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의 기도성지
1. 삼 보 사 찰 우리나라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수많은 절이 있다. 그 중에서도 신앙의 근본이 되는 삼보사찰을 존중하여 왔다. 삼보(三寶)는 불교에서 귀히 여기는 세 가지 보물이라는 뜻으로 부처님(佛)과 부처님이 설하신 법(法),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스님(僧)을 말하는 것이다.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으므로 불보(佛寶)사찰, 해인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판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법보(法寶)사찰, 송광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한 스님들이 열 여섯 분이나 나라에서 내리는 국사(國師)의 지위에 올랐으므로 승보(僧寶)사찰이라고 한다.
사찰을 참배할 때 처음 만나게 되는 안내판에 목조 건축물에 대한 용어가 적혀있으나 이해하기 힘들어, 그 이해를 돕기 위해 많이 사용되는 건축물에 관한 용어중심으로 살펴보자. 용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용어사전을 참고하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불보사찰 통도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하여 불보사찰이라 불리는 통도사의 절 이름은 ‘만법을 통달하여 중생을 제도하라(通諸萬法度濟衆生)’의 머릿글자에서 따왔다고 한다. 통도사는 흔히 ‘불지종찰(佛之宗刹)’ 부처님의 으뜸 가는 사찰이요, ‘국지대찰(國之大刹)’ 나라의 큰절이라는 현판이 일주문에 걸려 있다.
불지종찰(佛之宗刹) 통도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하여 불보사찰(佛寶寺刹)이라 불리는 통도사의 절 이름은 ‘만법을 통달하여 중생을 제도하라(通諸萬法度濟衆生)’의 머릿글자에서 따왔다고 한다. 통도사는 흔히 ‘불지종찰(佛之宗刹)’부처님의 으뜸 가는 사찰이요, ‘국지대찰(國之大刹)’나라의 큰절이라는 현판이 일주문에 걸려 있다. 이는 불교에서 소중히 여기는 삼보 중에서도 석가모니 부처님이야말로 불교 교단의 창시자요, 모든 중생의 스승으로서 불교의 중심을 이루기 때문에 그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통도사는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받들어 지는 곳이다. 통도사가 위치하고 있는 취서산(鷲棲山)은 영축산(靈축山)이라고도 한다.
영축산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화경> 등 많은 설법을 하신 인도 마가다 왕국의 수도 왕사성의 동쪽에 있는 영축산과 모양이 비슷하다 하여 그렇게 불린다고 하며,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앉은 모습과 흡사하다 하여 취서산이란 이름도 갖고 있다. 통도사는 서기 643년 신라의 대표적인 고승인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에 의해 창건되었다.
신라 귀족인 진골 무림(茂林)의 아들로 태어난 스님은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출가를 하였으며, 왕의 거듭되는 부름에도 산중에서 수행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서기 636년 제자들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간 스님은 선덕여왕 12년(643)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부처님이 친히 입으셨던 가사와 사리, 패엽경(貝葉經)을 모시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진흥왕 3년(549) 양나라에서 보내온 사리와 함께 이곳에 봉안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통도사의 시초라고 한다.
통도사의 창건설화를 살펴보면 자장스님이 처음 절을 세우려고 할 때 이곳은 큰 연못이 있었고 아홉 마리의 용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스님은 연못을 메워 절을 짓고자 하였는데 절을 짓자면 용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야만 했다.
스님은 신력(神力)으로 여덟 마리의 용들을 제도해 하늘로 승천시키고 나머지 한 마리는 이곳에 남아 사찰을 지키겠다고 하여 작은 연못을 만들어 그곳에 살도록 했다고 한다.
이곳이 지금의 대웅전과 삼성각 사이에 있는 작은 연못으로 구룡지(九龍池)라고 불린다. 구룡지를 메우고 이곳에 통도사가 창건되자 자장율사는 계단을 세우고 사방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계법(戒法)을 설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신라는 비로소 계율을 존중하고 불법을 바르게 믿는 나라가될 수 있었다.
통도사를 ‘불지종가(佛之宗家)’라고 하고 자장스님을 율사(律師)라고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통도사는 꾸준히 사세를 확장하여 고려시대에는 사찰을 중심으로 네 군데에 사유지의 경계를 표시하는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를 세울 만큼 번창하였으나 통도사는 국가의 변란이 있을 때마다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것은 이곳이 바로 불교신앙의 최고 보물인 사리를 봉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절이 거의 불타고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 만이 살아 남았다고 한다. 보물 제144호로 지정된 금강계단 앞의 대웅전은 인조 23년(1645) 우운(友雲)화상에 의해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내부에는 사리를 모신 이유로 불상이 없고 대신 거대하고 화려한 수미단(須彌壇)이 좌대를 떠받들고 있다. 통도사는 지금도 많은 보물을 간직하고 있으며 통도사 역사의 대부분은 사리신앙을 지키고 가꿔온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법보사찰 해인사 화엄십찰의 하나로 세워진 해인사는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대장경을 간직하고 있어 법보사찰이라고 한다. 해인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자 우리 민족의 믿음의 총화인 팔만대장경을 모신 사찰로서 한국인의 정신적인 귀의처요, 이 땅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 되어 왔다.
법보종찰 해인사(法寶宗刹 海印寺)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해인사는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대장경을 간직하고 있어 법보사찰이라고 한다. 해인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자 우리 민족의 믿음의 총화인 팔만대장경을 모신 사찰로서 한국인의 정신적인 귀의처요, 이 땅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 되어 왔다. 화엄종의 근본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에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경전의 최고봉으로서, 그 본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진다. 이 경전에‘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 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이렇게 여실(如實)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디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손인 순응(順應)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理貞)화상이 신라 애장왕 3년(802년)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에 자리에 창건하였다.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고려대장경이 바로 해인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보 제32호인 고려대장경은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방대한 규모와 정교함으로 우리 민족의 최고 문화유산으로 꼽히고 있다. 1995년 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으로써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일 뿐 아니라 세계인류의 문화재가 된 것이다. 고려대장경은 고려시대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부처님의 힘을 빌어 이를 물리치려는 국가와 백성들의 염원을 담아 만들어졌다.
고려 현종 때 거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조성했던 첫번째 대장경(5천 48권)은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하였는데 고려 고종 19년(1232) 몽고군의 침입 때 불타버렸다. 그러자 고려 조정에서는 대장경 판각을 위한 본부를 설치하고 1236년부터 1251년까지 16년간에 걸쳐 6천5백68권, 8만1천2백58매의 대장경판을 다시 만들었던 것이다.
고려대장경이 해인사에 자리를 잡은 것은 조선 태조 7년(1398)에 이르러서였다고 한다.
판각 후 강화도 선원사에 보관되던 고려대장경은 태조의 명에 의해 서울을 거쳐 해인사로 옮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대장경은 경판은 세로 25센티미터, 가로 70센티미터의 크기로 한 면에 23행, 1행에 14자가 새겨져 있다. 경판의 재질은 산벚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판면에는 옻칠을 하였고, 양쪽에 마구리를 대어 뒤틀림을 방지했다고 한다. 고려대장경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앞서 만들어진 다른 대장경들의 내용을 비교 검토하여 탈자나 오자 등을 바로잡았기 때문에 내용이 정확할 뿐만 아니라 수천만의 글자가 한결같이 고르고 정밀한 서체여서 예술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있다.
승보사찰 송광사 순천시 조계산에 위치하고 있는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 송광사는 길상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유명한 사찰은 아니었고 고려 중기에 지눌 스님이 대대적으로 중창하고 사찰명도 송광사로 바꾸어 대가람으로 발전 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승보종찰 송광사(僧寶宗刹 松廣寺)
전남 순천시 송광면 조계산에 위치하고 있는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慧璘)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 송광사는 길상사(吉祥寺)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유명한 사찰은 아니었고 고려 중기에 지눌스님이 대대적으로 중창하고 사찰명도 송광사로 바꾸어 대가람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송광사가 승보종찰인 까닭은 송광사에서 수행을 하시던 많은 고승들에 의해서이다. 불일보조국사지눌(佛日普照國師知訥)스님 이래 16분의 국사를 배출한 도량이기 때문이다.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나신 지눌스님은 어려서 출가한 후 25세에 승과(僧科)에 합격했다. 스님은 타락한 고려 불교를 바로 잡기 위하여 정혜결사(定慧結社)운동을 다짐하였다. 이는 당시 불교가 지나치게 정치와 밀착되어 순수성을 잃어버렸고 내부적으로는 선과 교의 대립이 심해져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눌스님은 <대장경> 특히 <화엄경>을 통해 참선과 교학의 일치와 조화라는 사상적 해결점을 찾아낸다.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스님은 33세 되던 해 경북 팔공산의 거조사에서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을 발표하고 본격적으로 정혜결사운동을 시작한다.
고려 명종 30년(1200년), 스님의 나이 42세 때 전남 송광산 길상사로 자리를 옮겼다. 지눌스님은 9년에 걸친 중창 불사로 송광사의 면모를 새롭게 한 후 산과 사찰의 이름을 길상사에서 조계산 송광사로 고쳐 불렀다. 스님은 송광사에서 입적할 때까지 10년 동안 정혜결사를 이끌었으며 스님의 문하에는 많은 제자들이 모여 스승의 뜻을 받들고 전하였다. 송광사는 고려 말까지 16분의 국사를 배출하며 ‘승보사찰’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또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청허 휴정과 쌍벽을 이루는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스님과 그 제자들에 의해 고승의 산실로서의 명성을 이어왔다.
송광사의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분은 근대의 고승인 효봉(曉峰)스님과 구산(九山)스님이다. 판사 스님으로 더 잘 알려진 효봉스님은 1950년대 후반 송광사의 수행정신을 되살리는데 전념하신 분이다. 구산스님은 1969년 송광사에 총림을 개설하여 불교 종합수련도량으로 만들었으며, 불일국제선원을 열어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는데 기여한 분이다. 승보종찰 송광사에서 가장 의미가 큰 곳은 국사전이다. 16국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이 국사전은 대웅전 동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세종 2년(1420)에 지어진 조선 초기의 목조 건물로 국보 제56호로 지정되어있다. 국사전은 수차례에 걸친 화재에도 피해를 입지 않고 오늘에 이르고있다.
2. 적멸보궁 적멸보궁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을 말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으므로 불단은 있지만 불상이나 후불탱화를 모시지 않은 것이 특징이고 다만 이 법당의 바깥이나 뒤쪽에는 사리탑을 봉안했거나 계단(戒壇)을 설치한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5대 적멸보궁으로는 양산의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이다. 이 중 태백산 정암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친히 가져 온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암사의 적멸보궁은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 통도사 적멸보궁의 진신사리를 나누어 봉안한 곳이라고 한다.
