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07
5월31일[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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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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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Q-4Ur_a0gPg (김익호 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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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겸손했던 마리아, 그러나 당당하고 야무졌던 나자렛의 마리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에 아기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탄생 관련 축일을 열거해보면 당시 성모님의 상황과 동선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5월 31일)-세례자 요한 탄생 축일(6월 24일)-아기 예수님 성탄 대축일(12월 25일)
3월 말경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는 두 달 남짓 나자렛에서 지냈습니다. 그 시기의 생활이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한 하느님 구원 계획의 메시지를 굳게 믿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를 잉태함으로 인해 확연히 드러나는 신체적 변화에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
그러지 말아야지 마음을 다잡았지만, 당시 마리아의 나이는 고작 13~14세였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제안, 그리고 급격한 상황의 전개에 막막하기도 하고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때 마리아의 머릿속에 가브리엘 천사의 조언이 떠올랐습니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6-37)
마리아는 결심을 세웠고, 즉각적으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래, 여기서 이렇게 마음 고생하고 있느니, 사촌 엘리사벳의 집으로 가자. 늙은 나이에 아이을 가져 고생하고 있는 사촌 엘리사벳에게 인사도 드리고 도울 일이 있으면 도와드려야겠다.’
마리아는 길을 떠났습니다. 나자렛에서 엘리사벳이 살고 있던 아인카림까지 거리는 결코 만만치 않은 거리였습니다. 직선 거리는 약 120킬로미터 정도였지만, 걷기 쉬운 요르단 강 옆 계곡 길을 따라 꾸불꾸불 걸어가면 160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였습니다.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거리입니다.
마리아는 그 먼길을 서둘러 걸어갔습니다. 그 어린 소녀가 이런저런 걱정거리들을 잔뜩 안고 그 먼 아인카림까지 걸어가는 모습, 생각만 해도 짠하고 안쓰럽습니다.
구세주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으시며 양육하신 나자렛 마리아의 생애, 참으로 영예롭고 놀라운 생애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길고도 긴 여정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결코 녹록지 않은 현실이 마리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참으로 당당했습니다. 야무졌습니다. 수시로 다가오는 두려움과 다양한 도전들 앞에서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고통스럽고 위험한 현실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언약만을 기억하며 자신에게 펼쳐진 여정을 꿋꿋이 걸어갔습니다. 여기에 성모님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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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저희의 목소리를 들어주십시오. 저희와 함께 걸어주십시오. 바로 그것뿐입니다>
살레시오회 세계 총회 때의 일입니다. 청소년 사목을 주로 하는 저희 살레시오회이기에, 당사자인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10명의 청소년들을 초대했습니다. 청소년들은 전 세계 각국에서 온 대의원 살레시오 회원들과 함께 모임에 참석하고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청소년들이 떠나는 날, 자신들이 쓴 편지를 총회 석상에서 공개했습니다. 대표 청소년이 낭독한 편지글을 들으면서,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살레시안들은 집단적 성찰과 회개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살레시오 회원 여러분, 솔직히 저희는 지금 두렵고 혼란스럽습니다. 저희들의 삶은 하루 하루 힘겨운 투쟁의 연속입니다. 저희에게는 살레시오 회원 여러분의 사랑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저희는 여러분의 손을 잡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길을 걸어가고 싶습니다.”
“존경하는 살레시오 회원 여러분, 저희에게 다가오는 것을 제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여러분에게 바라는 것은 그 누구도 풀지 못할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풀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저희와 함께 있어 달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외로워 울고 있는 저희 옆에 그저 현존만 해주셔도 충분합니다.”
“친애하는 살레시오 회원 여러분, 저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편안하고 쾌적한 사무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저희가 지금 서 있는 이 거리, 이 운동장으로 나와주십시오. 저희의 목소리를 들어주십시오. 저희와 함께 걸어주십시오. 바로 그것뿐입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을 맞아 청소년이었던 마리아를 따뜻하게 환영하고 위로했으며, 격려하고 동반했던 엘리사벳의 지혜로운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자렛에서 아인카림으로 며칠이나 걸리는 여행길이었는데, 서둘러 걸어온 나자렛의 마리아를
엘리사벳은 극진히 환영하고 환대합니다. 혼전 잉태로 인해 혼란과 당혹 속에 힘겨웠던 마리아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집에 들어서는 것을 발견한 엘리사벳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삿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복음 1장 42~45절)
아인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어색하고 당혹스런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사가가 묘사하고 있는 만남의 장면은 무척이나 흥겹고 기쁨에 찬 분위기입니다. 마리아를 맞이하는 엘리사벳은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마리아를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환대를 받고 있는 마리아 역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인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이 기쁨과 환희, 축복과 감사로 가득 차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우리네 인생도 정말이지 어처구니 없는 상황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만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입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주님의 현존 안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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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AzfD9o1H6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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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법>
오늘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방문하십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께서 인사하실 때 성령으로 가득 찹니다. 성모님의 인사말과 함께 성령께서 엘리사벳에게 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모님은 엘리사벳에게 성령님을 주시러 가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은 성령님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모님은 성령님을 주실 수 있으셨을까요? 우리 안에도 예수님께서 계시고 성모님 안에도 예수님께서 계셨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도로시 데이(Dorothy Day)는 1897년 11월 8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습니다. 데이는 명목 상 종교적인 성공회 가정에서 자랐지만 어린 시절에는 무신론자였습니다. 데이는 저널리스트로 일하기 위해 뉴욕으로 이사했고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항의하고 노동 분쟁에 대해 보도했으며 그녀는 국가의 위험인물로 간주되어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그녀의 삶은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보헤미안적 생애였습니다. 전통을 벗어나 관습적인 사회적 기대에 대한 무시, 사회적 투쟁에 대한 참여로 특징 지어졌습니다. 하지만 내면의 영적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1926년 딸 테레사(Tamar Teresa)의 탄생은 데이에게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자신이 딸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느님도 자신을 사랑할 것이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아이에 대한 크나큰 사랑으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딸이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도록 했습니다.
