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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비화] 국보 제85호, 금동신묘명무량수삼존불입상
글 : 제이풍수사
글 게시일 : 2022. 12. 26.
국보 제85호 금동신묘명무량수삼존불입상
571년에 주조된 고구려 불상으로 석가여래의 뒤에 배 모양의 광배가 붙고, 광배 양쪽에도 협시불이 조각된 특이한 형태이다.
1.화장실에서 푸대접받던, 금동신묘명무량수삼존불입상
금동신묘명무량수삼존불입상(金銅辛卯銘無量壽三尊佛立像, 국보 제85호), 이 불상은 서기 571년에 주조된 고구려불상으로 앙련(仰蓮)을 딛고 선 석가여래의 뒤에 배 모양의 광배가 붙고, 광배 양쪽에도 협시불이 조각된 특이한 형태이다. 광배의 뒷면에는 8행(行)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 불상의 조성 경위와 년대를 확증할 수 있다. 명문은 ‘다섯 명의 도반이 스승과 부모를 위하여 아미타불을 조성한다.’는 내용이다. 571년은 고구려 평원왕(平原王) 13년이니 지금으로부터 1,400년이 넘은 희귀한 불상인 것이다.
2.중국 불상이랍니다
1930년경이다. 황해도 곡산(谷山)에서 이상한 불상이 출토되었다는 정보가 주재소를 통해 평양경찰서에 접수되었다. 그 때는 불법적인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과 ‘고적조사위원회 설치규정’이 살아 있던 시절이라 유물을 발견한 사람은 즉시 신고를 해야만 했다. 어느 선량한 백성이 우연히 불상을 줍고는 신고했을 것이다.
5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나라는 수많은 외침과 내란을 겪었고, 그 때마다 가지고 있던 것들을 숱하게 잃어버렸다. 전쟁터로 나가든, 가족을 이끌고 피난을 떠나든, 소중한 것들을 땅에 묻은 뒤 발길을 옮겼다. 그렇게 매장된 수많은 문화재는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 것은 삭아 없어졌거나, 어느 것들은 그대로 묻혀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어떤 유물은 장마로 흙이 파이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 불상도 그런 경우에 속할 것이다.
신고를 받은 고등계 형사 나카무라 신자부로(中村眞三郞)는 야수 같은 군침을 삼키며 발굴 장소로 달려갔다. 그는 다짜고짜 불상을 손에 쥐고는 발견자에게 선심 쓰듯이 4백 원을 주었다. 그 당시 군수 월급이 70원(圓) 정도였고 자기의 월급도 고작 20원 안팎이었으니 만만치 않은 돈을 치른 셈이다.
당시 평양에 사는 일본인 치고 고려청자나 낙랑유물 몇 점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무력으로 이 땅을 강점한 그들은 우리의 조상이 물려준 찬란한 문화유산을 마치 전리품인 양 캐내고 약탈해 치부했다. 개성과 강화도에서 올라 온 고려청자도 다수 소장했던 나카무라는 그러나 금속유물에는 안목이 어두운 편이었다. 큰 기대에 차 이곳저곳에 불상의 감정을 의뢰했더니, 모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 불상은 너무나 특이하여 조선의 불상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뭐요. 그럼 어느 나라의 것이란 말이요. 곡산에서 출토된 것을 직접 사 온 것인데?”
나카무라는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자기의 2년 치 봉급을 주고 산 것인데 실로 낭패스런 일이었다. 불상이라면 당연히 한국 아니면 중국의 것인데, 만약 중국 것이라면 너무나 흔해 일본인에게 인기가 없었다. 즉 골동적 가치가 없어 돈이 되지 않았다.
