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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말없이 행동하고, 말없이 사랑합시다!
사순 특강을 갔다가 정말이지 몇십 년 만에 신학교 동창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특강 시간에는 성당에 안 보이더니, 사제관에서 따로 들었더군요. 저를 보고 하는 말, 어떻게 사람이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 있냐고.
하루 온 종일 말 한마디 없던 사람이었는데, 아무리 말을 붙여도 뒤로 빼면서 실실 웃기만 하던 사람이었는데,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어떻게 이렇게 날나리가 되었냐며 놀라워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정말이지 그랬습니다. 제가 봐도 놀랄 정도입니다. 사실 저는 젊은 시절 요셉 성인 못지않게 과묵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듣기만 하고,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고, 해야할 일만 딱 하고...
몇십 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말을 하며 살았으니, 이제 다시 과묵했던 시절로 돌아가야 할 순간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살다 보면 진국 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말없이 사랑하는 사람.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 조용히 도와주는 사람. 힘들 때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는 사람. 침묵 속에 기도하는 사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든든하고 힘이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요셉 성인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복음 사가들은 그에 대해 철저하게도 함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구세주의 양부이자, 마리아의 동반자로서, 오랜 세월 구세사의 주역들을 동반하셨던 그의 역할은 참으로 막중한 것이었습니다.
요셉 성인의 특별하고 굴곡진 삶을 글로 쓰자면, 아마도 소설 몇 권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과묵하고 진중한 사람, 침묵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요셉 성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아주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았으며, 그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일생을 봉헌했습니다. 그 사명은 예수님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마리아의 순결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비오 11세 교황님께서는 요셉 성인의 사명이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나 베드로 사도의 사명에 버금가는 막중한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성 요셉의 사명은 조용히 생각하는 사명이요, 침묵하는 사명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구속 사업의 비밀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리 노출되지 않도록 끝까지 침묵을 지켰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는 성 요셉의 사명은 곧 오늘날 우리 교회의 사명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과 함께 계실 때의 성 요셉의 사명은 보호와 방위의 사명, 수호와 원조의 사명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적으로부터 방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사명은 곧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 역시 이 혼탁한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지키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위에 성장시킬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셉 성인에 대한 신심이 각별하셨던 요한 23세 교황님께서는 그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성 요셉! 저는 이 성인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가장 먼저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제 하루 일과를 시작할 수도, 끝낼 수도 없을 정도로 그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성모님 전문가 쇼사르 박사는 요셉 성인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 요셉은 우리와 조금도 다름없는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두 발을 땅에 딛고 있었으며, 결코 지상 낙원의 꿈을 쫓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나이를 먹지 않는 영원한 청년입니다. 그는 세상 모든 가장들의 모범입니다. 그는 참으로 여성스런 동정녀 마리아와 떳떳하고 올바르게 교제할 수 있었던, 참으로 이상적이고 멋진 남자였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세상, 성 요셉처럼 침묵의 사명에 충실해야겠습니다. 성 요셉처럼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만사를 바라봐야겠습니다. 성 요셉처럼 말없이 행동하고, 말없이 사랑해야겠습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고해성사의 효과는 정확히 이렇게 드러난다>
복음: 마태오 1,16.18-21.24ㄱ
제가 어렸을 때 뒤란에서 야한 여자 사진을 보다가 아는 형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둥그렇게 꾸겨서 담 밖으로 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 형은 그런데 굳이 그것을 찾으려 했습니다. 다행스럽게 논은 그것을 잘 감추어 주어 그것이 드러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형이 찾았는데도 일부러 모른 척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쨌거나 그 일로 저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이 있은 후로 나는 타인의 잘못을 덮어주는 논을 본받았을까요, 아니면 그것을 찾아내려던 동네 형을 본받았을까요? 이상하게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본받게 됩니다. 이것이 부모가 자녀의 잘못을 들추어 상처 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자녀는 그러면 자기 잘못보다는 자기가 잘못했을 때 그것을 덮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만을 배우게 됩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이미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셨음에도 그것을 믿지 못하고 상대의 탓을 하였습니다. 타인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 자체가 용서를 믿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요셉 성인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 하기로 작정하였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는 말은 순결했다는 뜻입니다. 자꾸 타인의 잘못을 드러내려 한다면 자신이 얻는 게 있어서 입니다. 반면 드러내고 싶은 게 없다면 이미 의로운 사람으로 심판 받았기에 굳이 남을 아프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남을 아프게 하면 나도 아픕니다.
