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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권 구원론
제4장 중생-2
제3절 소명과 중생의 관련 순서
소명과 중생은 어떤 순서로 이루어지는가?
논리적인 순서를 보면, 외적 부르심이 있고 난 후에 그 부르심이 내적 부르심으로 연결되고, 내적 부르심이 중생의 효과를 가져옵니다.
죄인에게 말씀이 전파될 때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고, 열린 귀로 듣는 그 말씀이 죽었던 영혼을 살립니다. 살아난 영혼은 새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성향을 나타내게 됩니다. 이 과정을 이루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제4절 중생의 필요성
성경은 중생의 필요성에 관해서 아주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죄인의 중생이 필요한 이유는 거듭난 새사람이 되어야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제5절 중생의 도구로 사용되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은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모든 인격적인 존재는 언어를 사용하여 소통합니다. 사단이 하와를 유혹할 때에도 말을 사용했습니다. 하와가 뱀의 말을 들었을 때, 뱀의 말이 하와의 마음속에 있는 소욕과 만나게 됩니다.
所欲이라는 것은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니까 소욕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하와의 소욕이 뱀의 말에 반응해서 하나님 말씀과 다르게 들렸을 때 욕심이 되었습니다.
욕심은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게 만들어서 결국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하였고(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되었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은 인간이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된 죄인이 돌이킬 수 있게 되려면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원하려고 선택하신 자에게 들을 귀를 주셔서, 말씀을 듣고 영혼이 새로워져서 새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게 하십니다.
제6절 중생은 독점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에스겔 11:19,20] “내가 그들에게 한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죄인을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는 것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사역을 실행하시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마음을 열어서 말씀을 기쁘게 받고 따르게 하십니다.
[행 16: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리고 이렇게 성령께서 죄인을 거듭나게 하는 것에 인간은 조금도 개입할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롬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제7절 세례와 중생
죄인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 사함을 받는 것이냐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세례에 관해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말씀합니다.
[벧전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세례로 죄 씻음 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행 2:36~38]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8절에 보면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라고 했으니까 세례가 죄 사함의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런 이유로 38절은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볼 것은, 먼저 회개한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하는 순서입니다. 세례받기 전에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그 고백으로 죄 사함을 받은 후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세례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제72문과 73문은 세례가 죄사함의 필수 조건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은 독일의 개혁파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1563년에 하이델베르크에서 청년들 신학교육과 목회자 설교 지침으로 만들어서 발표한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제72 문답은
“세례의 물로 씻음이 곧 죄 씻음 자체입니까?”라는 질문과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만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합니다.”라는 대답입니다.
제73 문답은 “그러면 왜 성령께서는 세례를 ‘중생의 씻음’과 ‘죄를 씻음’이라 하셨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의 더러운 것이 물로 씻겨지듯이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없어짐을 우리에게 가르치려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죄가 영적으로 씻겨지는 것이 우리의 몸이 물로 씻겨지는 것처럼 매우 실제적임을 이러한 신적 약속과 표로써 우리에게 확신시키려 하셨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여러 교파의 교리를 보면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이는 것을 자기 마음에 들게 바꿔서 보고, 들리는 것도 자기 마음에 맞도록 바꿔서 듣는다는 말입니다.
사물에 관한 생각도 그렇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가 믿는 대로 바꿔서 보고 듣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확증편향이라고 합니다.
지난달 어느 주일예배 후에 집에 가서 그 전날 토요일에 다운 받아놓은 성경 동영상의 소제목을 찾아보려고 유튜브를 열었습니다. 찾다 보니까 어느 박식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불교문화원에서 기독교에 관한 강연을 하는 동영상이 있길래 열어봤습니다.
하나님께 볼 눈과 들을 귀를 받지 못한 그 사람은 성경 좀 읽고 자기 나름대로 성경과 기독교에 관한 강연을 자주 하는 걸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날은 불교회관에서 승려들을 모아놓고 기독교 강연을 한다기에 뭔 예기를 하나 해서 40여 분 동안 강연을 봤습니다.
제가 잘 쓰는 말 중에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날 그 사람의 강연이 딱 그랬습니다. 성경을 읽어보기는 했나 본데, 이건 그냥 자기 생각대로 성경을 뚜드려 맞추는 수준이었습니다.
뭐 더 볼 게 있겠나 하면서 그만 보려다가 그래도 무슨 말을 하는지 끝까지 봤습니다.