적멸보궁(寂滅寶宮)
양산의 통도사 영남알프스산군의 하나인 영축산 남쪽 산록에 자리한 영축총림 통도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인 불보사찰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금강계단에 모셔져 있다. 자장율사가 이곳에 석가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절이름을 통도사라고 한 것은 바로 ‘이산의 모습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의미에서 기인한 것이다.
경남 양산 영축산 통도사 금강계단 영남알프스산군의 하나인 영축산 남쪽 산록에 자리한 영축총림 통도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인 불보(佛寶)사찰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금강계단에 모셔져 있다. 자장율사가 이곳에 석가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절 이름을 통도사라고 한 것은 바로 ‘이산의 모습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의미에서 기인한 것이다.
또한 사명의 다른 의미로는 통도사가 신라시대의 계율근본도량으로, 전국의 모든 출가자는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아야 정통성이 인정됨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모든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제도한다’라는 대승불교의 이념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자장율사가 646년 (신라 선덕여왕 15년)에 당나라에서 선량산의 문수살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다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그 화현승으로부터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 1벌을 받아 귀국하여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왕명에 따라 당시에 계율종의 본산인 통도사를 창건하였으며, 그 사리를 삼분하여 각각 황룡사탑과 통도사 계단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통도사의 금강계단이 바로 그 불사리계단이다. 이 불사리계단이 통도사의 큰 특징 중의 하나이며, 이로 인해서 불보사찰의 칭호까지 얻게된 것이다.
보물 제144호로 지정된 금강계단 앞의 대웅전은 인조 23년(1645) 우운(友雲)화상에 의해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내부에는 사리를 모신 이유로 불상이 없고 대신 거대하고 화려한 수미단(須彌壇)이 좌대를 떠받들고 있다. 통도사는 지금도 많은 보물을 간직하고 있으며 통도사 역사의 대부분은 사리신앙을 지키고 가꿔온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사리를 봉안하면서 시작된 통도사의 역사는 1300년을 관통하는 전통이요, 우리나라 불교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남다른 고통을 감수하기도 하였다.
통도사의 사리는 워낙 귀한 보물이라 사람들이 항상 사리함을 열어 친견하기를 원했었던 모양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옛날 조정의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이 와서 계단을 예배하고 사리를 친견하기 위해 함을 열어 보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긴 구렁이가 석함을 지키고 있었으며, 두 번째는 큰 두꺼비가 지키고 있었다. 그 후부터는 감히 이 함을 열어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산장군 김이생(金利生)과 시랑 유석(庾碩)이 고종의 명을 받아 낙동강을 지휘할 때 왕이 하사한 기를 가지고 절에 와서 사리함에 예배를 하고, 사리를 친견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김이생과 유석은 군사들을 시켜 사리함의 뚜껑을 열게 하였는데 이때 함이 조금 상했다고 한다. 그러자 유석이 수정함을 기부하여 사리를 다시 봉안하였다고 하며, 그 후에도 통도사의 사리는 수많은 수난을 당하였다. 통도사의 사리가 이처럼 수난을 당한 것은 오로지 무지한 사람들의 세속적인 욕심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통도사의 사리가 금은보화보다 더 훌륭한 보물’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다만 금은보다 더 좋은 물건이라니 그것이 탐이 났을 것이다.
오대산 상원사 고려 때 고승인 일연스님은 ‘국내의 명산 중에서도 가장 좋은 곳이요, 불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라고 오대산을 말하고 있다. 오대산은 바위와 암벽이 별로 없는 육산이라고 한다. 육산이란 어머니의 품과 같은 흙이 있어서 동물은 물론이고 식물들이 잘 자라는 산이란 뜻이다.
강원도 평창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고려 때 고승인 일연(一然)스님은 ‘국내의 명산 중에서도 가장 좋은 곳이요, 불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라고 오대산을 말하고 있다. 오대산은 바위와 암벽이 별로 없는 육산(陸山)이라고 한다. 육산이란 어머니의 품과 같은 흙이 있어서 동물은 물론이고 식물들이 잘 자라는 산이란 뜻이다. 오대산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찾아오게 하는 것은 바로 오대산 주봉인 비로봉 아래 적멸보궁이 있고 부처님의 정골(頂骨)사리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오대산에 적멸보궁이 들어선 것은 자장율사에 의해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자장이 우리나라의 오대산을 진성(眞聖)이 거주하는 곳으로 믿게 된 것은 중국 오대산에서 정관 10년(636) 입당을 결행, 태화지(太和池)에 있는 문수석상 앞에서 7일 동안 간절한 기도로 만났던 문수 현신(現身)의 깨우침 때문이었다.
자장은 귀국 후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을 지내며 왕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으나 문수진신을 친견하는 꿈을 버릴 수 없어 오대산으로 들어와 모옥을 짓고 문수의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원녕사(元寧寺), 갈래사(葛來寺) 등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기도를 했다. 오대산에 월정사와 상원사, 사자산에 흥녕사(지금의 법흥사), 태백산의 갈래사(지금의 정암사) 등이 창건된 것은 이런 인연에 의해서다. 중대에 터를 잡고 그 위에 적멸보궁을 지은 것도 자장 율사의 간절한 구도심과 관계가 깊다.
오대산은 중대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의 오류성중(五類聖衆)이 상주한다는 믿음이 산명(山名)으로 나타난 것이다. 즉 동대에는 관세음보살, 서대에는 아미타불, 남대에는 지장보살, 북대는 석가모니불, 중대에는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것이다
.
특히 중대는 자장이 친견하고자 했던 문수 보살이 상주하는 도량이었으므로 가장 소중한 정골사리를 이곳 적멸보궁에 모셨다. 중대를 일명 사자암이라고도 하는데 사자는 문수보살이 타고 다니는 짐승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향각은 조선 초기 태종대에 깎아지른 절벽에 석축을 쌓아 올린 뒤 중건하였다.
보궁의 불사리를 공양하는 분수승(焚修僧)이 머무르는 곳인 탓에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다. 향각 앞에는 참배객의 눈길을 끄는 단풍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이 나무는 근세 고승으로 추앙 받는 한암선사가 서울 봉은사에 머물다가 1926년 오대산으로 거처를 옮길 때 짚고 온 단풍나무 지팡이다. 적멸보궁은 오대산의 주봉인 비로봉에서 흘러내린 산맥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그 중앙에 우뚝 서있다. 풍수지리를 보는 사람들은 이곳을 일러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라 하여 천하의 명당으로 꼽는다.
부처님이 계신 적멸의도량 적멸보궁, 보궁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른 보궁과 마찬가지로 불상은 없고 부처님이 앉아 계심을 상징하는 붉은색의 방석만이 수미단 위에 놓여있다. 그러나 보궁 어느 곳에 불사리가 모셔져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보궁 뒤에 약 1m 높이의 판석에 석탑을 모각한 마애불탑이 소담하게 서 있으나 이 불탑도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어쩌면 이 산 전체가 하나의 불탑이요, 부처님의 진신사리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일찍이 오대산에 오류성중의 진신이 상주한다는 믿음이 그것을 말해준다. 적멸보궁에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4분정근이 행해지고 있으며 매년 음력 4월 1일부터 5월 1일까지 정골사리봉찬회가 주관하는 대법회가 한 달간 열린다. 이 때가 되면 보궁참배를 위해 영동 지방은 물론 전국의 불자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설악산 봉정암 설악산 소청봉 서북쪽 중턱에 천하의 승경 봉정암 적멸보궁이 있다.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3.7일 기도를 마치고 귀국한 것은 선덕여왕 12년(643)의 일이다. 문수보살이 현신해 부처님의 진신 사리와 금란가사를 전해주며 해동에 불법을 크게 일으키라고 부촉했으니, 신라로 돌아온 스님은 우선 사리를 봉안할 곳부터 찾았다.
강원도 인제 설악산 봉정암 적멸보궁
설악산 소청봉 서북쪽 중턱에 천하의 승경 봉정암 적멸보궁이 있다.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3.7일 기도를 마치고 귀국한 것은 선덕여왕 12년(643)의 일이다. 문수보살이 현신해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전해주며 해동에 불법을 크게 일으키라고 부촉했으니, 신라로 돌아온 스님은 우선 사리를 봉안할 곳부터 찾았다.
양산 통도사와 경주 황룡사 9층탑에 사리를 봉안했으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보다 신령한 장소에 봉안하고 싶어 발길을 북으로 돌린 스님은 먼저 금강산을 찾아 엎드려 기도를 했다. 기도를 시작한지 이레 째 되는 날, 갑자기 하늘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오색찬란한 봉황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스님은 기도의 감응으로 알고 봉황새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더니 봉황새는 높은 봉우리 위를 선회하다 갑자기 어떤 바위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스님은 봉황이 자취를 감춘 바위를 유심히 살펴보니 봉황이 사라진 곳은 바로 부처님의 이마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이 불두암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곱 개의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었다. 자장율사는 바로 이곳이 사리를 봉안할 곳임을 알고 봉황이 인도한 뜻을 따르기로 했다.
스님은 부처님의 형상을 한 바위 밑에 불뇌사리를 봉안하고 5층탑을 세우고 암자를 지었다. 절 이름은 봉황이 부처님의 이마로 사라졌다 하여 ‘봉정암(鳳頂庵)’이라 붙였다. 신라 선덕여왕 13년(644)의 일이었다. 자장율사의 간절한 기도에 의해 절터를 잡은 봉정암은 이후 불자라면 살아 생전에 한 번은 꼭 참배해야 하는 신앙의 성지로 정착되었다.
신라 고승 원효대사는 불연이 깃든 성지를 순례하다가 문무왕 17년(667)경 잠시 이곳에 머물며 암자를 새로 지었다.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대사도 이곳을 참배했으며,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 지눌도 1188년이 이곳을 참배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수많은 고승들이 앞을 다투어 이곳을 참배하는 까닭은 오직 한 가지 여기에 부처님의 불뇌사리를 봉안돼 있어서였다.
봉정암은 지금까지 아홉 차례의 중건과 중창이 있었다. 1923년 백담사에 머물던 만해 한용운 선사가 쓴 <백담사사적기>에 따르면 조선 중종 13년(1518) 환적(幻寂)스님이 세번째 중건불사를 했고, 네번째는 명종 3년(1548)에 등운(騰雲)선사가 절을 고쳐지었다. 이어 인조 10년(1632)에는 설정(雪淨)화상이 다섯번째 중창을 했다.
