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여행14 - 가네이시성을 나와 슈젠지 절을 찾아 최익현 선생 순국비를 보다!
2024년 1월 26일 대마도(對馬 쓰시마) 의 히타카쓰(比田勝) 에서 렌터카를 빌려 타고
에보시타케 전망대와 만제키세토(万関瀬戸) 운하에 가네다성터에 오른후
면세점인 다이렉스 미쓰시마에서 쇼핑을 하고는 이즈하라(嚴原 엄원) 에 도착합니다.
식당가 운하 옆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지온(祈園) 호텔로 들어가서 체크인을 하고는 나와 걸어서
운하를 따라 올라가 朝鮮通信使 幕府 接偶の地(조선통신사 막부 접우노지) 비석을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좀더 올라가서 가네이시성(金石城) 으로 들어가서는 정원과 쓰시마번
번주인 소우케(宗家 종가) 의 묘소인 반쇼인(万松院 만송원) 을 바라봅니다.
반쇼인(万松院 만송원) 은 일본 3대 묘소의 하나로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수령 천년의 삼나무가
지켜보는 그런 고즈녁한 분위기로 다 오르면 역대 도주(島主)들의 묘석이 줄지어 있습니다.
여기 이즈하라의 반쇼인은 쓰시마번 번주인 소우케(宗家 종가) 의 묘소로.... 소씨의
보리사인데, 햐쿠간기(百匯木) 라고 불리는 돌 계단이 한적하면서도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조선통신사 관련 유물 및 도쿠가와 역대 쇼군의 위패도 있습니다.
그러고는 반쇼인을 뒤로 하고 걸어 나와 이제 슈젠지 절을 보아야 하니 시가지를 걸어서 운하를 따라
항구쪽으로 내려가다가 조금 못미쳐서 어림짐작으로 산쪽으로 난 주택가 좁은 골목길을 찾아
올라가니 일반 주택의 담장으로 보기는 힘든 유난히도 두꺼운 검은 돌담이 보이니.... 그럼
이것이 바로 화재를 막기 위해 쌓았다는 방화벽인 호우카헤키 ほうかへき (防火癖) 인가 봅니다?
이윽고 중국 강남지방의 오음(吳音) 으로 유마경 읽는 방법을 왜국에 전했다는.... 백제
비구니 법명(法明) 이 지었다는 슈젠지(修善寺 수선사) 절을 발견하고는 들어
가는데 서양의 성당이나 일본의 절 안에는 묘지가 늘어서 있으니 여기도 엄청 많습니다.
주지가 출타했는지 아님 밤에는 퇴근하는는지 사람이 없으니 안으로 들어가는데, 처음에는 최익현 선생의
묘가 있다고 잘못 안 탓에 묘소를 찾다가 어둡기도 하고 묘지들이 많기도 해서 발견하지는 못합니다.
그 대신에 돌아나오다가 절의 오른쪽 입구에서 최익현기념비를 발견하는데..... 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
之碑 (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지비) 로...... 1986년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세웠습니다.
최익현(崔益鉉 )은 조선왕국 말기 유학자로 철종시기 문신(文臣) 이었으며, 고종 시기에는
조선 최후의 산림중에 한 사람으로 유학자들을 이끌었던 거두이자 충신 입니다.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에는 친고종 충성파 산림으로서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키는데 한 몫을
했고, 개화기에는 위정척사파의 사상적 리더로 개국 반대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독립협회에 반대하고 기존 유교 질서로 돌아가려고 전력을 다했습니다.
일제 침탈이 가속화되고 나라의 명운이 경각에 달리자 을사의병 항쟁을 했던 최익현은 흥선
대원군과 더불어 조선의 수구파를 상징하는 인물로 개화를 반대해 조선 근대화에 걸림돌
이 되었던 인물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조국의 안위와 독립를 위해 결사투쟁한 충신입니다.