이는 확고한 무신론자인 남편 포스터 배터햄과의 이별을 의미했습니다. 데이는 배터햄을 사랑했지만, 배터햄은 데이를 떠났습니다. 데이의 신앙은 그녀가 자신의 사회적 행동주의와 가톨릭 신앙을 결합할 방법을 찾도록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열망은 1933년 가톨릭 노동자 운동(Catholic Worker Movement)을 설립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음식, 의복이나 쉼터를 제공하는 환대의 집입니다. 데이의 가톨릭 노동자 운동은 자발적 빈곤, 비폭력, 노숙자에 대한 환대를 강조하면서 당시로서는 급진적이었습니다. 그녀는 내부 분쟁과 외부 비판을 포함한 많은 도전에도 불구하고 남은 생애 동안 운동에 전념했습니다.
그녀의 작업은 또한 전쟁 반대를 포함하여 평화 운동으로 인해 여러 번 체포되었습니다. 가톨릭 노동자 운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장했으며 오늘날까지 미국과 해외의 200개 이상의 공동체가 사회 정의 문제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전념하고 있습니다. 도로시 데이는 삶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시성 절차를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오늘의 가장 큰 도전은 어떻게 마음의 혁명, 우리 각자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혁명을 가져오는가?”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가장 큰 혁명은 결국 내적인 변화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 안에 성체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계심을 알았고 그것이 그녀에겐 가장 큰 혁명이었습니다. 이러한 혁명을 거친 뒤에야 이웃에게 그 하느님께서 주실 수 있는 좋은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녀는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우리는 모두 오랜 외로움을 알고 있었고, 유일한 해결책은 사랑이며, 사랑은 공동체와 함께 온다는 것을 배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혼자 무엇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외롭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안다면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오늘 성모님께서도 그렇게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입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나는 진정으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만큼만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자신 안에 하느님을 품은 사람은 그 하느님께서 이웃 사랑을 통해서만 자신 안에서 깨어나실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성체를 영해도 죽은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또 말합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사람들이 스스로 먹고, 입고, 거처하는 일이 좀 더 간단해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풍랑이 일 때 예수님께서 배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는데도 그분에게서 성령의 힘이 나올 것을 믿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풍랑을 이겨보려고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 내 힘으로 사람들에게 잘해보려 합니다. 그러나 잘되지 않습니다. 나에게서 좋은 능력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풍랑을 가라앉힐 수 있었던 방법은 자신들 안에 계신 분이 하느님임을 인식했을 때입니다. 그때야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풍랑을 가라앉히십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우리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인식해야 합니다. 성체를 영하더라도 내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인식하지 않으면 성령께서 활동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누가 계신지 인식할 때 우리는 이웃에게 좋은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이웃에게 힘든 사람이 되거나 이웃 때문에 내가 힘들어집니다. 성령을 베푸는 사람이 됩시다. 마음의 혁명을 먼저 이룹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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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이스라엘에는 성지가 많습니다. 그중에서 오늘 축일로 지내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장소인 ‘아인카렘’은 산 속에 있는 아름다운 동네입니다. 복음서는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했다고 전합니다. 엘리사벳은 이미 아이를 잉태한지 9개월이 되었습니다. 이제 막 아이를 잉태한 마리아는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3개월을 머물렀다고 합니다. 아인카렘 동네에서 마리아의 방문 성당까지 30분 정도 걸어가면 됩니다. 약간의 비탈을 올라가면 동정마리아의 방문 성당이 반갑게 맞이해 줍니다. 성당 입구에는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서로 마주보며 인사하는 동상이 있습니다. 성당 마당에는 각 나라의 말로 ‘마리아의 노래’가 붙어 있습니다. 계단으로 올라가면 아름다운 성당이 있습니다. 벽에는 성모님과 관련된 성화가 있습니다.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성화, 교회의 어머니라는 성화, 은총의 중개자인 마리아를 의미하는 가나의 혼인 잔치 성화, 성모님께 전구하여 승리했던 레판토 해전의 성화,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었음을 전하는 성화가 있습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의 만남이기도 하지만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첫 만남이기도 한 장소입니다.
