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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를 회복하여 예슈아를 닮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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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언자가 죽어야 새언약이 유효한가?
예슈아께서는 새언약의 중보자로서 우리가 첫언약 때 범한 죄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즉 속량하고 구원하려고 죽으셨다. 그래서 영원한 기업을 약속으로 얻게 하셨다. 그러면서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효력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유언'의 헬라어 뜻은 원래 '계약, 언약'이다. 유언은 번역이므로 원래 뜻인 계약, 언약으로 생각해보자. 왜냐하면 17절에 계약자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계약이 유효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고 '그 사람'이 아니라 'men'으로 사람들이라고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내세의 언약이 유효하지 않다는 뜻이다.
또한 '유언'의 원래 뜻이 '계약'이고 계약자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새언약이 유효하지 않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계약자가 누구일까? 예슈아이실까? 우리는 과연 누구와 계약을 하는 것일까? 예슈아와 우리가 계약하는 것일까? 그래서 예슈아도 죽으시고 우리도 죽으셔야 새언약이 유효하다는 뜻일까? 여기서 분명히 해두어야 하는 것이 있다. 새언약의 그림자는 첫언약이다. 첫언약을 가지고 생각해보다. 첫언약의 계약자는 누구인가? 시내산에서 누구와 계약을 했는가? 이스라엘과 여호와께서 계약을 하셨다. 무엇으로 계약을 체결하셨는가? 동물의 희생제사이다. 그러면 새언약은 어떤가? 우리는 누구와 계약을 하는가?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럼 무엇이 그 계약을 가능하게 하는가? 예슈아의 희생의 피이다. 즉 계약자는 사람와 여호와시다. 그럼 예슈아는 계약자가 아닌가? 예슈아도 첫 언약에 속한 계약자이시기도 하지만 새언약으로 보면 그분은 중보자이신 것이다. 즉 새언약이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면 계약자가 죽어야 새언약이 유효하다. 효력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사람이 죽어야 내세의 언약이 유효하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도 죽으셔야 하는가? 그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계약 당사자이시지만 이미 내세에 속해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죽어야 하는 것은 육체를 입은 사람에게만 해당이 된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이름이 '야훼'로서 '존재하다, 스스로 계시다'이기 때문에 그분께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분은 죄가 없이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림자조차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계약자가 죽어야 계약이 유효하며 살아있는 동안 즉 첫언약에 속해 있을 때 범한 죄를 속량하려고 예슈아께서 새언약의 중보자로서 죽으셔서 내세에는 마침내 영원한 기업을 얻게 되는 것이다. 꼭 기억할 것은 우리가 이 땅에 있는한 영생은 약속이지 아직은 실제가 아니며 효력을 발생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약으로 하늘에 속했으나 동시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육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영생의 언약을 우리가 죽고 부활한 후 효력을 발생하는 것이다. 18절에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다'라고 번역하여 앞 구절이 예슈아의 죽음을 설명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러므로'의 원래 뜻은 종속 접속사보다는 '거기서, ~때'와 같이 부사로 많이 쓰인다. 만약 예슈아의 죽음으로 이해한다면 계약자가 죽어야 한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 왜냐하면 예슈아는 계약자가 아니라 중보자이기 때문이다.
2 죄는 예슈아의 희생을 헛되게 한다
예슈아께서 죽지 않으면 새언약이 유효하지 않다. 이유는 무엇일까? 히브리서 기자는 그 이유가 첫언약이나 새언약이나 피로 세운 언약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피가 없이는 언약이 체결되지 않는다. 예슈아를 통해 맺는 새 언약도 예슈아의 피가 없이는 체결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슈아의 죽음이 반드시 필요하며 그것을 통해 새언약이 체결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예슈아의 피의 그림자는 희생 제물의 피이므로 어떠할 때 그 피가 헛되게 되는지 알앙보자. 만약 회개하지 않고 희생 제물을 드린다면 그 예물은 헛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받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또한 희생 제물을 드리지만 계속 죄를 짓는다면 그것도 헛될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회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예슈아의 희생이 헛되게 된다. 또한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면 예슈아의 희생이 모독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것이다.