특히 설정화상의 중창 때는 부처님의 탱화를 새로 봉안하고 배탑대(拜塔台)를 만들었으며 누각까지 지었다고 한다. 여섯번째 중건은 정조 4년(1780) 계심(戒心)스님에 의해 이루어졌고 일곱번째는 고종 7년(1870) 인공(印空), 수산(睡山) 두 스님이 불사에 원력을 모았다. 그러나 6.25 전쟁때 설악산 전투로 봉정암의 모든 당우가 전소되어 10년 가까이 5층 사리탑만이 외롭게 서 있다가 1960년 법련(法蓮)스님이 1천일 기도 끝에 간신히 법당과 요사를 마련했다.
현재의 봉정암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85년부터이다. 우리나라 사찰 중에 가장 해발이 높은 봉정암은 기도를 하면 반드시 감응이 있는 도량으로 유명하다. 자장율사의 창건설화도 그렇지만 이 밖에도 신이한 영험과 이적의 이야기가 수없이 많다.
사자산 법흥사 자장율사가 문수보살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강원도로 올라와 세 군데를 돌며 사리를 봉안하고 적멸보궁을 지었다는 성스러운 곳으로 지금도 이곳을 찾으면 그 옛날의 법향이 천수백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도량 곳곳에 남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법흥사가 처음 창건된 것은 신라 선덕여왕 때인 7세기 중엽이다.
강원도 영월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
자장율사가 문수보살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강원도로 올라와 세 군데를 돌며 사리를 봉안하고 적멸보궁을 지었다는 성스러운 곳으로 지금도 이곳을 찾으면 그 옛날의 법향이 천수백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도량 곳곳에 남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법흥사가 처음 창건된 것은 신라 선덕여왕 때인 7세기 중엽,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장이 꿈에도 그리던 문수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오대산, 태백산, 설악산과 사자산을 오가며 기도를 했다.
자장율사는 이때 당에서 가지고 돌아온 사리의 일부를 기도하는 곳마다 봉안했는데 사자산도 그 중의 하나다. 자장율사가 처음 창건할 때의 사찰명은 흥녕사(興寧寺)며 우리나라 불교사에 뚜렷한 이름을 남기게 되는 것은 신라 말 헌강왕 때 징효절중(澄曉折中)에 의해 이곳에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이 들어서면서부터이다.
구산선문은 홍척(洪陟)국사가 남원 실상사(實相寺)에 개창한 실상산문, 도의(道義)국사를 스승으로 하는 보조체징(普照體澄)이 장흥 보림사(寶林寺)에서 개창한 가지산문(迦智山門), 범일(梵日)국사가 강릉 굴산사에서 개창한 사굴산문, 혜철(惠哲)국사가 곡성 태안사에 개창한 동리산문, 무염(無染)국사가 보령 성주사에서 개창한 성주산문, 도윤(道允)국사를 스승으로 하는 징효가 영월 흥녕사에서 개창한 사자산문, 도헌(道憲)국사가 문경 봉암사에서 개창한 희양산문, 현욱(玄昱)국사가 창원 봉림사에서 개창한 봉림산문, 그리고 이엄(利嚴)선사가 해주 광조사에서 개창한 수미산문을 일컽는다. 이 중 가지산문을 개창한 도의국사는 양양 진전사(陳田寺)에서 최초로 터를 닦았으나 제자인 보조체징에 의해 장흥 보림사(寶林寺)로 옮겼갔다.
사자산문은 처음 도윤국사에 의해 화순 쌍봉사(雙峰寺)에서 문을 열었으나 제자 징효가 영월 흥녕사로 옮겨와 가장 번성한 문파가 되었다. 흥녕사에 사자산문이 들어서자 헌강왕은 이 절을 중사성(中使省)에 예속시켜 보살핌을 받도록 했다. 당시 이 절이 얼마나 번창하였는지는 현재도 남아 있는 안내석탑과 수호불좌상이 말해주고 있다. 충북 제천시 장락동과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에 각각 안내탑을 세웠다. 이 가운데 두 번째 것인 현재의 흥녕사지에 있는 것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그러나 진성여왕 5년(891)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흥녕사는 전쟁 중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 뒤 고려 혜종 1년(944)에 다시 중건됐으나 얼마 뒤 다시 불에 타는 재앙을 겪은 뒤로부터는 사자산문도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
사자산문이 문을 닫은 후부터는 불사리탑을 공양하는 작은 절로만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1902년 비구니 대원각(大圓覺)스님이 중건을 하면서 법흥사로 사명을 바꾸었다. 그러나 비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12년에는 산불로 소실되었고, 17년 동안 중건불사를 해서 1930년에 회향을 하자 다음해(1931년)에는 산사태로 옛사지 일부와 석탑이 유실되었다.
할 수 없이 1933년 현재의 절터로 옮겨 1939년에는 적멸보궁만을 중수한 채 간신히 그 명맥만을 유지해 오다가 최근에 이르러서야 중창불사를 거듭해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법흥사에 현존하는 건물은 적멸보궁을 비롯하여 1968년에 세운 무설전, 1980년에 수리한 노전, 1987년에 건립한 산신각, 1985년에 세운 요사채 2동, 1992년에 세운 대형 객사 등이 있다.
태백산 정암사 정암사의 옛이름은 원래 갈래사였다.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갈래사란 사명은 이 절의 창건설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갈래사사적기>에 따르면 신라시대 대국통을 지낸 자장율사는 말년에 강릉에 있는 수다사란 절에 머물고 있었다. 하루는 꿈에 이상하게 생긴 스님이 나타나 ‘내일 대송정에서 보자’고 했다.
강원도 정선 태백산 정암사 적멸보궁 정암사의 옛이름은 원래 갈래사(葛來寺)였다.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갈래사란 사명은 이 절의 창건설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갈래사사적기>에 따르면 신라시대 대국통(大國統)을 지낸 자장율사는 말년에 강릉에 있는 수다사(水多寺)란 절에 머물고 있었다.
하루는 꿈에 이상하게 생긴 스님이 나타나 ‘내일 대송정에서 보자’고 했다. 스님이 대송정으로 갔더니 문수보살이 꿈에 나타나 ‘태백산 갈반지(葛蟠地)에서 만나자’고 한 후 사라졌다. 스님은 태백산으로 들어가 갈반지를 찾다가 큰 구렁이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이곳이 바로 그곳’ 이라며 석남원(石南院)을 지었다. 이곳이 바로 갈래사라는 것이다.
갈래사라는 사명에 얽힌 또 다른 설화가 있는데, 자장율사는 처음에는 사북에 있는 불소(佛沼) 위쪽에다 사리탑을 세우려고 했으나 탑을 쌓으면 자꾸 무너져서 기도를 했더니 하룻밤 사이에 칡넝쿨 세 갈래가 눈위로 뻗어나가 지금의 수마노탑과 적멸보궁, 그리고 요사채가 있는 곳에 멈추었다. 스님은 이곳이 바로 절과 탑을 세울 곳이라 하여 절을 짓고 이름을 갈래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갈래사는 창건과 함께 3개의 보탑이 세워졌다고 하는데, 북쪽의 금봉대에는 금탑, 남쪽의 은대봉에는 은탑을 세우고 가운데에 수마노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중 수마노탑은 사람이 쌓은 탑이라고 볼 수 있지만 금탑과 은탑은 도력으로 지은 것이라서 물욕이 많은 중생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고 전해진다.
창건에 얽힌 설화가 이처럼 풍부한 데 비해 이후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다만 조선 숙종 39년(1713) 자인(慈忍) · 일종(一宗) · 천밀(天密) 등 세 분의 스님이 합심하여 수마노탑을 중수했으나 그 해 8월 벼락으로 파손되자 6년 뒤인 1719년 천밀스님이 다시 중수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 뒤 정조 12년(1788)에는 취암(翠巖), 성우(性愚) 두 스님이 적멸보궁과 탑을 다시 중수했으며, 철종 9년(1858)에 해월(海月)과 대규(大圭) 두 스님이 다시 원력을 발해 보궁과 탑을 중수했다.
근년에 들어서는 1919년 보룡(普龍)화상이 중창불사를 했고, 1972년 이후는 등각(登覺) ·삼지(三智) ·법보(法寶) ·삼보(三寶) 스님 등이 당우를 고쳐 적멸도량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암사 적멸보궁에도 불상은 없다. 다만 부처님이 앉아 계신 것을 상징하는 붉은 색 방석이 수미단 위에 놓여 있을 뿐이다. 사리가 모셔진 곳이 바로 빈 방석 너머 장방형으로 난 창문 밖에 서 있는 수마노탑에 봉안되어 있다. 이 수마노탑을 보궁안에서 직접 바라볼 수는 없고, 탑을 제대로 친견하기 위해서는 적멸보궁 뒤편 급경사를 따라 100m쯤 올라가야 한다.
수마노탑은 모전석재(模塼石材)를 이용한 7층탑으로 높이는 9m 가량이다. 탑신을 구성하고 있는 석재는 수성암질의 석회암으로 판석의 길이는 30~40cm , 두께 5~7cm 정도다. 상륜부는 화강암으로 조성한 노반(露盤)위에 모전석재를 올리고 다시 그 위에 청동제 상륜을 설치한 탑이다.
정암사는 불자들의 이 같은 열렬한 신심을 돕기 위해 1년 365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4분 정근을 실시한다. 그러나 불자들의 지극한 신심은 이것도 모자라 하룻밤을 꼬박 새우는 철야정진이 이어진다. 일주문에서 왼쪽으로 1977년에 지은 선불장(選佛場)이 있다. 이곳은 정암사 스님들과 참배객이 머무르는 숙소로 쓰인다. 선불장 옆에는 무량수각과 자장각 · 삼성각이 얼굴을 맞대고 나란히 서 있다. 도량을 가로질러 흐르는 작은 개울 건너에는 아침저녁 예불 때 울리는 범종루가 서 있다. 정암사를 찾는 사람들에게 자장율사 영정을 모신 자장각은 정암사를 더욱 특별하게 느끼게 한다.
3. 5 대 총림 우리나라에는 5대 총림이 있다. 조계총림 송광사, 해인총림 해인사, 영축총림 통도사, 고불총림 백양사, 덕숭총림 수덕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 총림들은 고유한 법맥과 향기를 가지며 한국 불교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으며, 총림이 되기 위해서는 선원 · 강원 · 율원 · 염불원이 있어야 한다. 선원(禪院)은 선종(禪宗)의 사원이며, 선을 닦는 기관이다. 강원(講院)은 승가 속의 작은 승가로서 모든 불교의 전반적인 틀을 세우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 곳이다. 율원(律院)은 율장(律藏)의 계율(戒律)을 전문적으로 학습하는 사원을 말한다. 염불원(念佛院)은 부처님의 경전을 암송하고 명호(名號)를 부르는 염불수행을 전문적으로 전수하는 곳이다.
