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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이 무너질 것임
눅 21:1-9
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7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8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
9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
눅 21:1-9 / [과부의 헌금;막12:41-44] 예수께서 성전에 서서 부자들이 헌금궤에 돈 넣는 것을 지켜 보고 계셨다. 2) 그때 한 가난한 과부가 와서 렙돈 두 닢을 넣었다. 3)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이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넣었다. 4) 그들은 쓰고 남은 것 중에서 얼마를 넣었으나 이 여자는 가난한 중에서도 가진 것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다.' 5)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마24:1-2,막13:1-2] 제자 몇 사람이 성전 건물의 아름답게 조각된 돌과 기념할 만한 사건들이 새겨진 벽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6)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때가 오면 너희가 칭찬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다 무너지고 돌 하나도 제자리에 얹혀 있지 않을 것이다.' 7) [재난의 징조;마24:3-14,막13:3-13]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언제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어떤 징조가 나타나겠습니까?' 8)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아무에게도 속지 말라. 많은 사람이 와서 자기를 메시야라고 떠들어대며 `때가 왔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믿지 말라! 9) 또 전쟁과 난리가 시작되었다는 말을 듣더라도 당황하지 말라.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곧 마지막이 오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과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과 세상 종말에 대해 예언하시고, 메시야의 재림과 종말을 소망하는 성도의 올바른 자세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1-4) 어떤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에 대한 언급이 있었기 때문에 기록되어진 것으로 보입니다(20:45-46). 성전에 (과부가 들어갈 수 있는) 여인의 뜰에는 헌금을 넣는 열세 개의 그릇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스라엘 남성과 여성이 모두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가난한 과부가 드린 것은 두 렙돈 뿐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성전은 화려한 부를 과시했으며, 성전 관원들은 과부가 드린 헌금 정도는 생각 없이 썼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힘없는 과부는 헌금이 어떻게 쓰여 지는 줄도 몰랐을 것이고 선한 믿음으로 헌금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가장 많이 그리고 전부를 드린 사람이었습니다. 과부가 드린 이 동전은 화폐 단위로 가장 작은 동전이었고 헌금으로 받을 수 있는 최저 동전이었습니다. 이 과부가 드린 헌금은 다른 사람들의 헌금에 비해 적은 금액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과부를 주목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풍족한 중에서 드렸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중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이 가난한 과부의 행동은 하나님을 믿는 것만으로 족하게 여겼으며 가난함을 개의치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성전이 무너뜨려질 것을 이르시다(5-9) 어떤 사람이 성전의 화려함을 말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아름다운 흰 대리석으로 거대한 기초석 일부는 길이가 9m나 되는 인상적인 고대의 가장 멋진 구조물이었으며, 강하고 무적의 존재처럼 보였습니다. 이 위대한 성전이 헌물로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성전의 파괴를 허용하실 것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은 대략 40년 후에 이뤄졌습니다.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충격적인 예언에 제자들은 어느 때에 그리고 무슨 징조가 있을 때 이런 일이 있을지 물어보았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 세대의 끝이 가까워질수록 종교적인 미혹은 더욱 노골적으로 행해질 것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이 다가오는 세계적인 영적 미혹을 경계하기를 원하셨고 감람산에서 제자들에게 경고를 두 번 이상 반복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다양한 종말론적 사건들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 모두가 미혹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적 용 : 멸망 받을 것에 우리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영원한 것을 사모함으로 마지막 날을 예비해야 합니다.
우리의 상황에 따라 각기 구해야할 것이 다릅니다. 직장생활 하십니까? 주부십니까? 은퇴를 하셨습니까? 우리 각자는 모두가 상황이 다릅니다. 목사의 삶과 성도의 삶이 다릅니다. 무엇을 구하든지 건강한 모습으로 보아야 됩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다윗은 항상 지니고 다니던 물매 돌을 사용했습니다. 이 물맷돌로 골리앗의 미간을 정확하게 맞춘 것은 다윗이 연습을 잘 해서도 아니고 그만큼 평소에 실력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그 큰 거구가 미간에 돌을 맞아 죽는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돌이 미간에 맞고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은 이 사건이 기적의 사건이라는 것을 말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으로 살면 반드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 설 교 >
과부의 헌금
◈ 원문강해 ◈
희생적인 헌금에 드러난 과부의 경건
십자가 죽음을 사흘 정도 남겨 둔 시점에서, 주님은 헌금에 대한 교훈과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 그리고 주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에 대하여 예언하셨다. 특히 본 단원에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통한 희생의 본과, 유대인의 자랑인 예루살렘의 영광도 영원한 것이 못 된다는 예언이 나타나 있다.
1. 가난한 과부의 헌금(1-4절)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소재로 풍족한 자4들의 형식적인 희생과 믿음을 지적하신다. 특히, 이 이야기는 앞 장에서 다룬 바 있는(눅20:45-47) 서기관들의 위선적 경건을 비판하려는 의도도 있다.
