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즈, 左派 新自由主義, 혹은 社會民主主義
1997년 이후의 ‘카드발행남발’에 의한 반짝 경기의 여파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서민의 고통을 위해서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바탕에 대해서, 언뜻 바라보면 이러한 생각이 한국인의 정서에 맞기 때문에 자주 옹호되었다.
외환위기 탈출을 위한 ‘반짝경기부양책’ 시절의 일반인의 교양 지식의 한계선은, 피상적인 수준에서의 ‘대공황탈출’의 영웅으로서의 ‘케인즈’가 강조되었을 뿐이었다. 민주당 서울시장 선거에서 ‘조순서울시장후보’의 대중적 인기가 ‘케인즈’경제학에 대한 깨끗함의 보증수표가 되기도 했다. 한국의 자유주의 경제학 진영에서 ‘자유로운 기업행위를 억누르는 차원’의 상징으로서의 케인즈 경제학 비판을 하면서 좌파적 상징이라고 지적했으나, 잘 와닿지를 못했다.
“그는 한 평생 보수당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케임브리지 학생 시절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고 한다. 지금 가난과 곤궁 속에서 생활하는 한 마을이 있다고 하자. 이 마을을 구경한 전형적인 보수당원은 ‘매우 비참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구제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자유당원은 ‘이것은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보수당과 자유당이 서로 다른 점이다. (중략) 그는 보수당은 지성도 능력도 없이 단지 재산과 가문으로 사회지배층으로 자리잡은 완고한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하고, 자유당은 영국 중산 계급의 지성을 대표하며 인간의 지성과 노력으로 사회를 혁신해가는 사람의 모임이라고 생각했다.(이토 미쓰마루, 김경미 역, [존 케인스], 소화, 2004. 47쪽.)”
일 잘하는 박정희대통령의 ‘가난극복’을 위한 일을 존중했던 보수파는 자연히, 가난한 자들에 아무런 지원도 말아야 된다는 자유주의 경제학 분야의 지적들을 참고용으로만 듣게 되었다.
“소비자는 몇 퍼센트 저축할지 결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저축의 총액은 결정할 수 없다. 움직이는 것은 소득(생산고)이라는 이와 같은 케인즈의 이론은, 저축을 늘리려고 하는 개인의 노력은 경제 규모를 축소시키고 소득을 낮춰 결과적으로 실업을 만들어낸다는 지금까지 생각해 내지 못했던 결론을 이끌어 냈다. 저축은 미덕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같은 사고가 경제사상사에 준 영향은 실로 큰 것이었다.(앞의 책, 131쪽.)”
외환위기 직후에 ‘저축’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라며 ‘소비’를 장려하던 ‘국가경제학’은 케인즈경제관의 설계에 따른 것이다. 직업의 갑작스러운 축소사태에 맞이하여, 직업 늘리기 캠페인을 마련해야 하는 김대중 정부가 ‘케인즈경제학’의 유혹에 빠진 것은 이해가 될 수도 있다. (1) 소비성향을 높이며 저축성향을 낮추고 (2) 이자율을 내려서 민간투자를 늘리고 (3) 이자율이 내려도 안되면 공공 투자를 해야 한다는 발상(앞의 책, 151~152쪽.)의 처방은, 철저하게 케인즈적이었다. 이전까지의 통념으로는 불경기와 같이 어려운 때에 낭비를 줄여라 하고 했겠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검약’하면 고통을 가중시킨다(앞의 책, 161쪽.)는 것이 케인즈의 이론이었다. 그러나, 총수요가 갑작스레 증가된 만큼, 총수요가 줄어드는 더욱더 오랜 침체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총수요를 늘리기 위하여 10대 중고생들에게도 ‘잘 놀아라’라는 교육정책을 썼음은 공공연한 비밀일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정부의 케인즈 이론 적용은 중화학공업 분야의 중복투자를 허락했다. 케인즈 이론의 적용에서 중복투자의 남발은 필연적(185~186쪽)이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정부는 ‘인터넷’ ‘부동산’ ‘요식업’의 국민적 중복투자를 남발시켰다. 수익성 좋지 못한 허울좋은 ‘직장’확보를 위한 총수요 팽창 전략에서 그친 바가 결코 아니다. 여기까지는 좌파 정부의 경제관에 대해서 국민들이 흔히 알면서 비판 가능한 부분일 것이다.
