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이광은 감독이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지서 빼놓지 않고 다니는 게 한가지 있다.
점퍼 깊숙히 안쪽 주머니에 꼭꼭 숨겨둔 메모장. 여러번 망설이며 슬쩍 첫 페이지를 보여준다.
눈에 잘 들어오도록 빨간 글씨로 적은 스페인어가 빼곡하게 차 있다. 이감독이 발음 나는대로 한국말로 적은 것이다. ‘무차스 그라시아스’ 등 간단한 인사말부터 식사 용어까지 수십개의 문장이 나열돼 있다.
남미쪽에 출장을 많이 다닌 경험이 있는 김연중 운영부장과 멕시코리그에서 뛰었던 외야수 최경환에게 물어물어 알아냈다.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도미나카 공화국 출신의 새 외국인선수 발데스(35ㆍ투수)를 위한 ‘학습장’이다.
이감독은 훈련장인 이시가와구장에서 검은 얼굴에 4각이 진, 어디 만화에서 본듯 재미있게 생긴 발데스만 보면 슬쩍 미소를 띄우며 수첩부터 꺼내든다.
짐짓 놀란 발데스는 더듬더듬 고향말을 쏟아내는 이감독을 보고서야 ‘수첩의 비밀’을 알게 됐다.
그렇다고 발데스가 스페인어만 구사할 줄 아는 것은 아니다. 클리블랜드, 애리조나 등 메이저리그에서 오랫동안 활약했기 때문에 영어도 유창하다. 미국 출신의 해리거, 로마이어와 대화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냥 영어로 얘기하면 되지 않느냐”고 묻자 이감독은 “듣는 사람이 얼마나 기분이 좋겠느냐”고 말한다. 새 식구, 그것도 향수에 젖기 쉬운 외국인선수에 대한 세심한 배려다.
오키나와에 도착하기 전 한국에 딱 하루동안 머물면서 너무 춥다고 정신을 못차리던 투박한 얼굴의 발데스. 그에게 이방인 사령탑은 휴양지 오키나와의 햇살처럼 따뜻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 오키나와(일본)=양정석 특파원 js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