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문의 아름다움은 짧은 문장 속에 품고 있는 깊은 뜻에 있습니다. 한 문장 안에 시간을 초월한 역사를 담고 있기도 하고 한사람의 인생이 통째로 담겨 있기도 하지요. 언어 중에서 메타포가 가장 적합한 언어가 한문입니다. 때로는 모호하기도 해서 사람마다 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것도 또한 한문의 매력적인 점입니다.
당나라의 시인 왕유(王維 699-761)의 한강림조(漢江臨眺)라는 시의 멋진 구절이 생각납니다.
江流天地外(강류천지외) 강물은 아득히 멀리 흘러가는데
山色有無中(산색유무중) 산그림자는 있는 듯 없는 듯하다
어떻게 풍경을 이렇게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을까요?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이 생생히 떠오를 정도입니다. 아득한 산그림자를 산색유무중(山色有無中)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정말 멋지지요. 왕유보다 한 100 년쯤 후의 당나라 시인인 이하(李賀 791-817)는 신현(神弦)이란 시에서 神兮長在有無間(신혜장재유무간), 신은 유와 무 사이에 있다고 했습니다. 역시 멋진 구절입니다.
중국의 삼대시인으로 이백, 두보, 왕유를 손꼽는데 일각에서는 4대 시인으로 이하를 추가하기도 합니다. 이백 두보는 두 말이 필요 없는 시인들이고 왕유는 풍경묘사에 탁월했습니다. 이하는 26살에 요절한 시인인데 아주 특이한 시를 썼습니다. 염세적인 시선으로 유령과 귀신에 대한 기괴한 시를 많이 썼지요. 내용은 그렇지만 문장은 탁월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화두를 던져 준 표현 중의 하나는 空山無人 水流花開 (공산무인 수류화개) 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빈 산에 인적 없고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 산을 좋아하는 저는 상상만 해도 즐겁습니다.
이 구절의 정확한 유래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치 선승의 화두처럼 무언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어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표현을 인용하여 작품을 남겼습니다. 여러 자료를 참조하여 정리해 보았습니다.
중국 송나라 시인인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의 시 <水流花開>에 이 구절이 온전한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스승인 소동파의 시구를 인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水流花開
萬里靑天(만리청천) 만리 푸른 하늘에
雲起雨來(운기우래) 구름이 일고 비가 내리네
空山無人(공산무인) 빈 산에 인적 없고
水流花開(수류화개) 물 흐르고 꽃이 피네
담백하고 좋은 시입니다. 황정견은 소동파의 수제자였습니다. 송(宋)나라의 대문장가 소동파(蘇東坡1037-1101)는 당(唐) 나라의 선승 정현이 그린 18 나한상 모습을 보고 <십팔대아라한송>을 지었는데, 그 중 아홉 번째 게송에 空山無人 水流花開 구절을 활용하였다 합니다.
선불교에 심취한 소식은 어느 날 대선사로부터 시인은 인간의 소리만 듣지 말고 자연의 언어도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화두를 받고 크게 깨우쳤다고 합니다. 그는 ‘계곡물 소리가 곧 부처님의 설법이요, 산의 경치 그대로가 부처님의 법신이로다’라는 유명한 선시를 남겼습니다.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화두가 생각납니다.
空山無人 水流花開 는 당나라 때부터 민간에 즐겨 썼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예전부터 문인들이 자주 언급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법정(法頂)스님도 글을 쓰거나 설법을 할 때 수류화개를 자주 말씀하셨고 추사 김정희(金正喜)도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수류화개 표현을 썼지요.
인간 세상의 삶에 지친 사람들의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일종의 귀소본능이 아닐까 합니다. 요즘 티비 프로그램 <자연인>이 인기있는 것도 같은 이유이겠지요. 사실 인적 없는 자연 속에 가고 싶고, 살고도 싶지만, 막상 가서 살면 외롭고 쓸쓸합니다. 세상사 양면성이 있어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지요. 가끔씩 가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조선시대 후기 화가인 최북(1720~ )의 대표작 중에 공산무인도(空山無人圖)가 있습니다. 계곡에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 있는 산 중에 초가 정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사람은 없습니다. 산봉우리는 보이지 않는 산 속의 모습입니다. 작품 왼쪽 상단에 空山無人 水流花開(공산무인 수류화개)라는 글이 보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생각은 천년이 넘어도 이어져갑니다.
저는 사실 이 그림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최북이라는 사람이 좀 특이한 성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공산무인 수류화개라고 크게 써 놓았는데 그 뜻은 제대로 이해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도 합니다. 우선 정자가 너무 큽니다. 사람은 없지만 길도 너무 크게 그렸네요. 또 글씨도 너무 큽니다. 낙관은 그림의 중앙에 찍었군요. 정자, 길, 글씨 그리고 낙관 모두 사람에 관한 것들입니다. 그림에 사람의 흔적이 가득 차 있습니다. 계곡과 물은 저 한쪽 구석으로 밀어 버렸네요. 그림 어디를 봐도 공산무인 수류화개의 정신은 없습니다. 저는 특히 낙관이 중앙에 있는 것이 거슬립니다. 사실 저런 집도 있으면 안되겠지요. 이런 그림을 그리고 공산무인 수류화개를 써넣은 것은 좀 이상합니다. 오만하고 겉 멋에 치우친 작가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전부 제 개인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