1)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심
예루살렘 성전에는 나팔 모양을 한 모금함 13개가 있다. 성전을 찾는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명목의 모금함에 헌금을 넣을 수 있었다. '부자들이 하나님께 드린 헌금'이란 뜻으로 도라(dw'ra)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는 도론(dwvron 은사, 예물, 헌금, 선물) 목적격 복수로 사용된 것으로, 부자의 헌금이 얼마나 비싼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연히 가난한 과부의 헌금 행위를 보게 되었다. '예수께서…보시고'라는 말을 막12:41에서는 에데오레이(ejqewvrei)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은 의도를 가지고 지켜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본문에서 누가는 에이덴(ei\den)이라는 말을 쓰고 있어, 예수께서 우연히 과부의 헌금 행위를 접하고 알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I.H.Marshall).
서기관들의 자기 자랑과 허영심에 의하여 하나님께 헌금을 드린 것에 비하면, 항상 구제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 행위는 비록 우연히 보게 된 장면이긴 하지만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다.
2) 가난한 과부의 헌금
성서에서 '과부'(chvran 케란)는 가난한 사람으로, 흔히 구제의 대상으로 꼽히고 있다(penicra;n 페니크란)이라는 말로 꾸며지고 있다. 페니크란(penicra;n) 이란 말은 '굽실거리는, 거지 같이 보이는' 것을 의미하며, 광범한 의미에서의 가난함을 나타내는 말이다(R.Earle). 과부의 형편이 그만큼 초라하고 옹색하였다는 뜻이다. 이 가난한 과부가 헌금한 금액은 두 렙돈(lepta; duvo 렙타 뒤오)이다. 이 금액의 가치는 1페니의 1/16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래 '빈약한 것'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렙돈' 1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헌금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액수였다(L.Morris). 그러나 렙돈 1개는 허락하지를 않아 2개를 드렸다는 주장도 있다(Plummer).
3) 구차한 중에 드림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부자들의 한 몫하는 선물과 같은 헌금과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실상 예수께서는 이 과부의 헌금 행위를 통하여 드러나진 그녀의 경건성으로 눅 20:45-47에 나타나는 서기관들의 위선적이며 형식적인 경건을 공박하시려 하였다. 과부의 헌금은 부자의 헌금에 비하면 극히 작은 것이지만, 여건을 따져 볼 때, 두 렙돈은 상대적으로 큰 가치를 지닌다. 왜냐하면, 과부의 헌금은 생활비 전액이었기 때문이다. 생활비를 나타내는 비온(bivon)은 의식주 해결에 필요한 돈을 말한다(A .T . Robertson). 그 돈은 그녀가 전부터 계속 아껴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가난한 과부가 아끼던 생활비 전액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채워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 컸기 때문이다.
2.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예언(5,6절)
5, 6절은 예수님의 감람산 설교에 해당하는 부분이다(R.Earle). 이 설교 속에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주님의 재림 그리고 세상 종말이 다가 옴에 따르는 징조가 예언되어진다. 본 단원은 그 중에서도 예루살렘의 파멸에 대한 예언에 해당한다.
1) 성전을 자랑하는 사람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시작한 것으로, B.C.24년에 시작하였지만 A. D. 64년까지도 완성하지 못하였다. 그만큼 웅장하고 화려한 집으로 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기에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의 자랑이 되었다. 본문에서도 '어떤 사람들'(tinwn 티논)이 성전을 가리켜 대단하다는 듯 말하였다. 그런데 마24:1이나 막13:1에서 보듯 성전을 자랑삼아 말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성전을 가리켜'(peri; tou' iJerou' 페리 투 히에루)라는 말은 문자대로는 '성전에 대하여'라는 말이 마땅하다.
한편, 그들이 자랑하는 것 중에는 '미석'(livqoi" kaloi'" 리도이스 칼로이스)과 '헌물'(ajnaqhvmasin 아나데마신)로 꾸며진 장식들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성전의 어떤 주랑은 그 높이가 40피트나 되는 한 개의 대리석으로 꾸며졌다고 하며(Plummer), 사람만큼이나 큰 황금으로 된 포도나무 장식도 있었다고 전한다(Josephus). 이만큼 희생과 규모로 지어진 성전이라면 자랑거리가 될 만하다. 그러나 그 성전의 아름다움이나 규모는 하나님을 향한 희생의 정도를 판가름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영생을 얻는 조건이나 약속은 될 수 없다. 또한 아무리 아름다운 성전일지라도 '보이는 것'은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후4:18).
2) 날이 이르리라
'날'(hJmevrai 헤메라이)은 일상적인 '하루, 낮, 날'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복수로 쓰여지고 있어 '날들'이다. 그러므로 한 날이 아니라 예루살렘 파멸의 날은 여러 날이 될 것이다. '이르면'(ejleuvsontai 에류손타이)이라는 말은 '가다'(e[rcomai 에르코마이)라는 말의 직설법 미래 중간태로서 이제 도래하게 될 날을 의미한다.