일본에서는 존왕양이파들이 무진전쟁 반란을 일으켜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유신을
시작했던 1868년에 조선에서는 대원군이 고종의 대리 섭정이었던 시절,
대원군에 의해 임진왜란때 불에 타 없어진 경복궁 재건으로 나라가 도탄에 빠지자 반기를 듭니다.
270년간 경복궁을 재건하지 못한건 재정이 부족했기 때문인데 대원군이 무리하게 재건하면서 민생을 파탄
에 빠트리고 국가 재정을 바닥나게 했다고 상소해 혹독하게 비판하니.... 대원군의 사람들에게 역사에
이름 석자 남겨 보려는 구차한 행위라고 비난받았지만, 고종은 용기를 칭찬하며 돈녕부 도정에 제수합니다.
다만 최익현 선생의 근거가 위정척사파들의 사상적 근거인 유교 이념에 따라서
경복궁 재건 반대와 같은 백성을 위한 정책도 있지만.... 청전폐지, 서원 복구,
만동묘 제사 복구 같은 시대착오적인 수구적인 민생과 관련없는 내용도 있습니다.
1868년 최익현의 상소는 경복궁 토목 공사를 중지하고, 백성들에게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지 말며,
당백전(當百錢) 을 혁파하고 문세(門稅) 를 받는 것을 금지하라는 것인데... 대원군은 관료들에게
돈을 받고 벼슬을 팔고 인플레를 유발시킨 당백전등 건설비를 모으느라 무리에 무리를 거듭했습니다.
1873년에 상소를 올려 흥선 대원군을 맹렬히 비판하며 이륜두상이니 올바른 지위에 있지 않은 종친
이니 하면서, 천재(天災) 가 나타나고 아래에서는 지변(地變) 이 일어나며, 비가 오고 날이
개이고 춥고 덥고 하는 기후가 정상적인 상태를 잃었다면서 대원군을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자 하자 조정이 발칵 뒤집혀져 목숨이 위험할뻔했지만 고종은 최익현을 보호해주었고, 올바른
지위에 있지 않은 종친이 된 대원군이 은퇴를 결정하고는 항의 시위를 하자 고종은 오히려
이 기회를 틈타 대원군 하야를 확정지으면서 친정이 시작되니 "오매불망 얼마나 기다렸던 왕위" 냐?
1876년 일본 운양호 침입으로 영종진이 대패하자 민왕비 조정은 일본과 수교를 결정하니 대원군
을 하야시킨 일등 공신으로 고종 내외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던 최익현은 일본이든
서양이든 수교를 결사반대하는데..... 당시 조선군은 전투능력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전인 1871년 신미양요때 미군은 초지진과 덕진진을 함락하고 이어 광성보 로 진격하니 어재연의
조선군 600명은 열심히 싸웠으나.... 최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미군을 상대로 구식 화승총은
재장전에 시간이 걸리자, 성벽을 오르는 미군들을 향해 화승총을 버리고 돌을 던지며 저항했습니다.
돌을 던지는 조선 병사를 후방의 미군이 저격하니 전투는 불과 한시간 만에 끝났는데...
600명 조선군 중에서 전사자는 어재연등 350명에 부상자 20명을 포함해 다수가
미군의 포로가 되었는데도, 미군 피해는 전사자 3명에 부상자는 10명에 불과했습니다.
4년이 지나 1875년 대포 2문을 장착하고 65명이 승선한 일본 군함 운양호는 초지진을 포격한 후에 영종진에
이르러 보트 2척에 22명 육전대를 상륙시키니 450명 조선군은 전사 35명에 포로 16명을 내고 도주합니다.
조선군의 견고한 성벽을 기어올라 함락시킨 일본군은 조선군 대포 36문에 소총 130자루 까지
노획하는데, 일본군 피해는 전사자는 없고 경상자 2명에 불과한데.... 저 경상자 2명도
450명 조선군의 사격에 의한 것이 아니고, 보트에서 내려 상륙할 때 뻘 밭에 발이 삐인 것입니다?