저는 1982년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신학교의 교가 ‘진세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어라. 성신에 그느르심 아늑한 이 동산에 우리는 배우리라 구원의 베리타스(Veritas)’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동창들을 만났습니다. 41년 동창들과 함께 지냈으니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앳된 젊은이들이 이제 모두 60이 넘었습니다. ‘삼인행이면 필유아사’라는 말처럼 친구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친구들의 좋은 점을 많이 보았습니다. 독학으로 오르간을 배워서 어려운 ‘토카타와 푸가’를 연주한 친구도 있습니다. ‘삽자루’라는 별명처럼 신학교의 굳은 일을 도맡아서 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멋진 노래로 분위기를 살려주는 친구도 있습니다. 말이 없지만 있는 그 자체로 빛이 나는 친구도 있습니다. 힘들게 필기한 것을 기꺼이 나누어 준 친구도 있습니다. 방학 때면 나환자 마을로 봉사를 갔던 친구도 있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나서 하느님을 찬양했듯이, 동창들과의 만남으로 앳된 젊은이들이 부르심에 응답한 사제가 되었습니다.
노 사연은 ‘만남’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 이였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뉴욕에 와서 운명처럼 만난 분들이 있습니다. 4년 동안 함께 신문을 만드는 직원들이 있습니다. 매주 월요일 직원미사를 하고, 매주 수요일 직원회의를 합니다. 매주 신문을 제작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모두들 기쁘게 하고 있습니다. 3년 동안 함께 하는 ‘동북부 엠이’ 모임이 있습니다. 함께 했기에 팬데믹의 파도를 넘어 설 수 있었습니다. 피정, 나들이, 주말체험은 제게도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3년 동안 함께 하는 ‘부르클린 한인 성당’이 있습니다. 공동체는 저의 서품 30주년을 축하해 주었고, 저의 회갑도 축하해 주었습니다. 제가 도움을 주는 것 같았지만 제가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물고기는 물에 있어야 하듯이, 사제는 신자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4년 동안 함께하는 ‘동북부 사제 모임’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나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듯이, 사제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위로를 받았고, 팬데믹이라는 시련을 헤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매일 새벽에 묵상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글을 통해서 저의 내면과 만납니다. 그 만남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그 만남이 제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성찰과 묵상이 있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에너지를 이웃들과 나눌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욕심과 교만이 가득차 있으면 우리는 만남을 통해서 위로를 받기 어렵습니다. 만남을 통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마음을 열면 길가의 꽃에게서도, 하늘의 구름에게서도, 불어오는 바람에서도 배울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닫으면 아무리 좋은 글을 읽어도, 좋은 사람을 만나도 배울 것을 찾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는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찾아온 마리아를 축복하여 주었고, 마리아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찬가를 부릅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그러나 우리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품어야 할 가르침입니다. 오늘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해서 ‘마리아의 노래’를 불렀듯이 우리들 또한 각자의 노래를 만들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하는 신앙의 노래를 만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분이 나에게 큰일을 하셨으니, 모든 세대가 나를 복되다 하리라. 그분 이름은 거룩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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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39-56: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오늘 축일은 가브리엘 대천사로부터 주님의 잉태 소식을 들은 마리아가 예루살렘 남쪽 유다 지방에 사는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엘리사벳은 노년에 이르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런데 그 나이에도 아이를 가진지가 여섯 달이나 되었다는 천사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나, 서둘러”(39절) 엘리사벳의 집으로 바삐 가신다. 마리아의 이 모습을 우리는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세상에 낳아주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에서 나왔다고 한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잉태 소식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마리아는 거기에 그냥 머물지 않고 이웃에게로 향했다는 사실, 그것도 걸음을 서둘러 이웃에게로 향했다는 사실이 마리아를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게 했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이 모습은 바로 우리 신앙인들에게 큰 모범을 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고, 신앙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오늘 마리아를 통하여 배워야 하며,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 즉 신앙을 갖고 사는 우리는 이제 마리아와 같이 즉시 이웃에게로 걸음을 서둘러야 한다. 이때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사랑이신 하느님을 이웃에게 낳아주는 또 하나의 마리아가 되는 것이다. 즉 태어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완숙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조건에서 성장해야 한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어야 한다. 즉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은 자신의 태도가 사랑(1요한 4,7), 즉 형제들을 향한 사랑으로(참조: 3,1) 특징지어져야 하며, 자신의 인격을 걸고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삶이 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1,45) 복되신 마리아는 주님을 찬미하는 마리아의 노래를 부른다. 우리 역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을 때,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언제나 감사드릴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56절) 마리아의 봉사는 바로 세례자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의 봉사였다. 엘리사벳의 산후조리까지 도와주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은 사랑을 많이 가진 사람일 것이다. 마리아의 방문이 이 같은 느낌이 들게 해 준다. 만왕의 왕이신 분을 가지신 분이 엘리사벳을 찾아가 봉사하다니! 놀라운 겸손과 사랑의 신비를 보는 것 같다. 마리아를 닮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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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첫 선포, 첫 증인>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39-45)