“조선의 불상은 태반이 부처가 서 있는 입상(立像)이지요. 그런데 충청도에서는 앉아 있는 불상도 발견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불상처럼 등에 광배를 지고 있는 불상은 처음이고 이런 형태의 불상은 중국 것이 많아요. 조선 땅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
골동상의 말은 나카무라의 기대를 깡그리 짓눌려 놓기에 충분했다. 후회가 막급했으나 기대를 버리지 못한 채 다른 골동상을 찾아갔다. 비슷한 말들만 들었다. 대단히 실망한 그는 이제는 불상을 쳐다보기가 싫어졌다. 내버릴까 하다가 화장실 선반에 아무렇게나 얹어 놓았다.
“아니, 불상이 왜 이런 곳에 있지?”
거래를 위해 나카무라의 집에 들린 아마이케는 자기 눈을 의심하며 불상을 집어 들었다. 부식은 약간 되었으나 광배의 화염문까지 선명하고, 또 처음 보는 형태의 부처라서 한 눈에 귀해 보였다. 도저히 화장실에 놓아 둘 공예품으론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야 모조품과 가짜가 흔하지만 당시로는 불상을 가짜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앙련을 딛고 선 부처의 모습이 왠지 몇 번 보았던 신라의 불상과 표정이 너무나 달랐다. 신라 불상의 표정은 온유하고도 부드러운데 이 불상은 강인한 무인의 기품이 느껴져 자기 또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마이케(天池) 노인
일본의 조선 침략과 함께 일확천금을 꿈꾸며 서울에 정착한 거물급 골동상으로 감식 안목도 뛰어났다. 명동에서 커다란 골동상을 경영한 그는 일본인 골동상들의 소식통으로 통했다. 특히 교토에 사는 거상, 야마나카(山中) 와도 손잡고 좋은 물건만 있으면 즉시 일본으로 빼돌린 악질이다.
“나카무라 상, 웬 불상을 창문에 두었어요?”
불상을 들고 나온 아마이케는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주인에게 물었다.
“아마이케 상, 그거요. 귀한 줄 알고 샀는데 알고 보니 흔해 빠진 중국 불상이래요. ”
나카무라는 새삼 분해하며 얼굴까지 붉혔다. 속아 산 것이 속이 쓰라렸다.
“어떻게 입수했어요?”
고미술품은 출토지와 발굴 경위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금속유물의 골동적 가치는 형태나 문양의 온전함뿐만 아니라 희귀성과 연대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같은 조건이면 연대가 오래된 것이 가치 있고, 또 명문이 있어 제작 경위와 년대를 알 수 있으면 금상첨화이다. 왜냐하면 금속유물은 도자기나 고서화같이 감상이 목적이 아니라 문화사적 연구 자료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금속 유물은 녹이 슬거나 형태가 부식되어서 그 제원을 밝히기가 어렵다. 따라서 출토 지를 알면 대략 어느 시대, 어느 국가의 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녹의 상태와 유물의 복식과 문양으로 당시의 생활사와 풍토(風土)까지도 연구할 자료가 될 수 있다.
“황해도 곡산에서 발굴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가 샀어요. 여러 곳에 감정을 했더니 중국불상이랍니다.”
아마이케는 여전히 의구심을 풀지 않았다. 뭔가 귀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오래된 불상 같아요.”
눈치를 살 핀 나카무라는 되팔 기회라 생각하고, 속을 감춘 뒤에 슬그머니 운을 떼었다.
“그럼 아마이케 상이 사시겠어요.”
“그러지요.”
아마이케 역시 운을 떼지는 못했지만 바라던 바라 그 소리를 듣고 기뻐했다.
“그것 사고 어찌나 속이 상했던지….”
아마이케 역시 불상에 대해 밝지가 않았다. 그러나 직감에 흔해 빠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서울에 사는 거물급 수장가를 머리에 떠올렸다.
“그럼, 얼마나?”
“본전에 가져가시오.”
“그렇게 할 수는 있나요. 나카무라 상의 체면도 있고 또 앞으로 좋은 관계도 있어야 하니….”
아마이케가 내 놓은 돈은 8백 원이었다. 그로서도 대단한 투자를 한 셈이다.
