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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年代 美國 宋代 知性史 硏究動向
閔 丙 禧 (Harvard Univ.)
1. 1990년대 宋代 知性史의 연구사적 맥락
1990년대 미국 중국사학계에서는 宋代史 연구에 있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많은 중요한 저작이 발표되었다. 그 새로운 연구 방향 중의 하나가 知性史라는 용어로 분류될 수 있는 분야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어떠한 그 이전의 기존 연구 성과와 문제점들이 1990년대 宋代 知性史 연구에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봄으로서, 1990년대 宋代 知性史 연구를 연구사적 맥락에서 위치지어 보겠다. 이는 1990년대 宋代 知性史 연구의 주요 저작들의 공헌과 의의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을 제시해 주리라 본다.
첫 번째로 1960년대 이래 다양한 논의를 걸치며 미국 역사학계에서 발달해온 “知性史”라는 분야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여기서 知性史는 “Intellectual History”의 번역어이다. 기존의 사상사 또는 철학사라는 용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知性史“라는 번역어를 사용한 것은 “Intellectual History”라는 용어의 도입으로 자신들의 연구의 시각과 전제를 기존의 인류의 사상이나 정신영역을 다루는 역사연구와 그 대상이나 연구방법론 상으로 차별 지우고자 하는 시도와 이 시도에서 파생된 논의들이 미친 영향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Intellectual History“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하여서는 이 용어를 공유하는 “Intellectual Historian”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것이고 그 전문적 논의는 본고에 범위를 넘어서는 문제이지만, 1990년대 宋代 知性史 연구의 방향성과 문제의식의 이해에 중요한 밑바탕이 될 수 있는 몇가지 중요한 쟁점을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知性史에 대한 논의는 미국에서 1960년대 Lovejoy등이 주장하던 History of Ideas나 그 보다 더 전통적인 분야인 History of Philosophy의 기본적인 방법론의 전제였던 현실세계와 유리되어 독립적으로 어떠한 사상이나 관념의 본질의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회의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적인 사상사나 철학사가 ”特殊史“로서 일정한 한 부분의 역사적 연원과 발달을 추적하는 것 이상을 설명할 수 없으며, 따라서 사상의 전면적 이해, 더 나아가 한 시대의 총제적 이해를 지향하는 ”全體史“가 될 수 없음을 지적하여 왔다. 따라서, 知性史는 이러한 기존의 ”特殊史“적 관점을 극복하고 ”全體史“를 지향하는 경향을 가진다. 또 다른 논의는 1960년대 이후 아날 학파의 영향을 받으며 새로운 분야로 자리 잡은 mentalité의 연구에 대한 것이다. Mentalité 연구는 개인의 고급한 관념과 체계화된 사상을 연구하는 것과 달리 동시대의 모든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고 있는 어떠한 정신상태를 연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방향성은 그 이전 연구 대상이 되지 못하던 많은 현상들을 연구하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으나, 결국은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단일한 구조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사회의 모든 성원이 공유하는 단일한 정신적 기제가 있다는 전제에 대한 기본적 회의를 불러 일으켰다. 知性史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도전으로는 물질적 환원주의를 들 수 있다. 즉, 마르크스주의적인 역사 발전 모식과 인간의 사회, 경제적 토대에 대한 강조가 주류가 되어 버린 20세기의 사학에서 사상이나 정신활동은 결국은 좀더 “현실적”인 무엇에의 반영일 뿐이라는 물질적 환원주의는 知性史의 근본적 존재 의의를 흔드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인간의 정신 활동과 사상을 이러한 단순한 환원주의에서 구제하려는 논의가 知性史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켜 왔다. 다음으로, 보다 최근에는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관점에서 知性史 연구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포스트 모더니즘적 관점은 “언어학적 전회”를 특징으로 하는 고로 어떤 면에서는 知性史의 가장 고전적인 방법인 텍스트 비평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것은 흥미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관점과는 달리 문화의 다양성, 격절성, 특수성, 그리고 텍스트의 의미의 불확정한 임시성등을 강조하는 것이, 상호 간에도 많은 면에서 불일치하고 있는 이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최소한의 일반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1990년대 宋代 知性史 연구는 이러한 다양한 知性史에 대한 논의의 연장선 속에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知性史 일반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중국 사상, 특히 Neo-Confucianism으로 불리우는 新儒學 사상에 대한 기존의 서구 학계의 연구방향에 대해 언급하려한다. 구미에서의 중국 사상의 연구는 주로 위에서 언급한 철학사적인 관점에서 사상가 개인이나 저작의 사상내부의 구조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져 왔다. 中國古代의 孔子를 비롯한 諸子百家 사상에 대한 연구는 그 시대의 사료적 제한으로 인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의 파악이 지극히 제약을 받는 측면을 고려할 때, 이러한 방향성이 불가피하다는 측면도 있으나, 비교적 주변의 사료가 풍부한 唐宋대 이후의 사상 연구도 기존의 철학사, 사상사의 연구 관점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 1980년대까지의 실정이었다. 특히 Wing-tsit Chan (陳榮捷)과 Columbia 대학의 Wm. Theodore de Bary, Harvard 대학의 Wei-ming Tu (杜維明)등이 중심이 된 소위 宋明哲學이라고 불리우는 新儒學의 연구는 연구자 자신들이 대체로 역사학적 분야의 수련을 받았다기 보다는 철학적인 수련을 받은 학자들로, 程頤, 朱熹, 王陽明등 중요 新儒學 사상가들의 사상을 심도 있게 연구하여, 新儒學의 사상적 구조에 대한 이해를 촉진시키는데는 커다란 공헌을 하였지만, 新儒學이라는 것을 마치 超歷史的인 하나의 구조로서 이해하여 사상의 이해에 당시의 사회, 문화, 경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는 역사적 관점은 상당히 결여되어 있었다. 또한, 新儒學의 사상을 일종의 “진리”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자세에 의해, 新儒學이 형성, 발달한 시기의 다양한 사상, 문화적 조류를 이후의 朱子學의 “승리”라는 회고적 관점에서 평가하여 시대착오적인 朱子學 일변도의 단선적인 묘사에 그치는 등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1990년대 宋代 知性史 연구는 이러한 기존의 新儒學 사상 연구 시각에 대한 문제점의 제기를 강한 동기로 가지고 있다.
