대 종손인 김종길 씨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학봉 후손들의 선조 추앙과 선양 정신은 남다르다. 사실 학봉은 퇴계의 학통을 공식적으로 이어받았다 하지만 뚜렷한 학문적인 업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지낸 조정에서의 관직도 최고로 올랐을 때가 부제학이다.홍문관의 정3품으로 간신히 당상관의 말석에 든 사람이다. 정승이나 판서의 서열에 든 사람이 아니다. 참판이나 참의의 반열에도 가지 못한 사람이었다.
선조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사신을 보낼 때도 정사가 아니라 부사였다.
선조가 정사 황윤길의 말에 믿음이 더 있다고 판단하여 경상도 지방에 성을 수리하고 군사를 정비하였다. 그때 학봉김성일은 경상우도 병사의 직함을 제수 받았다. 주둔지는 경남 창원이었다. 이 보직이 거창한 것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다만 지방 주둔 군 사령관이다. 선조는 이 자리에 원래 신립이나 이일같은 명장을 내려보내려 했으나 이들이름난 명장들은 수도 한양을 지켜야 한다는 조정의 의견에 의해 학봉을 내려보냈다고 사서는 적고 있다.
학봉은 영남우도 병사로 발령받기 전에 잠시 초유사라는 희한한 직함을 받아 그의 왕과 조정에의 충성심을 증명한 적이 있었다. 초유사란 경국대전에도 없는 관직명이다. 일본의 전쟁 발발가능성에 대해 그런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상신한 학봉의 말과는 달리 일본군의 침략으로 전쟁은 발발하고 말았다. 그래서 선조는 진노하여 학봉을 파직하고 벌을 주려하였으나 학봉의 인품을 잘 알고 있는 서애 유성룡의 간곡한 만류로 경국대전에도 없고 조선왕조 5백년간 전후후무한 초유사란 벼슬을 내렸다.
그것은 서애 유성룡의 사람됨과 실력을 굳게 믿고 있었던 선조가 서애의 간함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서애의 간은 영남유생들 사이에서의 학봉의 인망은 대단히 두터웠고, 그런 인망을 바탕으로 하여 학봉으로 하여금 일본침략군들에 대한 의병을 일으킬 것을 영남을 돌면서 권유하라는 것이었다.
과연 곽쟁우 김면 등 쟁쟁한 의병들이 궐기하여 패전을 거듭하던 조선군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었다.
학봉은 관직과 전승의 업적보다 그의 강직한 성격과 고결한 인품으로 당대선비들의 인망을 모았다고 말하는 것이 그의 진면목을 말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어느날 선조가 만조백관 앞에서 내가 중국의 어느왕에 비유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다들 중국역사상에서 가장 명군인 요순에 비견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독 학봉만이 최악군주인 걸주에 해당할 수도 있다고 말하였다. 대노한 선조가 당장에 학봉을 참수하려 하였으나, 서애가 나서서 지금까지는 요순같지만 혹시 실수하시면 걸주에 비견될 수 있는 나락에 떨어질 수도 있는 말이라고 진언하여 학봉은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면하였다 한다. 사서에서는 학봉의 인상을 대궐의 임금 앞에서도 호랑이 상이락 하여 그의 아부할 줄 모르는 기상을 적고 있다.
그가 일본에 사절단의 부사로 가서는, 우물쭈물하는 정사와는 달리, 조선 조정의 국서를 받는 일본 조정의 무례한 절차를 크게 꾸짖고, 하물며 사절을 맞이하는 법도에 대해서도 잘잘못을 크게 꾸짖어 일본 조정 관리들의 혼을 빼놓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는 뭐니 뭐니 해도 영남유신들 사이에서 하늘처럼 추앙받던 퇴계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받아 그의 유신으로서의 신망은 대단히 높았다. 이런 것이 그의 영남우도 병사 발령의 빌미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학봉은 일차 진주성 싸움에서 성을 잘 지켜냈으나 2차 진주성 싸움에서 패전하여 진주 시민 6만명의 목숨을 일군들의 잔혹한 칼에 배이게 하는 참패를 당하였다. 학봉은 사실 패장이다.
임진왜란 중 도체찰사이자 영의정이던 서애 유성룡이 천거한 3인의 명장들, 권율 이순신 김성일 중 유일하게 패전을 거듭한 장수가 김성일이다. 장수는 전장에서 패전할 경우 할 말이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학봉의 성가는 드높기만 하다. 행주성 싸움에서 일군 3만을 지옥으로 보낸 권율이나 저 유명한 이순신 장군 못지 않은 성가를 누리면서 추앙받는 이가 학봉 김성일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를 학봉 종택을 방문하고 어렴프시 깨달을 수 있었다. 즉 학봉 후손들의 지극한 조상 추앙의 정신과 그 실행력이었다. 종손이 깎듯이 방문자들을 맞이함은 물론 학봉의 유물관을 두 채나 지어서 학봉의 유물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고, 방문자들에게 놀라울 정도의 역사 지식을 가지고 설명하였고, 각종 cd와 조상 관련 책자를 발간하여 기증하였다. 나도 귀경하고 밤새 종손이 준 책을 읽었는데 학봉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학봉 종택에서 준 떡과 과일 한과는 어릴 때 고향을 떠나 대구와 서울에서 살아온 나에게 고향의 향취를 일깨워 주었다.