이 파멸의 날은 심각한 파괴의 말이어서, 돌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는 철저한 파괴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막13:2마24:2). 유대인들은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성전의 끔찍한 최후를 이렇게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에 보이는 것으로서 영원한 것은 없다. 이러한 사실은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자랑거리로 여기던 성전 훼파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성전은 사라져 가지만, 예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지으리라'는 말씀을 하셨듯이(요2:19-21마26:61), 이제는 예수께서 성전을 대신하게 되는 날이 하나님의 구속적인 계획하에 임박하고 있는 것이다.
3) 다 무너뜨리우리다
'무너뜨리우리라'(kataluqhvsetai 카탈뤼데세타이)는 '파괴하다, 뒤집어 엎다'는 뜻을 가진 카탈뤼오(kataluvw)라는 동사가 직설법 미래 수동태 3인칭 단수로 쓰여진 것이다. 이 말에서도 나타나듯이 앞으로 되어질 일을 나타낸다. 그런데 수동태로 쓰여진 것으로 보아 유대인들이 원해서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원하지 않음에도 타의에 의하여 무너뜨림을 받게 될 것이란 사실이 암시되고 있다. 이는 주님의 예언대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과거 유대인의 믿음 생활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이제는 성도들 하나하나가 서로 연합하여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고전 3:16, 엡 2:21,22).
3. 마지막 날에 일어날 징조(7-9절)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날은 갑자기 임하는 것이 아니다. 파괴 전에 여러 징조가 일어난다.
1) 마지막 날의 징조를 물음
본 절과 평행 구절인 막13:3에서는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이 질문을 하고 있다. 질문의 요지는 '시기'와 '징조'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예수님의 답변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징조'에 대하여는 말씀하시나 '시기'에 대하여는 함구하신다는 사실이다.
본문에서 '저희가 물어'( jEphrwvthsan 에페로테산)는 '묻다, 요청하다, 심문하다'는 뜻이다. 이는 에피( jEpiv 위에)와 에로타오( jErwtavw 묻다, 요구하다)의 합성어이며 여기서는 단순과거 능동태로 평범한 질문으로 쓰여지고 있다. 주목해야 할 말은 세메이온(shmei'on 징조)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표적, 기적'이라는 말로서 예수님의 이적을 표현하는 데 많이 사용 되었던 말이다(마12:38막8:11). 그러고 보면 마지막 때에 나타나게 될 징조는 결코 우연한 사건들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혜 있고 믿음 안에 있는 자들로 미리 분별하도록 배려하시는 은혜의 행위 중 하나가 된다. 신실한 성도들이 염려할 것이 없음은 주께서 모든 것을 때가 되면 알리실 것이기 때문이다(살전5:4,5).
2) 거짓 그리스도들이 도래함
끝날에 벌어질 이러한 미혹의 가능성은 눅12:35-48과 17:20-37에서 언급된 바가 있다. 마지막 때가 되면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나타나 저마다 그리스도를 자칭하게 되고 사람들을 미혹하게 된다. '미혹'(planhqh'te 플라네데테) 은 가정법 단순과거 수동태로 쓰였는데, 이 말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플라나오(planavw)는 마24L4,5,11,24에도 쓰였으나 누가복음에서는 이곳에서만 쓰이고 있다. '혹성'(planet)이란 말은 이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A.T.Robertson). '내 이름으로'(ejpi; tw'/ ojnovmativ mou 에피 토 오노마티 무)는 명칭만이 아니라 미혹하기에 충분한 능력도 갖게 될 것을 말한다. '내가 그롸'( jEgwv eijmi 에고 에이미)는 에이미(eijmi 내가∼이다)가 1인칭 단수동사임에도 1인칭 단수 인칭대명사 에고( jEgwv 내가)가 언급된 강조형으로 쓰여졌으며, 거짓 그리스도가 자신의 정체를 그만큼 강조하게 될 것이란 의미이다. 주님 이외에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은 거짓인 경우가 많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징조가 나타나면 '때가 가까웠다'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고 하신다. 영웅은 시대가 만든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혼란한 때를 기하여 저마다 영웅이기를 자칭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혼란의 때에 미혹을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3)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들림
막 13:7은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라 표현하였다. 그런데 누가는 '난리와 소란의 소문'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누가는 '난리' 대신에 소란이란 말을 별도로 쓰고 있다. '소란'(ajkatastasiva" 아카타스타시아스)은 카타파우오(katapavuw 멈추게 하다, 쉬게 하다)라는 말로부터 나왔다. 여기에 부정어 아(aj 아니)가 붙어 인정되지 못하고 쉴 수 없는 입장을 표현하여 주고 있다. 또 '난리'(polevmou" 폴레무스)는 남성 복수로 기본형은 폴레모스(polevmou" 싸움, 전쟁)라는 말이다(마24:6약4:1고전14:8). 종말의 징조는 네 가지로 요약된다. ① 적그리스도의 출현, ② 난리와 난리의 소문, ③ 자연계를 통한 이변과 재해, ④ 성도들에 대한 박해의 가중이 그것이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본문은 내용상 앞 장의 내용과 연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눅20:41-21:4), 본문만 따로 떼어 놓고 볼 경우에는 과부의 헌금과 종말에 관한 설교들이 이중적 구조로 배치되어 있다(Grundmman). 물론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는 마가의 병행구(막12:41-44)로 상황 양식에 속하는 사회이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두 가지 종말론 가운데 후편인 본문 역시 마가복음 13장의 내용을 자신의 종말관에 따라서 수정, 가감했다(눅17:20-37).
