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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디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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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사람 스크랩 송정근(宋貞根) 감리회 서부연회 마지막 순교자
섬김이 추천 0 조회 33 19.08.27 00: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송정근(宋貞根) 감리회 서부연회 마지막 순교자

1. 서론

송정근(宋貞根) 송정근 목사의 일생을 우리는 3기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첫째는 출생과 학업기요 둘째는 젊은시절의 목회기며 세째는 반종교 세력에 대한 저항기 등인데 이 저항기는 다시 (ㄱ) 일제에 항거한 기간(1942-1945.8)과 (ㄴ)북한 공산정권에 항거한 기간(1945.10-1950.10)으로 나누어야 할 것이다.

2. 출생과 학업기

송정근 목사는 1895년 1월 12일 황해도 서흥군 도면 도리에서 송경호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회덕이오 호는 해심이라고 하였다.

그는 6세시까지는 부친에게서 천자문을 읽었고 7세 때부터는 마을 서당에서 소학,대학,논어,맹자를 배운 후 황주군 흑교면 용연리에 있는 양몽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양몽학교 설립자는 마ㅍ선교사였고 1912년 당시 교장은 정명리였으며 학제는 보통과 4년 고등과 3년제였다. 소년 송정근은 1913년 양몽학교 고등과를 졸업했다. 그는 계속하여 평양 숭실중학교에 들어가 1917년 3월에 졸업하였고 그해 4월 같은 학교 교원학습과에 입학하여 18년 3월에 수료한 후 2년간 소학교 교원을 지냈으며 1920년 4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 수료한 후 일시 휴학을 했다.


1920년 10월에서 1922년 12월까지는 장로회 조사 일을 보았고 1923년 5월부터는 감리교히로 이전한 후 김천구역자으로 시무하면서 같은 해 12월 1일에는 전도사 직첩을 받았으며 1925년 4월부터는 토산구역장으로 전임 시무했다.

1924년 3월 그는 김천구역장으로 시무하면서 서울 감리교회 협성신학교 제2학년에 편입하였고 1927년 3월 토산구역장 재임중에 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신학교를 졸업한 그해 9월 8-13일까지 종교교회에서 모였던 제10회 한국 남감리회 매연회에서 에인쓰워드 감독으로부터 집사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양양구역장으로 전임 시무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송목사 거취에 관하여 두가지 문제가 제기됨을 느낀다. 하나는 엄격한 유교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가 어떻게 기독교에 들어오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요 다른 하나는 장로교계의 양몽학교와 숭실학교 등을 거쳐 평양신학교 1년을 수려한 후 조사일까지 보던 이가 어떻게 감리교회로 교파를 옮겼을까 하는 점이다.


첫째, 그의 이력서에 의하면 1905년 5월 23일에 세례를 받았다고 했다. 1905년이라면 그의 나이 11세가 된다. 11세 때에 세례를 받았다면 일찌기 부모가 기독교에 들어와 신자가 되었던가 아니면 최소한 어머니가 교회에 다니며 어린 아들을 데리고 다닌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더우기 살던 곳에서 10리 상거에 용연리 교회가 있었고 용연리교회에서 양몽학교를 경영했으니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닌 것이 양몽학교에 들어가게 된 동기라고도 볼 수 있다.

둘째, 그가 어떻게 장로회에서 성장하고 평양신학교 1년을 거쳐 장료회 조사로까지 일하다가 감리교회로 전향한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알 도리가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감리교단을 통해 그를 크게 쓰시려고 교파를 옮기게 했다는 것을 알 따름이다.

2. 젊은 시절의 목회기

1927년 집사 목사로 안수를 받은 송목사는 같은 해 양양구역장으로 옮겨 시무한 후 1929-1932년까지는 고저구역장 1932-1935년까지는 고성구역장,1935-1937년까지는 서부연회 진남포지방 비석리구역장,1937-1943년까지는 강서구역장과 강서지방감리사로 시무하였다.

한편 송정근 목사는 양양구역을 거쳐 고저와 구성구역에서 시무할 때에는 이미 한 구역 목사가 아니었다. 지방 목사였고 연회목사였다. 1930년에는 원산지방 엡윗청년 협회회장으로 지방 각 교회 청년운동을 지도해야 하였고 같은 해에 조선기독교절제회 원산지방 담당위원으로 1년에 1개월씩은 고저항,오류리,거록리,전천리,포항리,석상리,도일리,아산,포천리,구항리,옥마리,자산리,어운리,명고리,사호리,등 교회로 순회하며 금주 금연에 관한 강연을 해야 했으며 원산지방 종교교육협회장직도 맡아 지방적인 종교교육 사업도 지도해야 하였다. 1930년 9월에 모인 남감리교 매연회에서는 원산루씨여자고등 보통학교 이사로 피선되었고 원산성경학원 강사로 초빙되어 교단에도 서야 하였다.