30년대 대공황 탈출의 케인즈 이론은 2차 대전 이후에 유럽 경제 지원을 통해서 미국이 유럽을 소련 손에 빠뜨리지 않는 중요한 이론이 되었다.(필립 암스트롱 외, 김수행 역,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 동아출판사, 1993. 참조) 그러나, 196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서 ‘실업’이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문민정부 이후에 한국의 자유주의 경제학자가 주장하는 바는, 이 무렵에서 ‘하이에크’이론을 붙들고서 경제난을 헤쳐 나간 ‘대처’와 ‘레이건’의 선택을 택하는 것이 된다. 국가가 많은 일을 하면서 경제 활동을 억누르면 억누를 수록, 불황의 시간이 더욱 더 길어진다는 입장을 택한다. 프랜시스후쿠야마의 [강한국가의 조건]에서 드러난 신우파(뉴라이트)는 경제면에서의 ‘신자유주의’는 인정하면서, 9*11이후의 최대한으로 강화된 국가안보 라는 경제외적 면에서의 고전자유주의 입각한 국가강화를 택했다.
국가의 불황 탈피를 위한 많은 행위는 ‘공공복리’란 전제의 자유경제 억압을 정당화한다. 특히, 국가가 공공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재원을 요구한다. 갑작스레 해고 당했을 때도 버틸 수 있는 넉넉한 복지와 ‘대중적 차원의 소비진작’을 요구하는 바에서는, 각종의 세금 폭탄을 만들 수 밖에 없다. ‘세금폭탄’은 정치적 무기로서 기득권층의 숨통을 조르는 좌파정권의 무기가 된다.
‘분배’냐 ‘성장’이냐는 이분법은 옳지 못하다. ‘성장’이 옳다 쳤을 때 ‘분배’의 필요성은 짧은 기간의 달콤함으로 긴 시간의 정체성을 가져다 준다는 국민적 설득이 가능해야 한다. 국가적 구심력에서 ‘가난 탈출’의 지도력을 신뢰하는 배경에서, 막연하게 ‘케인즈’경제학에 대하여 비난하며 그것에 타협하는 한나라당에 비난하는 우파 시민단체도 문제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경제적 시민주체의 ‘경제적 발전’이 커녕 퇴락과 쇠퇴를 바탕한 경제정책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으려면, ‘근면 검약’의 경제주체가 성공한다는 입장이 주어져야 하고, 경제곡선의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만 실질적 경제위기 극복이 이루어진다는 공감대가 주어져야 한다.
미국의 랜드연구소 계산의 4천억달러(한화로 얼마인지 계산이 안 나옴)의 통일비용을 짜내기 위해서는, 한국의 실물경제의 ‘현금’을 말라붙게 하는 막강한 ‘세금폭탄’이 향후로도 대단히 강화될 것으로 사료된다. 경제적 규제탈피로서의 외형은 실제로는 ‘국가주의’를 벗어버리려는 ‘좌파’제스처에 급급하다면, 헌법에서 기록된 헌법 1조 1항의 ‘민주공화국’이란 말에서, 그 동안 생각지 못했던 불쾌한 변태적 해석으로서의 다른 면모가 강화된다.
서민이 직업을 갖지 못해서 고통 받는 순간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만큼 대중사회의 서민이 바라보기에 가혹한 게 없지만, 그렇다고 경제주체의 인간적 발전을 퇴락시키는 분배주의의 미래를 암울하게 보는 경제관은 전적으로 옳다. 대한민국 국민의 ‘세금’에 의존하는 북한 경제의 인프라 갖추어주기보다는, 북한 경제의 자유화를 통한 내부의 자유경제 부의 창출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자유경제 지수가 상승되는 상황에 맞춰서만 지원을 하는 식의 억압이 마땅한데, ‘공산독재국가’ 지도자를 개혁적으로 길들이는 바탕을 하려할 생각이 없는 현재의 좌파 정부는 문제가 많다고 사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