5 대 총림(叢林)
조계총림 송광사 전남 순천시 송광면 조계산 자락에 새둥지처럼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는 송광사는 삼보사찰 중 승보사찰로 불리는 유서 깊은 절이다. 신라 말엽에 혜린대사가 작은 암자를 짓고 길상사라 부르던 것을 시작으로 고려시대 때 한국불교를 중흥시킨 불일보조국사 지눌스님께서 주석하신 정혜결사도량이다.
전남 순천시 송광면 조계산 자락에 새둥지처럼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는 송광사는 삼보사찰(三寶寺刹)중 승보사찰(僧寶宗刹)로 불리는 유서 깊은 절이다. 신라 말엽에 혜린대사가 작은 암자를 짓고 길상사라 부르던 것을 시작으로 고려시대 때 한국불교를 중흥시킨 불일보조국사지눌(佛日普照國師知訥)스님께서 주석하신 정혜결사도량으로, 지눌스님 이래 송광사에서는 16분의 국사스님을 배출하였고, 조선시대로 들어와 서산(西山)스님과 쌍벽을 이룬 부휴 선수(浮休善修)스님에 의해 승보사찰의 전통을 이어 왔으며, 근래에는 효봉(曉峰), 구산(九山)스님이 그 전통을 이어와 한국정신사상사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는 도량이다.
1969년 종합 수도도량인 총림(叢林)이 된 송광사는 선원(禪院), 강원(講院), 율원(律院), 염불원(念佛院) 등의 기관에서 100여명의 스님이 상주하며 참선과 경전을 공부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수행도량이며 1972년에 개원한 불일국제선원(The Bulil International Buddhist Center)에서는 세계 각국의 스님들이 와서 한국의 불교를 배우고 있다.
목조문화재가 많은 사찰로 경내에는 약 80여동의 건물이 있고, 16국사의 영정을 봉안하는 국사전 등의 국보 3점을 비롯하여 하사당, 약사전, 영산전 등 보물 13점, 천연기념물인 쌍향수 등 국가문화재 17점과 정혜국사사리합 등 지방문화재 11점을 포함, 모두 28점의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승보전과 지장전이 자리하고 있어 장엄한 기상을 나타내며, 각 전마다 피어오르는 향과 은은한 목탁 소리, 낭랑한 독경, 찬란한 고찰의 승맥을 이어가고 있는 스님들의 모습에서 경허함을 느끼게 한다.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 가지 전설이 있다. 그 첫째는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보조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해인총림 해인사
삼보사찰 중 법보사찰인 해인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자 우리 민족의 믿음의 총화인 팔만대장경을 모신 사찰로서 한국인의 정신적인 귀의처요, 이 땅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 되어왔다.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화엄십찰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삼보사찰 중 법보(法寶)사찰인 해인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자 우리 민족의 믿음의 총화인 팔만대장경을 모신 사찰로서 한국인의 정신적인 귀의처요, 이 땅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 되어왔다.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기치아래, 이른 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화엄종의 근본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에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경전의 최고봉으로서,
그 본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진다.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 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이렇게 여실(如實)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디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손인 순응(順應)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理貞)화상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802) 10월 16일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 자리에 창건하였다. 이리하여 화엄종은 개화기를 맞던 신라시대를 거쳐, 해인사를 중심으로 희랑(希朗)대사를 위시하여 균여(均如), 의천(義天)과 같은 빼어난 학승들을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광복후 1946년 해인사 선원의 선객중심으로 가야총림을 발족하였는데, 조실에 이효봉대종사(李曉峰大宗師), 주지에 임환경, 강주에 강고봉화상(姜高峰和尙)이었다. 그러나 발족 5년만인 1950년 6.25동란으로 말미암아 와해되고 다수 인민군이 주둔함에 따라 당시 주지 최범술은 사중에 있질 못했다.
1967년 7월 제32회 중앙종회에서 다시 해인사에 방장체재의 해인총림 설치를 결의하고 초대방장에 전 종정(宗正) 퇴옹 성철대종사(退翁性撤大宗師)를 추대하고 주지에 지월병안(指月炳安), 1970년 10월부터 당시 고암 상언대종사(古岩大宗師)가 부임하고 주지에 가산지관(伽山智冠), 1971년 11월 3대에 다시 퇴옹 성철종사(退翁性撤大宗師)가 재추대되고, 4대에 혜암대종사, 5대에 법전대종사를 추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이며 또한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국내 최대 사찰로서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하여, 가야산을 뒤로하고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어 그 웅장한 모습과 주변 경관이 어울러져 경의로울 뿐 아니라 송림과 산사가 어울러져 연출하는 설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경에 젖게 한다.
그 중에서 특히 해인사 장경각에는 팔만대장경이 보관돼 있다. 해인사는 14개의 암자와 75개의 말사를 거느린 거찰로 대적광전을 비롯, 승가대학, 심검당을 두고 있다.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은 빼어난 산세로 조선팔경의 하나로 손꼽힐 만큼 절경이다. 특히 매표소에서부터 이어지는 홍류동 계곡의 풍치가 뛰어나다.
영축총림 통도사 영남알프스산군의 하나인 영축산 남쪽 산록에 자리한 영축총림 통도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인 불보사찰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금강계단에 모셔짐으로 인해 대웅전에는 부처님을 형상화한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다. 자장율사가 이곳에 석가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절 이름을 통도사라고 하였다.
영남알프스산군의 하나인 영축산 남쪽 산록에 자리한 영축총림 통도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인 불보(佛寶)사찰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금강계단에 모셔짐으로 인해 대웅전에는 부처님을 형상화한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다.
자장율사가 이곳에 석가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절 이름을 통도사라고 한 것은 바로 ‘이산의 모습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의미에서 기인한 것이다. 또한 사명의 다른 의미로는 통도사가 신라시대의 계율근본도량으로, 전국의 모든 출가자는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아야 정통성이 인정됨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모든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제도한다’라는 대승불교의 이념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자장율사가 646년 (신라 선덕여왕 15년)에 당나라에서 선량산의 문수살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다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그 화현승으로부터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 1벌을 받아 귀국하여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왕명에 따라 당시에 계율종의 본산인 통도사를 창건하였으며, 그 사리를 삼분하여 각각 황룡사탑과 통도사 계단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통도사의 금강계단이 바로 그 불사리 계단이다. 이 불사리 계단이 통도사의 큰 특징 중의 하나이며, 이로 인해서 불보사찰의 칭호까지 얻게된 것이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이 계단에 얽힌 수많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왜구들의 침범때에 주지 월송스님이 부처님의 사리, 가사 등을 가지고 서울로 가 이득분(李德芬)을 만나 의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또한 임진왜란 때 의승장 사명대사는 통도사 사리를 대소 2함에 나누어 금강산에 있던 서산대사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에 서산대사는 ‘계를 지키지 않는 자라면 그에게는 오직 금과 보배만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고 신보(信寶)가 목적이 아닐 것이니 옛날 계단을 수리하여 안치하라’면서 1함을 돌려보내고 나머지 1함을 태백산 갈반지(褐班地)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수난을 겪었던 금강계단은 1605년(선조 36년)에 계단을 복구하였다.
1705년에는 성능이 1852년(고종 3년)에는 정인이 중수하여 여러 차례의 중수 끝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약 1300년동안 조선시대의 억불과 임진왜란의 전화에도 굴하지 않고 법등이 꺼진 적이 없는 사찰이다. 경내에는 용화전, 관음전, 응진전, 범종각 등 건물 35동과 법등, 법탑이 있으며, 절 주위에는 20개의 암자와 울창한 원시림의 대열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대웅전은 보물 제144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334호인 은사입향로, 보물 74호인 국장생석표등의 문화재가 있다.
또, 통도사에는 용혈암과 구룡지라는 곳이 있는데 여기에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통도사를 짓기 전에 큰 연못이었는데, 이 연못속에 9마리의 용이 살고 있어 구룡지라 불렸다고 한다.
하루는 율사가 주문과 경으로 용들을 설득시켜 떠날 것을 청했으나 이에 용들이 응하지 않자 율사가 종이에 ‘火’를 쓰고 주문을 외어 물을 들끓게 하여 이에 견디지 못한 용들 중 세 마리의 용이 죽게 되었는데 이 죽은 세 마리의 용을 던져서 부딪친 바위에 용의 피가 묻어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바위가 용혈암이라 불려지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 마리의 용은 통도사의 남서쪽에 있는 산너머 골짜기로 달아났기 때문에 그곳을 오룡곡이라 부르고 나머지 한 마리는 눈이 멀게 되어 율사에게 영원히 이 절을 수호하겠다고 맹세하고 머물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대웅전 뒤에 있는 약사전과 조사전 사이의 자그마한 연못이 구룡지이고, 통도사 입구 무풍교 100m 북쪽에 위치한 절벽바위가 용혈암이다.
고불총림 백양사
고불총림 백양사는 거대한 바위를 배경으로 좌우에 맑고 찬 계곡물이 흘러내려 경치가 매우 빼어나고 가을단풍을 비롯하여 일년 내내 변화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는 백암산에 위치하고 있다,
백두대간이 남으로 뻗어와 그 신령스러운 기운이 백암산에 치솟아 학이 날개를 편듯한 백학봉의 수려하고도 장엄한 기상의 품에 안겨 자리잡고있다.
고불총림(古佛叢林) 백양사는 거대한 바위를 배경으로 좌우에 맑고 찬 계곡물이 흘러내려 경치가 매우 빼어나고 가을단풍을 비롯하여 일년 내내 변화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는 백암산(白巖山)에 위치하고 있다, 백두대간이 남으로 뻗어와 그 신령스러운 기운이 백암산에 치솟아 학이 날개를 편듯한 백학봉의 수려하고도 장엄한 기상의 품에 안겨 자리잡고 있다.
입구에는 수십기의 부도와 비가 세워져 있다. 절 경내와 맞은편에는 난대성의 늘푸른나무인 비자나무 수천 그루가 군락을 이뤄, 천연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주차장에서 절로 오르는 0.5Km 구간에는 수백년된 아름드리 갈참나무 거목들과 비자림이 우거져 삼림욕 하기에 더없이 좋다.
정도전(鄭道傳, 1337~1398)이 고려말 1337년(우왕 3)에 지었다는 ‘백암산정토사교루기(白巖山淨土寺橋樓記)’에 의하면, 이 산은 장성군 북쪽 30리에 있는데 그 이름을 백암(白巖)이라 하였으며 암석이 모두 흰 색깔이라서 그렇게 이름 하였다한다. 석벽은 깎아지른 듯 험하고 산봉우리는 중첩하여 맑고 기이하며 웅장한 모습이 실로 이 지역의 명승지가 될만하므로 신라 때의 어떤 이승(異僧)이 처음으로 절을 짓고 살면서 이름을 백암사(白巖寺)로 하였다.
