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길 金柔吉 (1919-2022)】 "945년 5월 한국광복군 제2지대원으로서 OSS 독수리 작전 훈련 참여"
1919년 2월 4일 평안남도 평양부(平壤府)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평안남도 평원군(平原郡) 청산면(靑山面) 운송리(雲松里) 16번지이고, 이명은 이영삼(李英三)이다.
평양 숭덕학교를 다니다가 안주로 이사가 안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여기서 안주공립중학교를 마친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43년 큐슈(九州) 오이타(大分)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평양에서 서선전기회사에 다니던 중,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1월 20일 강제 징집되었다.
평양에 있는 일본군 보병 제39여단 제42연대 보충대(속칭 평양 제42부대)에 배치되어 있다가 2주일 뒤 중국 쉬저우(徐州)로 이동하여 중지파견군 제7997부대로 전속되었다. 중국에 파견된 지 두 달만인 1944년 5월경 김영호(金榮鎬)와 함께 일본군 병영을 탈출하였다. 어느 마을에서 중국군 소속의 유격대에 붙잡혔으나 한글 책자를 보여주여 간신히 풀려났다. 이후 보름여를 걸어 안후이성(安徽省) 린취안(臨泉)에 도착하여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였다.
입대 후 후일 광복군 제3지대로 개편되는 김학규(金學奎) 지대장 휘하 징모 제6분처에서 운영한 한국광복군훈련반(韓國光, 復軍訓練班, 일명 한광반)에 제1기로 입교하였다. 한광반은 안후이성 푸양(阜陽)을 중심으로 초모된 한인 청년들과 일본군을 탈출한 학병들을 대상으로 교육과 훈련을 실시한 간부훈련반이었다. 한광반에서는 군사훈련과 정신교육을 받았다. 군사훈련은 제식훈련이 중심이 되었고, 정신교육은 한국독립운동사와 항일정신 및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1944년 11월 한광반 제1기 교육훈련 과정을 마치고, 광복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임관 후 충칭(重慶)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갈 것을 희망하여 1945년 1월 21일 교관 신송식(申松植)의 인솔 하에 동료 53명과 함께 린취안을 출발하여 같은 해 1월 31일 충칭에 도착하였다. 충칭에서는 임시로 토교대(土橋隊)에 편입되어 있었다. 당시 토교대는 한광반 출신들이 부서 배치 전까지 대기하던 보충대였다. 토교대에서 머물다가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李範奭)의 요청으로 장준하(張俊河)·김준엽(金俊燁)·노능서(盧能瑞) 등과 함께 광복군 제2지대로 배치 받았다. 이후 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 제1분대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4월 말 이범석 지대장과 함께 미군 수송기를 타고 시안(西安)으로 가서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훈련에 참여하였다. OSS는 적 정보수집, 유격대 활동, 후방 교란 등을 주요 임무를 수행하던 일종의 전략첩보기구(戰略諜報機構)로서, 대일첩보작전을 수행하고자 한국광복군과 함께 한반도에 진입하는 작전을 세웠다. 이 작전이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이다. OSS 교관들은 광복군 제2, 3지대 대원들을 대상으로 독수리 작전 훈련 요원들을 선발하였다. 이에 일주일간 예비훈련을 받고, 자질과 적성 검사를 받았다.
예비훈련 후 1945년 5월, 무전반에 편성되어 첩보공작을 위한 정규훈련을 받았다. 이때 통신교육 외에 암호해독, 심리전술, 독도법, 야전훈련 등 다양한 과목을 이수하였고 1945년 8월 4일에 약 3개월간 진행된 OSS 제1기 훈련을 수료하였다. 8월 7일 광복군 요원들을 한반도에 침투시켜 OSS와 공동으로 첩보활동을 전개한다는 한국과 미국 간의 공동작전이 선언되자,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 경기도반 3조에 편성되어 국내진입작전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중, 8월 9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조기 항복하자 국내진입작전은 무산되었다. 광복 후 귀국하였고, 이후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과 광복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