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23, 8, 26, 토요일, 흐린듯 함, 남양주, 송촌리,
수종사에서 "한음 이덕형 선생 별서 터" 를 찾아 내려오다 만난.. 반가운 이정표입니다 ~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 선생\은 부친을 봉양하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
"산수"<山水>가 빼어난 이곳에 별서<別墅>인 "대아당"<大雅堂>을 지었는데.. 선조 33 <1605>년 45 세때의 일이고 ~
현재는 공<公>이 말을 타고 내릴때 쓰던 "하마석"<下馬石>만이 그대로 남아 있다네요..?
이 무렵 공이 손수 심은 은행나무 두그루는 "공" 의 고귀한 "얼" 이 서린듯 지금껏 꿋꿋이 서있답니다 !!
이곳은 1611 년 선생을 찾아온 무인이자 시인인 "노계 박인로" <盧溪 朴仁路>가 ~
"공 의 심경을 그대로 읊은 "사제곡"<莎堤曲>의 탄생지 이기도 하다네요 ~
"한음 이덕형선생" <1561 ~ 1613>은 조선 역사 최연소인 31 세에 "대제학"<大提學> ~
42 세에 영의정에 오른후.. 45 세 되던 1605 년 부친을 모시고 "용진"<龍津> "사제촌" 의 ~
소박하고 한적한 "별서"<別墅>로 왔으며 집의 이름을 "대아당"<大雅堂>이라 불렀고 <지금 이곳은 박서재> ~
"읍수정"<挹秀亭>과 "이로정"<怡老亭>이라는 두개의 정자를 지었답니다 ~
"읍수"<揖水>는 "주위의 빼어난 경치를 이곳에 가져온다" 라는 의미이고..?
"이로"<怡老>는 "벼슬에서 물러나 만년<滿年>을 즐긴다" 는 뜻에서 라고 합니다 ~
"서실" <書室> 이름을 "애일"<愛日>이라 한것은 "하루하루의 시간을 소중히 아끼고 어버이에게 효도한다" 란 뜻이구요 ~
용진강 건너 십리쯤 되는곳에 모친의 묘소가 있어 성묘하기 쉽도록 경치 좋은 운길산 아래 터를 잡았고 ~
선생은 중국에 가서도 이곳 "용진" 이 그리워 "아득한 천리에서 용진의 달을 한해에 두곳에서 나누어 보겠네" 라고 읊었답니다 ~
"명재상이 심은 은행나무 이야기" 는 "오성과 한음" 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 이 관직에서 물러나 ~
초야<草野> 에 묻혀 살때 일인데.. 그는 사택 앞에 "노둣돌" 을 놓고 은행나무 두그루를 심었다 ~
한 그루는 "한음' <漢陰> 또 한그루는 "오성" <鰲城>이라 여기며 다시 만나길 간절히 기원 했다네요 ~
이 나무는 8,15 광복과 6,25 동란때 웅 ~ 웅 하며 울었다고 전해지는데 ~
현재 사택은 온데간데 없으나 노둣돌과 이 나무만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