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증 문
저는 1977년 8월 30일 함경북도 cj시 라남구역 kd 이라는 곳에 4형제중 둘째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저희집 장남인 저희 오빠는 청진시 포항구역 수원동 번화한 좋은 아파트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제가 태어난 곳은 아버지가 추방자 여서 쫓겨난 심심산골입니다. 조금 철들었을 때 아버지께서 예술계통에 종사하셨고 쓰신 작품이 당의 사상에 어긋난 글이여서 추방대상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집에는 고급 기타와 손풍금 발풍금(피아노) 600곡집 이 있었고 표창장도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전국 근로자들의 독창 독주 공연에서 전국 2등을 하여 상받은것들이였습니다.
어머니는 음대 무용을 전공하셔서 고등중학교 음악선생님이 셨습니다.
저희 가족은 제가 8세 되던해 경성 두메산골로 재추방, 12세 되던해에는 온성에 있는 정치범죄수들 수용소가 있던 곳까지 죄인꼬리표 달린 채로 추방되어 죄수들 생활 하던 곳 지붕이 낮은 집들만 있는 곳까지 추방되어 갔습니다.
어린 나이에 이유도 모른 채 부모님 한테 이끌리어 여기저기 뜨내기처럼 안정되지 못한 생활을 해왔습니다.
저희 부모님들은 자기들 인생이 바닥으로 내버려짐도 당연한것처럼 김일성한테 충성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어릴 때 사탕과자 선물을 받으면 꼭 집안에 걸려있는 김일성, 김일성 부자 초상화를 향해 인사를 하고 먹어야 했습니다.
제가 7세되던해 쯤 집에 홀로 남겨졌을 때 초상화에 손가락질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우상에게 손가락질을 하면 손가락이 부러지거나 피가날텐데 궁굼했습니다.
부모님이 큰일난다고 했는데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 날 그 순간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릴적 뭐든지 모범이되었고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열성분자 였습니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죽었다고 통보받는 날, 그날이 고등학교 졸업식날이여서 집집마다 쌀를 모아 떡을 빚었는데 먹기전에 방송으로 김일성이 죽었다는 서거비보를 듣고 울기보단 왜 하필 이때 죽냐고, 그리고 한켠으로 김일성이 죽네, 신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철저히 계급사회인 북한 땅에 좋은 추억이 별로 없습니다. 고난의 행군시기 1998년 12월 28일 첫 탈북을 하였고
2000년 2월 중국공안에 체포되어 중국변방수용소 북송될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저는 그 속에서 살아서 북송되면 저희 가족에게 피해가 가고 또 그 고문을 못견디고 죽거나 감옥을 가야한다는 두려움에 죽을려고 자살를 하려고 수용소 방안에서 안전면도날을 찾아내 몸에 숨기고 지냈었습니다.
그럴때에 저보다 나이가 더 있어 보이는 한 여인이 수용소 방으로 들어왔고 문을 들어오자 마자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첨 보는 모습이라 신기하였습니다. 다가가 물으니 여인은 북경에서 왔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가 무엇이냐 했더니 하나님 아들이라 하였습니다. 이 여인과 멀리해야 겠구나 싶어 미워하고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다 한 여자가 아픔을 호소하였고 바닥에 쓰러져습니다. 이 여인이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 하였고 그 여인이 아무일 없듯이 툴툴 털고 일어난 상황을 목격하였습니다. 가장 핍박을 많이 했던 제가그 방에 있는 사람들을 이 여인에게로 모여오라 하고 당신이 아는 예수는 누구냐 라고 여쭸습니다. 이 곳에서 예수를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 곳에서 , 이 죽음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하여 그 방에있는 모두가 둘러 앉아 무릎 끓고 영접기도 받았고, 아멘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핍박하며 가장 끝자리에 자리를 줬던 예수쟁이 언니를 나의 옆으로 오게하여 옆자리에서 누웠습니다. 이 밤에 내가 이 언니와 딱 붙어있으면 저 지붕이 열리어 구원받을 것이다 확신하고 한숨도 자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언니는 코를 드르렁 그르며 잠을 자고 있었고 못마땅하게 여겨 못자게 하느라 툭툭 치며 깨웠습니다.
언니가 자고 있을 때 저 지붕이 열리면 구원을 못받을까봐서 그리했던것입니다.
그렇게 꼬딱 밤새고 동이트고 새날이 되었지만 지붕이 열리고 하늘에서 밧줄이 내려오는 기적은 없었습니다.
그대로 우리 모두는 북한 보위부 감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서너번 불리워 나가 조사끝났는데 언니는 매일 두세번도 불리워 나가 조사를 받았습니다. 누가 보위부한테 찔렀나? 왜 자꾸 불리워 나가지? 참 안타까웠습니다.
