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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 진리회 포천 도장 참예 및 탐방
2019년 10월 1일,대순 진리회 군포방면 도인 일행들과, 경기도 포천에 위치한 대순진리회 포천 도장 참예및 탐방의 길에 올랐다.
아침 8시까지 군포도장이 있는 명학까지 와달라는 전갈을 받고, 필자는 새벽 5시부터 서둘러 군포도장에 도착하였으며, 그곳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일행들과 더불어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다.
출발 시간은 정확히 9시,1시간후에 토평 요금소를 경유하여 목적지 포천도장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30분경이었고....
필자는 대순진리회 신도가 아닌 입장이기에, 참예를 하려는게 목적이 아니었고,가급적 대순진리회의 실상과 포천 도장의 이모저모를 보다 정확히 파악해 보려는데 뜻을 두었다.
대순진리회는 전국적으로 여러 도장이 있는데,경기도 여주에 있는 여주 본부도장을 위시하여,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서울 중곡동에 있는 중곡도장,포천 수도장,제주 수련도장등 모두 다섯군데의 도장이 있다.
필자는 중곡동 도장과 강원도 금강산도장은 답사를 한 바 있으며,포천도장과 함께 자리한 대진대학도 이미 다녀간 곳이기도 하다
이날 포천도장을 찾은 일행은 구천상제를 모셨다는 영대에 올라 참배를 하고, 도장 식당에서 제공하는 떡과 국수로 점심식사를 마친다음, 인근 동두천에 있는 동두천 재생병원 현장을 찾았다.
동두천 재생 병원은 20여년전 약 5만평의 부지에, 세계 최대 규모의 병원을 세운다는 야심찬 포부로 출발은 하였지만,대순 진리회의 창설자 박 한경 도전의 사망이후, 교단의 투쟁과 극단의 분렬 상황으로 공사를 중단하여 방치되어 왔단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던 까닭에, 짓다만 병원은 유령건물처럼 되어졌고,우범지대가 될수도 있다는 판단하에 동두천시에서 극단의 제안을 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병원 건립비는 5천억이나 되는 거금이 은행에 예치되어 있으면서도, 누구도 손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조속히 교단분렬을 수습하여 병원건립을 서둘러 진행하던가, 아니면 병원부지 포기와 철거비용까지 부담하라는 최후통첩 성격의 권고였다.
이런 통첩의 권고를 기회로,다행스럽게도 분렬되었던 교단이 서로 마음을 비우고, 하나로 뜻을 모을수 있는 자리가 형성되어, 공사가 머지않아 재개될 예정이라는 반가운 소식이다.
병원을 찾았던 우리 일행은 20층이 넘는 옥상까지 올라가 현장을 두루 답사하고, 오후 4시가 지나서야 귀가 길에 올랐다.
포천도장에 도착하여 참배를 하기위해 입장하는 장면
도장안에서는 어느곳이나 사진촬영을 금하고 있어, 일일히 사진에 담지 못하는 애로가 많았다.
특히 참배를 하는 영대안에서는 철저히 규제를 한다.
건물들은 대부분 2층 구조와 3층 건물들이지만, 실제 안에 들어서면 천정들이 엄청 높게 지은 건물이라 4~5층도 넘는 높이들이다.
뒷켠에 있는 산은 왕방산이란다.
왕방산은 포천시의 진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많은 전설과 유래가 전해지고 있는 명산이다.
신라 시대인 872년(헌강왕 3)에 도선(道詵) 국사가 정업을 닦을 때, 국왕이 친히 행차하여 격려하였다 하여 왕방산이라 불렀고, 그 곳에 있는 절을 왕방사라 했다 전해진다.
