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계장 / 이사과
엄마가 날 연변 근처 양계장에 맡겼을 때 양계장 아저씨는 삼천 위안에 고려인을 데려왔다며 좋아했어요 엄마는 두 시간 거리인 도시로 떠났구요 돈을 모으는 대로 국경을 넘기로 했지만 맨드라미꽃이 질 때까지 오지 않았죠 그해 마을엔 폭설이 잦았고 전기가 나갈 때마다 닭들이 무더기로 죽어갔어요 폭설에 장화신은 아저씨들이 드나들면서 내 방엔 먹을 것들이 늘어났죠 눈 녹은 뒤뜰에 나는 지난해 받은 맨드라미 씨를 묻었어요 맨드라미 붉은 볏이 가슴을 찢고 개화할 무렵엔 부스럼이 심한 딸을 낳기도 누군지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마을의 누구도 닮지 않았으므로 병든 닭처럼 나만 구구거렸죠 그러거나 말거나 또 다시 눈이 내렸고 닭벼슬의 피가 온 마을을 물들인지 몇 해가 지나서야 십 년은 늙은 엄마가 갈래머리 아이를 데리고 양계장을 찾아왔어요 누군가 한 명은 남아야 했기에 나는 갈래머리 아이에게 맨드라미 파종법을 알려 줬어요 그뿐이었죠
맨드라미꽃이 필 무렵 만나기로 하고, 우린 젖은 달빛에 발자국을 찍으며 걸었어요
- 2024년 평사리토지문학대상 시 당선작 ----------------------------------
* 이사과 시인 2024년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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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목적은 서정이거나 서사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무엇인지 알려주며 더 나은 삶을 만드는데도 있다. 빈곤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도움이 필요하다. 스스로 게을러서 혹은 일을 하기 싫어서 처하게 되는 빈곤은 제쳐두더라도, 정말로 일을 하고 싶으나 일을 하지 못할때, 혹은 몸이 온전하지 못해서, 또는 상황이 그럴 때 우리는 그런 구조적인 문제에는 강력하게 개입해야한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관해 마땅히 받아야할 대우를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야만의 장소다.
이 세상은 오로지 남자들의 세상이었던 적이 많다. 권력을 쥔 자들의 횡포는 언제나 약자를 양성하고 그들을 무릎꿇게 만들었다. 모든 이념이나 종교도 권력의 편에 서서 약자를 무시해온 것이 사실이다. 며칠 전 신문에 이슬람권에서 히잡 밖으로 머리카락이 나와서 단속을 당한 여대생이 속옷 바람으로 대학교 교정을 거닐었다. 그러자 검은 승용차가 나타나 그녀를 태우고는 사라졌다. 한때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여대생들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검은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휘날리며 걸었다. 그때도 이슬람 교리는 존재했다. 권력을 누가 쥐느냐에 따라서 교리는 변한다. 그러므로 종교 교리는 힘있는 인간 앞에 언제나 굴복한다.
이처럼 생생한 폭로 시를 본 적이 없다. 이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는 차분하다 못해 너무 조용하다. 도무지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상상도 못하겠다. 다만 폭설이 잦았고 또 폭설이 내릴 뿐이다. 시인의 항변은 체념 조다. '또다시 눈이 내렸고', '그뿐이었죠'라는 말에서 일상성과 반복성이 드러난다. 맨드라미 꽃씨를 뿌리는 아이가 우리의 딸이자 누이가 아닌가? 그래도 그뿐인가? 그저 눈이 내리니까 그 폭설을 그냥 맞고 있어야 하는가?
고작 60만 원도 안 되는 인간의 몸값이라니, 어디 이곳뿐인가? 세계는 언제나 이런 일에는 침묵한다. 그러나 시인은 침묵하지 않는다. 이 시를 통해서 눈을 뜨는 이들이 많기를 바란다.
- 홍정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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