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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김대중 납치사건’ 조사결과를 발표한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핵심 관계자는 “‘대통령 의전일지’ 등을 조사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박정희가 조중훈 회장을 통해 다나카에게 돈을 준 것은 100% 틀림없는 사실이다”고 강조했다.
작고한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이 이처럼 ‘김대중 납치사건’ 은폐-무마를 위한 한-일 비밀협상의 창구로 지목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박정희-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英) 사이에 이뤄진 4억엔 ‘매수외교’에서 조중훈 회장의 전달 가능성을 맨처음 폭로한 이는 재미 언론인 문명자씨이다. 유신 시절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하다가 미국에 망명한 문명자씨는 이렇게 폭로했다.
“이(납치)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 박정희가 일본 정계에 인맥이 있는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을 밀사로 보냈다. 그리고 다나카에게 사건 무마 공작금 4억엔을 바쳤다. 또한 다나카의 측근을 접대하기 위해서 서울에서 기생 5명을 공수해 갔다.”
문명자 “다나카에 4억엔 바치고 기생 5명 공수해 갔다”
문씨는 당시 조 회장이 술자리에서 가까운 지인에게 자신이 김대중 납치사건의 ‘막후 해결사’ 역할을 한 사실을 자랑한 것을 듣고서 이를 폭로했다.
또 1976년 미하원 비밀 청문회에서 도널드 레이너드 전 국무부 한국과장은 “박 대통령이 조중훈 대한항공 사장과 오사노 겐지(小佐野賢治) 국제흥업사장을 통해서 다나카 총리에게 3억 엔을 건네줌으로써 김대중 사건을 무마하는데 성공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런데 레이너드씨는 나중에 다시 이를 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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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조 회장의 ‘4억엔 전달설’은 소문으로만 나돌았다. 그러다가 사건 발생으로부터 27년이 흐른 뒤인 지난 2001년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비롯된 한-일간 외교마찰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박 대통령의 친서와 함께 최소 4억엔을 다나카 당시 일본 총리에게 전달했다는 증언이 일본에서 나왔다.
월간 <문예춘추>(文藝春秋) 2001년 2월호는 다나카 전 총리의 후원회 ‘에치잔카이’(越山會)의 가리와(刈羽)군 회장을 맡는 등 오랫동안 지역구 심복으로 일해 온 기무라 히로야스(木村博保) 전 니가타(新潟)현 의원의 기고문을 통해 이같이 전했다.
기무라씨는 1973년 11월2일 당시 김종필 총리가 일본을 방문, 다나카 총리에게 사죄함으로써 양국이 납치사건을 정치적으로 타결하기 직전인 10월 이병희 무임소장관이 직접 문제의 돈을 다나카 총리에게 전달했다고 밝혔다. 다음은 그 때의 장면이다.
“필자는 이병희씨를 먼저 총리가 기다리는 응접실에 들어가게 한 후 층계 밑에 놓았던 종이 가방을 가지러 갔다. 들어올린 종이 가방은 꽤 무거웠다. 종이 가방 하나에 분명 2억 엔은 들어 있음직했다. 필자는 응접실의 미닫이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서 종이 가방을 입구 바로 옆에 내려놓았다.”
‘서울에서 기생 5명을 공수해 갔다’는 문명자씨와 일치하는 기무라의 증언
기무라씨는 다른 용도의 돈 5억엔을 다나카에게 전달한 사실이 있기에 종이가방에 든 그 돈이 4억엔 정도임을 직감했다고 밝혔다. 전후맥락상 다나카 총리는 그 4억엔 가운데 1억엔을 당시 오히라 외상에게 준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한국 정부가 다나카에게 준 검은돈의 액수가 3억엔설과 4억엔설로 엇갈린 것이다.
나중에 드러난 사실이지만 다나카 수상은 그해 8월부터 이듬해 3월에 걸쳐 미국 록히드사로부터 뇌물 5억엔을 받은 사실이 76년에 드러나 그해 도쿄지검 특수부에 의해 구속된 바 있다.
