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4년 10월 8일,
고려의 거상들은 아라비아 오만 지방의 무스카트(貿殊角)에 대규모 정착지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번박 (繁駁)이라고 불렀습니다.
상당히 이상한 이름이지만,
아무도 저 곳에는 駁 (얼룩말)이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크게 신경쓰지않았습니다.
1549년 9월 1일,
남만의 방카 (Banka)섬에 소난 (消亂) 정착지를 세운 것 이후로
상당히 먼 거리에 세워진 두번째 교역소입니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매년 하지(廈至)를 해야만 했지만,
우즈베크(魏屹帛)의 야만적인 유목민들이
메카(瑪嘉)로 향하는 사람들을 갈취하는 일이 빈번하여,
비단길보다는 천축해(天竺海/ Indian Ocean)로 향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비록 델리(達曦)의 몰락으로
비자야나가르 (斧癩喝)의 성가신 힌두교(印度敎)
이교도들과 갈등을 빚는 일이 늘어났지만,
유목민보다 보다 신사적이고 교활한 그들은
순례자들이 풀어놓는 번쩍이는 보따리들에게 만족한듯 보였습니다.
이전에는 다르알이슬람 (達阿乙藍)에서 전해진 문서에 따라서
지구가 둥글다는 헛소문을 듣고 동방풍을 따라
얼음덩이 바다를 통해 메카로 가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약간의 파편적인 성과도 있었지만,
1547년, 5번째 원정에서 시웅 제독의 함대가 돌아오지 않으면서
더 이상의 무의미한 인명낭비는 칙서로 금지되었습니다.

1555년 1월,
익부의 왕이 사로잡혀 평양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이제 북중국의 주도권은 고려에게 넘어갔습니다.
기술자들은 천리장성을 산동(산둥)과 개봉(카이펑)까지 확장시킬 것입니다.
드디어 200년간의 북중국 정벌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남부의 명은 이미 자신만의 중화를 건설한 이후
칼을 갈고있으니, 언젠가 그들과도 전쟁을 해야하는 때가 올것입니다.
지금으로서 고려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지몽매한 현지인들의 거주지를 전쟁이 올때마다 무참하게 태우는 것입니다.
그들의 선조자인 고구려가 실패했던 전철을, 고려는 밟지 않게되길 빌뿐입니다.

만조 왕연은 산동까지 직접 내려가 자신을 원 이후의 정식 중화의 후계자로 선언했습니다.
왕연은 내치적으로는 암군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몇몇 내정에 있어서는 상식적이고 평범한 정치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군사적 실책을 저질렀으며,
필요이상의 전쟁으로 경제에 많은 부정적 영향을 미쳤지만,
(4/4/1)
끝끝내, 명보다 먼저 북중화를 통일하여 명과 대립구도를 세우는데 성공했으며,
긍정적인 묘호인 만조를 받아내었습니다.
물론 허영심이 강한 그는, 그가 죽기도 전 임에도 전쟁의 승기가 보이자,
신하들에게 떼쓰듯 시법도 무시하고 칭호를 얻어냈습니다.
하지만 유치한 성격을 가지고 주변국과의 불화를 이끌어내던 그는
이번에도 산동에 직접 도착해 망국의 백성들을 모욕하다가 살을 맞았는지,
외궁이 있는 대도(大都,Dadu)로 돌아가던 그는 급사하고 맙니다.

방종적인 왕연은 수 많은 자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유일한 아들 왕선은 총명함 (4/3/3)에도
23살의 나이에 사고사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축첩제와 일부다처제가 혼합된 고려의 계승구조는
동시대 그 어떤 국가보다도 복잡하였습니다.
심지어 성문화가 어느정도 되었음에도 필요 이상으로 복잡하였습니다.
다행히 똑같이 총명하고 문약한 도익군 왕염 (5/5/1)을 눈여겨둔 왕연이
그의 계승권을 손봐두어 낙점해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왕연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죽었습니다.
또한 왕염은 기존의 왕의 핏줄인 무종 왕세의 핏줄이 아니라,
그의 숙부이자 암군으로 유명한 원정군 왕정원의 핏줄에서 나온
방계승통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문제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행인 점은, 왕연의 친척들이 전부 사납고, 사치스러워
다섯 회학교(مدرسة, 호남, 패서, 해서, 태원, 대도)의
유생(علماء ,울라마)들 중 원리주의로 유명한 패서의 한합(الحنبلي)파들을 제외한 이들이.
왕염의 승계를 지지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남만주에서 일어난 왕의연의 반란은 가볍게 진압되었습니다.