세 번째로는 기존 宋代史 연구의 틀을 결정해 주었던 주요 가설과 전제, 연구방향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기존의 宋代史 연구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가설을 內藤湖南의 唐宋變革期論이라고 할 수 있겠다. 內藤湖南이 唐宋變革期를 중국사의 획기를 가르는 중요한 변화의 시기로 규정한 이후, 唐宋變革의 내용과 성격을 규명하려는 제 연구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사적 측면에서 다양하게 시도되어왔다. 內藤湖南의 가설이 주로 문화사, 제도사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면 그 이후의 일본학계의 연구는 주로 토지소유관계와 생산력 발달의 사회, 경제학적인 측면에 중점을 두며 시대구분론과의 연관성 상에서 唐宋變革을 연구하여왔다. 唐宋變革의 하나의 중요한 특점으로 지적되는 唐代 귀족사회의 몰락과 宋代 士大夫의 출현이라는 지배층의 변화도 새로운 토지소유관계의 발생, 科擧制度의 운영과 확산이라는 사회, 경제, 제도사적 측면에서 많이 논의되어 왔고, 地方史 자료의 이용의 증대에 따라 중앙이 아닌 특정 지역에서의 소위 “新興士大夫”들의 존재 양태와 중앙 정부와의 연관성과 격절성에 대한 연구도 唐宋變革의 이해에 폭을 넓혀 왔다. 여기서 1990년대 宋代 知性史 연구의 가설의 밑받침이 되는 미국 宋代 학계의 정치, 사회, 경제사적 연구 성과를 잠시 언급하려 한다. 우선 宋代의 科擧制의 신분변동에 대한 영향과 宋代 사회 지배층의 구조에 대한 논쟁과 그 연구 성과들에 대해 이야기 하려한다. 1947년, E. A Kracke가 "Family vs. Merit in Chinese Civil Service Examination Under the Empire"(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Vol. 10. No. 2)에서 宋代 科擧制가 중국 사회의 지배층의 전면적인 개편을 가지고 왔다고 주장하며, 科擧制의 신분변동에 있어서의 “근대적” 면모를 강조한 이래, 科擧制와 연관되어 宋代의 지배층의 존재 양태와 사회성격에 대한 논의는 최근까지도 중요한 논쟁점의 하나이다. 이러한 논의는 1982년 Robert M. Hartwell이 "Demographic, Political, and Social Transformations of China, 750-1550"(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Vol. 42)에서 Kracke의 설을 전면 비판하며, 宋代 科擧制는 실제로 지배층의 구성을 변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唐宋 시대의 지배층은 격절성 보다는 연속성이 강한 집단이라는 설을 주장하였다. 이 논문에서 중요한 주장 중 하나는 그가 唐宋 變革期보다 北宋-南宋간의 차이를 宋代 이후 중국의 지배층의 존재 형태를 바꾸어 놓은 중요한 시기로 제시하였다는 점이다. Hartwell은 宋代의 지배층을 建國 功臣集團, 중앙의 중요 관료 계층과 지방의 在地 鄕紳의 세 종류로 구분하면서, 北宋에서 南宋으로 전환하는 시기에 당쟁등의 영향으로 중앙의 중요 관료 집단과 지방의 재지 향신의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지기 시작한 것을 혼인 형태의 변화를 중점으로 제시하며 이후 지방성이 강한 지배층의 출현을 예기한 중대 변화로 지목하였다. Robert Hymes의 Statemen and Gentlemen: The Elite of Fu-chou, Chiang-hsi, in Northern and Southern Sung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은 그의 스승인 Hartwell의 주장을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宋代 초기부터 중앙 관료 계층과 지방 재지 향신의 분류라는 것은 그다지 존재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들은 연속성 속에서 파악될 수 있는 집단이었다고 그의 스승의 설을 수정하였다. 그러나 Hymes는 北宋과 南宋간의 지배층의 존재 형태가 과격한 변화를 보인다는 Hartwell의 설을 더욱 강화하여, 北宋에서 南宋으로의 전환시 사실상 지배층의 혈통적인 연속성은 이어졌으나, 동일한 지배층 구성원이 취한 지배층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전략에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왔음을 제시하였다. 즉, 北宋시기에는 지배층이 자신의 신분을 보장받기 위하여서는 관직과 그 관직으로 인한 중앙정부와의 연결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고 결혼 형태도 전국의 중요 가문이 서로 연결을 맺는 형태로 이루어졌으나 南宋시기로 전환하는 시기부터 지배층은 중앙과의 연결보다는 자신의 在地的 기반으로 이전하는 형태를 보이며, 혼인도 지방내의 유력 가문간의 유대 강화의 형태를 江西省 撫州지역 연구를 통하여 보여주었다. 이에 대하여 Kracke의 가설을 지지하는 방향의 연구들도 출현하여 科擧制와 宋代 지배층의 존재 형태와 중앙 정부와의 관련성, 변화의 시기 등은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었다. 미국의 1990년대 宋代 知性史 연구는 이러한 사회사 연구에서 제시되어진 지배층의 변동이 그 지배층의 정체성과 사상, 學과 어떻게 연결되어 지는지를 제시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2. 唐宋變革期, 北宋-南宋之際의 變化에 대한
知性史的 접근
먼저 1990년대 宋代 知性史 연구에 있어 가장 큰 틀이 된, 宋代史의 기존 연구에서 중요 논의점이었던 唐宋 變革期의 정치, 사회, 경제적 변동을 知性史와의 연관성 상에서 파악하려고 한 연구들을 소개하려한다.
이러한 唐宋 變革期의 지적 변동에 대한 거대한 가설을 제시한 것은 Peter K. Bol의 "This Culture of Ours": Intellectual Transition in T'ang and Sung China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2) 로 이제 이 저작은 저자의 기본적 관점에 동의하던 반대하던 중국 전근대사 연구자들에게는 논급하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저작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책은 唐初의 귀족주의적 官學的 학풍에서 宋代 程頤의 도덕주의적 道學 사상의 출현까지의 500년에 걸친 士 계층의 사회적 구성, 學의 내용과 정체성의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Bol은 전근대 중국에서 士 계층의 正體性(identity) - 즉 사회에서 한 사람을 士에 속했다고 인정받게 해주는 기준-은 크게 출생신분(家門), 관직, 문화라는 세가지 요소에 의해 결정되어 왔다고 보고 이 세가지 요소가 항존하고 있지만, 安綠山의 亂에서부터 시작되는 唐宋 變革期와 위에서 살펴본 北宋, 南宋간에 그 강조점과 비중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 즉 安綠山의 亂과 五代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唐代의 大姓貴族들 중심의 지배층의 와해는 士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기준으로서의 출생신분의 비중을 약화시켜, 北宋 시기에는 관직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士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리고, 北宋에서 南宋으로 전환하는 시기에는 다시 관직 소유 여부와 관계 없이 일정한 學이 士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부상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러한 北宋에서의 南宋으로의 전환시기의 변화의 중대한 원인으로서는 위에서 Hartwell과 Hymes의 주된 가설인 北宋-南宋之際의 지배층의 在地化를 들고 있다. 北宋 이후 경제, 사회 발달에 따른 교육기회의 확산으로 인한 식자층의 확산, 科擧制의 확산과 발달, 당쟁 등은 식자층이 관직을 획득하는 기회, 특히 이를 다음세대로 세습시킬 수 있는 기회를 대폭 제한하게 되었다. 이렇듯 자신의 士 계층으로서의 정체성을 더 이상 중앙 정부와의 관련성에 의해 보장받을 수 없게 된 士 계층은 자신의 기반을 地方化 시키는 한편, 자신들의 새로운 정체성으로서의 學의 비중을 강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는 이제 士의 學의 내용과 방법 그 자체가 士의 정체성을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知性史의 관점에서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려는 이 저작의 질문은 “唐-北宋-南宋에 걸치는 사회의 변화 속에서 士 계층의 가치(value)가 어떻게 변화했는가?” “文(culture)"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변화하였는가?” “士의 學의 내용이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로 표현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지적 영역에서의 변화가 다른 변화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Bol은 6세기에서 11세기에 걸친 士 계층의 學의 내용의 변화를 모든 역사적, 자연적 질서의 구현체로서의 文에 대한 신뢰와 이러한 신뢰에 바탕을 둔 전통의 축적과 습득, 그리고 그 형식의 재현을 지적인 활동의 중축으로 여기던 唐初의 官學的 학풍에서 어떠한 문화적 전통에도 의존하지 않는 모든 사물에 내재되어 있는 우주적 질서인 理에 기반한 개인의 도덕적 수양에 중점을 두는 道學 운동의 시작이라는 北宋末의 지적 세계로의 전환으로 보고 있다. 