3.복이 저절로 굴러오다
이 불상은 곧 서울로 옮겨왔다. 서울로 내려오면서 아마이케는 도자기 왕이라 자타가 공인하는 이토 마키오에게 되팔기로 작정했다. 그 동안의 친분으로 그에게만 넘기면 어렵잖게 큰돈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 들었다. 그러나 이토는 냉정하게 손사래를 쳤다.
“나는 불상을 몰라요. 때깔이 고운 청자나 가져오시오.”
하지만 나이가 더 먹은 아마이케의 마음을 서운하게 내몰 수는 없었다.
“물론 처음 보는 불상이지만 그래도 유별나요.”
아마이케가 애원하듯 보챘다.
“누가 녹슨 불상을 쳐다보는 사람이 있어요?”
이토 마끼오(伊藤愼雄).
동양제사(東洋製絲) 사장을 지내면서 지위와 부를 이용해 이 나라 청자만을 수 없이 수집해 감상하던 재미로 살았던 자이다. 그는 당시에는 극히 드물었던 단파 라디오를 통해 태평양 전쟁의 전세를 미리 전해 듣고, 부리나케 국보급 청자를 한국의 신진 수장가에게 팔고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의 패망을 미리 점친 예지의 승부였다.
“그래도 사두면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요.”
“그럽시다. 아마이케 상이 어려운 모양인데. 돕고 살아야지요.”
이토는 하늘에서 복이 저절로 굴러 떨어지는 복덩이요, 아마이케는 굴러 들어온 복도 내친 불운아였다. 선심 쓰듯이 3천 원을 건네자, 아마이케는 안도의 한 숨을 내 쉬며 물러 나왔다. 그 후 얼마의 세월이 흘렀을 때다. 우연히 이토의 집을 세키노가 들리자, 이토는 기다렸다는 듯이 불상을 내보이며 감정을 부탁했다.
“세키노 박사, 이 불상 좀 보아 주세요.”
불상을 이리저리 살피던 세키노는 놀라움에 소리쳐 외쳤다.
“대단한 불상이요. 큰 행운을 잡았습니다.”
광배 뒷면의 명문(銘文)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다.
“景四年在辛卯比丘道□ 共諸善知識邦婁 賤奴阿王阿据五人 共造無量壽像一軀 願亡死父母生生心中常 値諸佛善知識等値 遇彌勒所願如是 願共生一處見佛聞法數”
세키노 다다스(關野貞, 1867~1935).
1867년 니이가따(新瀉)에서 출생했고 동경제국대학 공학부를 졸업한 건축사학자였다. 그는 그 대학의 조교수로 재직하며 1902년부터 한국과 중국 각지의 고적을 답사해, 1918년에 당(唐)의 불교 유적인 천룡산 석굴을 발견하고 나아가 평양의 낙랑 유적을 밝히기도 한 유명 인사이다. 그가 이 땅에 공식적으로 들어온 것은 1902년이다. 당시 대한제국은 일본의 강권에 못 이겨 이 땅의 옛 건물과 고적에 대한 실태를 조사했고, 그 조사자로 그가 발탁되었다. 하지만 이 조사는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한 정보 수집의 일환임은 물론이다. 한국을 대신한 조사라 그는 돈과 행동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주요 고적지와 옛 건물, 그리고 폐사지까지 조사해, 그 결과를 1904년 ‘한국 건축 조사보고’로 발표했다. 이 자료는 호시탐탐 이 땅의 매장 문화재를 노리던 악질적인 일본인에게 도굴과 약탈의 지침서가 되었다.
“글쎄요. 모두 중국 불상이라고 하던데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이토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억지로 맡기는 했지만 늘 밑졌다며 속상해 하던 불상이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출토지가 어디라 합니까?”
“황해도 곡산이요.”
“그럴 테지요. 이것은 고구려불상입니다.”
“뭐요!”
“명문을 보세요. 이것은 고구려 평원왕 13년, 그러니까 571년에 주조된 불상입니다. 틀림없습니다.”