그럼 새 언약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옛언약이 말하는 것은 영생에 대한 약속이다. 그리고 새언약은 우리 마음(영)에 법도를 새겨 영생하게 하는 실제이다. 즉 옛언약의 성취인 것이다. 물론 예슈아께서 죽고 부활하기 전에는 우리에게 부활체를 물려줄 수 없고 또한 영생도 물려줄 수 없다. 먼저 예슈아께서 사망을 이기시고 영생을 유업으로 받아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다. 예슈아께서 먼저 구원의 창시자가 되셔야 우리도 뒤따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또한 유업은 영생이므로 죽어야 받을 수 있다. 죽어야 주실 수 있고 죽어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생은 사람이 죽은 후에 받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첫 언약 때는 영생을 언약으로만 받을 수 있었다면 새 언약 때는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3 피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피로 세운 언약이기 때문에 언약의 피라고 말한다. 동물의 희생은 사람과 하나님의 중보자 역할을 한다. 즉 땅에서 부정한 것을 씻고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첫언약에서 중요한 것은 희생의 피가 아니다. 언약의 내용이 가장 중요하고 순종이 중요하고 누구의 언약인지가 중요하다. 첫 언약은 여호와의 언약이며 토라로서 율법이다. 우린 동물의 피를 부각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피로 언약을 세웠다는 것은 그만큼 생명과 같이 중요하다는 뜻이지 동물의 피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순종위에 희생이 더해지면서 우리로 죄에서 벗어나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언약도 마찬가지이다. 새언약에서 중요한 것은 언약의 내용이다. 그 내용은 첫언약과 같다. 여호와의 토라(법도, 율법)이다. 물론 육체에 속한 것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지만 토라의 근본 정신인 사랑과 믿음과 소망은 영원할 것이다. 그때에도 예슈아의 피를 부각시키지 않는다. 예슈아의 피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순종할 때 예슈아의 피가 우리의 영에 부어져 정결하게 하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예슈아는 우리와 아버지의 중보자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순종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언약인 것이다.
4 장소와 시간이 다른 언약
첫언약은 모세를 통해 세운 언약이다. 이 언약은 희생 제물의 피로 세웠다. 왜냐하면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죄는 우리로 사망하게 하고 사망의 댓가는 생명이다. 사망에 상응하는 지불이 있어야 생명을 얻는 것이 토라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대신하여 희생 제물의 피를 받는 것으로 정하셨다. 그리고 그 피로 언약을 세우셨다. 피로 세운 언약의 뜻은 우리가 불순종하면 결국 우리의 생명을 드려야함을 말한다. 즉 순종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만 불순종은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피로 세운 언약의 뜻이다. 다시 말해 언약은 생명과 같다.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인 땅과 땅의 성소와 땅의 백성은 율법에 따라 동물의 피로 정결케 된다면, 하늘 성소와 하늘에 있는 것들과 하늘 백성은 더 좋은 제물, 더 좋은 피로 정결케 해야 한다. 즉 첫언약은 동물의 피로 땅의 것들을 정결하게 한다면, 새언약은 예슈아의 피로 하늘의 것들을 정결케 한다. 그러므로 예슈아의 피가 있으므로 동물의 희생 제물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사용되는 장소와 시간이 다르다. 동물의 희생은 땅에서 현 시대에, 예슈아의 희생은 하늘에서 내세에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대립하거나 중복되어 폐하지 않는다. 그저 실제와 그림자로 반드시 필요할 뿐이다.
5 더 좋은 제물이 되신 예슈아
땅은 하늘의 모형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육체는 부활체의 모형이다. 또한 땅의 성소는 하늘 성소의 모형이고 땅의 대제사장은 하늘 대제사장 예슈아의 모형이다. 그리고 땅의 제사장들은 하늘 제사장들의 모형이다. 모형도 정결케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잠시 입고 마침내 벗게 될 장막인 육체도 씻을 필요가 있는 것처럼, 하늘의 모형들도 씻어 정결케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땅의 법도가 있고 하늘의 법도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육체를 정결케 하기 위해 이 땅에서는 물과 피(희생제물)가 필요했다면, 하늘에서는 물과 피를 쏟으신 예슈아의 희생이 필요한 것이다. 이처럼 하늘에서는 땅에서 보다 훨씬 더 좋은 제물이 필요하다.
#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9:24-26)
6 예슈아께서 세상 끝에 오셨다
예슈아께서 세상 끝에 오셔서 새 언약의 중보자로 나타나셨다. 이는 세상 죄를 담당하시는 어린양이시기 때문이다. 즉 아브라함이 언약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 날에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일어날 자손을 위해 아담의 14대 손으로 예슈아께서 오셔서 죽으신 것이다. 예슈아를 통해 수 많은 이방인이 이스라엘로 접붙여졌다. 또한 마지막 때를 예언한 스가랴도 요엘 선지자도 일어날 것이다. 마지막 때를 본 다니엘도 일어날 것이다. 이처럼 예슈아께서는 세상 끝에 오셔서 모든 성도들의 언약을 이루는 중보자가 되신 것이다. 그런데 예슈아의 초림이 세상 끝인가? 당시 제자들은 세상 끝이라고 여겼다. 물론 구약의 끝이었다. 약속하신 메시아가 마침내 오셨다. 그후에도 2000년이 더 흐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슈아의 죽으심의 의미는 동일하다. 온 세상의 죄를 담당하시고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성도의 부활을 위해 오신 것이다. 그래야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 성취되고 선지자들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의 성취는 다니엘서의 성취이다.
