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된 인간의 영광 ‘로마제국 실상’ 인간군상 비록 불완전·악덕해도 오랜 세월 익은 전통은 지혜의 총화 강자에 대한 존중=로마 민주주의 ‘규율있는 자유’ 근대에 되살려내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는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서술된 독특한 역사서다.1천4백년에 걸쳐 서서히 멸망해가는 대제국의 역사를 치밀한 묘사와 탁월한 해석으로 하나하나 짚어간 이 웅편거작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간의 악덕들이 장강의 물결처럼 펼쳐진다.무모하기 짝이 없는 권력욕과 성욕,뒤틀린 심성과 모자라는 지성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제위찬탈,골육상잔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기번은 이토록 불완전한 인간이 자신의 불완전성을 무릅쓰고 쌓아올린 인류사 최대의 영광으로 로마사를 조망하고 있다.때문에 이 책은 역사서이면서도 단순한 역사서술을 뛰어넘는 문학작품으로서 독자적인 인간관과 세계관을 보여주는 불후의 고전이다.
ㅇ부하들에 의해 살해된 모친의 시신을 바라보며 “이렇게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줄 알았더라면…” ㅇ하고 아쉬워하는 네로 황제의 병적인 자의식. ㅇ우유부단하고 겁 많으며 교활했던 칼레리아누스 황제의 나약함. ㅇ몇 달 사이 아홉명의 처와 이혼·결혼을 반복한 카리누스 황제의 우행. ㅇ재색을 겸비했지만 남편과 조카를 죽이고 권력을 잡는 제노비아. ㅇ방종과 쾌락으로 이성이 마비된 로마시민들의 부화뇌동. ㅇ로마를 노리는 온갖 주변 민족들의 배덕과 파렴치. ㅇ자신의 잔인성을 정의라는 말로,그 잦은 변덕을 인애(仁愛)라는 말로 포장하는 무수한 정치가들. ㅇ매점매석으로 일확천금을 꿈꾸는 상인들. ㅇ천박한 질투와 시기심으로 광기어린 교리논쟁을 이어가는 기독교 성직자들.
‘로마제국쇠망사’는 이처럼 생생한 인간군상의 악덕들을 침착하고도 장중한 문장으로 그리고 있다.
로마제국사에 명멸한 인간의 어리석음과 탐욕과 음란과 광기를 보는 기번의 눈은 인간 존재의 모순성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담고 있다.
인간은 불완전하며 그 불완전성 때문에 신들과는 다른 인간적인 영광이 있다는 사상.바로 악덕과 영광이라는 모순성 자체가 인간의 객관적 현존의 토대가 된다는 사상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인간에게 역사가 필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인간의 지성은 나름대로 유용한 것이지만 그것으로 터무니없이 복잡한 인간사회를 인식하거나 생각하는 대로 조정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또 인간이 덕성을 몸에 지니는 것은 가능하지만 거기에도 엄격한 한계가 있다.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타락하기 쉬운 존재며 이기심을 지워없앨 수 없다.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인간의 설계의 결과가 아닌 인간의 행위의 결과로서 역사가 필요한 것이다.
이 때문에 기번은 모든 형태의 전통을 옹호한다.사람들이 자신의 악덕과 뉘우침으로,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험과 시행착오의 반복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형성한 전통이야말로 인간이 존중해야 할 지혜의 총화라는 것이다.
‘로마제국쇠망사’가 제국 내의 기독교 교회에 대해 잔인하리 만큼 부정적인 묘사로 일관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기번이 부정하고자 했던 것은 기독교 자체가 아니라 고대세계가 축척한 문화적 전통을 전부 이단으로 몰아 박멸하고자 했던 교회의 광신성이었다.
기번은 무수한 개인의 악덕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국가의 경영 속에 반성되고 축척된 로마적 전통을 복원시키고자 했다.이것은 한때 기독교 교회에 의해 폄하되기도 했으나 근대문명을 낳은 힘의 근원으로서 영원한 의의를 갖는 전통이다.기번이 요약하는 로마적 전통은 한마디로 ‘규율 있는 자유’라 정의될 수 있다.
로마는 왕정시대에도 왕을 민회에서 선출했으며 공화정으로 이행한 뒤에도 원로원을 비롯한 통치조직을 선거를 통해 구성했다.
뿐만 아니라 점령한 부족에 대해서는 시민권을 개방하고 그 대표자를 원로원에 흡수함으로써 사회적 통합에 성공했다.이처럼 로마의 법과 제도를 유지하면서도 자기 외부의 이질적 요소에 대해 스스로를 개방하고 최대한의 자유와 자율을 허용한 것이 로마 융성의 원천이었다.
로마의 규율,그 법과 제도는 글자와 격식에 얽매인 경직된 것이 아니었다.로마적 규율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구체적인 각각의 상황 속에서 여러가지 힘들을 조화시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로마인들은 형식논리상으로는 부도덕하게 여겨질지라도 당대의 역사적 상황에서는 최선이었던 그런 선택을 위해 노력했다.
‘로마제국쇠망사’는 다섯 현제(賢帝)시대가 끝나갈 무렵인 트라야누스 황제시대부터 형언할 수 없이 어지러운 제위쟁탈전을 중심으로 역사의 줄거리를 잡아간다.그러나 이같은 권력쟁탈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진 로마적 규율은 항상 ‘가장 강한 자에게 제국을 주어야 한다’는 원칙론이었다.제위 계승은 왕왕 양자제도,군대나 친위대에 의한 옹립,음모에 의한 찬탈 등 불미스럽고 부도덕한 수단을 통해 실현되었다.그러나 이같은 혼란은 가장 강한 자에게 제국의 통치권을 주어야 한다는 로마적 논리와 규율을 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가 생각하는 자유의 정신은 인간의 실질적 불평등을 받아들이는 데 있었다.로마는 인종차별과 같은 부당한 차별을 지양하고 ‘출발선상의 평등’을 보장하려 노력했지만 사람들 사이에 나타난 ‘결과의 불평등’은 부정하지 않았다.자유를 지키려면 결과의 불평등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강자에 대한 존중은 단순한 실력제일주의,패권주의가 아니라 로마적 민주주의의 지향을 깔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제국쇠망사’는 이같은 로마의 정신과 전통을 근대세계에 되살려낸 불후의 명저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