또한 조선 태조가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에 있다가, 환궁하는 도중 형제의 난을 접하고 슬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 산에 있는 사찰을 방문해 체류하였다 하여 왕방산이라 하고, 절 이름을 왕방사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반면 조선 태종이 어머니인 신의 왕후 한씨를 모시고, 재벽동에서 살 때 이곳에서 늘 무술을 연마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왕방산은 고려 말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속세를 떠나, 산중에 들어와 삼신암이란 암자를 짓고 은신했다 하여 국사봉이라고도 했는데, 왕이 항상 이색을 생각하며 이 산을 바라봤다 하여, 왕망산이라 부른 것이 왕방산으로 변했다고도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순 진리회는 강 증산(본명:강 일순)을 교조로 하는 증산교의 분파이며,조철제,박한경으로 이어지는 도맥의 한 지파 종단이다.
증산교는 한말 개항기에 나타난 동학·대종교와 함께 이 땅에 새로운 이상세계를 건설한다는 후천개벽을 주장한 대표적인 자생적 종교의 하나이다.
또한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문화, 특히 무속과 선도를 계승·발전시켜 한국 민중의 개인적인 신앙의식을 민간 중심의 공동체 신앙으로 승화시켰다.
증산교의 창시자 강 일순은, 갑오농민전쟁 때는 동학군을 따라다녔지만, 전쟁의 실패를 예언하고 직접 전쟁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전쟁이 끝난 다음 3년 동안 전국을 순회하며 사회의 실상과 민중의 생활을 살핀 후 민심을 수습함에 있어 갑오농민전쟁과 같은 인간의 인위적인 힘이나 지역을 기반으로 형성된 기성종교로서는 역부족임을 깨닫고, 1901년 전주 모악산에 들어가 도를 닦기 시작하여 그해 7월 5일 성도했다.
1902년부터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훈화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그는 자신이 고통 속에 있는 민중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땅·인간의 삼계대권을 가지고 이땅에 금산사 미륵불로 강림했다고 했다.
또 세상의 혼란을 괴질로 비유하고 자신이 세상의 모든 병을 대속했으나 오직 괴병만은 남겨두었다고 했는데, 예언과 병든 세상을 고치는 의통을 세상구원의 수단으로 삼았다.
당시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천지개벽을 통한 지상선경이 하루 빨리 도래되기를 바라고 있었으나 1909년 그가 죽자 그의 허망한 죽음을 보고 대부분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않고 해산해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2년 뒤 강일순의 아내였던 고부인이 갑자기 졸도한 후에 강일순과 비슷한 언행을 하게 되었다.
이에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은 강일순의 영이 고부인에게 강림했다 하여 다시 모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최초의 교단인 선도교가 나오게 되었고, 이 교단의 교세가 확장되자 강일순의 추종자였고 고부인의 이종사촌 동생인 차경석이 고부인과 신자들의 접촉을 차단하고 교권을 장악하여 교명을 보천교라 하였다.
이러한 분열 가운데서도 당시에 급속한 성장을 한 것은 차경석의 보천교였다.
차경석은 교세가 늘자 1919년 전국적으로 60방주라는 교구를 두었으며, 수백만의 신도를 거느리게 되었다.
이에 차경석은 1921년 함양군 황석산에서 천자등극을 위한 천제를 올렸으며, 당시 많은 이들이 차경석을 차천자라고 불렀다.
그러자 조선총독부에서는 보천교 신자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해 교인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이같은 탄압이 계속되자 차경석은 친일행각을 시작했다.
이에 대해 교단 내에서 심한 반발을 받게 되었고 보천교 혁신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일부 간부들이 이탈하여 서울대법사·삼성교 등 새 교단을 만들었다.
한편 보천교에서 분파된 교단 이외에 강일순 추종자의 교단에서도 순천교·태극도 등 새로운 분파가 생겼다.
일제강점기에 증산교는 한때 100여 개에 달했으나 1938년 총독부의 유사종교 해체령이 내려진 이후 교단이 소멸되거나 대부분 지하로 잠적하고 말았다.
여기에 잠시 필히 참고할 내용은, 증산교 계통의 태극도를 창립한 조 철제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조 철제의 호는 정산(鼎山)이며, 경상남도 함안 출신으로 항일운동을 하던 아버지 용모(鏞模)를 따라 15세 때 만주 심양으로 가서 구국운동에 가담하다가 김혁(金赫)으로부터 증산(甑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대사(大事)에는 도력(道力)이 필요함을 절감, 입산수도하던 중 23세 때 강일순(姜一淳)의 『태극도리(太極道理)』를 읽고 개안영통하였다.