1. 가난한 과부의 헌금(1-4절)
본문은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예화로, 또는 역사적 사건으로 분류될 수 있는데, 불트만(R.Bultmann)과 디벨리우스(M.Debelius)는 예수님이 발설한 비유나 우화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와 같이 불트만이 주장하는 근거는 누구도 헌금의 액수를 알기 어렵고, 또 이 이야기가 랍비 문학에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테일러(Taylor)와 마샬(Marshall)도 불트만의 견해에 동조하면서 이야기가 지닌 역사적 신빙성에는 그리 비중을 두지 않는다. 또, 마가의 병행구(막12:41-44)와 대조할 경우에 누가는 더 이상 '부자'가 많이 바쳤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누가의 시각에서는 헌금이 풍족한 상태에서인지, 아니면 구차한 상태에서 인지가 문제될 뿐이었다(E.Schweizer).
1절의 '연보궤'(gazofulavkion 가조필라키온)는 성전에 가져온 기부금이나 세금 등을 수집해 보관하는 저장소나 방 혹은 모금함을 가리킨다(1절). 요세푸스(Josepus)에 따르면 성전 안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어서 귀중품들을 보관했는데, 그 중 하나에 나팔 모양의 헌금함이 13개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이곳이 '여인의 뜰'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특히 마가는 동전을 바쳤다고 언급하지만, 누가는 '선물이나 예물'을 뜻하는 도라(dw'ra)를 사용함으로써 부자들보다는 값진 동전을 바쳤음을 암시한다(Marshall).
2절에서 누가는 '가난한'이라는 뜻의 '페니크로스'(penicrov")라는 형용사를 사용하는데, 구약에서는 이 단어가 마가가 사용하는 '프토코스'(ptwcov")와 서로 번갈아 사용되기도 했지만(시28:1529:7), 듯은 후자가 더 강하다(L.Johnson).
3절과 4절은 역설체로 구성되어 있다. '가난한 과부'가 전부를 넣고 '풍족한 중'에 낸 사람은 사실 전부를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C.Evans). 그렇다면 누가는 과부의 이야기에서 무슨 교훈을 제시하려 했을까? 여러 가지의 해석이 분분하다.
❶ 헌금의 진정한 가치는 양이 아니라 얼마나 남아 있는가 하는 것이다(Farrer, Marshall, Caird, Swete, Taylor).
❷ 헌금의 양이 아니라, 바치는 정신이 중요하다(Haenchen, Keck, Lagrange, Plummer, Miner).
❸ 진정한 헌금은 전부를 바치는 것이다(Nineham).
❹ 헌금과 구제금은 개인의 분수에 따라야 한다(Schmid).
❺ 이 이야기는 구제에 관한 예수님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Taylor, Fuller). 어쨌든지 본문은 이렇게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공격과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누가의 관심은 분명하다(W.Lampe).
2. 성전의 파괴 예언(5, 6절)
본문은 마가 자료(13:3-4)를 옮겨 쓰면서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이다. 마가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성전을 떠나서 이 예언을 하지만, 5절에서는 예수님이 여전히 성전 안에서 예언을 한다. 양식 비평의 시각에서 볼 경우 선언 이야기로 구성된 본문을 불트만(Bultmann)은 자서전적 아포프테그마라고 부른다. 본문이 실제 예루살렘 성전의 운명을 너무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는 탓에 여러 학자들은 이 예언의 말씀을 '사후 예언'(vaticinia ex eventu)으로 간주한다.
5절에서 누가는 '어떤 사람들이'라고 했으나 마 24:1 막13:1에는 '제자들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본절에서는 특이하게 예루살렘 도시가 아닌 성전만을 문제 삼는다(Conzelmann). 성전은 헤롯 대왕이 세 번째로 재건한 성전으로서 A.D. 63년경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특히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성전의 화려함 때문에 방문객들이 경탄할 정도였다고 한다.
6절은 예언 부분으로서 학자들에 따라서 그 자료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경우가 많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은 마가가 창작한 자료를 누가가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간주한다(Pesch, Lambrecht, Hartman). 어쨌든지 이 서론에 따르면 성전은 더 이상 제 기능을 상실했고, 그것이 파괴라는 형태로 입증된다. 이 말씀은 지상의 가식적 메시야 왕국의 곧 도태되고 예루살렘이 그 왕국의 중심이 될 것이라 예상했던 자들에게 기이하게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왕국은 먼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간의 죄가 해결되고 의롭게 된 상태에서 임한다.