루카복음서 저자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그 만남이 하느님의 구원사업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공적인 만남’이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두 사람만의 사적인 만남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날 때 옆에 즈카르야도 있었을 것이고, 다른 가족이나 친척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통해서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세상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선포했고, 엘리사벳은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믿고 증언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기쁜 소식’의 ‘첫 선포자’(첫 선교사)이고, 엘리사벳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처음으로 고백한 사람, 즉 첫 증인입니다. <첫 신앙인은 바로 마리아 자신입니다.>
여기서는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라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인사만 한 것이 아니라 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와서 한 말들과 자신이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일과 그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또 메시아로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까지 모두 엘리사벳에게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한 말이 모두 진실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믿었기 때문에 메시아 강생을 크게 기뻐했습니다. 여기서 ‘성령으로 가득 차’라는 말은, 마리아의 말을 믿고 기뻐하는 과정에서 성령의 도움과 인도가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이 말은, 바오로 사도의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가득 차’라는 말이, 성령에 사로잡혀서 자유의지 없는 로봇처럼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엘리사벳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말을 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자신의 자유의지로 믿었고, 크게 기뻐했습니다.<“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라는 말과 “큰소리로 외쳤다.”라는 말은 엘리사벳의 큰 기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기쁨은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왜 엘리사벳을 첫 선포의 대상으로 삼았을까?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엘리사벳 자신이 이미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의 권능을 체험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루카 1,36-37) 그 자신이 이미 체험한 일이고, 자신의 태 안에서 세례자 요한이 자라고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말을 금방 이해하고 믿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라는, 뜻으로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분이라고 마리아를 찬양한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구원사업의 가장 중요한 협력자로 마리아를 특별히 선택하셨기 때문이기도 하고, 마리아를 통해서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실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라는 말은, 마리아 태중의 아기는 사람들에게 복을, 즉 구원을 가져다주실 분,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라는 말은, 마리아는 ‘주님(메시아)의 어머니’라는 뜻이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는 첫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입니다.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라는 말은, 메시아 강생에 대한 기쁨을 표현한 말입니다. 45절의 ‘행복하십니다.’라는 말은, 뜻으로는 ‘복되십니다.’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좁은 뜻으로는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 준 말들을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메시아에 관한 구약시대의 예언들까지 모두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믿음을 찬양하는 ‘믿으신 분’이라는 말은, 메시아에 관한 예언들과 천사가 전해 준 말들을 믿은 일,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고 순종한 일까지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고 순종하는 일은, 믿음과 기쁨으로 하는 일이어야 진짜 응답이고 순종입니다. 자유의지도 없이, 또 믿음도 없이, 또 기쁨도 없이 억지로 복종하는 것은 응답도 아니고 순종도 아닙니다.>
두 어머니의 만남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찬양하는 말은, 메시아 강생과 구속사업의 기쁨에 동참하라고 우리를 초대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이천여 년 전 어느 날 있었던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여기서 우리를 부르는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나는 이미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다. 그러니 나를 또다시 부르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날마다 새롭게 주어지는 일이고, 신앙인으로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순종하는 일도 ‘날마다 새롭게’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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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입니다. 마리아는 시골 나자렛 목수의, 엘리사벳은 유다 산골 사제의 아내였습니다. 창조부터 이어진 하느님의 구원 경륜을 완성하시는 예수님과 요한을 태중에 모신 이 여인들이 그토록 작고 가난한 이들이었다는 사실에서 하느님의 영광은 더욱 빛이 납니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1,36-37). 아이를 낳지 못하는 늙은 엘리사벳이 잉태하였다는 소식은 마리아에게 커다란 확신과 기쁨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잉태한 서로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은 열망으로 100-150킬로미터나 떨어진(걸어서 닷새나 걸리는) 엘리사벳의 집으로 “서둘러” 갔습니다.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이러한 태도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마리아의 전적인 믿음과 즉각적인 응답을 잘 보여 줍니다. 마리아와 태 안에 계신 주님의 방문으로 모든 이가 성령을 가득히 받고 기쁨에 넘칩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마리아와 주님을 찬미하고, 천사의 예언대로(1,15 참조) 요한도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해집니다. 그리고 주님을 태 안에 모신 마리아는 하느님을 한껏 찬송하고 용약하며 ‘성모의 노래’(마니피캇)를 바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스바니야 예언자는 주 하느님을 한가운데에 모신 시온의 환성과 기쁨을, 그리고 바로 그 시온 때문에 기뻐하며 즐거워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예언하면서, 우리를 하느님 안에서 기쁨 가득하고, 또 그분께 기쁨이 되어 드리는 축복의 삶으로 초대합니다.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성모님처럼 내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뜻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뜻도 바라볼 줄 아는 혜안을 청합시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웃들 안에도 머무르고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보고 함께 기뻐하고 격려하는 이 시대의 ‘마리아’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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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두 여인 간의 만남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의 만남이지요.