중국 송나라 경평 연간(423~424)에 이르러 정토선원(淨土禪院)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그 문도인 중연선사가 이를 이어 전당과 문무, 방장실, 요사 등 80여 칸을 다시 지었다. 중연선사의 문도가 차례로 전해 오다가 일린(一麟)스님에 의해 백양사의 법맥이 계속 이어져 왔음을 살펴볼 수 있다.
창건은 신라 때 이루어졌고 창건주는 법명은 알 수 없지만, ‘이승’이라고 표현된 점으로 보아 상당한 이적행(異蹟行)을 해온 승려일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정도전이 지은 이 자료의 모든 내용을 있는 그대로 믿어야 할 것인가는 쉽게 단정지을 수 없다. 하지만 백양사의 창건주가 신라 스님이었다는 점과 백암사와 정토선원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은 역사적 사실임에 분명하다.
극렬한 배불론자였던 정도전의 '백암산정토사교루기'가 백양사 창건을 전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는 사실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백양사는 백제 무왕 때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명찰로 본래 이름은 백암사(白巖寺)였고 1034년 중연선사가 크게 보수한 뒤 정토사(淨土寺)로 불려졌으며, 조선 선조 때 환양선사가 영천암에서 《금강경》을 설법하는데 수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법회가 3일째 되던 날 하얀 양이 내려와 스님의 설법을 들었고, 7일간 계속되는 법회가 끝난 날 밤 스님의 꿈에 흰양이 나타나 '나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양으로 변했는데 이제 스님의 설법을 듣고 다시 환생하여 천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하면서 절을 하였다 한다.
이튿날 영천암 아래에 흰 양이 죽어 있었으며 그 이후 절 이름을 백양사라 고쳐 불렀다. 14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이어오면서 숱한 고난과 전란 속에서도 민초들과 함께 해온 호남불교의 요람으로 오늘에 이르고있다.
옛부터 백양사와 대흥사, 선운사는 한 문중으로서 한국불교 법통을 이어왔다. 근대 종정 큰스님을 다섯 분이나 배출한 전국 제일의 선불장이며, 또한 조계종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어 한국불교 법맥을 이어 온 만암스님, 지금도 전 종정이신 서옹대종사가 수행 근본도량인 운문암에 주석하시면서 끊임없이 후학의 가르침을 펴고 있다.
이와 같이 수행과 교육을 으뜸으로 화두삼아 정진하면서,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면 크나큰 법력을 펼쳐 민족의 아픔을 함께 한 역대 대선사들은 수행과 실천의 장을 펴는데 주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백양사는 만암스님께서 주창하시고 호남 20여 사찰이 동참해서 세운 경, 율, 론의 가르침을 펴고 있는 전국 유일의 고불총림(古佛叢林)도량으로 1996년 3월 총림으로 공식 승격되었다.
덕숭총림 수덕사
덕숭낭자와 수덕도령의 애틋한 전설이 서려있는 수덕사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에 있으며, 1984년에 종합수도장을 겸비한 덕숭총림으로 승격되었다.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이 만들어낸 덕숭산은 북으로는 가야산, 서로는 오서산, 동남간에는 용봉산이 병풍처럼 둘러 쌓인 중심부에 우뚝 서있다.
덕숭낭자와 수덕도령의 애틋한 전설이 서려있는 수덕사(修德寺)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에 있으며, 1984년에 종합수도장을 겸비한 덕숭총림(德崇叢林)으로 승격되었다.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落脈)이 만들어낸 덕숭산(德崇山)은 북으로는 가야산(伽倻山), 서로는 오서산, 동남간에는 용봉산(龍鳳山)이 병풍처럼 둘러 쌓인 중심부에 우뚝 서있다. 산과 바다가 조화를 이루고 낮은 구릉과 평탄한 들녘이 서로 이어지며, 계곡이 골마다 흘러내리는 이곳은 옛부터 소금강(小金剛)이라고 일컬어 왔다.
여기에 불조(佛祖)의 선맥(禪脈)이 면면히 계승되고 많은 고승 석덕(碩德)을 배출한 한국불교의 선지종찰(禪之宗刹)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어 불자들이 사시사철 줄을 잇고있다.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威德王,554~597) 재위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연화문와당과 평와편은 백제시대 창건설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이다. 문헌에 수덕사가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속고승전(續高僧傳)’으로 백제의 고승 혜현(惠現)이 수덕사에서 주석하며 <법화경(法華經)>을 지송하고 <삼론(三論)>을 강(講)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수덕사의 사격(寺格)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수덕사는 관련 문헌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내용을 파악할 수 없으나 다행히도 충렬왕 34년(1308)에 건축된 대웅전과 통일신라말기 양식을 모방한 삼층석탑, 수덕사 출토 고려자기, 수덕사 출토 와당 등 여러 유물이 남아있어 대가람으로서 융성하였던 면모를 볼 수 있다.
16세기 전반에 편찬된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권19 ‘덕산현(德山縣) 불우조(佛宇條)’에 덕숭산내에는 취적루와 불운루의 2개의 누각이 있다. ‘재덕숭산 사유취적불운이루(在德崇山 寺有翠積拂雲二樓)’라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수덕사는 대웅전 이외에 2개의 누각이 있을 만큼 대가람의 면모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가람이 소실되었으나 수덕사 대웅전은 다행히 옛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937~40년 보수 당시 발견된 대웅전 동측 내부 전면에 기록된 ‘단청개칠기(丹靑改漆記)’에 의하면 중종 23년(1528)에 대웅전 색채보수, 영조 27년(1751), 영조 46년(1770)에 대웅전 보수, 순조 3년(1803)에 대웅전 후면의 부연보수와 풍판의 개수 등 4차례 대웅전 보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673년 조성된 수덕사 괘불과 18세기 제작된 수덕사 소종은 조선후기 수덕사의 꾸준한 불사활동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세워진 수덕사 대웅전은 연대가 확실하고 조형미가 뛰어나다는 점에서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건물로서, 정면3칸 측면 4칸으로 지붕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기둥의 중간부분이 부풀려진 배흘림기둥 위에만 공포를 올린 주심포계통의 건물이다. 간단한 공포구조와 측면에 보이는 부재들의 아름다운 곡선은 대웅전의 건축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데 특히 소꼬리모양의 우미량은 그 중 백미로 꼽을 수 있다.
내부에는 천장을 가설하지 않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고 과거에는 바닥에 전돌이 깔렸으나 현재는 우물마루가 깔려있다. 외부에 그대로 노출된 가구에 새로 단청을 입히지 않아 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수덕사 대웅전은 건물의 기능미와 조형미가 잘 조화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조 건축물 중 하나이다.
그리고 특히 측면 맞배지붕의 선과 노출된 목부재가 만들어내는 구도는 수덕사 대웅전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형미와 역사적 가치로 인해 국보 제49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현존하는 건물 중 백제적 곡선을 보여주는 유일한 목조건축물이다.
4. 관음성지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근본도량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남쪽 해안의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이 관세음보살의 상주처이며, 중국은 주산열도(舟山列島) 경치 좋은 섬, 보타도(補陀島)의 조음동(潮音洞)이 관음성지이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 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대표적인 관음도량은 대부분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고 기도도량에 얽힌 설화와 영험설화들을 간직하고 있다. 남해 보리암 ·서해 강화 보문사 ·동해의 낙산사 홍련암 등이 모두 바다에 면해 있고, 그래서 관음신앙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사찰로 손꼽히는지도 모르겠다.
3 대 관음성지
남해 금산 보리암 우리 나라 3대 관음성지로 꼽히는 보리암이 창건된 것은 683년이다.
온 산이 마치 방광하듯 빛나는 모습에 이끌려 이곳을 찾아온 원효 스님이 이 절을 짓고 <화엄경>에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곳을 보광궁이라 한데서 착안 산 이름을 보광산이라 하고 절 이름을 보광사라고 하였다.
후 1660년 현종이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기도하여 새 왕조를 열었다 하여 왕실원당으로 삼고, 보리암이라 개명한 것이다.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로 꼽히는 보리암이 창건된 것은 683년(신라 문무왕 3)이다. 온 산이 마치 방광(放光)하듯 빛나는 모습에 이끌려 이곳을 찾아온 원효스님이 이 절을 짓고 <화엄경>에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곳을 보광궁(普光宮)이라 한데서 착안 산 이름을 보광산이라 하고 절 이름을 보광사(普光寺)라고 하였다.
그 후 1660년(조선 현종 1) 현종이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기도하여 새 왕조를 열었다하여 절을 왕실원당으로 삼고, 보리암이라 개명한 것이다. 1901년에는 낙서(樂西), 신욱(信昱)스님이, 1954년에는 동파(東波)스님이 각각 중수하였고, 1969년에 양소황(梁素滉)스님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있다.
사찰 옆에는 이성계가 기도했던 자리인 ‘이씨기단(李氏祈壇)’이 있는데 매년 가을 전주이씨종친회에서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의 인연으로 이름이 바뀐 금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있다.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창건하기 전, 이성계는 전국의 이름난 성지에서 기도를 올렸다. 계룡산과 지리산에서의 기도가 응답이 없자 보광산을 찾아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나의 기원을 들어준다면 이 산을 비단으로 감싸겠다”고 산신령에게 약속했다.
기도의 영험이 있었던지 이성계는 훗날 개국해 왕이 되었다. 나라를 새로 열고 바쁜 나날을 보내던 그는 어느 날 자신이 기도했던 남쪽 끝의 작은 산을 생각하게 되었다. 동시에 약속도 생각났다.
그러나 비단으로 산을 덮는다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으나 약속한 것을 어쩔 수는 없어 태조는 묘책을 짜내고자 신하들을 불러모았다. 신하들도 뽀족한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한참 후 어느 신하(정도전<鄭道傳>이라는 설이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해도 그 산을 비단으로 직접 감싸지는 못합니다.
어명을 내리어 이제부터 산 이름을 비단 금(錦), 뫼 산(山)자로 해 금산이라 부르게 함이 옳을 줄 압니다.
뭇 사람들이 그 산을 금산이라 부르면 실제 비단을 두른 것이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묘책이었다.
이후 보광산이란 명칭과 함께 금산이 혼용되기 시작했고, 지금은 대부분 금산이라 쓰여지고 있다.
보리암에는 현재 보광전을 비롯하여 간성각(看星閣), 산신각, 범종각, 요사채 등의 당우가 있다. 문화재로는 큰 대나무 조각을 배경으로 좌정하고 있는 향나무 관세음보살상이 있다. 관음상 왼쪽에는 남순동자, 오른쪽에는 해상용왕이 모셔져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상은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가 인도에서 모셔왔다고 한다. 보리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전각은 보광전(普光殿)이다. ‘빛(光=깨달음)을 널리 펴겠다’는 의미를 가진 보광전은 바로 관음보살의 중생구제 원력을 현실화시킨 당우다.