같은 해 귀국하여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1918년전라북도 태인면 태흥리에서 무극도(無極道)를 창도, 증산사상을 포교하여 많은 신도가 모여들었다.
그 뒤 3년 동안 120여 칸의 교당을 짓고 10만의 신도를 거느리는 대교단을 이루었는데.세상에서는 그를 조천자(趙天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한다.
또한, 진업단(進業團)이라는 신도단체를 만들어 충청남도 안면도와 원산도에서 간척지공사를 벌여, 안면도에는 20만 평의 농경지를, 원산도에는 대규모 염전을 만들기도 하였다.
1930년 평안북도 무산의 국유림을 채벌하기 위하여 400여 명의 신도를 보내었고, 1932년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의 사금광과 충청북도 음성군의 무극광산을 채굴하였다.
이와같이, 황무지와 간척지 개척, 수리사업 및 산업장려로 수많은 빈민을 구제하는 사업을 벌이며 포교활동을 전개하였으나, 1936년 일제에 의하여 교단이 해체되고 본부가 철거당하게 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종교활동을 다시 시작하여, 1948년에 본부를 부산 보수동에 정하고 태극도라는 이름으로 교명을 바꾸었다.
1955년에는 다시 본부를 부산 감천동으로 옮겨 3,000세대의 신도를 집단 이주시킴으로써 대규모 신앙촌을 형성하였다.
대순 진리회는 증산교 창시자 강 증산과, 태극도를 일으켰던 조 철제,대순진리회의 창설자 박 한경을 동시에 모시는 신앙단체디.
대순진리회 창시자 박 한경 도전의 호는 우당(牛堂), 충청북도 괴산 출생에서 출생하였으며, 부친 영선(永善)과 모친 안동 김씨(安東金氏)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종가의 백부(伯父) 유선(有善)에게로 출계(出系)하였다.
유년에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수안보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교사활동을 하던 27세(1943)에 강제 징집으로 일본에 건너가 청삼(靑森) 해군기지에서 근무 하던 중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다.
31세 되던 해인 1947년에 정산(鼎山)조철제(趙哲濟)가 세운 태극도(太極道)의 전신인 무극대도(無極大道)에 입도하였다.
입도 초부터 남달리 포교에 힘써 1954년에 충청북도 지방의 포감이 되었고, 1958년에 총도전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3월 6일 정산이 숨을 거두자 태극도의 종통을 계승하였다.
그 뒤 태극도 전반의 운영을 하며 종단의 근대화에 힘썼으나, 보수세력과의 마찰로 부산을 떠나 1968년 안양 수리사에서 49일간의 공부를 마치고, 1969년 6월에 서울의 성동구 중곡동에 종단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였다.
그는 무한한 대순의 진리가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여 인보상조(隣保相助:가까운 이웃끼리 서로 도움)의 미덕으로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인류 평화에 있음을 강조하고, 아울러 인존사상(人尊思想)이 곧 평화사상임을 밝혔다.
또한 1972년에 포덕·교화·수도사업·구호자선사업·사회복지사업·교육사업 등의 종단 기본사업의 취지를 설정하고 아울러 해원상생(解寃相生) 대도의 참뜻을 전하는 것이 포덕이며 포덕천하가 될 때 광제창생이 된다는 기치 아래 현 교세 200여 만호의 교단을 형성하는 기조를 구축하였다.
1976년에 대순장학회를 발족하였으며 1984년에 학교법인 대진학원을 설립하여 현 학교법인 대진대학교 산하의 2개 대학교와 6개 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의 기반을 닦았다.
1986년 경기도 여주에 5만여 평의 도장을 건립하여 1993년 2월에 본부 도장을 여주로 옮기고 종단의 운영을 재정비하였다.
또한 취지에 따라 1992년에 의료법인 대진의료재단을 설립하여 분당과 동두천 등지에 병원을 신축하여 병고에 시달리는 환자들의 구제사업을 실현하였다.