끝까지 들어봐도 역시 계속 무식해서 용감한 말만 하는데, 누구한테 말했는데 안 들었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구약은 낡은 성경이니까 버리라고 기독교에 말해도 안 듣더라’라든지, 이어오병(그는 오병이어를 이렇게 말합니다.)이라는 것은 모인 사람들을 먹였다는 것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든지, 구약성경에 있는 예언들은 그 일이 일어난 지 수백 년 후에 기록한 것이니까 예언이 아니라는 둥, 참, 무식해서 용감하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드는 강연이었습니다.
메시아 예언에 관해서 말하는 것만 봐도 수박 겉핥기 정도도 안 되는 지식으로 말하는 것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탄생하신다는 예언을 사람이 성취할 수 없습니다.
메시아가 은 삼십에 팔릴 것이라고 [슥스가랴 11:12]에 예언했는데, 가룟인 유다가 그 예언을 알고 있어서 그 예언을 성취하려고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습니까?
예수님께 쓸개를 탄 포도주를 드린 것이나 뼈를 꺾지 않은 것은 모두 구약성경에 예언한 것인데, 실제로 그 일을 한 것은 로마 병정들입니다. 로마 병정들이 구약성경에 예언한 것을 알고서 그 예언을 성취하려고 그런 일을 했을까요?
그런 정도도 판단할 줄 모르면서 성경과 기독교를 비판하는 그 사람에 대해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그런 사람의 생각은 사실상 논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무슨 책으로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자신이 성경을 무슨 책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기록된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성경에서 추출해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리는 성경을 무슨 책이라고 보느냐,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만들어집니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교리가 다른 것, 개신교 안에서도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교리가 차이가 나는 것은 각기 성경을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은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과 사탄의 영이 싸우는 것을 기록한 책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은 신앙심이 좋은 사람들의 신앙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성경을 하나님의 구속 계시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라고 말합니다.
세례와 속죄에 대해서도 각 교파가 다르게 말합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세례가 믿음을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로마교회는 세례에 사용하는 물을 성수 즉 거룩한 물이라고 해서 그 물에 능력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에서는 “세례받는 사람이 참된 신자인지 아닌지, 세례받는 자녀의 부모가 교회의 살아 있는 지체인지 아닌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라고 주장합니다. 세례 자체에 능력이 있기 때문에, 세례받는 이의 믿음이나, 유아세례의 경우 부모가 신자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례를 주는 교회가 구원의 능력, 속죄의 능력을 부여해 주기 때문에 세례를 받는 사람이 믿음이 있든 없든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주교 사제가 축복한 물 즉 성수만 있으면 누구든지 그 물로 세례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시기에는 세례는 단지 형식일 뿐이지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근대에 들어와서 칼 바르트 같은 신학자는 세례를 ‘자기 믿음으로 신앙 고백하는 행위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현대 한국 교회 역시 세례를 하나의 형식으로만 보는 것처럼 보입니다.
본래 세례의 원형인 구약시대의 할례가 태어난 지 8일 만에 시행했던 것처럼 세례도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주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3년 동안 출석한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하는데, 숨어서 예배를 드려야 했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출석한 사람도 가려야 하고, 적어도 3년 정도는 별도로 예배를 드리게 해서 그가 진실한 신자인지를 확인한 후에 세례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기독교가 들어온 초기에는 교회 출석하면 바로 세례를 베풀던 것을 여러 사정으로 인해 대개 1년 후에 세례를 베풀게 되었습니다. 세례 본래의 뜻이 주변 현상 때문에 바뀌게 된 것입니다.
세례는 구원받았다는 것을 인(印)치는 것이니까 교회에 출석해서 믿음을 고백하면 바로 베풀어야 하는 것이 원칙일 겁니다. 그런데 교인이 많은 교회에서는 그렇게 안 하고 때를 정해서 몰아서 세례를 행하는 행사가 되어버리니까 세례의 엄숙함이라든가 감격이 줄어졌습니다.
전에 서울에 사는 페루 사람들에게 넉 달 정도에 걸쳐서 세례(침례)를 주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토요일 밤에 목욕탕을 빌려서 한 번에 너덧 명씩 열 번 정도 했습니다. 그때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나 함께 온 가족 친지들이 눈물을 흘리며 찬송하고 기도하는 모습은 아마 초대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때 저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뜨겁고 감격스러웠습니다. 세례를 베푸는 내가 오히려 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세례는 그것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세례에는 성령의 인치심이 있고, 그 인치심이 우리 마음속에 구원의 확신을 넣어줍니다.
그러니까 세례는 그리스도인이 거쳐야 하는 형식적인 통과의례가 아니라,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며, 성령께서 그것을 확인시켜 주시는 거룩한 예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