이 두 개의 과격하게 다른 가치관에 기반한 學의 내용은 8세기 古文運動에서 시작되어 11세기의 지적 다양성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에 걸친 변화의 과정을 거쳐 생성된 것이다. Bol은 이러한 8세기에서 11세기에 이르는 지적 변환을 安史의 亂 이후 정치적 혼란으로 인하여 우주적, 자연적 질서에 기반을 둔 규범적 기준으로서의 ”斯文“에 대한 신뢰에 위기를 맞게 되며, 이에 따라 그 존재론적 기반을 초인간적인 존재에서 분리시킨 좀 더 人事에 기반을 둔 文의 개념의 출현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北宋 시기의 지적 조류를 개인적 수양과 사회, 정치적 책임의식 간의 긴장관계로 규정한다. 그는 歐陽修를 이러한 긴장관계와 이에 대한 논의의 틀을 마련한 중요한 인물로 보고 歐陽修 이후의 두 세대가 이 양극의 사이를 어떻게 진동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즉, 王安石과 司馬光은 비록 극단적으로 다른 결론에 이르렀지만, 결국 두 명 모두 어떻게 제도를 통하여 완벽한 정치 사회적 질서를 구축할 것인가 하는 사회 정치적 책임에 중점을 둔 논의를 펼친 것이었다. 반면, 王安石과 司馬光의 다음 세대인 程頤와 蘇軾의 경우는 개인에 관한 문제- 도덕 수양과 창조력의 문제-가 그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Bol은 蘇軾의 개인성과 그 창조성, 이에 따른 다양성의 강조가 당시의 士 계층에 상당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던 중요한 관점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반하여 절대적인 기준에 의한 도덕적 수양을 강조한 程頤의 道學의 출현을 논하며 程頤에 이르러 당 중기 이후, 文에서 분리되어졌던 天, 즉 인간의 역사적 전통을 넘어선 우주론적 존재기반이 이제는 문화적 전통과 형식인 文이 아니라, 인간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는 보편적 인성과 합치된 理에 기반하여 새로운 틀로 작용하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Bol이 어떻게 이 모든 변화 -사회, 정치, 경제적 변화, 士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소의 비중의 변화, 士의 學의 내용의 변화-를 연결시켰는가를 설명하겠다. 唐初의 大姓 귀족들과 궁중 학자들은 중국 제국의 통일을 목지하며, 그 통일에 의한 자신감과 그 통일을 뒷받침해주는 기반으로 통일적이고 종합적인 문화적 전통에 기반한 學을 추구한다. 이들의 士 계층으로서의 정체성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출생한 가문에 기반하는 것으로 일정 가문에서의 출생은 士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다른 두 요소, 즉 관직을 얻을 기회와 일정한 문화적 소양을 얻을 기회 또한 규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지배층으로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어떻게 행위하여야 하며 仕宦하여 어떻게 治國을 할 것인가를 일정한 문화적 형식을 습득함으로서 익히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안사의 난 이후, 이러한 통합적 질서를 제공하는 정치적 질서가 사라지고, 대성 귀족들이 와해되어 가면서, 8세기에서 11세기에 걸친 시기는 문화적 전통의 학습, 개인적 수양, 그리고 정치적 참여라는 세 개의 士의 임무가 상호 어떻게 연관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하는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는 시기였다. 가문보다는 관직이 가지는 士의 정체성에 있어서의 비중이 커지지만, 결국은 북송말에 이르면서 이러한 관직의 비중은 점차 士 계층의 다수에게 사환의 기회가 희박하여짐에 따라 學이 士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떠오른다는 것이다. 8세기 고문 운동에서 歐陽修, 王安石, 司馬光, 蘇軾등에 걸쳐 진행된 논의는 위에서 말한 문화적 전통의 학습, 개인적 수양, 그리고 정치적 참여의 세 가지 축의 상호관련성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지만, 모두 문화가 가치를 매개하는 수단임을 부정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11세기 程頤의 道學 운동에 이르러 그는 마침내 문화가 도덕 능력의 중개자임을 부정하고 개인의 선천적 도덕 능력과 그 개인적 수양이 가장 중요한 學의 내용임을 주장한다. 그는 명백히 개인의 도덕적 능력과 문화적 형식의 분리를 선언한 것이다. 그 이후의 중국사의 전개는 중앙 정부와 관련성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해지고 지방에 근거한 士 계층이 개인적 도덕 수양을 가장 중시하는 道學을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가장 근본인 學의 내용으로 수용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저작이 宋代 知性史와 중국사 일반에 공헌한 몇 가지 점을 요약해보겠다. 첫째로, 이 저작은 사상사, 문화사, 사회사적 관점을 동시에 수용하여 唐宋 시기의 모든 변화를 연결시키며 한 시대의 종합적인 상과 변화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知性史의 전체사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이제 唐代의 대성 귀족이 추구하였던 學의 내용과 宋代의 사대부들이 학습하던 學의 내용이 어떻게 또 왜 그렇게 달랐는지를 이들의 정치, 사회, 경제적인 상황의 변화와 상호 연관성 상에서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둘째로, 기존의 北宋代 사상의 연구의 중심이던 北宋 五子-周敦頤, 張載, 紹雍, 程顥, 程頤-의 어떠한 사상이 朱熹에게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朱熹의 선구로서 朱子學의 맹아를 보인 몇몇 사상가의 사상을 朱熹의 사상과의 연관성에서 파악하는 제한된 이해에서 벗어나, 王安石이나 蘇軾의 學을 당시에 程頤의 道學과 서로 경쟁하였던 위치에 있었던 중요한 대안으로서 위치 지워, 후대의 회고적 관점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좀더 광범위하고 다양한 宋代의 사상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그 이후의 宋代 知性史 연구에 많은 자극을 주고 있다. 셋째로, 文이라는 개념을 분석의 틀로 사용함으로서, 문학, 철학, 예술활동, 정치 사상 등 현대의 세분화된 전문분야의 개념으로 파악하기 힘든 전근대 중국의 士 계층의 다양한 지적, 문화적 활동과 그 상호 연계성을 보여주는데 성공하였다.
위의 Bol의 저작이 제시하였듯이 11세기는 지적으로 상당히 다양하고 역동적인 시기였고, 이러한 11세기의 지적 다양성과 역동성에 주목한 연구들은 1990년대 미국 宋代 知性史 연구의 한 특징이다. 이 중에서도 王安石의 新法이 宋代 知性史에 끼친 영향에 대해 보다 많은 관심이 모아진 것도 하나의 성과라 할 수 있다. 위의 Bol의 저작은 이러한 관점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그의 논문 “Ch'eng Yi as a Literatus" (Willard J. Peterson, Andrew Plaks, Ying-shi Yü eds., The Power of Culture, Hong Kong: Chinese University of Hong Kong Press, 1994)은 程頤를 그의 형이상학적 사상에 의해 이해하기 보다는 한명의 정치, 사회적 지배층 -士-의 일원으로서 보고 있다. 그의 논문은 程頤가 정부와, 다른 사들의 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學을 어떻게 규정하였는가, 또한 자신의 출생신분과 당시의 정부의 주류를 이루었던 사람들과의 출생신분의 차이를 어떻게 파악하고 그것이 그의 學의 내용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를 보여줌으로서 당시의 정치, 사회적 변화, 특히 王安石의 新法으로 인해 일어난 新法黨, 舊法黨의 대립등이 程頤의 學에 어떠한 영향이 있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Chu Hsi's Redefinition of Literati Learning" (Wm. Theodore de Bary, John Chaffee eds., Neo-Confucian Education: The Formative Stage, Berk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9)에서 보여주듯 결국 朱子學의 성립이 당시 程頤의 道學계열의 學보다 오히려 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많은 추종자를 가지고 있었던 王安石과 蘇軾의 학과의 경쟁과 상호 영향관계 안에서 士 계층을 설득해 나가는 과정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北宋의 독특한 象數學者로 알려진 紹雍에 대한 Don J. Wyatt의 연구인 The Recluse of Loyang: Shao Yung and the Moral Evolution of Early Sung Thought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6)도 그의 象數學이나 이후 朱子學에 영향을 끼친 사상적 공헌에 집중하기 보다는 紹雍의 일생을 전기적으로 상세히 고찰하면서, 당시 新法에 반대하는 사들의 중심지인 洛陽의 지적 풍토와 교유관계를 논하였다. Wyatt는 그의 저작 이전에 발표된 Anne D. Birdwhistell의 Transition to Neo-Confucianism: Shao Yung on Knowledge and Symbols of Reality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9)에서의 紹雍에 대한 해석 -즉 紹雍은 그의 象數學에 기반하여 세계를 통합적으로 해석할 존재론적, 인식론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는 설에 반박하여 紹雍은 당시 洛陽에서 상호 교유하던 反 新法黨 士들의 도덕주의적 관심을 공유하였고, 그의 사상의 윤리학적 측면이 중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11세기의 지적 다양성과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지적 추이의 상관관계를 이해하는 데는 司馬光의 “보수주의”와 그의 정치적 경력간의 관계를 세밀하게 추적한 Xiao-bin Ji의 ”Conservatism and Court Politics in Northern Sung China: The Thought and Career of Ssu-ma Kuang(1019-1086)" (Princeton Univ. Ph.D Dissertation, 1998) 도 유익한 연구라고 본다. 