7 희생 제사를 폐하셨는가? 율법이 충만한 세상
예슈아께서는 하늘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하늘 성소로 바로 들어가셨다. 땅의 대제사장은 여호와께 일년에 한번 나아가기 위해 매년 희생 제물을 드려야 한다면, 예슈아께서는 자신의 피로 언제나 지성소에 들어가실 수 있고 아버지와 함께 계실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예슈아께서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에 이제는 희생 제사가 필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슈아께서는 하늘의 제물이지 땅의 제물이 아니다. 하늘의 제물이 있다고 땅의 제물이 필요 없지 않다. 예슈아께서 대제사장이신 것도 하늘 성소이지 땅에서가 아니다. 하늘 성소가 있기에 땅의 성소가 필요 없다면 여호와께서 이 땅을 창조하지 않으셨어야 한다. 그러나 하늘 성소가 있지만 땅의 성소가 필요하며 부활체가 있지만 육체를 창조하신 것은 아버지의 특별한 뜻과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즉 땅의 성소와 하늘 성소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하는 것이다. 땅에서 유효한 언약과 그를 위한 피가 필요하며 하늘에서 유효한 언약과 그를 위한 피가 필요한 것이다. 땅에서 하늘의 것을 사용할 수 없고 하늘에서 땅의 것을 사용할 수 없다. 각각의 용도와 역할을 이해한다면 어느 것도 폐할 수 없으며 왜 필요한 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슈아의 피로 우리의 양심이 씻어졌기 때문에 죄를 모르는 온전한 자가 되어 여호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곳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 나라는 더 이상 죄가 없는 나라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우리가 죄인이고 불완전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결코 여호와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아직은 땅에 속한 자로서 육체의 예법이 필요하다. 만약 예슈아의 죽으심으로 성전이 필요 없고 희생 제물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면 예슈아의 이름으로 첫언약(율법)을 폐하는 것과 같다. 예슈아께서는 율법의 어떤 것도 바꾸거나 폐하러 오시지 않았다. 오히려 율법(언약)이 가득하고 충만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 영어로는 destroy 가 아니라 fulfil을 위해 오셨다고 말하고 헬라어 뜻도 ‘충만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다시 말해 율법이 가득하여 충만해지기 까지 현 세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마5:17-18). 우린 이 땅에 율법이 충만하게 가득 채워질 거라는 예언을 믿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슈아께서 왕으로 재림하셔서 율법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실 때 이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회복을 위해 일하는 성도들은 예슈아의 다시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같은 자들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Think not that I am come to destroy the law, or the prophets: I am not come to destroy, but to fulfil.)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For verily I say unto you, Till heaven and earth pass, one jot or one tittle shall in no wise pass from the law, till all be fulfilled.)
8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는가?
앞서 영생은 새언약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새언약은 첫언약에 진정으로 순종하는 자들이 예슈아를 통해 속량(구원)함을 얻는다고 했다. 그런데 한 율법사가 직접 예슈아께 질문했다.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합니까?" 이에 대해 예슈아께서는 하나님을 목숨을 다해 힘을 다해 뜻과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그러면 생명을 얻을 거라고 대답하셨다. 이 말씀은 신명기 말씀으로 율법의 강령이다. 예슈아의 이 대답은 진리이다. 여호와의 법도인 율법에 진정 순종한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 이것이 예슈아의 가르침이고 우리에게 보이신 본이었다.
예슈아께서는 목숨을 다해 여호와를 사랑하셨으므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드리셨고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셨으므로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다. 그럼으로써 자신도 순종으로 구원을 얻었고 또한 자신처럼 순종하는 자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고 모두 부활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한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이웃은 내 몸처럼 사랑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해야 한다. 자기 자신도 이웃도 하나님 보다 사랑한다면 그것은 죄이고 우상 숭배이다.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예슈아께서 몸소 보이셨다.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 영생을 주는 믿음은 바로 예슈아께서 보이신 믿음이다.
#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9:25-28)
9 단번에 제물이 되신 이유
예슈아께서 자신을 제물로 단번에 드리셨다는 뜻은 무엇일까? 단번에 제사를 성취하여 이제는 희생 제물이 필요없다는 뜻인가? 그것이 아닌 것을 앞에서 살펴봤다. 단번에 드려지신 이유를 히브리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고 그래서 예슈아께서도 단번(한번)드려지셨다고 말하고 있다. 즉 예슈아께서도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한번만 죽으실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수많은 종교는 윤회설을 말한다. 요즘 많은 사람이 '다음 생애에는...'이라는 단어를 쓴다.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런 비성경적인 단어를 쓰고 있다. 심지어 히브리 철학이라고 알려져 있는(사실은 바벨론 철학이다) 카발라도 윤회설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윤회설을 말하는 카발라는 성경적인 철학이 아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사람은 단번 죽는 것이 정해졌다. 만약 사람이 또 태어나고 또 태어난다면 단번이 아니라 여러 번 죽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한번 태어나고 한번 죽는 것이 창조주께서 정하신 법도(토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오신 예슈아께서 단번 태어나서 단번 죽으신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여기서 ‘단번’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한번’이라는 뜻이다.
초림에는 예슈아께서 심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죄에서 벗어나 순종하게 하려고 즉 구원을 준비하게 하려고 오셨다면, 재림에는 심판을 위해 오신다(요12:47). 그러므로 그때에는 죄와 상관없는(원어의 뜻: 죄가 없는, 죄와 분리된, 죄와 떨어진)자로 그분 앞에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이 영생을 유업으로 얻는다. 그것이 구원의 성취이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요12:47)
샤밧 예배: 토요일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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