세키노는 명문을 일일이 손으로 집어 가며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자 이토의 얼굴에서 의심이 가시며 희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단한 것입니까?”
“대단하지요. 이것은 국보감입니다. 국보!”
“뭐요! 국보요?”
이토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세키노도 연신 감탄을 하면서 불상을 이리 저리 살펴보았다.
“이토 상, 이 불상을 내 책에 실으면 안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세요.”
혼이 빠진 듯이 이토는 흥분했다. 맑은 하늘에서 금덩이가 떨어진 격이다.
“그럼 사진을 찍어야 하니 가지고 가겠습니다.”
세키노는 이 불상을 ‘조선 미술사(朝鮮美術史)’와 기타 저서에 사진과 함께 실으면서, 출토 경위와 가치에 대해 자세히 소개했다. 모든 골동상이 주목했다. 가격이 금세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10~15만 원까지 호가했다. 불상의 가치가 알려지자 금세 천정부지로 가격이 뛴 것이다.
금동신묘명무량수삼존불입상의 광배(앞면)
금동신묘명무량수삼존불입상의 광배(뒷면)
4.복을 차버린 사람
1945년, 과욕이 부른 천벌이 일본을 강타하자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일본인들은 애지중지 모았던 재산을 고스란히 남겨 둔 채 몸만 떠나야 했다. 이권을 근거로 재물을 모으고 살았던 그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었다. 미군정이 ‘륙색(rucksack) 1개’로 돌아가는 일본인들의 보따리를 규제하자, 그들은 패전국의 포로로서 모든 부귀와 고미술품을 송두리째 헌납하거나 혹은 헐값에 팔고 떠났다. 해방 후 이 나라 제일의 고미술품 수집가는 해방과 더불어 혜성처럼 등장한 장석구였다.
부동산으로 돈을 번 그는 일본인들이 쫓겨 가면서 헐값으로 판 골동품을 거의 쓸어 담다시피 수집했다. 그 중에서 이토가 수집한 거의 전부가 그에게로 옮아온 것이다. 이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포 공덕동에 들어서면 가장 번듯한 한식집이 그의 집이었다. 해방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다. 평양에서 내려온 김동현이 그의 집을 들렸다. 이토 마키오의 수장품을 보았으면 하고 일부러 찾아간 것이다.
창고로 쓰는 넓은 온돌방, 한복에 마고자를 받쳐입은 장석구가 방구석을 따라 그 동안 수집했던 골동품을 꺼내 펼쳐 보였다. 그는 초라한 차림에 광대뼈가 불거진 김동현이 일제 때부터 금속유물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다만 금속유물을 몇 점 가지고 있는 애송이라고 생각했다.
“내 물건 보여주기는 처음입니다.”
거드름을 피우는 그 앞에서 삼십대 후반의 김동현은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가 각 10여 점이고, 분청사기도 여러 점 있었다. 그 외는 불상과 불구(佛具)였는데, 모두가 대단한 감식안을 가지고 쏙 빼어 고른 일품들이었다.
“모두 보려면 하루가 모자라요.”
장석구의 얼굴에 거만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얼마나 되는데요?”
함께 간 사람이 물었다.
“고서화는 없고 대부분 자기인데, 몇 백 점은…. 참 김 선생은 금속에 밝다면서‥.”
아직 피난민의 티가 가시지 않은 김동현이다. 자랑이 얼굴이 가득 차서 장석구가 다락에 보관했던 상자를 꺼내 왔다.
“이토한테 청자매병을 사면서 끼워서 산 것인데, 나는 불상에는 관심이 없어요.”
오동 상자의 끈을 풀며 장석구가 투덜거렸다. 김동현의 눈에서 광채가 돌기 시작했다.
“부처님 뒤에 광배가 붙었는데 광배에도 조그만 부처가 또 있어요.”
그 말에 김동현의 가슴은 두 방망이질을 해댔다. 혹시 ‘조선미술사’에 소개된 고구려불상이 아닌가 생각 들었다.