또한, Kai-wing Chow의 논문인 "Ritual, Cosmology, and Ontology: Chang Tsai's Moral Philosophy and Neo-Confucian Ethics" (Philosophy East &West Vol43, No 2, 1993) 도 張載의 禮사상을 살펴봄으로서 그동안 宋代 유학의 연구에서 상대적으로 경시되어 왔던 禮學의 측면을 조명하고 있다. 이렇듯 11세기의 지적인 다양성은 연구자들의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唐宋 變革期를 知性史의 관점에서 재조명하려는 시도로는 Ying- shih Yü(余英時)의 짧은 논문인 “Intellectual Breakthroughs in the T'ang-Sung Transition"( Willard J. Peterson, Andrew Plaks, Ying-shi Yü eds., The Power of Culture, Hong Kong: Chinese University of Hong Kong Press, 1994)가 있다. Bol의 저작이 불교의 영향에 대한 논의를 기술적인 측면에서 배제한 한계를 서문에서부터 밝혔다면, 余英時는 당송 변혁기의 지적변환에 있어서의 불교의 영향을 극대화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는 新儒學의 성립을 가지고 온 唐宋變革期의 지적 변환을 ”現世로의 전회“로 정의하고 이러한 전환은 유교의 내부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慧能(638-713)에 의해 창립된 禪佛敎에 의하여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余英時는 韓愈의 중국인에게 불교가 매력적이었던 원인인 超越世界를 放棄하지 않고 現世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서, 유교가 불교와 경쟁적인 위치에서 우위에 서있을 수 있는 기반을 제시하였다고 하고 있다. 韓愈에게서 시작된 이러한 선불교에 대한 대응은 天理에 기반한 新儒學 사상의 발달을 가지고 왔으며, 이런 의미에서 新儒學의 대두는 8세기에 시작된 새로운 禪佛敎 운동에 의해 촉발되어진 장기간에 걸친 정신적인 운동이라는 보다 넓은 역사적 관점에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Hartwell과 Hymes의 宋代 사회의 연구 이후, 중국사의 중대한 분기로서 唐末-五大-宋初에 걸치는 唐宋變革期 외에 北宋-南宋之際가 중시되기 시작하였다. Bol의 연구도 이러한 北宋-南宋之際가 知性史에 있어서도 중대한 변화를 가지고 온 시기임을 재확인 시켜주고 있지만, Robert Hymes와 Conrad Schirokauer가 편집한 Ordering the World: Approaches to State and Society in Sung Dynasty China (Berkeley: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는 이러한 北宋-南宋之際의 중요한 사회, 경제, 제도적 변화속에서 宋代의 治者와 사상가들이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하였는가를 잘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10편의 논문들을 싣고 있다. 이 책은 정치사와 제도사가 知性史와 맞물리는 지점에 있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宋代의 “經世”에 대한 논의를 다양하게 보여줌과 동시에 이러한 宋代의 경세사상이 그 이후의 중국사 전개에 미치게 되는 영향이라는 관점에서 淸代史에 있어 현저하게 나타나는 國家와 私的인 영역 사이에 위치한 “public space"의 출현, G. William Skinner가 주장하는 唐에서 淸代에 이르는 시기의 점진적인 국가 행정력의 축소의 문제등의 좀더 거시적인 문제와의 연관성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宋代史 연구가 宋代 이후의 중국사회 이해에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나 하는 점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책의 서문은 宋代의 知性史 연구에 대한 방법론에 대한 가장 명쾌한 논문으로 추천하고 싶다. 현대적, 서구적 개념의 틀과 언어를 중국사 연구에 이용하는 데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과 그 문제점을 완화시키기 위한 전제와 기제등에 대한 논의는 각론적인 각각의 연구주제를 추구하기 앞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명쾌히 논의되기는 힘든 부분이다. 이러한 이론적인 문제점을 단지 공허한 이론의 토론이 아닌 宋代史의 구조와 특수성에 입각하여 구체적으로 논의한 서문은 서구의 이론적 분석의 틀이 중국사 연구에 어떻게 적용되는 것이 생산적일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90년대는 기존의 사상을 그 내적 논리에 의존하여 연구하는 방향에서 탈피하여 그 시대의 다른 변화와의 관련성 상에서 파악하려는 시도가 진행되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종합적인 이해의 추구는 특히 중국의 지배층과 그 學의 내용의 정치와 사회와의 밀접한 관련성을 생각할 때 사상 그 자체를 이해하기 위하여서도 중요한 관점이라고 생각된다.
끝으로 위에서 唐宋變革期, 北宋-南宋之際의 지배층의 존재형태에 대한 변화의 설명이 宋代 知性史의 중요한 과제였음을 보여주었기에, 본 저작 자체는 知性史가 아닌 사회사이지만, 그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宋代 지배층의 존재 형태에 대한 가설이 앞으로의 宋代 知性史 연구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고 보는 최근의 사회사 연구서 하나를 소개하며 이 장을 마무리하려한다. 1998년 출판된 Beverly J. Bossler의 Powerful Relations: Kinship, Status, and the State in Sung China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Council on East Asian Studies, 1999)는 Hartwell과 Hymes의 지배층의 在地化 경향에 대한 가설에 기본적으로 동의하고 있으나 몇 가지 면에서 중요한 수정을 가하였다. 즉 Bossler는 Hymes의 가설 -지배층의 자신의 지위를 보존하는 전략이 北宋에서 南宋之際를 거쳐 중앙과의 연계를 중시하는 것으로부터 地方의 기반을 중시하는 것으로 전환한다는 가설- 에 대해 일종의 수정을 가하고 있다. 즉, 전체적인 이러한 地方化된 지배층의 등장에 대해서는 동의하나, 그 地方化된 재지 지배층과 北宋 시기의 중앙관료 중심의 지배층이 항상 동시에 지방과 전국적인 조직망을 추구하여 왔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北宋-南宋之際 시기의 재지화된 지배층의 등장을 단지 그들의 기반과 영향력이 地方化 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宋代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地方化된 기반만을 가지고 있었던 士들도 집단으로서 중앙의 정치와 전국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된 점에 주목해야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지방에 기반을 둔 士의 전국적 영향력의 획득은 全帝國에 걸쳐 단일한 士 문화가 발생한데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Bossler는 지배층과 피지배층, 지방 士와 중앙 관료의 명쾌한 구분이 불가능한 상당히 유동적이고 혼화된 계층구조를 갖는 宋代 사회상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그녀의 宋代 의 관료 계층이 아닌 士 계층의 증대와 이에 따른 중앙과 관변 자료가 아닌 私的 기록의 증대, 宋代 이후 道學의 전파로 인하여 宋代의 사료를 선별하여 보존하는 일을 담당한 사람들 자신의 취향이 반영된 선별적 사료 보존의 문제에 대한 지적은 宋代史 전반을 연구하는 데에 있어 “역사적” 변화와 “사료학적” 변화의 차이를 감안하여 宋代를 파악하여야 한다는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이후의 Bossler가 주장한 지방과 전국의 문화와 연결망이 어떻게 상호 전화되어 가는가 하는 문제와, 宋代의 士의 學과 문화가 지배층의 전국적인 연대의식에 미친 영향 등은 宋代 知性史에 있어 이미 언급되어 오던 문제이나 좀 더 풍부한 연구가 필요한 분야라고 할 수 있겠다.