1531년 일본의 단바국(丹波国)의 다이묘 야스마사 (泰昌)가
주변 섬들을 정복하고 자신의 영지로 추가하기 시작하면서,
문립(文砬)과 박순(朴循)으로 대표되는 개척자들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 섬싸움(島戰)을 전개했는데,
그 과정에서 원완양계, 남만도호부, 추물진, 양을진 등등의 행정체계가 만들어지고,
사라지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원완왕계제가 힘을 얻어
원양계와 완양계가 신설되었긴 하지만요.
(1556년 세워진 것은 원양계뿐, 완왕계는 약 200년후 무서도 (務瑞島 /오스트레일리아) 개척과 함께 생성)

고려 역사에서 왕자의 난은 2번이 있었는데,
무종 왕효의 시기에 영남에서 일어난 왕안영의 난 또는 제 1차 왕자의 난이 있었고요.
(1507년 9월 1일 ~ 1508년 8월 24일)
그리고 도익군 (아직 죽지않아 묘호가 없음) 왕염의 때였습니다.
패서의 한합 붕당 (유교적 붕당과는 달리, 마드하브 (مذهب)의 수용문제로 생긴 것)의 일파가
덕강군 왕유시와 함께 계승을 불복하고,
왕연의 다른 사촌들과 함께 들고 일어났는데
이를 왕유시의 난 또는 제 2차 왕자의 난이라고 합니다.
(1556년 5월 28일 ~1557년 2월 16일)
왕유시
왕송효
김지엽
신숙
왕윤동
지전동
이들은 기습적으로 평양성을 점거하여,
수도를 빼았았지만,
행정기능이 대도 지방으로 옮겨진 이후였기 때문에,
결국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빠르게 진압되었습니다.
특히 왕유시의 경우, 왕위주장자임에도 야전에서 처참한 (0/0/2/0) 능력을 보여줘
관군의 승리에 공헌했습니다.
물론 오랫동안 수도를 점거했다면, 그들의 목적을 강요할 수 있었겠지만.
명나라와의 싸움을 위해 병력을 잔뜩 증강해놓은 상태라,
그들이 진압되는데 걸린 시간은 군사를 재배치하는 시간에 불과했습니다.

1556년 7월 1일
마지막 시베리아의 거점이 완성되었습니다.
저 곳의 이름에는 첫 탐험가인 심균 장군의 이름이 붙을 것입니다.

무스카트 교역소에 대한 추가투자.

저번에 처리한 모융(毛戎/Muscovy)족이 날뛴다고 합니다.
따라서 1556년 병진년, 병진서정을 떠납니다.
한편 남만주에는 이바디 이단이 유입됩니다.
시아를 포함하여 이단들이 반복해서 유입되는 것이 역시 야만의 땅입니다.

1557년 11월 29일
유생들이 상소문을 올려,
말갈인 (고려에서 여진, 다우르, 할하, 호르친 등 모든 유목민을 합쳐서 이르는 말) 이단자들을 단죄하자는
것을 윤허해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왕은
말갈인들은 사나워 반란을 자주 일으키니 타협하는 방향으로 유생들을 설득하기로 합니다.

유연산 장군의 승전보가 파발 통해 전달되어 불만을 잠재웠습니다.

1559년 1월 8일
모술 압바스 칼리프의 칙서를 가지고, 통신사가 귀환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왕염의 정당성을 공개적으로 논박하는 이는 품위있는 자들 가운데 없게됩니다.

유교도들은 관료와 학자, 법학자인 울라마( علماء ) 계층으로 흡수된 반면,
불교도와 도교도들은 고려의 수피 신비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유목민들은 울라마 계층이 없는 틈을 타, 수피들의 왜곡된 사상이 텡그리의 잔재들과 함께 이식되곤 하여,
잘못된 믿음을 경계하는 정당한 무슬림들의 경계심을 사고는 했습니다.
한편 모용과의 전쟁이 이 시기에 종료됩니다.
고려의 봉신국 회륜(回侖/Perm)에서 모용 오랑캐들은 아무것도 얻어가지 못했습니다.

1560년 1월 19일 고려의 중화수도 대도에도 회학교가 세워졌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다른 붕당과 인재들이 형성될 것이며,
이들 대도의 학풍은 기존의 불교풍의 태원 (타이위안)의 학풍보다 유교적으로 엄숙주의적이면서도 유연했습니다.

모융과의 전쟁을 마치고 난 뒤,
고려는 드디어 수백년 만에 평화의 시기를 얻게됩니다.
비록 남방의 명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있으나,
그들 또한 내부를 정리하기 위해 잠시 쉬어야할 차례였습니다.
재정을 안정적으로하고, 농민들의 삶을 편하게 하여,
취민유도의 정신을 보여주도록 합니다.

원양계에 대한 종교계의 권위를 결정하는 자리에서
대신들과 왕은 토인들을 올바르게 가르치기 위하여,
사원 단위의 행정체제를 구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오옷 시베리아 황무지(yakut?)는 어떻게 개척하신건가요?? 판도가 간지나네요 ㄷㄷ
메죽과 베리타스 모드에서 황무지 주변지역을 모두 점령하면 황무지도 자신의 땅으로 칠해집니다. (=개척되는건 아니고 클릭도 불가능합니다.) 메죽의 경우, 극후반에 기술발전 디시전을 이용해 땅으로 바꿀 수는 있습니다. 아직 사용은 못해봤지만요.
@The Count of Gelre 크흑 대박이군요 ㄷㄷ
여기도 문학가 한분 계시네요ㄷㄷ
게임 스피드가 좀 나오시나요? 도저히 못하겠던데...
나올리가요ㅠㅠ... 영원히 고통받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