태어날 아기들의 운명이 어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여인들의 마음은 얼마나 쓰렸겠습니까? 그런데도 서로 격려하면서 주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이처럼 주님에 대한 신뢰를 통해서만 앞날에 대한 희망이 나옵니다. 지금은 나의 처지가 비천하지만, 언젠가 귀한 존재가 되리라는 희망입니다. 비록 내가 슬픔에 젖어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기쁨으로 넘치리라는 희망이지요.
마리아는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라고 응답합니다. 비천한 사람은 낮은 신분, 또는 매우 겸손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돈도 지위도 명예도 없기에 하느님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또는 재산이나 명예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주님 앞에서 자신은 무력한 존재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비천한 자신을 택하신 주님을 찬미하며, 주님께서는 하실 수 없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모든 이에게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 기쁨이 넘치려면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느껴야 합니다. 나의 생활을 늘 되돌아보면서, 그 가운데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심을 발견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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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유다 전통에서 ‘시온의 딸’은 바빌론 유배에서 귀환한 뒤에 선포한 신탁으로 다시 세워진 하느님의 백성을 일컫습니다.
이들은 유배에서 돌아온 ‘남은 자’들이며, 종말에 메시아를 맞이한 예루살렘(즈카르야 예언서 9장 9절 참조)을 의미합니다.
구원 역사 안에서 성모님께서는 메시아 예수님에 관한 구절들에서 새로운 하와로서 불순종이 아닌 순종의 신앙인으로 나옵니다.
메시아를 잉태하시고 이스라엘을 재건하시는 성모님께서는 시온 딸의 전형이며, 세상의 어느 것보다 하느님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모범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성모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 주시는’(루카 복음 1장 35절), 마치 구약 성경의 커룹들이 감싸고 있는 ‘계약의 궤’(탈출기 25장 20절 참조)처럼 표현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라고 노래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말하였듯이 “은총이 가득한” 행복한 여인이십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마리아보다 엘리사벳이 더 행복한 여인으로 보입니다.
그 당시 문화 안에서 엘리사벳은 늙도록 아이를 가지지 못한 여인이었기에, 창피함과 부끄러움 가운데 일생을 살아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이 늦은 나이에 아이를 잉태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죄인이라는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이었고, 당당하게 한 여인으로 서게 하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반면에 마리아의 잉태는 축복이라기보다는 염려스럽고 걱정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를 잉태한다는 것은 그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일이며, 걱정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과 그의 태 안의 세례자 요한은 기쁨 속에서 성령으로 가득 차 마리아를 칭송합니다. 이에 성모님께서는 겸손하고 온화하게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라고 노래합니다.
이렇게 마리아를 만난 엘리사벳은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자신의 삶에서 체험합니다.
우리의 삶이 어떠하더라도 우리가 체험하는 많은 만남을 통하여 주님의 은총을 발견하는 것은 신앙인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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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이 둘의 만남은 참으로 기구하면서도 놀라운 하느님의 섭리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던 처녀였지만 성령에 힘입어 아이를 갖게 된 마리아가, 나이가 많아 아이를 가질 수 없었지만 하느님의 손길로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을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상황에서 하느님을 체험하였지만, 자신들의 남은 인생 전부를 그분의 구원 역사를 위하여 내놓습니다. 그러고는 서로 만나 자신들에게 섭리하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따뜻한 인사를 받으며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하여 더 큰 확신과 위안을 얻었을 것입니다. 엘리사벳도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마리아의 모습을 보며 하느님의 섭리에 끝까지 충실하겠다고 다짐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긴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믿음 안에서 서로에게 진정한 위로와 힘이 되어 줍니다.
우리는 현대를 살아가는 또 하나의 마리아이며 엘리사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 안에서 끊임없이 머무르시고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만남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처럼 서로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 주고 있는지요? 한 신앙인으로서 다른 신앙인에게 힘과 용기가 되어 주는 만남이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기억하며, 우리의 만남이 신앙 안에서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 힘과 용기가 되어 주기를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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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으로 행복하기>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지난주 우리는 성모의 밤을 지냈습니다. 촛불을 봉헌하면서 자신을 녹아내려 세상에 빛을 밝힐 수 있기를 소망하였고 아름다운 꽃을 봉헌하면서 꽃처럼 예쁜 삶을 다짐하였습니다.
성모님께 드리는 멋진 노래와 사랑의 마음을 담은 편지 봉헌을 통해 어머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어머니와 함께하는 가운데 어머니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바람이 주님께 전구 되고 가슴에 담았던 아픔과 시련의 상처들이 치유되기를 기도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첫 기적이 성모님의 청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이루어주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성모님의 전구를 통하여 모든 바람이 열매 맺기를 희망합니다.