칠난삼독(七難三毒)에서 미혹한 중생들을 인도하겠다는 서원이 담긴 건물이다. 보광전 뒤편에 있는 간성각은 별다른 특징이 없다. 옆에 있는 산신각도 간소하기는 마찬가지다.
보광전 맞은 편 바위 끝에 있는 해수관음상은 헬리콥터로 이곳에 이운될 때 찬란한 서광을 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바로 그 옆에 있는 3층탑은 신라탑의 양식을 간직하고 있으며 상륜부에는 보주(寶珠)만이 놓여 있다. 높이는 2.3m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4호이며 원효대사가 이곳에 사찰을 세울 때 건립했다고 하지만 학자들은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보리암의 기도는 하루 네 번, 한번 시작하면 1시간 30분 동안 계속된다. 오전 3시 30분과 9시, 오후 2시와 6시 30분에 시작되는 기도시간에 맞춰 사찰측은 수송차량을 남해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운행한다. 장기(長期) 기도를 올리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도록 요사채를 기도객 위주로 운영하고 있다.
서해 강화 보문사
보문사는 신라 선덕여왕 4년(635)년에 회정대사가 금강산 보덕굴에서 수행하다가 이 곳에 와서 절을 창건하였는데,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의 이름을 따서 낙가산이라고 하였고, ‘차별없이 모두에게 골고루 덕화가 미치는 문(普門)’,‘불보살이 갖가지 인연으로 여러 모습으로 나투어 중생을 구한다(普門示現)’ 는 절 이름을 갖고 있다.
보문사는 신라 선덕여왕 4년(635)년에 회정대사가 금강산 보덕굴에서 수행하다가 이곳에 와서 절을 창건하였는데,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의 이름을 따서 낙가산이라고 하였고, ‘차별없이 모두에게 골고루 덕화가 미치는 문(普門)’,‘불보살이 갖가지 인연으로 여러 모습으로 나투어 중생을 구한다(普門示現)’ 는 절 이름을 갖고있다. 고려 현종 1년(1095)에 중국 자은종(慈恩宗) 소속의 혜인(惠忍)스님이 31인의 성인과 함께 낙가산의 성굴(聖窟)을 친견하고자 고려 조정에 간청하였나 조정에서는 친견을 허락하지 않았다. 고려 조정에서 그만큼 신성시하고 보호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 한때 쇠락의 길을 걷던 보문사는 1812년(순조 12) 홍봉장(洪鳳章)의 도움으로 이뤄진 대대적인 불사로 중흥의 기틀을 다진다. 1893년(고종 30)에는 명성왕후의 전교로 요사와 객실을 중건했고, 1920년에는 대원(大圓)스님이 화주가 되어 관음전을 중건했다. 그 후 1928년 주지 선주(善周)스님의 원력으로 마애관음보살상 조성불사가 이루어져 보문사는 명실공히 전국적인 관음기도 도량으로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에도 몇 차례의 개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법당, 관음전, 종각, 석실 등이 있다. 석실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굴 안에는 신라 선덕여왕 9년(640) 한 어부가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그물에 걸려 올라온 22위(位)의 나한상이 봉안돼 있다.
석실 입구에는 세 개의 홍예문이 설치돼 있고, 동굴 안에는 21개소의 감실이 마련돼 있다. 석실 법당 좌측 위에 천 사람이 앉을 수 있다는 암반인 천인대가 있다. 길이 40m, 촉 5m의 위용을 자랑하는 천인대는 이 절 창건 당시 인도의 한 스님이 이 바위에 불상을 모시고 날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마애관음보살상은 절에서 1km 가량 뒤쪽으로 올라간 절벽에 조성되어 있다.
높이 32척, 너비 11척인데, 각각 관음보살의 32응신(應身)과 11면(面)을 상징한다. 낙조에 붉게 물드는 보살상의 모습은 관음진신 바로 그것이다. 고해(苦海)에 허덕이는 중생을 어머니처럼 어루만져 주는 대비보살의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있다.
보살상을 덮고 있는 기묘한 형태의 눈썹바위는 보살상을 외호하는 천혜의 지붕으로 신비감마저 들게 한다. 마애관음보살좌상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문사의 볼거리 중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향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다. 수령(樹齡) 600년이 넘은 향나무는 석실과 범종각 사이에 있는 큰바위 틈에서 자라고 있다.
높이 32m, 둘레는 굵은 곳이 2.8m이며 인천광역시 지방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외에도 많은 나무와 성보문화재들이 보문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동해 낙산사 홍련암
낙산사 홍련암이 창건된 때는 671년(신라 문무왕 11년)으로 신라 화엄종의 초조인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곳인 관음굴 위에 지은 암자이다.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에 따르면 의상 스님이 이곳에서 밤낮 없이 7일 동안 기도를 하자 바다 위에서 한 떨기 붉은 연꽃이 솟아났고, 꽃속에서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였기에 암자 이름을 홍련암이라 하였다.
낙산사 홍련암(紅蓮庵)이 창건된 때는 671년(신라 문무왕 11년)으로 신라 화엄종의 초조인 의상대사(625~702)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곳인 관음굴 위에 지은 암자이다. 창건연기는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 제3권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조에 따르면 의상 스님이 이곳에서 밤낮 없이 7일 동안 기도를 하자 바다 위에서 한 떨기 붉은 연꽃이 솟아났고, 꽃속에서 관세음보살이 현신(現身)하였기에 암자 이름을 홍련암이라 하였다.
바닷가 암석굴 위에 자리잡은 홍련암은 창건당시부터 법당 마루 밑을 통하여 출렁이는 바다를 볼 수 있도록 지어졌다. 여의주를 바친 용(龍)이 불법을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뒷날 원효스님도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낙산사를 찾았으나 관세음보살을 친견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있다.
낙산사는 창건 이후 여러 차례 소실의 위기를 맞았으나 그때마다 뜻있는 이들의 원력으로 관음성지의 맥을 이어왔다. 고려 초기에는 산불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을 모신 불전만은 화재를 면했다. 고려 고종 때 몽고의 침입으로 건물이 모두 불탔으나 관음상만은 약간의 화를 입었다. 1468년(조선 세조14) 세조가 학열(學悅)스님으로 하여금 중창하게 했다.
1631년(인조 9) 화재로 다시 불타자 종밀(宗密). 학조(學祖)스님이 중건했고, 1643년(인조 21)
다시 불타자 도원(道源), 대주(大珠)스님 등이 중건했다. 현대에 들어
오현(五鉉), 지홍(知洪)스님 등이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일으켜
보타전과 성관음(聖觀音) ·천수관음 ·마두(馬頭)관음 ·11면관음 ·준세(准提)관음 ·
여의륜(如意輪)관음의 6관음과 관세음보살 32응신상(應身像) 등을 봉안했다.
낙산사와 관련된 영험담은 무수히 많다. 대표적인 것이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문의 개산조 범일(梵日)스님의 정취보살 친견기와 춘원 이광수가 소설로 꾸몄던 조신(調信)의 설화다. 태화(太和) 연간(827~835)에 당나라로 들어간 범일스님이 명주 개국사에 이르렀을 때, 왼쪽 귀가 없는 스님으로부터 명주 익령현(지금의 양양)의 덕기방에 집을 지어주라는 청을 받았다.
847년(문성왕 9) 중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범일스님은 먼저 굴산사를 세우고 선(禪)을 전하기에 여염이 없었다. 그 뒤 10년이 지난 858년 2월 15일 밤, 중국에서 보았던 귀가 없는 스님의 꿈을 꾼 범일스님은 잠을 깬 즉시 익령현으로 가서 그가 사는 곳을 찾았다.
물 속에 금빛 나는 돌부처가 있었는데, 왼쪽 귀가 없는 것이 중국에서 만난 스님의 모습과 똑같았다. 정취(正趣)보살이었던 것이다. 낙산 위에 3칸의 불전을 지어 모셨다. 정취보살과 관음성지는 <화엄경> <입법계품>에 그 비밀이 있다. 선재동자가 도를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나 스물 여덟 번째로 만난 분이 관세음보살이고, 스물 아홉 번째로 만나는 분이 정취보살이다.
홍련암에는 신비로운 창건설화를 이어가기라도 하듯 이적들이 계속 나타났다. 1185년(고려 명종 5) 병마사 유자량(庾資諒, 1150~1229)이 관음굴 앞에서 분향하고 배례했을 때 청조(靑鳥)가 꽃을 물고 날아와 갓 위에 떨어뜨렸다. 관음굴 앞에서 지극한 정성으로 예배하면 청조가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는데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1683년(조선 숙종9) 관음굴의 불상을 개금할 때는 공중에서 한 알의 명주(明珠)가 내려오는 이적이 있기도 했다. 이를 목격하고 환희에 찬 석겸(釋謙)스님은 곧 사리탑을 건립하고 탑의 이름을 공중사리탑(空中舍利塔)이라 했다. 1694년에는 사리탑을 세우게 된 유래를 적은 공중사리탑비를 세웠다. 현대에 들어서는 1930년 2월 25일, 현대 고승 경봉(鏡峯)스님이 이곳에서 관음기도를 시작했는데 13일째 되던 날 찬선 중에 바다 위를 걸어 다가오는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큰 정진력을 얻었다한다. 스님은 이러한 인연으로 낙산사 원통보전과 홍련암 편액을 쓰기도 하였다.
낙산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원통보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이다. 돌과 기와 흙을 함께 이용한 낙산사의 담은 소박하면서도 미적 감각이 뛰어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힌다. 그밖에도 세조 12년(1466)에 세운 홍예문, 최근에 다시 중수한 의상대, 1972년에 착수해 5년 만에 완공한 해수관음상 등도 관음도량 낙산사를 돋보이게 하는 문화재들이다. 낙산사와 홍련암은 하루도 빠짐없이 4분정근을 한다. 시간은 새벽 4시, 오전 9시 40분, 오후 2시, 저녁 7시다. 특별한 기도를 원할 때는 시간을 정해서 할 수 있다고 한다.
5. 관음, 나한 성지 관음 · 나한기도처로서 이름난 곳이 이곳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국의 사찰이 기도도량이며, 이 도량에 얽힌 창건설화와 많은 영험설화들을 간직하고 있다. 금오산 향일암 · 월출산 무위사 · 성덕산 관음사 · 설악산 오세암 · 두타산 관음암 등이 그 대표적이다.
금오산 향일암
마치 거북이가 경전을 등에 지고 용궁으로 들어가는 형상의 금오산이 바다와 맞닿은 가파른 언덕에 호젓이 자리하고있다. 절의 왼쪽으로는 보리암과 감응도가 보이고 앞으로는 세존도, 오른쪽으로는 미타도와 관음동굴이 있다. 신라 선덕여왕 8년(659)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원통암이라 했다.