3. 朱子學 연구에의 새로운 시각
이 장에서는 기존의 구미의 新儒學 연구에 대한 반발로서 1990년대 급격한 발전을 보인 역사적 맥락에서 朱熹의 道學 운동을 재이해하려는 연구들을 중점적으로 소개하려한다. 우선, 구체적인 저작에 대해 논하기 앞서 Hoyt Tillman과 Wm. Theodore de Bary 사이에서 진행된 “Neo-Confucianism"이라는 용어를 둘러싼 논쟁을 소개하는 것이 이러한 새로운 朱子學 연구에의 시각의 문제의식을 간략히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Tillman은 그의 ”A New Direction in Confucian Scholarship: Approaches to Examining the Differences between Neo-Confucianism and Tao-hsheh"(Philosophy East &West Vol 42. No 3, July, 1992) 라는 짧은 글에서, 기존의 “Neo-Confucianism"이라는 모호하고 몰역사적인 용어를 쓰며 행해진 기존의 宋代 사상의 연구를 비판하며, 이러한 연구가 宋代 儒學의 다양성과 각각 다른 학파들 간의 차별성을 사장시키며, 宋代 儒學을 程-朱 계열의 소위 ”正統“ 朱子學 위주의 서술로 축소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朱熹가 마치 지적인 진공상태에서 자신의 사상을 창출해낸 것 같이 기술하는 기존의 宋代 유학 연구에 대한 대안으로 ”fellowship“ 개념에 입각한 道學 운동에의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 즉, 그는 道學을 추구했던 宋代 儒者들은 다른 儒者들과 달리 그들만의 사회관계와 집단으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다른 집단과 차별되는 전통을 공유해나갔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집단으로서의 자의식은 비록 그들이 조직화된 집단을 조성한 것은 아니나, 느슨하지만 동시대인들에 의해 인정되어 질 수 있는 동료의식에 의해 하나의 집단으로 구분되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朱熹의 사상을 정점으로 한 道學 사상은 이러한 fellowship의 상호 작용에 의해 형성,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de Bary는 다양한 宋代 유학의 발달과 그 이후의 유학과 주변 국가에의 영향을 포괄할 수 있는 용어로서 ”Neo-Confucianism"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Tillman이 제시한 역사적 맥락에서의 宋代 儒學의 연구라는 방향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하였다.
이러한 Tillman의 문제의식은 그의 저작인 Confucian Discourse and Chu Hsi's Ascendancy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2)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1982년 저작인 Utilitarian Confucianism: Ch'en Liang's Challenge to Chu Hsi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Council on East Asian Studies, 1982)에서 도덕주의적인 형이상학 보다는 경세와 공리 사상에 입각한 陳亮(1143-1194) 과 朱熹의 논쟁을 소개함으로서 朱子學 성립 시기의 다양한 宋代의 지적 배경과 상호 영향관계를 보여주었던 그는 道學 운동의 성립, 전개에 대한 그의 “fellowship" 개념에 입각한 설명을 Confucian Discourse and Chu Hsi's Ascendancy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는 道學 운동의 발전 과정을 4시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즉, 張九成(1092-1159)와 胡宏(1102-1161)을 이 道學 fellowship의 첫 세대 지도자로 보고, 그 이후를 3 시기로 나누어 朱熹의 세대의 주된 道學 운동의 참여자들 - 張栻(1133-1180), 呂祖謙(1137-1181), 陳亮, 陸九淵(1139-1192)- 을 그들 자신의 사상과 朱熹와의 관계에 의거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의 道學운동에 대한 연구관점은, 12세기 당시 지식인 사이에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呂祖謙과 같은 인물을 재조명하고, 당시의 다양한 지적 담론 사이에서 朱熹의 사상체계가 형성되어 가는 양상을 잘 보여 주었다는 면에서 이후의 宋代 知性史 연구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할 수 있다.
이러한 Tillman의 저작이나 위에서 소개한 Bol의 저작들은 宋代와 전체 중국 知性史, 더 나아가서는 동아시아의 知性史에 있어 일대 획기적인 변화를 가지고 온 道學 운동의 발전과 확산, 그리고 최종적 승리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즉, 11세기에는 주변부의 士人에 의해 전개된 일개의 지적 운동으로 정부에 의해 강력한 탄압조차 받았던 道學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당시의 士人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으며,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결국은 1241년 理宗에 의해 朱熹와 북송의 四先生-周敦頤, 張載, 程頤, 程顥-이 禮部와 鄕學, 書院의 文廟에 공식으로 추존되는 것으로 상징되는 국가의 정통 이데올로기로의 승인까지 얻게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은 宋代 知性史가들의 관심의 초점이 아닐 수 없다. Tillman은 위의 저작에서 우선 朱熹가 많은 다른 道學 운동의 지도자 중에서 어떻게 유일한 권위를 지닌 절대적 인물로 浮上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의 설명의 중점은 다른 道學운동 지도자들간의 지적인 알력과 경쟁에서 朱熹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하는 “fellowship" 내에서의 상호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그 밖의 요인들, - 즉 철학적으로 朱熹가 당시 담론 중 양극에 위치하고 있는 두 가지의 유력한 입장들 사이에서 호소력 있는 “中庸”을 찾아낼 수 있었다는 점, 朱熹가 다른 道學 지도자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장수를 누린 점등도 그 원인이라 보고 있다. 물론 朱熹의 사망 이후의 道學 운동의 발전과 성공에 대해서는 Tillman은 남송기의 대외관계에서 비롯한 정부의 정통성에의 위협, 이에 따른 정부와 士人 간의 긴장관계 등에 의한 정치적인 요인, 그리고 道學 운동가들이 발전시킨 제도적 장치-書院, 文廟-와 道學의 역사와 系譜, 커리큐럼을 전파하는 방식등이 끼쳤을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점등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Peter K. Bol은 그의 저작, “This Culture of Ours" 와 논문, "Examination and Orthodoxies:1070 and 1313 Compared"(Culture &State in Chinese History,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7)에서 道學 운동이 당시의 士人에게 그렇게 많은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원인을 道學 운동의 이념이 국가와 정부에서 독립된 士人의 독립적인 공간과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것이었고, 정치, 사회, 문화적 정통성을 정부가 아닌 士 개인에게 부여한데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밖에도 道學 운동의 발전 과정을 지속적인 전통의 축적과정으로 파악하고 1160년에서 1220년 사이의 기간을 집중적으로 고찰한 Ping-tzu Chu의 "Tradition Building and Cultural Competition in Southern Song China" (Harvard University, Ph. D. Dissertation, 1998)이나 科擧制를 당시의 士人과 정부 간의 상호에 대한 기준과 기대에 대한 절충이 일어나는 장으로 보고 南宋代 과거에 있어서의 師弟關係, 시험준비책자, 시험문제와 답안을 상세히 분석한 Hilde De Weerdt의 "The Composition of Examination Standards; Dao-xue and Southern Song Dynasty Examination Culture" (Harvard University, Ph. D. Dissertation, 1998)도 南宋代의 道學의 발전과정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연구들이다. De Weerdt의 박사논문은 좀 더 축약된 논문인 "Canon Formation and Examination Culture: The Construction of Guwen and Daoxue Canons" (Journal of Sung-Yuan Studies 29, 1999)에서 그 중요 논점을 읽을 수 있다.
그 외에 宋代에서 淸代에 이르기까지 道學 운동을 道學가들이 자신들의 道統 개념에 기반하여 구성해 낸 선집과 계보의 텍스트들을 푸코의 역사해석방식을 적용하여 분석한 Thomas A. Wilson의 Genealogy of the Way: The Construction and Uses of the Confucian Tradition in Late Imperial China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5)와 道學 운동의 기반지인 宋代의 書院을 상세히 고찰한 Linda A. Walton의 Academies and Society in Southern Sung China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도 道學운동 전개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접근을 보여주고 있다.