36문 대포에 300정 총을 가진 450명 조선군이 견고한 성채에서 22명 일본군에 처참하게 패했는데도
최익현은 개국을 결사 반대하니 “저들이 대포를 겨누며 화친하자고 하니 믿을수 없으며, 저들이
파는건 사치품이지만 우리가 파는건 생필품이니 민생에 해를 끼칠 것이고, 저들은 말이 왜인
이지 서양인과 다를 바 없는 도적이며 저들이 우리 나라에 올라오면 재물과 부녀자를 취할 것이다.”
그러나 이홍장과 청 조정에서 러시아의 침입에 중국이 방어해줄 능력이 없다는 최종 통보를
듣고 서양열강과 수교로 입장을 바꾼 조선 조정에 대해 최익현이 도끼상소를 올리며
반대하자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고도 유생들과 반대를 계속
하는데 기본적으로는 그가 서양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며 교역을 죄악시 한다는 것입니다.
최익현은 위정척사파이니 송시열 계열의 주자 성리학 학통을 제외한 모든 학문을 배척하는
것으로....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이어져온 조선의 통치 질서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즉 성리학을 통해 철저히 지켜온 기득권으로 만동묘와 서원을 철폐한 흥선대원군은 패도정치이며,
동학은 토비떼 이고 천주교는 사학(邪學) 이며, 농민운동은 체제를 위협하는 비적떼
이고, 갑오개혁도 일본이 시켜서가 아니라 주자성리학 이데올로기에 충돌하기 때문에 반대합니다.
아베 신조 총리의 외고조부 오시마 요시마사가 서울에 무혈입성해 경복궁을 공격해 고종을 포로로
잡아 조선군의 항복을 받은, 김홍집 친일내각을 세우고 일본 공사의 훈수에 의해 1895년
갑오개혁을 하는데.... 왕실과 정부 재정 분리, 경찰과 사법제도 설치, 도량형 통일, 반상의
신분 차별 폐지, 천민제도 폐지, 노비 해방에 500년간 이어진 과부재혼금지 제도 폐지등 이었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후 을미개혁이 있을때도 계속해 반대를 고수하였으며, 1896년 단발령이
일어났을 때는 상투 자르는 것을 맹렬히 반대하며 내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는
자를 수 없다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바로 왕명(王命) 거역 및 반역 미수죄로 체포되었는데
그가 했던 이 한 마디는 유생들과 보수 성향의 인사들에게도 교훈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후에는 왜놈들과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들이 들끓는 조정에 있어봤자 심신(心身) 이
더러워지게 될 뿐이라며 관직을 내놓고 사퇴후 향리에서 후학의 교육에 힘썼는데
서재필등이 만들었던 독립 협회와 만민 공동회에 대한 매우 노골적으로 배척
하니.... “군주가 유학에 힘쓰면 나라가 절로 평안해진다” 는 사상이 그 배경 논리 입니다.
을사조약 직후 최익현은 상소를 올려 고종에게 조약 체결의 책임을 물으며 명의 숭정제를 예로 들면서 까지
날선 공격을 하였으니 "숭정제는 자결까지 했는데 폐하께서는 조약 하나 막지 못하셨습니까" 라는 취지
인데, 조약이 체결되자 비분강개한 조정신료들이 줄사퇴하고 을사오적들의 목을 베라며 상소했으나
인사권은 이토 히로부미와 학부대신 이완용이 쥐고 있었고 고종은 이미 실권을 잃은 허수아비 상태였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10만명이 넘는 일진회 등 친일 집단이 세워져 일본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한성으로 상경하여 고종의 자문에 응해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만행을 규탄하고 외세의 철수,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 처단과 일진회 해산을 요구하다가.....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향리에 압송되기도 합니다.