3. 종말 이전의 징조들(7-9절)
누가는 마가의 자료를 인용하면서 몇 가지 수정을 가한다. 먼저, '때가 가까웠다'(8절)와 '먼저'(9절)를 첨가하고, '아직 아니다'(막13:7)는 '곧 오는 것은 아니다'(9절)로 변경시키고, '이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막 13:8)는 말은 생략했다. 물론 양식 비평적 시각에서 보면 본문은 묵시적 언어를 빈 예언의 수집이다. 이것을 놓고서 불트만(Bultmann)은 '기독교적 편집에 따른 유대적 묵시'의 출발로 간주하기도 한다. 어쨌든지 청중들은 '이런 것들'(pau'ta 타우타), 즉 '성전의 파괴' 순간이 언제인지 질문한다(7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언에 대해 어떤 의문없이 시기만을 묻는다. 아마 그들은 새로운 왕국에 합당한 성전을 만들도록 하기 위하여 파괴되어지도록 한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A. Plummer).
이로써 촉발된 종말의 징조 강화에서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가까운 장래에 성전의 파괴가 있을 것이라고 사칭하는 이들에게 미혹당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8절). 이어서 9절에서는 묵시문학에서 종말을 상징하는 '난리와 소란'이 거짓 예언자들과 맞물려 등장한다. 누가가 예루살렘 전쟁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이지만(Evans), 계시록만큼 종말의 순간이 이를 것으로는 기대하지 않는다(Schweizer).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본문의 말씀은 전 장들의 내용과 시간적, 주제상의 관련성이 있다. 우선 시간적으로 예수께서는 일곱 가지 화에 대한(마 23장)그의 다섯 번째 설교를 마치신 후(눅 20:45-47), 잠시 쉬고 계셨던 것 같다. 그때에 그는 아마도 성전의 헌금궤에 사람들이 헌물을 바치고 있는 것을 보고 계셨을 것이다(1, 2절). 한편 앞 장과의 주제상 관련성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바로 앞 장에서(눅 20:45-47) 서기관들의 위선에 대해 경고하셨고, 21장에서는 과부의 진실한 믿음에 대해 말씀하심으로 둘을 대조시키셨다. 게다가 서기관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이었는데(눅 20:47), 본문은 그 과부들을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W.Hendriksen).
1. 가난한 과부의 헌금(1-4절)
1절의 배경을 이루는 장면은 헌금이 드려지던 여인들의 뜰(요8:20)이다. '연보궤'는 성전내에 헌금을 관리하던 하나의 방(I.H.Marshall), 혹은 봉헌함으로 알려져 있다(W. L. Liefeld). 일반적으로 연보궤는 13개의 궤로 이루어져 있고 나팔 모양으로 생겼으며, 그 중에 어떤 궤에는 그 용도를 새겨 놓은 것도 있었다(Spence). 예수께서는 이곳에서 당시의 관습대로 헌금이 봉헌된 액수를 발표하는 소리를 듣고 계셨을 것이다(Marshall). 부자들은 많은 헌금을 했지만(막 12:41), 2절에서 예수께서는 한 가난한 과부에게 제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키신다. 여기에서 '가난한'(penicra;n 페니크란)이라는 말은 신약 중에 본문에만 등장하는 단어로 누가는 이 말을 통해 그녀가 매우 가난한 자였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예수 당시 1세기의 유대에 있어서 과부라는 존재는 소득이 없는 가난한 백성들 가운데서도 극빈자에 해당하는 계층이었다. 그러므로 그녀가 봉헌할 수 있었던 것은 작은 동전 두 개뿐이었다. 원문에는 두 렙타로 기록되어 있는 이 화폐 단위는 현재 영국 화폐의 1/10페니, 미국 화폐의 1/8센트에 해당되는 아주 적은 돈이었다(Morris). 일부 주석가들은 당시 성전에 예배하는 자들은 최소한 두렙돈 이상의 헌금을 드렸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여인의 헌금은 최소한의 것이었으나 동시에 그녀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이기도 했다(Plummer).
3절에서 예수께서는 그녀의 헌금을 귀히 보셨다. '모든 사람보다 많이…'의 의미는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가 아니라 '그들 모두를 합한 것보다 많이'라는 의미이다(Morris). 제자들은 예수의 이러한 말씀에 적잖이 놀랐겠지만, 4절에서 예수께서는 이에 대한 설명을 계속하고 있다. 그녀가 드린 것은 부자들의 헌금에 비해 너무나 초라한 것이었으나, 헌금이 드려진 후에 그들에게 각기 남는 것은 너무나 차이가 났다. 부자들은 헌물을 드리고 성전을 떠날 때에도 여전히 부자였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과부는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드렸던 것이다(Dean).