향일암은 마치 거북이가 경전을 등에 지고 용궁으로 들어가는 형상의 금오산(金鰲山)이 바다와 맞닿?가파른 언덕에 호젓이 자리하고있다. 절의 왼쪽으로는 보리암과 감응도가 보이고 앞으로는 세존도, 오른쪽으로는 미타도와 관음동굴이있다. ‘해(日)를 바라본다’는 절 이름에 걸맞게 향일암의 아침 해돋이는 장관이다. 향일암은 신라 선덕여왕 8년(659)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원통암(圓通庵)이라 했으며, 고려 제4대 광종 9년(958) 윤필(允弼)스님이 산의 형세를 보고 금오암(金鰲庵)이라 개명했다. 그 뒤 조선 숙종 41년 인묵(仁默)대사가 주석하면서 금불상을 조성 봉안하였다.
1849년 무렵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책육암(策육庵)이라 하였고, 근래에는 경봉(鏡峯, 1892~1982)이 영구암(靈龜庵)으로 이름을 고쳐 현판까지 써주었다. 향일암은 이렇게 여러 차례 사찰의 이름을 바꾸었는데 여기에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먼저 원통암은 관음보살이 지닌 원통자재의 위신력을 의미하는 말로 사찰이 곧 관음도량임을 나타낸다. 금오암과 영구암은 모두 거북이와 관계 있는 이름이다. 현재 절이 위치한 금오산은 기암괴석이 절경이며 바위들이 거북이 등 같이 금이 있고, 지형자체가 거북이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서 이런 이름들이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책육암이라는 이름에는 보다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책육은 육근(눈, 귀, 코, 혀, 몸, 의식)의 옳지 못한 행위를 경계한다는 수행의 의미가 포함돼 있다. 또 거북이의 목과 네 다리, 꼬리를 모두 합하면 여섯이 되므로 사람의 육근을 여기에 비교하여 거북이가 위급할 때 고개를 집어넣고 발을 감추고, 꼬리를 사리는 모습처럼 사람도 조심해서 수행하라는 의미도 있다. 향일암은 현재 대웅전, 관음전, 용궁전, 삼성각, 종각, 요사채 등으로 사격(寺格)을 이루고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안에는 1987년에 조성한 청동석가모니불과 관음, 지장보살이 모셔져있다. 1988년에 조성한 영산회상도와 금니(金泥)로 채색한 신중탱화, 1983에 만든 소형 범종 등도 봉안되어있다. 대웅전 뒤에 있는 일명 흔들바위는 마치 경전을 펼쳐 놓은 듯한 형상인데, 이 바위를 한 번 흔들면 경전을 사경한 공덕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관음전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사찰의 가장 위쪽에 있다. 1991년에 조성한 관음보살상과 관음탱이 있고, 관음전 옆에는 석조관음보살입상과 동자상이 있다. 향일암은 일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하는 절이다.
월출산 무위사
전남 강진군 월출산 무위사는 사적기에 따르면 원래의 이름이 관음사였는데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당시 이 지역은 백제의 영역이었고, 더구나 617년은 원효대사가 출생한 해이므로 사적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전남 강진 월출산(月出山) 무위사는 사적기에 따르면 원래의 이름이 관음사였는데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당시 이 지역은 백제의 영역이었고, 더구나 617년은 원효대사가 출생한 해이므로 사적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가 중창하고 이름을 갈옥사(葛屋寺)로 바꿨으며, 고려 정종 원년(946)에 선각(先覺)국사가 3창하고 모옥사(茅屋寺)로 개명했다고 하지만 선각국사는 이미 917년에 입적했으므로 사실과 거리가 있다.
조선 명종 10년(1555)에 태감(太甘)선사가 4창하고 절 이름을 무위사로 정했다. 무위사는 10세기 이전에 창건되어 도선국사가 머물던 시기에 사세(寺勢)를 확장한 것으로 보고있다.
임진왜란 때에도 화를 입지 않아 웅장함과 화려함이 전라도 사찰 중에서 으뜸이었다는 무위사는 그 후 점차 퇴락하여 영조 15년(1739)에 이르러 미타전(지금의 극락보전), 천불전, 시왕전 만이 남게된다. 일제시대 극락전을 보수하면서 벽면의 벽화들을 통째로 뜯어내 벽화보존각에 따로 모셨으며, 1974년 벽화보존각과 해탈문, 분향각(焚香閣), 천불전, 미륵전 등을 중건했다. 무위사의 큰 자랑거리인 극락보전은 1430년(조선 세종 12)에 지어졌다. 성종 7년(1476)에 극락전 안에 아미타삼존도, 아미타래영도를 비롯한 벽화가 그려졌다. 이는 당시 무위사가 수륙사(水陸寺)로 지정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고 한다.
무위사에서 가장 돋보이는 그림은 바로 극락보전 후불벽 뒷면에 그려진 수월관음도이다. 얼굴과 목, 어깨가 건강한 남성적인 인상의 관음보살이 버들가지와 정병(淨甁)을 들고 노비구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관음보살의 광배는 두광과 신광이 모두 보름달처럼 둥그렇고 주변에는 물결이 표현돼 바다 위에 떠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벽화보존각 안에는 아미타불이 8여래와 8보살을 이끌고 죽은 이들을 맞으러 나오는 광경을 그린 아미타래영도, 석가여래설법도, 해수관음상좌도, 보살좌상도, 오불도, 비천신인도 등 30여 점이 보존돼 있다. 모두 고려 불화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한 불화들로 극락보전에 있는 아미타삼존도와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그림들이다.
극락보전 오른편에 있는 선각대사 형미(泂微)의 부도비도 매우 아름답다. 946년에 건립된 부도비는 비신과 비신을 받친 거북, 비신머리가 모두 온존하다. 거북의 머리는 용의 모습인데 정수리에 뿔이 있고 귀 뒤에 작은 깃이 달려 있다. 코가 벌름하고 윗입술은 조금 말려 올라갔으며, 여의주를 문 입에 가지런한 이빨과 혀가 보이는 것이 특이하다.
비의 주인공 선각대사 형미(864~917)는 광주출신으로 속성은 최씨였다. 15세에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에서 출가하여 보조체징(普照體澄)의 제자가 되었다. 28세 되던 해 사신을 따라 당나라로 건너가 운거도응(雲居道膺)의 법을 받고 905년(효공왕 5)에 귀국하였다. 무위사에서 머물던 형미는 이후 철원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성덕산 관음사
전남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 성덕산 기슭에 관음사가 있다.
금랑각을 지나 경내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관음사는 백제 분서왕 때인 308년
처녀 성덕(聖德)이 낙안포(樂安浦)에서 금동관세음보살상을 모셔다가 창건했다고 한다.
전남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 성덕산 기슭에 관음사(觀音寺)가 있다. 금랑각을 지나 경내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관음사는 백제 분서왕 때인 308년 처녀 성덕(聖德)이 낙안포(樂安浦)에서 금동관세음보살상을 모셔다가 창건했다고 한다.
관음사의 창건설화를 살펴보면 충청도 대흥현(大興縣)에 장님 원랑(元良)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용모가 수려하고 효성이 지극한 홍장(洪莊)이라는 딸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님 원량은 밖으로 나갔다가 홍법사의 화주승 성공(性空)스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처음 보는 스님이 빈털터리인 원량에게 한사코 시주를 청했다. 불사의 원을 세워 백일기도를 하였는데 마지막 회향하는 어젯밤 꿈에 부처님께서 오늘 동네에서 장님을 만날텐데 그가 대화주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원량은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설명하고 다만 나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혹시 대작불사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데리고 가서 좋은 도리를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이야기를 들은 홍장은 아버지와 자신의 앞날이 걱정되어 애통하게 울었다.
홍장의 나이 겨우 열여섯 살이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미 약속한 것을. 홍장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스님을 따라 나섰다. 난생 처음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소량포에 이르러 잠깐 쉬어 가기로 하고 언덕에 앉아 있는데, 바다 저 멀리 수평선 위에서 붉은 배 두 척이 나타나 홍장에게 다가왔다. 중국의 배였다. 배에서 내린 그들은 언덕에 앉아 있는 홍장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예를 갖추고 말하길 “참으로 황후마마이십니다.”하는 것이었다. 홍장은 물론 성공스님도 깜짝 놀랐다.
“저희는 진(晋)나라 사람입니다. 최근 왕후께서 돌아가신 후 임금님께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성상의 새 황후 되실 분이 이미 동국 백제에 탄생하여 성장하셨고, 단정하기로는 전 황후보다 더하니 가신 이를 생각하고 과히 슬퍼하지 마시오.’라고 했답니다.
이에 저희들은 황명을 받자와 동국으로 오던 중 여기서 마마를 뵈옵게 된 것입니다.” 사자의 긴 사연을 듣고 난 홍장은 한숨을 쉬며 “내 한 몸이야 가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소, 다만 아버님을 위해 선근종자(善根種子)를 심어 드리고자 스님과 가고 있는 중이니 배에 실은 폐백을 모두 스님께 바치면 기꺼이 가겠나이다.”고 했다.
황후가 된 홍장은 자신의 원불(願佛)로서 관음성상을 조성하여 아침저녁으로 모시다가 고향 백제를 그리는 마음에서 석선에 실어 보내면서 “관음보살이여, 인연 따라 고향 백제로 가셔서 그들에게 자비와 지혜를 주시고 정업(淨業)을 닦아 소원을 성취하게 하여주소서”라는 원력을 세웠다. 그 배는 바다에 표류하기를 한 달만에 홀연히 낙안(樂安)의 해변에 이르렀는데, 이 때 옥과(현 곡성군 오성면)에 사는 성덕(聖德)이라는 아가씨가 우연히 배 한 척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배 안에 번쩍이는 관음보살상이 모셔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경스런 마음이 생긴 성덕은 보살상을 어디든 좋은 자리를 찾아 모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관음상을 업고, 낙안을 출발하여 고향인 옥과로 향했다. 관음상은 새털처럼 가벼웠다. 도중에 열 두개의 정자를 만나 쉬어 갔다.
막상 고향 가까이 왔으나 관음상을 모실 곳이 마땅치 않았다. 9일 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다시 관음상을 업고 성덕산을 넘어가는데 갑자기 태산처럼 관음상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성덕은 관음상을 모실 곳이 가까워 옴을 알고 주위를 살피니 마침 앞으로는 강물이 흐르고 좌청룡 우백호가 벌려져 있고, 가운데는 집짓기에 적당한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 터를 잡고 관음상을 모셨다. 바로 현재의 전남 곡성군 오산면(梧山面) 선세리(善世里) 성덕산 관음사 자리다. 성덕은 나무 가지를 꺾어 움막을 짓고 관음사 창건을 발원하는 기도를 조석으로 드렸다. 후세 사람들은 주산(主山)을 처녀 성덕의 이름을 따서 성덕산이라 하였으며, 성덕보살은 관음사의 개산조가 되었다.