‘기무라 증언’은 리얼했다. 한 나라의 총리가 외국 정부의 밀사로부터 직접 현금을 받는 현장을 이만큼 생생하게 재현한 증언은 처음이었다. 기무라는 이병희 장관이 도쿄 긴자(銀座)의 한 고급음식점에 자신을 초청해 다나카 총리와의 면담을 부탁할 때의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그곳에 한복을 입은 기생이 대여섯 명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접대 대상은 필자와 호스트인 이씨 두 사람뿐이었다. 양쪽에서 시중을 든다 해도 남아돌 판이었다. ‘일본에 이런 기생이 다 있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이병희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아니오, 한국에서 데려왔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다나카의 측근을 접대하기 위해서 서울에서 기생 5명을 공수해 갔다’는 문명자씨의 증언과 일치하는 증언이다. 비밀리에 서울에서 도쿄로 공수해 갔을 ‘기생 5명’의 존재는 조 회장이 대한항공 사장이라는 사실과 묘하게 오버랩 된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실행도 중정이 주도하고 ‘뒤처리’도 중정이 주도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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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수자금 전달자인 이병희 무임소장관은 김종필 총리와 육사 동기였고 김 총리가 중정 부장 시절에는 서울지부장을 지냈을 만큼 가까운 사이다. 또 한국과 일본의 국회의원으로 결성된 한일 의원연맹의 간사장을 맡아 ‘일본담당 장관’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일본과의 교류에 열성적이어서 일본 금권정치와의 결탁을 주선하는 데는 ‘최고의 적임자’였다.
즉 73년 8월 이후락 중정부장이 주도한 김대중 납치사건의 은폐-무마공작을 위해 그해 10월 중정 서울지부장 출신의 이병희 무임소장관이 뇌물 전달로 사전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후 11월 2일 초대 중정부장 출신의 김종필 총리가 박 대통령의 친서를 갖고 다나카 총리를 만나 사죄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한-일 양국 정부가 ‘추악한 정치적 결탁’을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은 실행도 중정이 주도하고 그 ‘뒤처리’도 중정이 주도한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조중훈 회장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그때 당시 한진그룹은 ‘월남특수’를 누릴 때라 어느 기업보다도 외환자금이 풍부했다. 따라서 은밀하게 교섭해야 할 박 대통령으로서는 자연스레 조중훈 회장을 통해 비자금 4억엔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 납치사건 발생 당시 우리나라 외환 보유고 총액은 8억8천500만 달러 수준에 불과했다. 이에 비추어 4억엔이라는 돈이 얼마나 큰 돈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에 적힌 ‘한일 민간외교’에서의 역할
김대중 납치사건에서 조 회장의 막후 역할을 짐작할 수 있는 실마리는 뜻밖에도 조 회장이 쓴 자서전에서도 찾을 수 있다. 96년에 발간한 <내가 걸어온 길>(나남출판)에는 ‘한일 민간외교’라는 제목의 챕터(장)가 있을 만큼 그에 대한 자부심이 컸음을 알 수 있다.
물론 4억엔 비밀교섭 관련 부분은 자서전에 나오지 않는다. 다만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은 있다.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64년 7월 당시 장기영 부총리의 요청으로 협력기금 2천만 달러 차관도입 ▲69년 정부(한 각료) 요청으로 일본에서 쌀 60만톤 반입 ▲70년대 초 포항제철 건설 위한 대일차관 도입 때의 막후 역할 등으로 한일 민간외교에 기여했다.
이를테면 그는 한일회담 반대 6․3사태 무렵 계엄령과 무기휴교령으로 어수선한 시절인 64년 차관도입 사절로 나서게 된 과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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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무렵 취임한 지 몇 개월 지난 장 부총리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심각한 외환위기 극복에 필요한 2천만 달러를 일본에서 변통해 오는 사절(使節)로 나서 달라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가용외화가 4천700만 달러에 불과하던 시절에 2천만 달러는 큰 금액이었다.
정부에서 나를 지목한 데에는 물론 이유가 있었다. 일본이나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 장성들을 통해서 알게 된 기업인과 그 친구들이 정계나 관계에도 있어 몇몇 사람과 교분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중의 한 사람이 당시 일본의 대장상(大藏相)이었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英) 대신으로 얼마 전에 유명을 달리한 분이다. 우리로 치면 주무부서 장관인 셈이었다. 다나카씨는 당시 차기 수상을 노리고 있던 자민당의 막강한 실력자이기도 했다.