2. 마지막 때(5-9절)
복음서 가운데 눅 21:5-36과 이의 평행구인 막 13장, 마 24장만큼 어려운 본문은 없을 것이다. 이 문제의 한 부분은 본문에 사용된 언어가 다분히 묵시적이라는 데 있다. 이처럼 상징적인 언어는 성경에서 주로 에스겔, 다니엘, 계시록 등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가장 주된 난제는 본문에 서로 다른 두 사건이 얽혀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비록 예루살렘의 멸망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누가는 이것을 장차 그의 재림에 있을 징조로 이해하기도 한다. 두 사건은 본문의 조직 안팎으로 짜여 있다. 그 결과 각 구절이 각각 어떤 사건을 나타내는지 항상 구별하기가 어려운 것이다(Dean). 이것은 특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두드러진다. 누가는 이 두 사건(예루살렘 멸망과 예수 재림)을 비교적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마태나 마가가 모호하게 기록한 부분은 누가의 기사에 따라 해석해야 할 것이다(Geldenhuys).
5절의 내용은 예수께서 그 과부에 대한 말씀을 마치시고 성전을 나가시면서(마 24:1 막 13:1), 제자들과 나누신 대화의 내용이다(Hendriksen).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은 그 규모나 장대함이 세계적인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B.C. 587년 바벨론에 의해 파괴된 솔로몬 성전은 B.C. 515년 스룹바벨에 의해 재건되었고, 헤롯 대왕은 B.C. 20-19년에 제3성전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구조물에 대한 작업은 예수 당시에도 계속되고 있었다(Dean). '미석'은 건물을 세울 때 사용된 돌로서 요세푸스(Josephus)는 이 돌 가운데 45규빗이나 되는 것도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5절에서 '헌물들'은 주로 성전을 장식하기 위해 바쳐진 것들로, 그것 가운데는 헤롯이 바친 거대한 금포도송이도 있었다(Morris). 성전에는 이러한 헌물들이 가득했기 때문에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이 성전을 '거대한 재산을 가진 성전'이라고 불렀다(Spence).
7절에서 예수께서는 예레미야가 솔로몬 성전의 파괴를 예언했듯이(렘7장), 헤롯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셨다. 예레미야나 예수 당시의 사람들 대다수는 하나님이 결코 그의 성전을 무너뜨린다거나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열광적인 최후의 방어자들은 성전 안으로 피신했다. 그때조차도 그들 중에 일부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예수께서 예언하신 대로 그 성전을 무너뜨리고 말았다(Dean).
제자들의 질문은 이처럼 성전이 무너질 때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는 데에 집중되었다. 예수께서는 우선 기다림과 섬김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시려고 했으나(눅 12:35-40, 19:11-27), 그의 추종자들은 예수께서 즉시 그와 같은 왕국을 세워주시기를 기대했다(눅 19:11,Dean).
8절에서 예수께서는 종말의 충격적인 사건을 궁금해하거나 그때가 가까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다(Dean). '미혹받다'는 초기 기독교 사회에서 주로 이단이나 거짓 선지자들의 활동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곤 했다(요이 7; 계 2:20). 오리겐(Origen)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도 이와 같은 이단적 주장들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Contra Celsum). 9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러한 일들이 분명히 드러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결국 난리와 소란이 역사적 종말을 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Liefeld).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심판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
1. 순전히 형이상학적인 심판
슐라이에르마허와 다른 독일 학자들에 따르면 마지막 심판에 관한 성령의 묘사는 세상과 교회의 최종적 분리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심판을 정식적·공시적·최종적 선언(formal, public, armd finalded aration)이라고 설명하는 성령의 언급들을 정당하게 다루지 못한다.
2. 순전히 내재적인 심판
많은 자유주의 학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은 순전히 내재적이어서 세계의 도덕적 질서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 성령의 표현을 올바르게 다루지 못하는 것이다. 심판을 '자율 행동'으로 간주하는 것은 하나님을 게으른 하나님, 즉 보상과 형벌의 문제를 그저 바라보고 시인하기만 하시는 분으로 만드는 개념으로 미래의 어떤 일정한 시점에 있게 될 외적이고 가시적인 사건으로서의 심판 개념을 완전히 허물어 버린다.
3. 단일한 사건이 아닌 심판
전천년주의자들은 세 가지의 상이한 미래의 심판을 말한다. 그들에 따르면 하나는 주님의 강림사에 부활하여 살아있는 성도들이 받는 심판이고 다른 하나는 대환난 직후에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때에 있을 심판을 말하고 마지막으로 계20:11-15에 묘사된 크고 흰 보좌 앞에서 받는 악한 죽은 자들의 심판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심판의 날들이 아니라 심판의 날(요5:28,29행17:31벧후3:7), 또는 '그 날'(마7:22딤후4:8), 그리고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롬2:5)을 가리킨다.
4. 불필요한 최후의 심판
어떤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이 전혀 불필요하다고 간주하는데, 이는 죽을 때 이미 각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래적 심판의 확실성은 그것이 필요한가 아닌가 하는 우리의 개념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며 성경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사건의 결말이 있다고 하신다.