어느날 보위부 감옥 감시하는 선생이 다가와서 언니를 일어나라 하더니
(넌 당의 배려로 좋은 대학도 나왔으면서 왜 예수한테 미쳤니 )라고 묻자
언니는 ( 예수님은 나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주셨습니다.)
*앞에 김일성에 대해 언급했지만 정확히 기억못해서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라고 얘기하는데 제 귀가 제 속이 엉엉하면서 울림으로 들렸습니다.
그 날 오후쯤 제가 숨쉬기 힘들어지고 도저히 견디기 힘들어 쓰러졋습니다. 온 몸이 덜덜 떨면서 숨을 못쉬었습니다.
조사가 끝난 죄수여서 이 곳에서 죽어나가면 안되는 조건이라 간수들은 놀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이불을 가져다 덮어주고 다리를 주물라고 방에 함께 있던 여인들, 죄수들한테 호령질 하였습니다.
이때 언니가 제 머리맡에서 두손을 얹고 예수를 불렀습니다. 언니의 손은 뜨거웠고 두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은 주먹만한 크기의 물방울처럼 느껴졌고 울림과 같이 온 몸으로 느껴졌습니다.
눈 흰 자위가 돌아가고 감각을 잃은 상태지만 모든 상황이 또렷이 기억이 납니다.
언니가 기도하는데 몇몇의 간수들이 와서 철창을 붙들고 지켜봤고 안수기도하는 행위를 하지못하게 하는 간수가 아무도 없었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고 합니다. 저는 완벽한 치유를 받았고 예수를 믿는 그 언니가 죽음앞에서 저런 광채가 나는 얼굴을 하고 있는게 너무 멋있어서 한 밤중에 옆에 누워있는 언니에게 귀에 속삭였습니다. ( 언니가 믿는 그 예수라는 남자 나한테 알려주세요 ) 언니가 조용히 하라면서 알려준다고 하였고 지켜주세요 지켜주세요 속으로 말하라 얘기해주었습니다.
다음날 언니가 바닥에 손가락으로 전화번호를 그렸고 난 외웠습니다.
예수님 전화번호인 줄로 착각하고 달달 외웟습니다.
그 다음날 퇴소하였고 중국으로 다시 예수만나러 두만강 건넜습니다.
달달 외운 전화를 걸어 언니의 사연을 전하였고 외눈 집사님 집으로 가서 기다리다 예수를 전해줄 주모세 전도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쟁이 언니의 남편이였고 딸아기 100일 갓넘은 아기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를 따라 첨으로 HB G교회와 HB에 있는 지하사역장에 들러서 내가 본 언니를 간증하였고 주기도문, 사도신경. 성경책을 모를 때에 성령 체험을 받았습니다.
SH 사역장으로 이동시 기차에서 주전도사님이 두꺼운 가죽책을 보라며 건네 주셨고 무심코 펼쳤는데 보이는 말씀이 시편 1편 1절에서 3절말씀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면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않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3절까지의 말씀.)
그 말씀을 읽는데 제 눈이 제 머리가 제 가슴이 이상한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SH에서 CD 일조에서 4개월을 말씀훈련 받다가 8월에 CD일조 바닷가에서 철야기도 하다가 공안에게 체포되어 중국 단동을 통해 신의주 보위부로 북송되었습니다.
주모세 전도사님과 함께 있던 배형제 송자매 모자매.나 5명이 함께 보위부에 잡혀있었고 며칠이 안돼 주전도사님은 주여주여 하는 부르짖음과 함께 자신의 순교를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때 보위부 감방에는 송자매 모자매 할빈에서 만났던 한나와 한나 어머님까지 5명이 한방에 있었고 우리는 눈뜨고 감방에서 기도하였습니다.
성령이 충만해 서로를 격려하였고 순교를 결정한 주모세 전도사님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저를 비롯한 일행들은 다 풀려놨고 다시 탈북하였지만 저는 하나님을 믿기 싫었습니다.
이유는 언니도, 또 예수를 알게해 주는 나의 스승 주모세 전도사님 목숨을 가져간 하나님이 무슨 아버지냐고 원망하였습니다.
그 예수를 철저히 부인하고 중국에서 돈을 열심히 벌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저를 구속하셨습니다. 그후 저는 3번의 북송이 있었고 저는 6번의 탈북과 5번의 북송을 마감으로 2006년 9월 대한민국에 입국하엿습니다.
한국에 입국하여 봉사하다 음성꽃동네에 캐스팅초대로 사회복지 노인전문요양원에 입사하였고 1년반을 일했고 신앙이 없이 살던 저는 세상에서 남자를 만나 혼인신고 없이 동거생활을 하였고 교회도 열심히 다녀 집사 직분도 받았습니다.