요셉 성인이 약혼 중에 임신하고 온 아내를 보면서도 굳이 그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신 그러한 순결한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닮아야 할 요셉 성인의 의로움이 이것입니다. 타인의 잘못을 들추는 사람은 그것으로 반드시 얻는 이득이 있기에 타인을 아프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고집 센 사람 한 명과 똑똑한 사람 한 명이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다툼의 이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고집 센 사람은 4×7=27이라 주장했고, 똑똑한 사람은 4×7=28이라 주장했던 것입니다. 답답한 나머지 똑똑한 사람이 재판관에게 가자고 말하였고, 그 둘은 재판관을 찾아가 시비를 가려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재판관은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둘을 쳐다본 뒤, 고집 센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4×7=27이라 말하였느냐?”
그러자 고집 센 사람이 말합니다.
“네,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말했는데, 글쎄 이놈이 28이라고 우기지 뭡니까?”
그러자 재판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7이라 답한 놈은 풀어주고, 28이라 답한 놈은 매질 하여라!”
결국 고집 센 사람은 똑똑한 사람을 놀리며 그 자리를 떠났고, 똑똑한 사람은 억울하게 매질을 당해야 했습니다. 도무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똑똑한 사람은, 매질을 당하는 내내 재판관에게 억울하다고 하소연했지만, 재판관은 그런 그의 하소연을 한 마디로 잠재웁니다.
“4×7=27이라고 말하는 놈이랑 싸운 네놈이 더 어리석은 놈이다. 내 너를 매우 쳐서 지혜를 깨치게 하려 한다.”
왜 굳이 받아들이지도 않으려는 사람의 잘못을 드러내면서까지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 할까요? 나 스스로 그렇게 해야 하는 틀린 면이 있음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타인을 굳이 심판하고 잘못을 드러내며 자기를 정당화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고해성사 직후’입니다. 이때는 모든 죄를 용서 받았기에 그 사실을 믿는다면 타인의 잘못도 들추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내 죄를 용서 받았음을 의심하게 된다면 아담과 하와처럼 또 누군가의 잘못을 들추어 자기를 정당화하게 마련입니다. 고해성사를 본 즉시 우리는 요셉 성인처럼 ‘누구의 잘못도 들추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됩시다. ‘굳이 남의 잘못을 들추어낼 때 내 맘만 괴롭게 되는 성 요셉과 같은 정결하고 의로운 상태’로 살아갑시다. 이것이 심판 앞에서 의로운 상태입니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복음: 마태 1,16.18-21.24a: 요셉은 천사가 일러준 대로 하였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18절). 이 잉태는 거룩한 신비이다. 이 잉태로 인해 우리는 요셉의 놀라운 모습을 본다. 요셉은 조금도 마리아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그 일을 해결하려 한다. 약혼은 했지만, 마리아와 혼인을 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고, 그 일을 드러내어 마리아를 재판에 넘긴다면 마리아가 죽을 수도 있어서 조용히 파혼하려 했다. 이때 천사가 꿈에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하였다. 이것은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그 신비를 알려준 것이다. 요셉은 의심이라는 악을 떨쳐버리고 신비라고 하는 선을 받아들여야 함을 깨달았다. 요셉은 이제 마리아가 아무 죄가 없다는 것과 동정잉태를 인정할 수 있었다. 요셉이라는 뜻은 흠잡을 데 없는 이라는 뜻이다.1)
천사는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하였다.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했는데 그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 구원자라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이요 구원자는 나밖에 없다.”(참조: 이사 43,3; 호세 13,4)라고 하셨다. 즉 그 이름은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분의 육에 붙여진 이름이다. 요셉은 천사에게서 계시를 받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 그는 마리아를 맞아들이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게 되었다. 요셉 성인이 의롭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채우려 노력했다고 하는 것이다.