1935년 4월 7일 오후 1시 고성읍교회에서 송목사의 성역 15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는데 그 기념식에서 보고된 송목사의 업적을 소개하면,
(1) 신설교회 7개처
(2) 신축 예배당 9개처
(3) 유치원과 학원 설립 7개교
로 기록되어 있다. 아무리 외형적인 보고라 하더라도 교역 15년에 이룩한 사업으로는 큰 것이 아닐 수 없다.

그가 1935년-1943년까지 진남포 비석리 구역과 강서읍 구역을 시무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1935년에서부터는 예수교서회(현대한기독교서회)이사로서 출판사업에도 관여하였고 강서읍 구역담임 시절에는 지방 감리사로,연회실행위원으로 그리고 총회 총대로 활약했다. 그는 어느덧 한국교회 목사로 성장했던 것이다.

3. 송목사의 저항운동

(ㄱ)왜정당국에 저항하는 송목사

중일전쟁과 미일전쟁을 도발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국에서 신학교 폐쇄,선교사 추방,그리고 1941년에는 친일 목사들을 조종,감리교 총회를 열게 한 후 감독을 통리자로,연회를 교구로,감리사를 교구장으로 목사를 교사로,담임자를 주관자로 개혁시켰다. 동시에 한국 교인들에게 신사참배 동방요배,구약폐지,찬송가 개정,일본어 설교 등을 강요해 왔다. 거기에 일부 한국의 친일 목사들은 신사참배,종바치기 국방헌금 모으기 등으로 앞장서 다니기도 하였다.

송목사에게는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여 그들 친일행위에 동조하지 아니했더니 목사직 정지 처분을 내렸다가 1년만에 복직 통지가 내려왔다. 그것이 1943년 강서읍구역에서 시무할 때였다.


1944년 일제의 패전을 앞둔 시국은 점점 다급해 왔다. 거기에 따라 날뛰는 감리교회 친일 교권자들은 일제에 항거하고 있는 목사들을 가만둘리 없었다. 서울에 있는 양주삼,류형기 등을 비롯하여 평양 이윤영,이환신,배덕영 목사를 목사직에서 파면시킬 때 송목사도 같이 파면을 당했다. 그러나 송목사는 올 것이 왔다는 담담한 심정으로 왜정 당국에 눈을 피해 고향인 황해도 서홍 시골로 숨어 버리고 말았다. 8.15 해방이 올 때가지 농촌에서 호미들고 김을 매며 지났던 것이다.

(ㄴ) 공산정권에 순교하는 송목사

1945년 10월 평양 남산현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하자 평양지방에서는 그를 감리사로 선택하였고 동부연회 철원지방과 원산지방까지 포함된 서부연회에서는 그를 연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송목사에게는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담임자로서는 우선 1939년에 화재로 전소된 남산현교회 성전을 건축해야 하였고 감리사로서는 왜정 말년에 폐쇄시켰던 채관리,박구리,선교리,외신리,서평양교회 등을 재건해야 했으며 연회장으로서는 종래 감리교회에서 경영하던 광성,정의 두 고등학교를 비롯하여 평양 기독병원, 해주 구세병원,원산루씨여고,원산 구세병원,영변숭덕학교 등도 수습해야 하는 동시에 교역자 파송,목사 안수등 감독의 권한을 수행해야 하였고 북한지역 교역자 양성을 위해 박대선,배덕영 등과 설립한 성화신학교에 이사장의 중책도 맡아야 했다.

물론 교단 내부의 책임도 중한 것이었지만 공산주의자들과 투쟁해야 하는 외부의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송목사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또는 전가함도 없이 다방면으로 대처해 나아 갔다.


1946년 3월 1일 해방 후 처음 맞는 3.1절 기념행사는 공산정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각 교파연합으로 장대현 교회에서 모이는데 전력을 다했고, 주일 선고에는 직접 공산주의자들과 투쟁했으며,미소공동위원회를 북한에서 모일 것에 대비하여 조직된 기독교 민주당에는 창당위원으로 참예하여 부당수에 취임했다가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갖은 악형을 당했다.


마침내 1950년 6월 24일 공산 괴뢰들은 6.25 전쟁 도발을 하루앞두고 교회 지도자들과 우익진영 인사들을 총 검거할 때 송목사도 체포되었다. 같은해 10월 10일 국군의 평양 입성으로 총퇴각해 가는 공산군에 의해 살해,순교하였다. 그는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갈대 [나는 이제 가면 다시 돌아올 것 같지 않으니 예수 잘 믿고 믿음으로 승리하라]는 말을 부인과 자녀들에게 남기고 갔는데 정말 그 길이 마지막 길이었던 것이다.(윤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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