신앙이라고는 포현할수 없는 모습이엿고 아이를 출산한지 얼마안되어 그 남편한테서 철저하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 아이를 가난에서 키울수 없다는 생각에 그 후로 열심히 일을 하였고 일에 미쳐 살다가 마음에 찔림을 주시는 하나님을 거부하면 큰일날 것 같아서 2016년 기도하다 교회로 나갔고 예배중심. 기도중심. 섬김중심으로 신앙의 회복을 찾았습니다.
그때 당시 회사를 직접 운영하고 있었지만 거의 많은 시간을 교회의 사역에 힘써왔습니다. 교회로 가는길이 즐거웠고 교회안에 있으면 밖으로 나오기 싫었습니다.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받는 만큼의 연단의 훈련은 계속 되었고 어린 딸을 재워놓고 밤새 기도하고 아침이 밝아온지를 모르게 기도를 한적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에. 죽기까지 내 죄를 위해 피흘려주신 예수님 사랑에 밤새 울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말씀이 부족하여서 저는 모래위에 집을 지어 와르르 무너졌고 갈급함은 있으나 찾지못하는 병든 신앙생활를 연의해왔습니다.
죄의 노예엿다가 점점 가면서 죄를 가지고 부리는 죄의 상전질도 해온 것 같습니다.
죄가 무엇인지, 죄책감이 무엇인지 망각한채로 몇 년을 벋텨오다 2021년 5월쯤 코로나로 인해 교회모임이 없어지면서 제 안에 성령님을 향한 갈급함이 있어 매주 수요일마다 기도모임에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7월쯤 일찍 기도모임장소로 운전하고 가는데 계속 눈물이 나는것입니다.
누가 괴롭힌 사람도 없는 데 말입니다. 그러면서 기도 합니다. 아버지 내 양쪽 어깨는 너무 무겁습니다.
근데 나의 힘으로 이 짐을 내려놓을수 없으니 아버지의 방법대로 내려놔 주세요
이 미련한 딸 좀 살려주세요. 라고요. 기도하고는 금새 내뱉은 기도를 다시 주워담고 싶었습니다.
제 안에 있는 죄성이 탐심이 저를 떨게 만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눈물의 기도를 들으셨고 일을 하셨습니다.
일이 터지자 처음에는 ( 아버지 이 방법밖에는 없었습니까 ) 라면서 펑펑 울었습니다.
지금 저를 돌아보니 그 방법이 아니시면 미련하고 우둔한 제가 깨닫지 못하실꺼 같으니 저를 저보다 더 잘아시는 아버지께서 그리 하신 위대한 행함이셨습니다.
매일 불평불만속에 살아가는 저를 더욱 더 구속하셨고 이 세상에 내가 못하는것도 있구나를 발견했을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구속하심을 보았고 56평아파트에서 쫒겨나 6평 원름으로 12살된 딸과 반려견과 함께 살게 되었고 법을 어기면서 살아온적 없는 데 통장압류에 말할수 없는 고통이 다가올때에야 무릎을 끓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주신것이니 이제 아버지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그냥 기도만하게 해주세요. 예수님 옷자락끄트마리 만 잡게 해주세요.
밑바닥까지 내려꽂히구서야 주님 옷자락이라도 붙들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새벽예배와 기도, 금요성령집회 월요일를 뺀 매일 교회가서 살다싶이 주의 몸된 성전에 붙어있어야 살 것 같아서 그리 살았습니다.
5월 어느 새벽기도속에 아버지의 분명한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너를 이땅에 왜 인도했는지 아냐. 니가 두고온 고향을 위해 예비하기 위함이라
아멘 아멘 하였지만 내 속에는 아버지 저는 저땅을 사랑하지 않아요 . 라고 하루종이 묵상도 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에는 지하사역장 시절 아버지께 서언드렷던 서언기도 소리와 현장을 생동하게 보여주시면서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멘 아멘 아멘. 46세 이 나이에 이제 주님길 가겠다고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신학교를 가겠습니다. 준비하라고 하신 주님 준비 과정이 5년이든 10년이든 주님쓰시기 편한도구가 되겠습니다. 주님 담기 편한 그릇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준비되어서 단 하루를 쓰임받더라도 이 길 가겠습니다. 라고 결신하였습니다.
북한을 향한 눈물과 기도가 터졌고 현재는 E기도운동 탈캠에 속해 찬양싱어로 섬기고 있습니다.
며칠전 그냥 준비할게요 가 아닌 사명도 깨닫게 하셨습니다.
세상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완벽한 확신을, 콜링을 주셔서 이제는 구원의 이길, 십자가의 이길로 걷게 하신 하나님아버지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올려드립니다.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오직 예수그리스도 능력안에 머물며 영광의 이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순종하며 나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