요셉이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는데 협력하셨던 삶을 본받아,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에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며 그분을 본받도록 하여야 한다. 요셉은 어떤 큰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온전한 믿음을 통해서 주님께 인정을 받았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하느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응답이 되어야 한다. 요셉이 자기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듯이,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였듯이 주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의 뜻을 따르려 노력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살면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이, 조그마한 행위 하나하나가 하느님 구원사업에 협력하는 순간으로 될 것이다. 요셉 성인과 같이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이루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4)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바오로 사도께서는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어떻게 하면 늘 기뻐할 수 있을까를 묵상하게 됩니다. 돈 많이 벌고, 승진 척척 되고, 아프지 않고, 시험에 늘 좋은 성적을 맞고, 자기 원하는 대로만 된다면 늘 기뻐할 수 있을까요? 어린이가 썼다는 다음과 같은 일기의 내용을 봤습니다.
“수건은 집안의 더러운 것들을 깨끗하게 만들고 걸레가 된다. 걸레가 더러워진 만큼 우리 집은 깨끗하게 된다. 나는 걸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떠십니까? 걸레 같은 삶도 멋질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모는 자기 자녀가 걸레 같은 삶을 살겠다고 하면 아마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말릴 것입니다. 그 삶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 안에서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기를 희생해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 자기를 희생해서 다른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이 길을 쫓아갈 때, 예수님과 함께하게 되고 진짜 기쁨을 갖게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우리가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덕분입니다. 요셉 성인은 단 한 번도 주인공이 되지 않았습니다.
약혼자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자 그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단호하게 마리아를 법정에 세우지도 율법 학자들에게 고발하여 돌로 치게 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요셉에게 꿈에 천사가 나타나 주님의 계획을 전합니다. 말없이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합니다. 이렇게 그는 조용하게 주님의 뜻이 세상에 펼쳐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구원을 가능한 일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반드시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초등학생이 말했던 걸레면 또 어떻습니까? 의미가 충만하다면, 분명히 기쁘고 행복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요셉 성인께서 바로 그런 행복을 가지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깨끗이 닦여진 귀한 명품만 되려고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사실 명품은 피곤합니다. 어떤 분이 제게 명품 만년필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한 번 쓸 때마다 부담됩니다. 즐겨 쓰는 만년필은 아무렇게나 쓸 수 있는 보급형 만년필입니다. 만년필 쓰는 기쁨 역시 명품 만년필이 아닌, 막 쓰는 보급형 만년필에서 생겼습니다.
많이 사용되는 ‘나’, 비록 걸레처럼 지저분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사랑을 베풀며 기쁘게 사는 ‘나’가 되어야 합니다. 요셉 성인의 모범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오늘의 명언: 삶의 작은 일을 즐겨라. 어느날 돌아보면 큰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5)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 1,24)
아브라함도
성 요셉도
세상의 모든 의로운 이들은
하느님의 명령에
순명하였네.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불의한 상황이 닥쳐오더라도
그들은
모든 일을
뼛속 깊이 간직하며
믿음을 증거하는
소중한 기회로 만들었다네.
6)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자신이든 타인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수하고 해맑게 있는 그대로 기뻐하고
아파서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나오면
있는 그대로 눈물을 흘릴 줄 알고
항상 긍정적으로 누구에게나
있는 그대로 감사할 줄 아는 삶이
행복한 삶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말씀을 잉태한 삶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있는 그대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성령을 품은 삶입니다.
말씀을 잉태한 사랑의 특징은
사랑하는 대상에게 흘러 들어가 사라지고
생명을 나눠주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마음속 깊은 곳에
하느님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 신성이 나타나려면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담으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분의 사랑에 다시 취해
새로운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복음 말씀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6.18-21.24ㄱ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