이듬해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제국이 승리하고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비분함을 느끼며 을사조약에
가담한 5적인 이완용, 박제순,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의 처단을 요구하고 임금이 직접 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각 공관이 철수하기 전에 조약이 무효라는 성명을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전국 각지에 의병 궐기 내용을 알리며 납세 거부, 기차 승차 및 철도 이용 거부, 일본 상품 불매, 을사 조약
가담자 5적 처단 운동과 의병 활동 및 항일 운동을 호소하며 1906년에 정읍 무성서원에서 74세의
노구를 이끌며 의병을 일으켜, 남원에서 고종의 해산 권고 칙지를 받고 고심하던중 유생 21명과
함께 방안에서 사서삼경인 맹자를 읽다가 대한제국군(진위대)에 체포되자 유생들을 해산하고 투항합니다.
그러니까 실제 전투는 해보지도 못하고 조선군에 잡혀 일본군에 넘겨져 쓰시마섬에 유배를 왔던 그는
유배지에서 일본인이 밥을 주니 일본식으로 머리를 깎으라는 요구를 받자 왜놈이 주는 더러운
음식 따위에는 입에도 대지 않겠으며 차라리 굶어죽을 것을 선언하고 단식 운동에 돌입하였으니,
무리한 단식 영향으로 인한 아사(餓死) 로 잘못 알려졌으니....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런줄 압니다.
진상은 유배를 간 제자들도 함께 단식하였으나, 결국 일본 측에서 오해가 있었음을 알리고 머리를
안 깎아도 된다고 해서 죽을 먹기 시작했으니 단식을 시작한지 불과 이틀 만의 일이니, 함께
유배가서 단식하였던 임병찬의 대마도 일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70
노구에 단식하면서 4개월을 버텼다는 이야기를 역사서라고 쓰는 사람들의 인식이 걱정스럽습니다.
최익현은 과거 위리안치 때와 마찬가지로 감옥에 갇히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괜찮은 대우를 받으며
섬내 명소를 방문했다고 하며 그리고 3개월 후 풍토병에 걸려서 1개월간 투병하다가 7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시신은 쓰시마 섬을 떠나 부산으로 운구되어 충청남도 예산에 안장되었습니다.
나라가 흥하자면 왕이 장수해 성년이 된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아야 하는데 1800년 정조가
48세로 와병 며칠만에 사망하니 10살짜리 어린아이 순조가 준비되지
않은 왕위에 올라 외척인 안동 김씨들이 세도정치를 펼치게 되니 민란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1834년 순조가 44세에 죽자 7살 코흘리게 어린아이 헌종이 즉위하고, 그도 1849년 22세로 요절하자
귀양갔던 역적의 후손 농사꾼 철종이 왕위에 불려나와 허수아비가 되었고 그후 대원군은
장성한 큰 아들을 제치고 12살 어린아이를 왕위에 앉히니 제대로 승계한 경우가 단 한번도 없었다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 라는 말이 있으니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
롭지 않다는 구절인데, 나라를 지키고 싶다면 적에 대하여도 나에 대하여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 손자병법에서 나온 말이지만 최익현은 사대부 유립들이 여지껏 향유하던
질서를 지키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을뿐...... 나라를 지킬 "군사력" 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나라를 지키고 독립을 유지하는 것은 군사력이고 그 군사력을 뒷받침하는 것은 농업생산력과
산업생산력등 경제력인 국력인데, 일본군이나 유럽군대를 물리칠 군대를 육성하기
위해 어떻게 경제력과 국력을 키우고 군대를 어찌 최신식으로 근대화 해서 육성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한데다가 관심 조차 없이 오직 "유학을 숭상" 해야 한다는 말뿐입니다.
모든 위정척사파가 그러했지만 최익현은 송시열, 이항로 계열이 아닌 모든 학문을 이단시 했고
거부했으니 이들 논리에 의하면, 유교 성리학 이념에서 벗어나는 것은 인간에서 짐승으로
타락하는 것이라 이런 것을 배우느니 차라리 절개를 지켜 문명인으로 죽는게 낫다는 생각이니,
거기에 경제를 어떻게 발전시키고 국력을 어찌 키울지 한다는 생각은 끼어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