일상 안에서 누군가를 찾아갈 수 있는 마음을 지닐 수 있고 또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만나서 끝까지 기쁨을 나눈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도와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실컷 도와주고서는 그것으로 끝나면 좋은데, 나중에 고맙다는 인사를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고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스스로 해 놓고는 서운한 감정을 지니고 마음을 화로 가득 채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만남을 위한 노력과 헌신은 그 자체가 보상이고 기쁨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서둘러 유다 산골에 있는 한 동네로 갔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습니다.
서둘러 간 것은, 적극적인 이웃 사랑 실천입니다. 그리고 둘은 배속에 든 세례자 요한과 함께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사실 엘리사벳은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임신하였고 더욱이 마리아의 방문에 성령을 받아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그러자 마리아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하며 찬미의 노래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이 비천한 여종이라는 사실,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을 지니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위대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여인은 참으로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석 달가량이나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서로가 통하지 않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겠습니까? 제가 해외에서 있을 때 보니까 ‘손님이 오실 때 반가운 손님, 떠나실 때 더 반가운 손님’이라고 합니다.
결국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며 행복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믿음과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할 때 풍요로워지는 것입니다.
누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11,27-28) 하고 말하였는데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이렇게 보면, 성모님께서 “모든 여인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이라는 것은, 예수라는 훌륭한 아들을 낳아서 젖을 먹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행복이란 그렇게 하면 행복해진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러이러해서 행복하다면 그 행복은 무엇이 저러저러해질 때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실행함으로써 복되었듯이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것이 곧 행복이어야 하겠습니다. 이러저러한 조건과 환경이 마련되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주님 안에 있다는 자체가 행복의 순간입니다.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 더없이 행복한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시고 마리아를 통하여 큰일을 하셨듯이 오늘 우리의 부족함도 굽어보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를 희망합니다.
이 시간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 성모님의 믿음을 간직할 수 있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성모님을 통하여 은총을 구하십시오. 성모님을 통하여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계시다는 것을 기뻐하고, 준비된 마음 안에 우리의 모든 바람을 성취시켜 주시길 바랍니다.
“성모님의 일생은 사람의 기림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다만 하느님의 뜻에 맞기만을 원하셨습니다.”(성 암브로시오) 오직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사는 것으로서 행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옛날 한국에는 고려장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고 그래서 부모가 나이가 많이 들면 깊은 산속에 모셔다 놓고 그냥 돌아오는 것입니다. 한 아들이 늙은 어머니를 지게에 짊어지고 깊은 산 속으로, 산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지게 위에서 나뭇가지를 계속해서 부러뜨려 놓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무엇을 하시느냐고 물으니 ‘네가 늦게 내려가다가 길을 잃을까 봐 그런단다.’ 하셨답니다.
당신을 버리는 아들이지만 아들에 대한 어미의 사랑은 더욱 애절하기만 합니다. 바로 이런 어미의 사랑이 우리 어머니 성모님의 사랑입니다. 성모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우리의 바람을 아들 예수님께 전구 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적을 오늘 우리에게도 이루도록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모님을 통하여 모든 것을 예수님께로 향할 수 있다는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성모님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고 그분께서 바라신 것을 바라고 그분께서 하고자 하시는 바를 행하고 그분께서 지향하시는 바를 지향하십시오.
그분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거기에 견주어 마음을 성찰하고 그분을 닮지 않은 것이면 무엇이나 마음에서 몰아내십시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있기 위해서 먼저 성모님 안에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을 통하여 모든 것을 예수님께로!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성모님께로!(복자 마르첼로 심파냐) 그리하여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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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새벽에 일어나 기도와 묵상을 한 뒤에 책 좀 읽으면 창밖이 환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날씨를 예측해봅니다. “맑겠구나.”라고 예측할 때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고 저 멀리 해 뜨는 것이 선명히 보입니다. 그날도 이렇게 맑은 날씨를 예측했습니다. 너무나 맑고 깨끗한 하늘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의 예측과 달리 오후부터 우중충해지더니 결국 저녁이 되면서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맑겠구나”라는 저의 예상이 완전히 어긋나는 날이었습니다.
우리 삶도 이렇게 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맑겠구나.”라면서 모든 것이 원만히 진행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비바람과 같은 고통과 시련이 갑자기 찾아올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비바람이 1년 365일 계속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삶도 비바람, 폭풍과 같은 시련의 시간이 오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삶이 올 것입니다.
이 사실을 늘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또 비바람, 폭풍 불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을 주는 맑고 쾌청한 삶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희망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까? 따라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만 있다면 포기도 절망도 하지 않고 기쁘게 지금을 살 수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맑은 날도 오겠지. / 흐린 날도 날이 새도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인데, /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 해가 뜨지 않더라도, 분명히 가까운 시간 내에 해가 뜹니다. 가슴을 쫙 펴고 힘차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희망을 놓지 않았던 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 잉태 소식에도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라고 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사촌 언니인 엘리사벳 성녀를 방문하면서 하셨던 말씀을 통해도 그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서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면서 보여주십니다.