귀경 시간이 촉박하여 일정에 있던 봉정사 관림은 생략하였다.
문화일보 수요일 판에, 작년 7월부터 근 일년 반 넘게, 한국전통음식 이야기를 쓰고 있는 집사람(김갑영)은, 안동에 건립되어 있는 전국 최고규묘의 안동전통음식박물관을 관람하고 새로운 자료를 구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무산되어 아쉬움이 컸다. 신 도청 청사를 보지 못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았다.
학봉 종택에서 김시업교수(성대, 남양주 실학박물관장), 김시업 교수는 물론 의성김씨이다. 그는 학봉 종택의 사랑채에서 긴 설명을 하여 학봉의 인간과 업적에 대해 소상히 밝혔다.
고택촌에 들어선 우향계 기념 비석, 각종 성씨를 가진 안동 선비 20명이 계를 만들었고, 500년이 지난 지금도 후손의 후손들이 계를 하고 있다.
우향계를 칭송하는 서거정의 한시를 풀이하고 있다.
고택 하나를 돌아보고 있는 회원들
회장인 김광억 교수와 안동시의회 김근환 의장
조촐한 안동헛제사밥
도착한 첫날 점심으로 헛제사밥을 들고 있는 일행
일행
김근환 시의회 의장과 필자
식당 일구에 제시된 헛제사밥 메뉴의 모형
점심을 마치고 월영교를 넘어 산책로로 가기 위해 월영교를 건너고 있다.
산책로 안내판
멀리선 본 월영교
둘레길 입구에 선 일행, 좌로부터 필자(단국대) 김갑영(공주대), 유필조(세명대), 박진서(세명대), 권원오(시립대), 김광억(서울대), 이봉수(세명대),김승년(외대)
300여년 전에 안동지역에 살았던 원이엄마라는 사람이 먼저 죽은 남편을 그리는 편지를 써서 무덤에 묻었던 것이 발견되었다. 남편이 살아 있다면 이런 말을 하였으리라 예측하고 쓴 글이다.
고창전투(안동전투)에서 삼태사(안동권씨, 인동김씨, 안동 유씨)의 도움으로 승리함으로써 개국의 전기를 맞았던 왕건이 살아생전을 예상하여 쓴 글이 둘레길 주변에 걸려 있다.
학봉종택의 정원에서, 좌로부터, 류석춘(연대), 이봉수(세명대), 박진서(세명대) 권원오(시립대), 김시업(성대) 배도환(중앙대), 김무성(경희대), 김종길(종손), 김광억(서울대), 유필조(세명대),정소성(단대),김승연(외대), 김갑영(공주대), 문옥표(한국학 중앙연구원), 신명순부인, 배동환부인, 류석춘부인, 김형아(호주국립대), 신명순(연대)
좌로부터
안동 천연염색전시실에서, 천연염색된 옷감이 전시되어 있다.
원장인 최옥자 명인과 김갑영
정소성, 최옥자, 김갑영
작동강 둘레길로 넘어가는 강 한가운데에 설치된 전망대에서 조재호 교수(서울대 상대)와 함께
김형아 교수와 류석춘 교수 부부
안동댐 전경, 40년 전에 조성된 안동댐은 시설이 낡아 조금 상류에 새로이 짓고 있다.
신명순과 김준환 안동 콘텐추문화진흥원 원장과 권원오 교수
안동 콘텐츠문화진흥원을 찾은 일행, 가운데 썬글라스 쓴 사람이 필자
김원길 시인의 강연을 듣고 있는 일행
필자부부와 김원길 지례예술촌원장 김원길 시인
안동 콘텐추문화진흥원 원장실에 걸려 있는 김대원화백(경기대)의 동양화
김대원화백과 권오남교수(서울대)
강보영 안동병원 이사장과 함께
안동출신 국회의원 김광림씨와 함께
류석춘 교수와 학봉 15대 종손 김종길 씨
석주 이상룡의 종택 군자정의 모습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안내지도
퇴계 종택 소슬대문
퇴계종택 앞에서 안내설명하는 안내원ㄴ
퇴계종택 정원에서 기념촬영
도산서원 선비수련원에 세워진 퇴게의 동상, 인물화를 남기지 않은 퇴계의 동상은 천원권지펜의 인물화와 학봉의 저서에 니오는 퇴계의 인물상에 대한 언급,즉 광상이라 하여 이마가 대단히 넓고 근엄하다는 글에서 따왔다고 한다.
국학진흥원의 장판각 안에 서있는 필자, 책 한권 내는데 요사이 돈으로 1억5천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국학진흥원의 전경
학봉 고택의 정문
학봉 고택의 제일 뒷편 사당에 모셔진 4개의 신주 중 불천위신주인 학봉의 신주를 열어젖혀 보여주는 종손
학봉 유물관인 운장각 앞에서 유필조 교수와 필자 그리고 김승년 교수(동연회 총무)
운장각 앞에서 집사람 김갑영교수와 함께
학봉 고택 사랑채에서 간단한 다과를 하면서 15대 종순 김종길씨의 설명을 듣고 있는 일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