朱熹 개인에 대한 좀더 상세한 고찰로는 Daniel K. Gardner의 朱子語類의 권 7에서 권 13의 學 1-7의 번역인 Learning to Be a Sage: Selection from the Conversations of Master Chu, Arranged Topically (Berkeley: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0) 가 1990년대 대표적인 성과라 할 수 있다. 이 번역서는 朱熹의 당시 학풍에 대한 도전과 대안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비록 朱子語類의 저자가 朱熹로 되어 있다고 하여 이것을 모두 朱熹 자신의 육성 그대로라고 보는 것은 朱子語類의 형성과 그 이후의 판본의 연변과정에 개입된 많은 변화와 그 변화 과정이 암시하는 많은 의미를 감안하지 않는 것으로 주자어류에 대한 올바른 접근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朱子語類를 朱熹에서 비롯되어 이후 축적된 朱子學의 학의 방법론으로 파악한다면, 주자의 학의 방법론이 얼마나 그 이후의 士의 사고 방식과 일상생활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끼쳤는가를 잘 엿볼 수 있다. 특히 이 책은 80여 쪽에 달하는 Gardner의 주자에 대한 개론적 소개를 싣고 있는데, 간략하지만 朱熹의 사상과 그 역사적 맥락에 대한 상당히 정확한 개설이라고 할 수 있다.
朱熹의 사상의 좀 더 다양한 면모를 보기 위해서는 앞장에서 언급한 Ordering the World: Approaches to State and Society in Sung Dynasty China 에 실려있는 두 편의 논문을 추천할 수 있다. Conrad Schirokauer 는 "Chu Hsi's Sense of History"에서 朱熹의 역사관을 고찰하고, Richard von Glahn은 "Community and Welfare: Chu Hsi's Community Granary in Theory and Practice" 에서 朱熹의 지역 사회제도에 대한 관점을 살피고 있어 朱熹 사상에서 자주 다루어지지 않던 면들을 고찰하였다. 또한, Yung Sik Kim(김영식)의 "Chu Hsi(1130-1200) on Calendar Specialists and Their Knowledge: A Scholar's Attitude toward Technical Scientific Knowledge in Traditional China" ( T'oung Pao LXXVIII, 1992)는 朱熹의 자연과학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어 朱熹에 대한 이해를 더욱 풍부하게 할 수 있다.
끝으로 향후 미국의 新儒家 연구의 방향성을 암시하는 짧은 논문으로 Peter K. Bol의 "Neo-Confucianism and History -Some Issues for Historians" ( 『中國史學』 第 6卷, 1996, 12) 은 新儒家의 역사학적 연구에 있어서 주목해야 할 몇가지의 쟁점을 소개하고 있다.
4. 宋代 士大夫의 知的, 文化的 活動의 多樣性
중국의 士 계층이 文, 史, 哲 일체의 교양을 동시에 구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士 계층이 治者로 자임할 수 있는 정당성에는 그들의 문화적, 지적 소양이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으며, 특히 宋代는 그 경제와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사대부 계층이 더욱 다양한 지적, 문화 활동에 종사한 시기로 인식되고 있다. 儒家 經典과 역사의 연구, 다양한 장르의 문학작품의 양산, 그리고 宋代 文人畵로 불리우는 새로운 회화 예술의 발전과 서예등에서 보여준 宋代 사대부의 지적, 문화 활동의 넓이와 깊이는 이전부터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분야이다. 1990년대 미국 학계의 宋代 知性史 연구는 이러한 宋代 사대부의 지적, 문화적 활동을 다각적인 시각에서 조명하고 있다.
우선, 宋代 사대부들이 어떻게 전통적인 儒家 經典을 연구하고 이용하였으며, 그것이 가지는 의의는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연구로는 Kidder Smith, Jr., Peter K. Bol, Joseph A. Adler와 Don J. Wyatt가 공동 집필한 Sung Dynasty Uses of the I Ching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0)와 Alan T. Wood의 Limits to Autocracy: From Sung Neo-Confucianism to a Doctrine of Political Rights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5)가 있다. 이는 각각 宋代의 周易과 春秋에 대한 연구를 고찰한 책이다. 우선, 宋代의 저명한 4명의 사상가-歐陽修, 紹雍, 蘇軾, 朱熹-들이 易經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였나 하는 것을 서술한 Sung Dynasty Uses of the I Ching 는 이들 사상가들의 易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그들의 문화, 사회, 도덕, 인성 등의 기반과 상호관계에 대한 전제를 살펴보고 있다. 宋代의 저명한 三人-孫復, 程頤, 胡安國-의 春秋에 대한 주석을 연구한 Limits to Autocracy 는 이들의 춘추 주석을 통하여 宋代 신유가 사상가들의 정치사상을 석출해내고, 이들의 정치사상에 나타난 君主權의 개념과 君臣關係를 분석하여, 기존의 일반적인 이론인 신유가의 사상이 宋代 이후 君主 獨裁權 강화에 기여하였다는 설에 반발하고, 이들의 사상에서 군주권에 대한 견제의 사상이 명백히 보이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위의 두 연구서의 대상도 宋代 사상가들의 유가 경전에 대한 주석이었지만, 주석이라는 특이한 방식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을 표현, 발전시키는 중국 知性史의 특성은 1990년대 이래 더욱 학자들의 주목을 모으고 있다. 대표적인 연구로는 詩經의 성립과정에서 宋代 朱熹의 주석에 이르는 詩經의 해석학에 대한 Steven Van Zoeren 의 연구서, Poetry and Personality: Reading, Exegesis, and Hermeneutics in Traditional China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1), 중국 유가와 서구의 해석학적 전통을 비교 연구한 John B. Henderson의 연구서, Scripture, Canon, and Commentary: A Comparison of Confucian and Western Exegesi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1991), 儒家들은 왜 주석을 썼으며, 주석을 씀으로서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주석의 연구가 중국 知性史에 줄 수 있는 공헌은 무엇인가를 통괄하여 고찰한 Daniel K. Gardner의 논문, "Confucian Commentary and Chinese Intellectual History" (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57, no 2, May 1998)를 들 수 있다. 이중 Poetry and Personality 는 시경 해석학의 역사에 있어 宋代가 차지하는 독특한 지위에 중점을 두고, 저작의 후반부를 歐陽修, 程頤, 朱熹의 주석에 할애하였다. 그는 특히 朱熹의 詩經 해석이 전대의 詩經 해석을 종합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시경 해석의 틀을 마련한 것으로 그 이후 중국의 詩經 해석학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기술하고 있다. 나머지 두 권의 연구서 들은 宋代에만 국한된 연구는 아니나, 宋代가 중국 儒家의 註釋的 전통에 있어서도 분명히 새로운 장을 여는 시기였음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겠다. 이러한 宋代의 새로운 註釋的 전통의 창출은 앞으로 더욱 많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리라 생각된다.