그와 친하게 된 것은 평소 교분이 두텁던 일본인 기업가인 오사노 겐지(小佐野賢治)씨의 소개를 받아서였다. 나를 포함한 세 사람 모두가 보잘 것 없는 학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상통되는 게 있어선지 서로가 퍽 친근감을 갖고 있었다. 오사노씨는 나보다 두 살 위였고 다나카씨는 한 살 위로 동년배나 다름없는 처지여서, 나는 먼저부터 알던 오사노씨보다도 그를 통해 알게 된 다나카씨와 오히려 더 가까울 정도의 사이였다.” (조중훈, <내가 걸어온 길>)
조중훈-오사노-다나카 3자의 친분관계와 대일 차관도입 교섭
조중훈-오사노-다나카 3자의 친분관계는 “박 대통령이 조중훈 대한항공 사장과 오사노 겐지 국제흥업사장을 통해서 다나카 총리에게 3억 엔을 건네줌으로써 김대중 사건을 무마하는 데 성공했다”는 1976년 레이너드 전 국무부 한국과장의 미하원 비밀청문회 증언과 일맥상통한다(실제로 준 돈은 4억엔인데 이 가운데 1억엔은 다나카가 오히라 외상에게 준 것으로 추정된다-편집자주).
당시 상황은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국내 여론이 들끓고 있는 데다가 정상적인 절차를 통한 대일차관이 가능한 시점이 아니었다. 조 회장은 일본으로 가서 다나카씨를 만나 설득했다.
“결국 이왕에 제공할 것이라면 일을 서두르자는 나의 집요한 설득 끝에 2천만 달러에 달하는 협력기금차관이 성사되었다. 궁지에서 벗어난 우리 정부는, 그해 7월 21일 2천만 달러의 일본경제협력차관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 (<내가 걸어온 길>)
‘한일 민간외교’에 기여한 그의 역할은 그 자신에게도 사업상의 기회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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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방문 수확은 그것(사업하는 과정에 국익에 도움-편집자주)만이 아니라 사업의 활로를 해외로 돌리는 데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는 데에도 있다. 특히 국내에서는 미처 몰랐었던 월남전 양상에 대한 새로운 정보들을 접할 수 있었다. 장기영씨도 내게 월남에 관심을 갖도록 권유해 실제로 2년 뒤에는 월남 진출의 막을 열게 되었다.”
(<내가 걸어온 길>)
66년에 월남에 진출한 한진이 71년 철군과 함께 용역사업을 마무리한 약 5년 반 동안에 걸쳐, 월남에서 획득한 외화는 총 1억5천만 달러 규모였다. 이 기간 중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200달러 안팎이었음을 감안하면 그것은 엄청난 거액이었다. 당시 한진은 해마다 외화획득 우수업체로 선정되어 수출의 날 ‘최고상 최다 수상’ 기록을 남겼다.
조 회장은 또 68년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적자가 누적된 국영항공사인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69년 3월 대한항공의 전신인 민간항공사를 창립했다. 그후 대한항공은 73년 제1차 오일쇼크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고비를 잘 넘겨 70년대 중후반 ‘중동 붐’을 타고 건설업에 진출하고 다시 건설인력 수송을 위해 중동 항로에 취항함으로써 국내 유일의 항공운수 재벌로 승승장구했다.
차관 2천만 달러를 도입한 한-일 민간외교에서의 ‘사절 역할’이 그에게 월남 진출이라는 사업상의 기회를 주었듯이, 한-일 정부간 4억엔 ‘매수외교’에서의 ‘막후 역할’ 또한 그에게 독점재벌로 성장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제공한 셈이다.
김당 기자
첫댓글 야당 대통령 후보였던 지도자를 일본에서 납치하는 파렴치 극을 벌이고도 돈과 여자로 해결하려 했던 박정희는 희대의 독재자요. 난봉꾼이라고 해야겠습니다..그런 인간을 존경하는 국민이 가장 많다는 것 또한 창피한 일이지요..더욱 큰 문제는 창피한 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이명박 지지율이 말해주고 있으니까요.. ㅠ
박정희...새마을이란 이름으로 어린 아이까지 강제 동원했던 기억이 납니다..학교에만 (초등 학교)갔다오면 까만 피삐시로(전선주선)만든 장 바구니를 새기로 어깨멜방 달고서 산으로 갑니다..돌을 담아 신작로에 붓고 했습니다..그렇게 해서 신작로가 만들어지고..아시는지들....
삿갓쓰고님도 저와 비슷한 추억을 갖고 계시는군요..추억은 아름답다고 하는데, 독재자 박정희에 대한 추억까지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