“얘기도 없이 굳이 좋은 것이라며 주었어요. 이 따위 불상이 무슨 가치가 있어요?”
김동현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아!”
뚜껑이 열리며 나온 불상은 바로 금동무량수삼존불입상이었다. 불상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었던 명품을 장석구 혼자만 몰랐던 것이다.
“퍼렇게 녹이 났어요. 도자기는 볼수록 맛이 나구만‥.”
불상 표면에 적도금(赤鍍金)된 것을 동제(銅製)로 보았고, 또 광배 뒷면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장석구는 읽지도 못했다.
“이 불상을 양보해 주시지요.”
분위기를 보아 가며 김동현이 운을 떼었다. 그러자 참새에 굴레를 씌워 타고 다닐 만큼 재치와 지혜가 뛰어난 장석구가 의미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얼마나 주려오?”
김동현의 눈이 빛났다. 가격을 묻는 말은 곧 팔겠다는 의사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말씀해 보시지요.”
사실 장석구는 김동현을 깔보고 있었다. 듣자니 집도 없이 세를 살고, 또 일제 때 이름 한번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2만 5천 원만 내시오.”
기와집 한 채 값이 조금 넘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이토 마키오가 소장했을 때는 15만 원, 아니 기와 집 100 채 값에 해당하는 천하의 보물이었다. 그 가치를 모르는 장석구는 오히려 약을 올리려고 값을 높여 부른 것이다.
“알겠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도 거래를 거들며, 쐐기를 박는 한 마디를 보태었다.
“세상 물건에는 모두 제 임자가 있군요. 물건을 싸시지요?”
평양서 내려 온 김동현은 너무나 쉽게 이 천하의 불상을 입수했다. 골동계에서는 한 점을 가지고 승부를 건다고 한다. 장석구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뭐라고! 김동현이 일정 때부터 이름을 날렸던 한국 최고의 금속 감식가라고!”
장석구가 또 다시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래요, 아니 온재(溫齋: 장석구의 호)는 아직도 몰랐단 말이오?”
“시커멓고 허름한 옷을 입은 그 사람이 그랬단 말이야?”
장석구는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듯이 계속 혀를 찼다. 한수산(韓繡山)과 최남(崔楠)은 맞장구를 치며 장석구를 놀려댔다.
토건업계의 선두 주자, 한수산은 일산토목(一山土木)을 세워 부자로 소문이 난 사람이고, 일제 때부터 종로에서 거상으로 소문났던 최남도 만만치 않은 갑부였다. 세 사람은 명동의 신아라는 음식점을 단골로 들락거렸다.
“그 불상은 세키노가 쓴 ‘조선 미술사’에 대문짝만하게 나온 불상이야. 그 때는 값이 무려 15만 원까지 보았어.”
기가 막힌 장석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식했던 까닭에 기회를 여지없이 놓친 것이다.
“아무튼 김동현, 그 친구 이름깨나 나게 생겼어.”
주인 마담까지 낀 술자리는 폭소가 터지고 곁에 앉았던 기생은 눈물까지 찍어 가며 이야기를 들었다. 세상 물건에는 모두 임자가 따로 있는 법. 이 불상은 6․ 25를 겪으면서 김동현은 부산으로 피난 가며 가지고 갔다. 그리고는 어려운 생활을 겪으면서도 팔지 않고 늙을 때까지 가지고 있었다. 세월은 흘러 불상의 가치를 인정한 문화재관리국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85호로 지정하였다. 김동현은 이 불상을 약 45년간이나 간직하다가 80세가 넘어 더 이상 소장할 수 없자, 고구려금동반가사유상과 함께 1992년 이건희 회장에게 양도했다. 1995년 문화재관리국에 소장자의 명의를 김동현에서 이건희로 변경 신고를 할 때에 10억 원이란 거래 가격이 기재되었다.
(참고: ①김동현 증언, ②「금속유물특별전 도록」․호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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