宋代의 道學運動의 발달이 宋代 역사서술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도 1990년대에 주목을 받기 시작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Hoyt C. Tillman 의 “Ho Ch'u-fei and Chu Hsi on Chu-ko Liang as a Scholar-General" ( Journal of Sung-Yuan Studies 25, 1995), 그리고 Johannes L. Kurz의 “ The Invention of a "Faction" in Song Historical Writings on the Southern Tang" (Journal of Sung-Yuan Studies 28, 1998) 은 道學的인 세계관과 道學者들의 정치적, 사상적 입장이 어떻게 過去에 대한 역사서술에 반영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연구이다. Charles Hartman의 연구, “The Making of a Villain: Ch'in Kuei and Tao-hsueh" (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vol 58 no 1, June, 1998) 는 道學운동의 성공이 현재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宋代에 대한 사료에 미친 영향을 秦檜(1090-1155)에 대한 評이라는 예를 들어 잘 보여준 연구라 할 수 있다. 道學 운동의 성공으로 宋代의 마지막 100년 간 정도의 궁중의 歷史記錄官은 道學 운동에 관련된 학자 중에서 충당된다. 또한, 朱熹는 道學 운동의 정체성과 차별성을 구축하기 위해 북송에서 자신의 시기에 이르는 기간까지의 道學의 歷史를 구성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敵과 我를 명백히 하기 위하여 道學운동의 歷史는 道學運動家를 탄압하는 “惡黨”의 상이 필요하였고 이에 의해 秦檜는 자신의 원래의 행각보다 더 과장된 道學운동의 敵인 악당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南宋末 이후의 道學 운동의 성공은 道學者들이 宋代의 사료 선별과 역사 기술의 중심이 되게 하고 그들은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최대한 진작시키는 역사 편찬, 기술을 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道學 운동의 성공은 이후 중국 역사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이며,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사료도 이러한 道學 운동의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다시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Hartman의 연구는 道學운동의 영향을 보다 덜 받은 사료와 道學 운동의 입장에서 쓰여진 사료를 비교함으로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의 연구는 이러한 道學 운동이 미친 宋代 역사 서술, 편찬에 대한 것 뿐 아니라, 宋代 역사 편찬에 대한 일반적인 많은 지식을 얻는데도 유용한 논문이다. 이러한 宋代를 사학사적 입장에서 고찰하려는, 또 당시의 士의 중요한 지적 활동의 하나였던 역사서술과 연구를 조명하려는 노력은 1990년대 이후 미국 宋代 知性史학계의 움직임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그 밖의 宋代 士大夫들의 다양한 문학, 예술적 활동에 대한 많은 연구서가 출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의 접근방법은 知性史라기 보다는 좀더 문학, 예술 작품 자체의 분석에 치중한 文學史, 美術史로서의 특성이 강하지만, 중국 士大夫들의 특성 상, 학문, 문학, 예술 활동을 분리하기 힘들고, 이 모든 분야에 걸친 활동에 대한 종합적 이해가 宋代 士大夫 이해에 결정적인 요소이므로, 참고로 1990년대 중요한 宋代의 문학, 예술에 대한 저작을 소개하려한다. 우선 蘇軾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Michael A. Fuller의 저작, The Road to East Slope:The Development of Su Shi's Poetic Voice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0), 그의 논문. "Pursuing the Complete Bamboo in the Breast: Reflections on a Classical Chinese Image for Immediacy"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Vol 53 No 1, 1993)와 Ronald C. Egan의 蘇軾의 작품에 대한 전기학적 분석인 Word, Image, and Deed in the Life of Su Shi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Council on East Asian Studies, 1994)등이 그 중요한 연구 성과이다. 黃庭堅의 詩論을 연구한 David Palumbo-Liu, The Poetics of Appreciation: The Literary Theory and Practice of Huang Tingjian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米芾의 서예에 대한 연구인 Peter C. Sturman, Mi Fu: Style and the Art of Calligraphy in Northern Song China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7), 그리고 宋代와 元代의 미술에 대한 다양한 논문들을 Maxwell K. Hearn과 Judith G. Smith가 편집한 Arts of the Sung and Yuan (New York: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1996)도 중요한 저작이라 할 수 있다.
宋宋代 士大夫에 있어서의 불교의 심대한 영향은 늘 이야기되고 있는 소재이며, 선불교가 新儒學 발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거의 상식적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宋代의 불교를 知性史的 관점에서 연구한 저작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러한 현실에서 Peter N. Gregory와 Daniel A. Getz, Jr.이 편집한 최근 출간된 Buddhism in the Sung (Honolulu: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은 宋代 불교의 다양한 모습을 史的으로 조명한 열 세 편의 논문이 담긴 귀중한 성과라 할 수 있다. 이 중 Peter N. Gregory는 이 책의 서문 격인 논문, “The Vitality of Buddhism in the Sung"에서 新儒學의 발달과 강력한 불교 비판, 그리고 數量的인 佛敎 寺院과 僧의 수의 감소 등으로 宋代가 唐代에 대비되어 불교의 쇠퇴기였다고 하는 기존의 宋代 불교의 대한 인식은 잘못된 선입견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宋代 불교가 단지 수량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때는 분명 쇠퇴하였던 것 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으나, 그 질적인 면에서 宋代 불교를 바라볼 때, 그 사상적인 혁신과 종합은 오히려 宋代를 불교의 “전성기”라고도 부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그는 宋代불교 연구에 있어 선불교 뿐 아니라 天台宗에 대해서도 좀 더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 책의 2 장인 Albert Welter, "A Buddhist Response to the Confucian Revival: Tsan-ning and the Debate over Wen in the Early Sung" 는 宋代 불교가 당시의 문화 전반 속에 어떻게 위치 지워졌는가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그는 당시 文에 대한 토론 중, 불교가 과연 중국의 文 - 經典的 전통-에 포함되는가 하는 토론을 고찰함으로서 당시의 士人들의 불교에 대한 인식을 살피고 있다. 이 밖에도 Beata Grant의 Mount Lu Revised: Buddhism in the Life and Writings of Su Shi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4) 는 불교가 宋代 士人의 사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蘇軾의 예를 통하여 상세히 고찰하고 있다.
끝으로 南宋代에 중국의 북방을 지배하며, 南宋과 대치하였던 金(1115-1234) 치하에서의 정치, 제도, 사상, 문화, 종교에 대한 연구 논문을 모은 Hoyt C. Tillman과 Stephen H. West가 편집한 China under Jurchen Rule: Essays on Chin Intellectual and Cultural History (Albany: State Universtity of New York Press, 1995)은 北宋代에 발달한 士人층의 사상과 문화가 민족과 문화를 달리하는 지배층을 가진 金에 의해 어떻게 수용되고 운용되었는가 하는 것을 살펴봄으로서, 宋代의 중국에 대한 좀 더 완정한 이해를 도와주고 있다.
5. 宋代의 出版文化의 발달과 知的活動의
연관성 대한 연구
마지막으로 이 장에서는 宋代의 인쇄술과 출판문화의 발달이 宋代의 사대부의 지적활동에 미친 영향을 논한 연구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Thomas H. C. Lee의 “Books and Bookworms in Song China: Book Collection and the Appreciation of Books" (Journal of Sung-Yuan Studies 25, 1995)는 宋代의 종이와 인쇄기구의 증대, 독서층의 증가와 서적 수집열의 발생 등 출판문화의 발달이 宋代人의 삶과 문화에 미친 영향을 일화등을 통하여 소묘하고 있다. Lucille Chia의 "The Development of the Jianyang Book Trade, Song-Yuan" (Late Inperial China Vol.17 No.1, June 1996)는 宋代와 원대에 福建의 建陽에서의 인쇄업의 발달 과정을 살피고 이를 그 지역의 지적 전통과 연결시켜 살피고 있다. 이 두 개의 논문이 宋代의 출판문화에 대한 서술적인 기술이라면, Susan Cherniack의 논문, "Book Culture and Textual Transmission in Sung China"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Vol 54, No 1, 1994) 는 宋代의 출판문화의 발전이 당시의 사인들의 經典을 비롯한 텍스트에 대한 관념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으며, 이러한 텍스트에 대한 관념의 변화가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중요한 지적 작업의 하나로 인식되었던 텍스트에 대한 대조, 교정 과정에서 어떻게 반영되었는가, 이러한 태도는 또 결국 그들의 經典 학습의 태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고찰하고 있다.
이러한 출판 문화의 발달에 따르는 또 하나의 현상으로는 새로운 서적의 장르의 발달을 둘 수 있다. 宋代에 발달한 類書 장르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 두 편의 논문을 소개할 수 있다. Russell Kirkland은 "A World in Balance: Holistic Synthesis in the T'ai-p'ing kuang-chi" (Journal of Sung-Yuan Studies 23, 1993)에서 太平廣記의 전반적 구조와 내용을 간략히 고찰하고, 太平廣記의 특정 傳記의 기술을 그 이전의 같은 소재에 대한 기술과 비교하여 太平廣記가 宋 太宗의 “全體論的인 종합”이라는 개인적, 정치적 전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Hoyt C. Tillman의 "Encyclopedias, Polymaths, and Tao-hsueh Confucians: Preliminary Reflections with Special Reference to Chang Ju-yu" (Journal of Sung-Yuan Studies 22, 1990-92)는 鄭樵(1004-1162), 章如愚(?-1215), 王應麟(1223-1296), 南宋代의 중요 類書 편찬자 삼 인을 고찰하고 있다. 그는 특히 宋代의 道學과 博學이 相沖되고 있다고 보아온 시각에 대하여, 章如愚와 같이 道學에 관련된 類書 편찬자의 예를 살피면서, 宋代의 다양한 학적 전통의 상호 영향관계에 대해서 좀더 다른 시각으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는 특히 宋代의 博學의 전통에 대한 검토는 기존의 宋代 道學과 淸代 考證學의 선명한 대립이라는 상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연구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Peter K. Bol은 "A Literati Miscellany and Sung Intellectual History: The Case of Chang Lei's Ming-tao tsa-chih" ( Journal of Sung-Yuan Studies 25, 1995)에서 筆記라는 宋代에 발달한 장르가 지니는 宋代 知性史에서의 의미를 고찰하여, 筆記는 그 통일성을 결여한 형식 자체로서 宋代의 道學의 理로 대표되는 체계적이고 통일적이고 보편적인 세계관에 대비되는 다양성과 실제 경험과 현상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宋代 士人의 사고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을 하고 있다.