우리의 믿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믿음을 갖춘 사람은 절대로 좌절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감사의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기쁨의 노래를 힘차게 부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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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이 된 사람 길을 떠나네>
루카 1,39-56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마리아의 노래)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길이 된 사람 길을 떠나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길을 품어
길이 된 사람
하늘을 바라는
땅을 품으러
길을 떠나네
땅에서
하늘로 오르는
길을 품어
길이 된 사람
땅을 보듬는
하늘을 나누러
길을 떠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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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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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정의 여정>
-주님과 더불어 도반 형제들과의 우정-
오늘은 5월 성모성월 마지막날이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입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날을 경축하는 날이며, 마리아가 석 달 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니 엘리사벳의 환대가 얼마나 극진했으며 두분간의 우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감동하게 됩니다. 이에 근거하여 반가운 손님이 수도원의 저를 방문했을 때는 저는 주저없이 “아, 오늘은 형제(자매)님의 수도원 방문 축일이네요!”덕담을 드리며 환대하곤 합니다.
나이 70을 넘어 제가 주로 심취하여 읽는 책은 성인들이나 위인들의 평전(評傳)입니다. 요즘 감명깊게 읽은 평전은 금장태 교수의 퇴계평전, 율곡평전, 다산평전이요 이분들의 우정에 정말 감동했고 부러워했습니다. 길다 싶지만 나누고 싶은 분이 율곡과 성혼의 우정이요, 다산 정약용과 그의 형 손암 정약전과의 우정입니다.
1.율곡과 성혼의 우정은 깊어 항상 서로 그리워하며 찾고, 만나면 밤을 새워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43세때(1578) 세모에 눈이 많이 내렸는데, 율곡은 문득 친우 성혼이 보고싶어 소를 타고 눈길을 뚫고 찾아가 밤을 새우고 정담을 나누면서 작별의 아쉬움을 읊기도 하였다.
“한해는 저물고 눈은 산에 가득한데,
들길은 가느다랗게 숲속으로 갈라졌네.
소를 타고 어깨 으스대며 어디로가나?
우계(牛溪;성혼) 냇가 아름다운 사람 그리워서라네.
슬퍼라, 반평생에 이별도 많았으니,
온갖 산 험한 길들 다시금 생각하네.
이야기 끝에 뒤척일제 새벽 닭 울어,
내다보니 창문 가득 서리 달빛 차갑네.”
율곡이 죽었을 때, 성혼은 30년간 율곡과의 우정을 돌아보며 제문에서 율곡의 인물됨을 다음처럼 요약합니다.
“형은 뜻이 크고 원대하며, 학문은 깊고 명석하며, 재주는 영민하고 넉넉하며, 도량은 크고 굳세니, 하늘이 인재를 낳으심이 의도가 있는 것 같았소. 일찍이 큰 도의 근원을 깨쳤으나 스스로 만족하지 않았고, 스스로 백성을 위한 책임을 맡으면서 자기 몸을 아끼지 않았소. 일을 당해서는 세차게 밀고 나가니 얽히고 설켜 어려운 마디도 그 생각을 얽맬수가 없었으며, 남과 다툼이 없었으니 백성들이나 천박한 사람은 그 도량을 엿볼 수 없었소.”
2.다산 정약용은 둘째 형 손암 정약전이 1816년 6월6일 유배지 흑산도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피맺힌 슬픔을 두 아들에게 처절하게 토로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오호라. 어질면서도 곤궁함이 이와같을 수 있는가. 원통하여 무너지는 가슴을 호소하니 목석도 눈물을 흘리는데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느냐. 외로운 천지 사이에 우리 손암(정약전)선생님만이 나의 지기(知己)였는데, 이제는 그분마저 잃고 말았다. 앞으로는 비록 깨달은 바가 있다하더라도 누구에게 입을 열어보겠느냐.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는 이가 없다면 죽느니만 못하다. 아내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자식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형제 종족들이 모두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처지에 나를 알아주던 우리 형님이 돌아가셨으니 슬프지 않으랴. 경집(經集) 240책을 새로 장정하여 책상 위에 두었는데 나는 이 저술을 불살라야 한단 말인가.”
정약용 아우의 지기지우(知己之友)였던 형 정약전이 정약용의 <주역사전>에 붙인 서문에서 그 아우의 인물됨에 대한 간결한 서술도 감동적입니다.
“그가 젊어서 성균관에 다닐 적에는 과거시험의 문체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니, 나는 그를 재치가 번뜩이는 재사로 여겼다. 장성하여 규장각에 출입하면서 문학으로 명철한 임금(정조)을 섬기게 되었을 때는 나는 그를 문장과 경학의 선비라고 여겼다. 지방수령으로 나가 행정을 담당하면서는 크고 작은 안팎의 일이 모두 지극한 성과를 이루었기에 나는 그를 재상될만한 그릇이라 여겼다. 만년에 바닷가에 귀양가서 <주역사해>를 지었는데, 나는 처음에는 놀라고 그 다음에는 기뻐하다가 마침내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이 꿇어질 뿐만 아니라 그를 어디에 비겨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내가 섬에 유배되어 죽을 날이 멀지 않았지만, 그와 같은 세상에 같은 형제가 되어 이 책을 읽고서 이책의 서문을 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는 진실로 유감이 없다. 아아, 그도 또한 아무 유감이 없을 것이다.”
