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세상사 돌아가는 모순을 시니컬하게 잘 풍자하는 논객 검 비봉님이 1.20일 올린 컬럼입니다. 가슴 속 깊이까지 공감하지만 겉으로 드러내기 어려워 안타깝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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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다르겠으나, 그 옛날 영구차를 모는 버스기사가 하는 말이 있다.
“영구차를 운전하면 좋은 게 있어요. 교통 위반을 해도 교통순경이 절대 잡는 법이 없고, 네거리나 복잡한 길에서도 일반 차량을 세우고 먼저 통과시켜 줍니다.”
은원의 관계가 아무리 진하여도 일단 유명(幽冥)을 달리하면, 이승과의 인연을 접고 떠나는 유체이므로 서운한 말은 삼가고 정중하게 보내드림이 마땅하다.
그 어떤 죽음이든, 그 죽음에 대하여 잘못 입을 열었다가 찬물을 뒤집어 쓰고 물러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죽음 앞에서는 말을 매우 조심하고 아껴서 하지 않으면 화를 입는다. 할 만한 말이라 할지라도, 유가족이 듣기에 거북한 말이면, 매서운 힐난이 되어서 돌아오고, 여기에 여론까지 더해지면 견디기 어렵다.
사회의 곳곳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사고가 계속 일어나고 있으며, 비명에 돌아가시는 숫자가 일 년에 수 만명이다. 유가족들은 슬픔을 가누기 힘들겠으나, 자신들의 슬픔을 함께 나누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서러움을 억누르고 나름 절제하는 것도 필요하다. 떠나간 고인들이 자신들로 인해 세상이 소란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남의 죽음을 함부로 말해서는 안되는 바와 마찬가지로, 유족들의 주장도 가급적이면 진중한 것이 아름답다.
지하철에서 강성 시위를 이어가는 장애인들의 주장이 무엇이든지, 하필이면 시간에 쫓기며 일터로 학교로 발길을 서두르는 서민들의 발목을 잡아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팬데믹과 경제불황으로 매사가 편치 못한 서민들이, ‘이분들 요구를 얼른 해결해드리세요’ 라고 동조해주기를 바라는지 모르겠으나, 시간과 격무에 쫓기는 서민들도 장애인들 이상으로 고통 속에서 그야말로 ‘죽지 못해’ 지내는 분들도 적지 않다.
프랑스에서는 기차역 플랫폼에서 키스를 하다가 적발되면 처벌받는다. 1910년대에 제정된 법인데, 프랑스의 선남선녀들이 플랫폼에서 작별의 키스를 너무 오래 진하게 나누는 바람에 기차가 번번이 연착되기 때문에 이런 법이 제정되었으며 엄격하게 지켜진다고 한다.
나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남의 생존의 길목을 막아섬은 온당하지 못하다. 콩나물시루 같은 그 전철 안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채로 이유도 모르고 5분~10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은, 이태원의 그 시간의 숨막힘과 다르지 않다.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의 고충을 풀어드리면서 함께 살자는 생각에는 시민들 모두가 이견이 없다. 전철 안에는 장애인들의 자매, 조카들이 고된 격무와 박봉의 현장으로 달려가는 길임을 거듭 고려해주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출처 : 최보식 의 언론(https://www.bosik.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