6. 1990년대 미국 宋代 知性史 硏究의
성과와 전망
위에서 살펴본 1990년대 미국 학계의 宋代 知性史 연구를 정리하여 그 성과와 앞으로의 과제를 간단히 제시해보고자 한다.
1990년대 미국의 宋代 知性史 연구의 가장 큰 성과는 宋代의 철학, 사상, 가치관, 사고 방식 등의 정신적 영역의 변화와 制度와 物質的 환경의 변화를 상호 연관시키며 통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는 점에 있다고 본다. 宋代는 그 이후의 동아시아 문명권의 사고방식, 생활방식, 제도에 지대한 변화를 끼친 소위 “新儒學”이 생성되고 발전된 시기이다. 사실 “新儒學”처럼 인간의 사상이 인간의 제도적, 물질적 세계에 거대하고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1990년대의 미국 宋代 知性史의 인간의 정신적 영역의 변화와 제도, 물질적 영역의 변화의 관련성을 추적하는 연구는 단지 중국사 뿐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에서 이 두 가지의 영역이 어떻게 상호 연관되어 변화해 왔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예를 제공할 수 있다고 하겠다. 특히, 모든 정신적 변화를 물질적인 下部構造의 변화에 따르는 결과로 환원하거나, 또는 인간의 정신세계의 절대적 독립성에 기반한 것으로 가정하여 時空의 제약을 고려하지 않는 沒歷史的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닌, 좀 더 신중하고 정치하게 양자의 관계를 고찰하려는 시도들이 보여준 새로운 방향성은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소위 “唐宋變革期”의 사회, 경제적 변화와 당시의 지적, 문화적 풍토의 변화의 상관 관계라던가, 朱熹의 사상적 체계와 그가 속해 있던 지적인 동료 집단과의 관계 등을 규명하였던 시도는 사상가 개인의 사상적 체계에 대한 깊은 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그 사상이 자리잡고 있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고찰하였던 시도였다. 이러한 연구 성과는 또한 소위 “唐宋變革期”의 다른 영역에서의 변화 내용과 변화 과정에 대해서도 좀더 풍부하고 세밀한 뉘앙스를 가질 수 있는 설명을 제시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앞으로의 宋代 知性史의 과제는 현재까지 축적된 宋代에 관한 사회, 제도, 정치, 경제, 군사, 과학, 사상에 대한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어떻게 하면 이들의 상호 관련성을 종합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며 변화를 설명해 가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또한, “新儒學” 또는 “道學 운동”의 연구에 있어서는 朱子의 사망이후 元代에 이르는 기간은 과연 이 道學 운동이 어떠한 메카니즘을 통하여 사회에 전파, 수용되었으며, 그 수용의 범위와 정도, 그 영향력의 실체는 어떠한 것이었나를 살펴 보는데 중요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연구가 많이 진행되지 않은 시기이다. 물론, 史料의 제약이라는 측면이 작용하였겠지만, 道學 운동의 사회에 대한 영향을 보다 심도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기의 연구가 필수적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宋代의 士大夫의 지적, 문화적 활동의 多樣性에 대한 인식의 심화도 1990년대 宋代 知性史의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宋代 사대부가 많은 경우, 동시에 시인이며 화가이며 철학자이고 정치가이며 향촌 지도자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또한 宋代 불교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점차 분명해져 가듯이 宋代 士大夫는 동시에 佛敎, 儒敎, 道敎 등 상호 모순될 수도 있는 지적 경향을 동시에 수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公的인 自我와 私的인 自我가 분리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하겠다. 일개인의 다면적인 역할과 상호 다른 믿음 체계의 공존은 물론 어떠한 사회에서도 존재하는 현상이지만, 宋代 사대부의 이러한 다면적인 활동의 어떠한 면은 宋代의 지배층의 존재 양태와 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특수성이기도 하다고 본다. 1990년대의 宋代 知性史 연구가 宋代 士大夫들의 지적, 문화 활동의 다양성을 인지한 것은 사실이나, 그 다양한 활동이 어떻게 상호 연관되면서 개인의, 혹은 집단의 정체성을 구성했으며, 이러한 다양한 활동이 당시의 士大夫들의 상호 연계와 사회와의 연관에는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美術史, 佛敎學 등으로 기존에는 독립되어 연구되던 분야를 통합적으로 수용하여 宋代 知性史를 규명하는 일은 새로운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990년대의 宋代 출판 문화의 발달에 대한 연구에서 보이는 기술과 물질 문명의 발달과 당시의 정신문화와의 연관성은 앞으로 좀 더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분야가 아닌가 전망한다. 그리고, 1990년대 宋代 知性史에서 제시한 史料 자체가 그 시대의 지적인 경향에 영향을 받는 산물임에 대한 인식은 史料 批判 등에서 상식적으로 이야기되는 것으로 새로운 발견은 아니라 할 수 있으나, 당시의 역사학에 대한 관심과 모든 사료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불러일으키는 흥미 있는 연구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을 끝마치며, 이러한 미국 학계의 宋代史 硏究 성과를 共有하고 批判하기 위하여, 첫 번째로 20세기를 마감하며 21세기를 향하여 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미국이라는 전혀 다른 문명권에서 거의 천 년의 시간의 간격을 가지고 있는 중국의 宋代를 연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한국에서 중국의 宋代를 연구하는 학자의 그것과 다른 것인가 하는, 그리고 두 번째로 달라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을 제시해 본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사실 현상에 대한 파악으로 미국과 한국의 宋代史 연구가들 간에도 많은 다른 답변들이 존재하리라는 것을 예상할 때, 무의미한 질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지적인 흐름의 대강을 파악할 수 있다는 “知性史” 연구자로서의 믿음을 바탕으로 답변을 하자면, 서구 학계의 동양 연구의 태도는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지적하고 싶다. 이전의 서구의 학계의 동양 연구는 “왜 그들은 우리와 그렇게 다른가?”하는 질문에 중점이 있었다면, 최근에는 어느 정도 비교학적인 관심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들의 중심 질문은 좀더 보편적인 방향으로 전환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역사의 연구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을 “歷史化” 시킬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주는 것이라 할 때, 천 년 전의 중국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일들을 “歷史化” 시키는 것은, 우리 자신을 “歷史化”시키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와서 어떻게 왜 변화해 왔으며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는데 미국인이나 한국인이나 모두 宋代人들이 어디서 와서 어떻게 왜 변화해 갔으며 어디에 서 있었는가를 살피는 것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두 번째의 질문은 다를 필요가 없다는 답변이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곳에서 다시 어디서부터 와서 어떻게 왜 변화해 왔으며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이 다른 미국과 한국의 “우리”들의 차이가 연구에 반영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沒歷史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宋代人들이 어디서 와서 어떻게 왜 변화해 갔으며 어디에 서 있었는가에 대한 답변 자체를 변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본인의 의견이다. 따라서, 미국 학계의 宋代史 연구의 활용과 비판은 그 자체가 宋代의 “歷史化”와 현재 미국 학계의 관점에 대한 “歷史化”와 우리 자신의 관점에의 “歷史化”라는 “知性史”적 관점의 응용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