성전(신전)에 바친 제물의 종류(21:1-9)
◈ 세계배경 문화사 ◈
인간은 신도 자신들 비슷한 생활을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각 종교에서 그들이 신봉하고 있는 신의 성질에 따라 일정한 제물을 드렸다. 특히 농경 사회에서는 동물과 더불어 곡물을 주로 신에게 바쳤고, 지역에 따라서는 인간까지 신에게 바치는 풍습을 지니고 있었다.
서양 / 그리스 :그리스의 종교 생활 중 중요한 신앙적 행동은 봉헌 제물과 정화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제물 없이 신에게 자신의 소원을 기원하는 것은 적합하지 못하며, 선물이 없는 소원은 신도 들어주지 않는다고 믿었다. 따라서 각 신전에는 신에게 바쳐진 선물을 보관하기 위해 저장실이 따로 있었다. 이들은 주로 신에게 가축과 곡물을 선물로 드려 다산과 풍년을 기원했다. 특별히 질병이 있을 경우에는 정화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간단한 제물은 '현주'(^; 신들을 위한 음식으로 또는 신들에 대한 정의로서 포도주 한 잔을 땅이나 불 속으로 붓는다)이다. 그리고 과일, 기름, 곡식들과 제사의 형식에 따라 양의 차이가 있지만 동물을 바쳤다. 규모가 큰 축제 때에는 약100마리정도의 동물을 희생 제물로 드렸다. 숭배의 대상에 따라 제물의 종류가 달랐는데, 올림푸스 신에게는 흰색의 동물을, 지하의 신에게는 검은색의 동물을 완전히 태워서 땅에 묻었다. 이 외에도 제단에 화환을 놓았으며, 성스러운 찬가와 기도를 대신 드리곤 했다.
로마 :로마인들은 신에게 주로 동물과 곡물로 제물을 드렸다. 가장 보편적인 제물로는 소, 암퇘지, 수탉 등이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제물을 신에게 바치고 제사장은 다음과 같이 헌물을 드린 자를 위해서 기도했다. "당신들의 고기 제물은 아주 완벽했고 분명 당신들에게 행운을 보장해 줄 것입니다. 당신들보다 더 신의 눈에 은총을 입은 자는 없었습니다. 이 훌륭한 제물을 바친 이들과 이들의 남편들과 자녀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또한 로마인들에게는 피흘리는 제사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신에게 바치는 것으로 제물로, 바쳐진 동물의 일부분만 태우고 나머지 부분은 신전 관리나 제사장이 가지는 방법이다. 또 다른 하나는 크토닉(chthonic; 영웅이나 죽은 자들) 권세에게 바쳐지는 희생 제물로 그 전부를 태워 이들에게 바쳤다. 그리고 로마 각 가정에는 벽감이란 가정 신전을 모셔놓고 매 식사 때마다 소량의 음식으로 제물을 올렸다. 이들은 이런 제물을 신에게 바치고 신으로부터 일정한 대가를 원했다. 즉 "당신께 드리오니 당신도 내게 주옵소서"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소크라테스도 "제사는 신에게 선물을 드리는 것이고, 기도는 그들에게 부탁하는 것이다."라고 했으며, 유티프로는 "거룩함이란 신과 인간 사이의 물물교환이 된 것"이라 하여 로마인들의 제물관을 엿볼 수 있다.
동양 / 한국 : 한국 사회는 전통적으로 샤머니즘이 사회 전반에 걸쳐 자리잡고 있다. 샤머니즘은 대부분 굿이라는 형태로 신에게 기원을 했다. 이때 신에게 발치는 제물을 차리게 되는데, 여기에 빠지지 않는 것이 돼지이다. 특히 기우제·가신제·지신제 등에는 지금도 돼지 머리가 제상에 올라온다.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편에 보면 유리왕 19년(1 B.C.)에 8월에성문밖에 있던 돼지가 달아나자 왕은 탁리, 사비 두 사람을 시켜 잡았으나 이들은 돼지의 다리를 칼로 끊었다. 왕은 노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낼 희생물을 어찌 상하게 할 수 있으랴"라고 말했다고 하는 데서 한국 사회는 예로부터 돼지를 제물로 신에게 바쳤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후한서」의 '동이전'에 "시월에 제천 의식을 갖는데, 밤에 남녀가 모여 가무를 즐겼고 귀신, 사직, 영성을 제사하기를 즐겼으니 이를 동맹이라 했다"라 하였다. 이때 고구려인들은 추수한 곡물과 고기를 신에게 제물로 바치고 함께 어울려 춤과 노래를 즐겼다.
중국 : 중국은 전통적인 유교 사회에서 주로 신에게 바쳐지는 것은 곡물을 이용해 만든 음식이었다. 그러나 국가적인 큰 제사 때에는 주로 소와 양을 제물로 드렸다. 그리고 제물로 사용될 동물을 특별히 사육되었다. 한편 귀족들은 소와 양을 제물로 이용하기도 했지만 일반 시민은 주로 돼지와 개를 제물로 드렸다.