정약용의 저술을 통해 도를 들었으니 이제 죽더라도 아무 유감이 없다는 뜻으로 공자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정말 깊고 아름다운 우정의 형제들입니다. 하늘의 도(道)를 중심으로 날로 깊어졌던 형제간의 깨끗한 우정의 여정이었음을 깨닫습니다. 하늘의 도를 중심으로 하기로는 율곡과 성혼의 우정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마리아와 엘리사벳 간의 우정의 깊이와 아름다움이 확연히 이해됩니다. 오는 제1독서의 스바니야 예언서의 시온은 그대로 우리에 해당됩니다. 삶의 중심인 주 우리 하느님을 확실히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 뜨리지 마라.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나는 너에게서 불행을 치워버려, 네가 모욕을 짊어지지 않게 하리라.”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모든 이들을 당신 사랑으로 끊임없이 새롭게 하시며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하십니다. 바로 스바니야의 아름다운 예언이 하느님 중심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주님과의 우정에 충실했던 두 영적도반인 마리아와 엘리사벳을 통해 그대로 실현됨을 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우정을 깊이할 때 성령충만한 삶이겠습니다. 마리아의 인사말을 듣고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환호하며 환대하는 엘리사벳입니다. 두분의 영적우정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엿볼수 있는 대목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영적우정과 더불어 태중의 아기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영적우정도 이미 시작됐음을 봅니다. 아, 이런 영적도반이 있다면 그대로 구원이요 태어난 보람이 있는 성공인생입니다. 마리아의 내적 불안과 두려움은 완전 사라지고 그 영혼은 꽃처럼 활짝 피어났을 것입니다.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이 참 좋은 영적도반에 영적우정입니다. 예전 우정깊은 선비들이, 또 선사들이 만났을 때 시로 마음을 주고 받듯이 엘리사벳과 마리아 역시 성령에서 샘솟는 시로 서로의 마음을 나눕니다. 엘리사벳의 성령충만한 환대에 응답한 마리아의 노래가 참 절창(絶唱)입니다. 개인 감사고백시로 시작하여 집단감사시로 끝납니다.
역시 가난한 이들을 대변한 아나뷤의 노래에 속합니다. 바로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가톨릭 교회 신자들이 2000년 이상 저녁 성무일도시 마라아와 함께 부르고 있는 구구절절 희망과 기쁨을 가득 선사하는,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찬미감사가입니다. 첫 부분과 끝 부분만 나눕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습니다....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시온이요 이스라엘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게 하시며 더불어 당신 중심으로 살아가는 도반 형제들과의 우정도 날로 깊게 하심으로 우리 모두 성공적 우정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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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카1,43)
'은총을 함께 나누자!'
오늘은 주님의 어머니로 부르심을 받은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입니다.
은총을 가득히 입은 마리아가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 '아인 카렘(Ein Karem)'이라는 곳으로 서둘러 길을 떠나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마리아를 맞이한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큰 소리로 기뻐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2-45)
그러자 마리아가 화답(성모찬가)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루카1,46-50)
하느님 은총을 가득히 입은 두 여인이 만나 대화합니다. 그리고 그 대화의 중심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5월 성모성월의 끝 날입니다. 이제 내일부터는 6월 예수성심성월입니다. 성모 마음에 이어 예수 마음을 묵상하게 됩니다. 예수 마음은 측은지심으로 늘 우리를 향해 있는 마음입니다.
지금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한인 성당에 와 있습니다.
오늘 성모의 밤 행사를 했습니다. 예수 마음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바로 은총입니다. 우리도 마리아와 엘리사벳처럼 예수 마음 안에 머물러 있고, 이 은총을 함께 나눕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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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zwgPeIv8G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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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 43)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를
방문 축일을 통해
묻게 됩니다.
살아있는 이 시간을
더욱 소중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 말씀안에서
삶의 의미를
나누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하느님 말씀으로
채워야 할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에
기대어 살았던
두 여인이 만납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어셨기에 행복한
방문이 됩니다.
하느님 말씀안에서는
단역과 주연의
구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 저마다
간절한 바람을
안고 살아가는
말씀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소통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느님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 안에서
참된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우리 마음 깊은 곳의
기쁨과 감사까지도
자연스레 쏟아져
나오게 합니다.
우리를 먼저
찾아온 말씀처럼
우리또한 말씀이
우리 삶의 이정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말씀은
관계에 대한
새로운 눈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올바른 방향을
가르쳐주는
믿음의 말씀이
있습니다.
행복이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사이에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이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으로
이루어지고
채워지는 말씀의
기쁜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걸어가야 할 길은
말씀의 길이며
말씀이 가장
필요한 사람은
바로 우리자신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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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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