1989년의 제주도와 1992년의 경기도 포천에 이어 1995년에는 강원도 속초에 3만여 평의 수련도장을 신축하여 교세를 확장시켰다.
그리고 ‘처세함에 있어 온유함을 귀중히 하고 억셈과 강함은 화의 바탕이 되니, 말함에 있어 언제나 더듬거리기를 바라고 일함에 있어 의당히 어리석음과 같게 하라(處世柔爲貴 剛强是禍基 發言常慾訥 臨事當如癡)’는 가르침으로 실천수행 체계의 근간을 세웠다.
1996년에 별세하여 강원도 속초에 있는 수련도장에 묻히게 되었는데 그의 무덤은 현재 대순진리회의 가장 중요한 성지(聖地)로 여겨지고 있다. ㅡ백과사전 참조
기념 박물관을 위에서 내려다 보며 찍은 사진
조직의 운영은 <도헌(道憲)>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도전(都典, 박한경)을 정점으로 의결기관인 중앙종의회(中央宗議會)와 집행기관으로 종무원(宗務院)이 중심이 되어 그 아래 포정원(布正院)ㆍ감사원ㆍ육영사업부 등 몇 개의 집행부서가 있다.
또 종의회의 구성 멤버는 선감(宣監)ㆍ교감(敎監)ㆍ보정(補正) 등 각 부의 고위 교직자로 되어 있다.
이 교단은 ①구호ㆍ자선, ②사회복지, ③교육사업 등을 3개 기본사업으로 책정하여 활동하고 있다.
재단법인 '대순진리회'는 해원상생의 대순진리회를 종지로 하고, 인간개조, 정신개벽으로 포덕천하, 구제창생, 보국안민, 지상천국 건설을 위한 주요사업은 대순진리회의 포덕, 교화, 수도 사업 및 이에 부대한 중앙 본부를 비롯한 각 지방회관의 유지 관리, 국민을 위한 구호자선사업 전개, 국가를 위한 사회복지사업 전개, 교역자 양성기관 및 육영사업 유지 경영 등이다.
여주본부도장, 중곡도장, 포천수도장, 금강산토성수련도장, 제주수련도장등 5개의 도장이 있고 전국에 120여개의 회관과 200여개의 회실 및 2,000여개의 포덕소를 두고 있다.
여주본부도장은 가장 규모가 크며, 중곡도장은 박한경이 처음 지은 도장이다.
대진 성주회는 중원 대학교,대진 대학교,대진 고등학교,대진 여자고등학교,분당 대진 고등학교,일산 대진 고등학교, 특성화 고등학교인 대진 디자인 고등학교,대진 정보 통신고등학교등 여러 교육기관과 분당과 동두천의 재생병원이 있다.
이중 중원대학교는 성주방면의 대진교육재단에서, 나머지는 서울측의 학교법인 대진대학교에서 운영한다.
참고/한국 사전 연구사 96년 편집본
보이는 모든 건물들은 순전히 신도들 힘으로 이루었다 전하며, 그것도 100일만에 완공하였다하니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벽화는 심우도(尋牛圖)의 일부인데,이 벽화가 뜻하는 심오한 내용이 있다.
인솔 선감은 심우도를 놓고, 장시간 대순 진리회의 교리를 자상하게 해설해 주셨다.
참배를 마친후 기념으로....
벽화를 설명해주고 있는 장면
건물 곳곳에 이런 장수 들이 지키고 서있다.
불교의 사천왕에 해당된다 말할수 있으며,요즘 말로 호위무사나 경호원쯤에 해당된다 볼수 있다.
종단 취지와 연혁
잘 가꾼 분제와 곱게 꽃피운 다육이
박물관 구경을 하며.....
동두천 병원 현장 방문
짓다만 건물이긴 해도 21층까지는 엘리배이터가 작동하고 있었다.
건물안에는 너저분하 어질러져 있는 상황이었고,약간의 건축자재들이 있기도 하였다.
병원 옥상에 올라서도 열성껏 설명해 주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