아메리카 / 아즈텍족 : 아즈텍족은 인신 제물을 바친 민족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아즈텍 민족 외에도 아프리카, 태평양 연안의 섬들, 인도 등지에서도 보이고 있다. 아즈텍인들은 옥수수의 여신인 치코메-코아틀을 믿었다. 이들은 옥수수를 심을 때 처녀를 희생 제물로 여신에 바치는데, 여인의 목을 베고 그 피를 옥수수 밭에 뿌려 풍년을 기원했다. 그리고 수확이 끝나면 다시 처녀의 목을 벤 후 가죽을 벗긴 다음 이를 신에게 바쳤다.
인디언 :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은 자신들의 소지품과 아울러 인간까지도 태양, 바람, 별과 같은 자연신에게 희생제물로 바쳤다. 특히 농경을 주로 하는 인디언들은 피의 제물을 바쳤다. 즉 처녀를 희생 제물로 바치고 그녀의 몸을 조각내어 들판에 뿌렸다. 이로 인디언들은 풍년을 기원했던 것이다. 이 외에 전쟁에 나가기 전에 또한 피의 제물을 바친 후 그 피를 자신의 몸에 발랐는데, 이렇게 하면 전쟁터에서 자신의 생명을 보호받을 수 있다는 신앙 때문이다.
성경적 접근 : 인간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죄 사함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함(요일 2:2)이요, 온전케 되기 위해(히 10:14) 드리는 것이다. 드려지는 제물은 정결하고(창 8:20) 흠이 없는(출 12:5) 것으로 선별해서 드려야 한다. 제물의 종류를 보면 숫양(민 6:17), 소(민 7:17), 향기로운 것(빌 4:18)을 들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은 인간들을 위해 예수님을 희생 제물로 삼으셨다. 이처럼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리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불신에 지배되는 종교(21:1-9)
예루살렘 성전에서 헌금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계시던 예수께서 과부의 적은 헌금을 높이 평가하신 이 이야기 속에는 종교에 있어서의 헌금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깊은 교훈이 담겨 있다.
1. 종교와 헌금
종교는 정신적, 영적 기관이면서도 물질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헌금'을 필수 요소로 하고 있다. 예수는 이 '헌금'을 하늘에 그 마음을 바치는 것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적이 있다(마 6:19-21). 즉 모든 신자는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하여 물질로 표현하는 것이 '헌금'임을 뜻한다. 그러나 종교가 부패하면 헌금이 자기 명예와 세력 확보의 수단으로 드려지기도 한다. 이렇게 하여 사단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헌금하는 사람의 마음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2. 종교와 부자
부자는 종교 안에서도 우대를 받는다. 그리고 그들의 헌금은 교회당을 크게 돌집으로 짓고 장식하는 데 쓰여진다. 이러한 비종교적 현상은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을 평가하신 예수의 정신과는 정반대이다. 오늘날 '과부의 두 렙돈'은 교회 안에서 철저히 무시된다. 가난한 자들이 더욱 서러움을 느끼는 곳이 오늘날의 교회가 아닐까?
3. 물신에게 지배되는 종교
종교는 모름지기 진리에 의하여 지배되어야 한다. 그러나 물질만능 풍조가 지배적인 세속가치 개념이 종교 안에 깊이 침투되어 물신에 의해 지배되는 종교로 전락해 버렸다. 부유한 부흥사, 목회자, 신학자는 많아도 '성자'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 그것을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주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은 재물에 미혹되어 그 수하로 전락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교회와 물질적 가치(21:1-9)
과부의 연보와 성전의 찬란한 건축미에 대한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종교와 물질적 가치의 상관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1. 부자와 과부의 연보
예루살렘 성전의 여자의 뜰 안 행각 기둥들 앞에 모두 13개의 연보궤가 놓여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 중의 한 연보궤에 연보하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부자들은 많은 금액의 헌금을 했으나 가난한 한 과부는 두 렙돈의 지극히 적은 헌금을 했다. 그것은 헌금의 단위로는 최소의 것이었다. 한 렙돈은 노동자의 하루 임금인 한데나리온의 128분의 1에 해당했으므로 그 액수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알 수 있다.
2. 두 렙돈 연보의 의미
그러나 예수는 이 과부의 헌금은 제일 많이 낸 헌금이라고 평가하셨다. 재물은 그 소유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밀도를 달리하는 신비성을 갖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보신 것이다. 과부의 두 렙돈은 부자의 만 데나리온보다 더 큰 밀도를 갖고 사막에서의 한 컵의 물은 대하에서의 만 톤의 물보다 더 큰 의미를 갖는다.
3. 종교와 물질적 가치
과부의 소액의 헌금을 높이 평가하시는 예수에게 제자들은 성전을 장식하고 있는 미석과 고귀한 헌물의 가치를 대비해서 이야기했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의 임박한 파멸을 예고함으로써 종교에 있어서의 물질 관계의 요체가 무엇인가를 암시하셨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물질적 성전 건물을 장식하는 데 쓰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와 사회 공동체를 위하여 '섬김의 기회'와 '자원'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헌금은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선교와 규제 등으로 쓰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