내륙에 있는 관음성지로 명성을 날리던 관음사는 정유재란 전까지만 해도 80여 동의 건물을 자랑하던 거찰이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832년(순조 32)에 큰 홍수가 일어 전각의 거의 반이 쓸려 무너졌고, 금랑각처럼 남아 있는 건물도 물이 차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금랑각은 오랫동안 방치돼 있다가, 1936년 청운스님의 발원으로 중건되었다.
그 후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건물이 없어졌고, 전쟁 후에 창훈스님이 근처에 있는 대은암의 건물을 옮겨와서 원통전을 중건하였다. 최근에는 1982년 중환스님이 천왕문을 복원하였다. 만월당과 종각을 짓는 등 불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전쟁 전에는 원통전이 국보 제273호, 금동관음보살좌상은 국보 제214호로 지정되었으나 전쟁으로 둘 다 없어졌다. 사찰 일대는 현재 전남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되어있다.
설악산 오세암
강원도 인제 설악산 만경대 아래에 있는 오세암은 백담사의 산내암자이다. 백담사에서 약 10㎞ 지점, 영시암을 거쳐 마등령 고갯길로 가노라면 오세암이 있다. 오세암이 창건된 것은 644년(신라 선덕여왕 13) 자장율사에 의해서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설악산 만경대 아래에 있는 오세암(五歲庵)은 백담사의 산내암자이다. 백담사에서 약 10㎞ 지점, 영시암을 거쳐 마등령 고갯길로 가노라면 오세암이 있다. 뒤로는 관음봉이 병풍처럼 외호하고 오른쪽에는 만경대가 굽어보고 있다.
앞으로는 용아장성릉이 삿된 기운을 막는 듯 오세암을 안고있다. 오세암이 창건된 것은 644년(신라 선덕여왕 13) 자장율사에 의해서다. 이곳에서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한 자장율사가 절을 창건하고 관음보살이 언제나 상주하는 도량임을 나타내기 위해 관음암(觀音庵)이라 부른 것이 오세암의 시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도 1445년(조선 세조 1) 여기서 출가했다. 이후 오세암은 허응당 보우(虛應堂 普雨)스님에 의해 크게 중건되고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548년(명종 3) 금강산에서 수도하다가 불교중흥의 큰 뜻을 품고 이곳에서 기도하던 보우스님이 문정왕후에 의해 선종판사로 발탁되고 난 직후 암자를 중건한 것이다. 그 뒤 1643년(조선 인조 21)에 설정(雪淨)스님이 중수한 다음부터 암자 이름이 오세암으로 바뀌고, 5세 동자와 연관된 유명한 관음영험설화도 이 때부터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설정스님은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데려다 암자에서 키우고있었다. 겨울이 막 시작된 10월의 어느 날, 스님은 월동준비 관계로 양양의 물치장터로 떠나게 되었다. 이틀 동안 혼자 있을 네 살 조카를 위하여 며칠 먹을 밥을 지어 놓고 스님은 아이에게 신신당부 하였다. “이 밥을 먹고 저 어머니(법당 안의 관세음보살)를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이라 부르면 너를 보살펴 줄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스님은 절을 떠나 장을 본 뒤 신흥사에 다다랐다. 다음날 돌아가려고 일찍 잠을 자고 일어나니 눈이 엄청나게 쌓여 도저히 암자로 돌아갈 수 없었다.
눈 높이에 비례해 스님의 속도 점점 시커멓게 타갔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허나 길이 막혔으니 어찌하랴. 부처님께 열심히 기도만 드렸다. 억지로 가려고 하니 사중의 모든 스님들이 말렸다. 무정한 시간은 그 사이에도 흘러 어느덧 봄이 오고 눈도 거의 녹았다. 서둘러 걸망을 챙긴 스님은 나는 듯이 달려 암자에 들어섰다. 달려가 보니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목탁을 치면서 가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고 방안은 훈훈한 기운과 함께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스님은 정신없이 아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한참 후 까닭을 물었다.
“저 어머니가 언제나 찾아와서 밥도 주고 재워도 주고 같이 놀아도 주었어요.” 그 때 갑자기 환한 백의여인이 관음봉으로부터 내려와 동자의 머리를 만지면서 성불의 기별을 주고는 한 마리 푸른 새로 변하여 날아가 버렸다. 감격한 설정스님은 다섯 살의 동자가 관음보살의 가피로 살아난 것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관음암을 중건하고 오세암으로 고쳐 불렀다.
이렇게 하여 다시 태어난 오세암은 이후 영험 있는 기도도량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865년(고종 2) 남호(南湖)스님은 해인사 대장경 2질을 인출하여 한 질은 오대산 상원사에, 한 질은 오세암에 봉안하였다.
1898년에는 인공(印空)스님의 주도로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 도량이 되어 무려 18년 동안이나 염불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외에도 몇 번의 중수를 거쳐 사격을 일신했던 오세암은 한국전쟁 때 거의 모든 당우(堂宇)가 소실되고 말았다.
그 뒤 1992년 지우스님이 대웅전을 중건하여 백의관음보살상을 봉안하고 산신각, 요사채 등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있다. 오세암은 관음기도 도량이기도 하지만 김시습으로 널리 알려진 설잠(雪岑)과 만해 한용운 스님이 거(居)했던 곳이기도 하다. 영험이 가득한 오세암은 영험이 가득한 도량이라고 할 수 있다.
두타산 관음암
삼화사에서 서쪽으로 가파른 길을 따라 50분쯤 올라가면 관음암이 자리하고있다. 관음암의 원래 이름은 지조암이었다고 한다. 921년(고려 태조 4)에 창건되었으며, 관음암의 중건은 왕실의 지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두타(頭陀)라는 말은 원래 범어 ‘dhuta’를 소리나는 대로 음역한 것으로써 의 · 식 · 주에 대한 탐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행위를 말한다. 기도를 하기 전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해야 함을 일깨워 주는 듯 동해 제일의 관음기도 도량 두타승(頭陀僧)처럼 엄격히 느껴지는 이 산에 있다. 삼화사에서 서쪽으로 가파른 길을 따라 50분쯤 올라가면 관음암이 자리하고있다.
관음암의 원래 이름은 지조암(指祖庵)이었다고 한다. 921년(고려 태조 4)에 창건되었으며
항간에는 용비대사가 절을 지었다고 하나 용비(龍飛)는 임금이 등극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는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관음암의 중건은 왕실의 지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934년(태조 20) 태조 왕건은 통일 전쟁의 후유증을 치유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삼공암(三公庵)을 삼화사(三和寺)로 이름을 바꾸면서 삼화사에 노비와 사전(寺田)을 하사하였다. 삼화사는 이를 발판으로 산내에 8개의 암자를 창건하는 등 급격히 사세가 신장하였는데, 이 때 관음암도 중건된 것이다. 조선 정조 17년(1793)에 불탄 것을 당시 삼척부사였던 윤청이 주선해 중건했다.
현재 남아있는 삼화사의 유일한 산내암자이다. 관음암은 작은 관음상을 모시고 있는데 예로부터 그 영험함이 소문나 동해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기도도량으로 지금도 사시사철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1959년 이 암자를 중건하면서 아예 이름도 관음암으로 고쳤다고 한다.
관음암에 얽힌 영험설화를 살펴보면, 옛날 아랫마을에 심(沈)씨 성을 가진 총각이 늙고 병든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심총각은 얼굴도 잘 생기고 마음씨도 착했으나 집안이 가난해 나이 서른이 다되도록 결혼을 못해 노총각으로 늙어가고 있었다. 심총각은 삼화사 뒤 두타산과 청옥산에 약초를 캐서 늙고 병든 홀어머니를 봉양했다.
약초를 캐로 갈 때면 늘 산중의 작은 암자 앞을 지나갔다.
이 암자에는 스님 한 분이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심총각은 매일 같이 암자 앞을 지나다 보니 어느새 스님의 염불소리를 조금씩 흉내내게 되었다.
깊은 산중에 들어가 있다가도 문득 목탁소리가 들리면 자신도 모르게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어느 날 심총각은 약초를 캐고 내려오는 길에 기도하는 스님한테 불쑥 물었다. “스님, 관세음보살한테 기도를 하면 정말로 소원이 성취됩니까?” 스님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백일 동안 열심히 기도를 해도 소원이 성취되지 않으면 내가 자네 소원을 성취하게 해주겠네” “스님, 정말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약속했습니다.” 총각은 그 날부터 산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법당에 들려 관세음보살 앞에 세 번 절하고 돌아올 때도 그렇게 하며 기도를 했다.
어느 날 점심을 싸 가지고 간 강냉이를 관세음보살 앞에 공양으로 올리기도 했고, 또 어느 날에는 산나물을 뜯어 관세음보살 앞에 올리기도 했다. 이렇게 석 달 가까이 하다 보니 비록 말 없는 불상이지만 친숙함이 느껴졌다.
어느덧 백일이 다되어가던 어느 날 심총각은 산으로 들어가다가 암자에서 큰 비를 만났다. 법당 추녀 밑에 앉아 비 그치기만을 기다리다 무료해져서 맨땅에 줄을 그어 놓고 혼자서 꼬니를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혼자서 두는 꼬니라 재미가 없었다. 총각은 문득 법당의 관세음보살을 바라보면서 “관세음보살님, 저하고 꼬니 한판 두시렵니까?” 관세음보살이 대답을 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총각은 혼자말로 다시 말했다. “우리 내기를 합시다. 내가 이기면 보살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시고, 보살님이 이기면 내가 보살님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지요. 제 소원은 예쁜 색시를 얻어 장가를 드는 것이니 그렇게 해주시면 됩니다. 보살님은 무엇이 소원인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말씀해주세요. 꼬니는 세 판을 두어서 두 판을 먼저 이기면 승부가 나는 것으로 합시다.”
총각은 혼자말로 약속을 하고는 꼬니를 두기 시작했다. 첫 판은 총각이 이겼다. 둘째 판은 관세음보살이 이겼다. 셋째 판은 막상막하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선수는 관세음보살이 잡고 있었다. 장고를 하던 관세음보살이 드디어 결정적인 한 수를 두었다. 승부가 나는 수였다. 심총각은 한 수 물리자고 억지를 부렸다. 관세음보살은 묵묵부답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총각은 벌떡 일어나 법당의 관세음보살한테 절을 세 번 하고 절값으로 한 수를 물리겠다고 했다. 심총각은 얼른 한 수를 물리고 다시 두자 이번엔 보살이 지고 총각이 이겼다. 총각은 찬을 쓸어버리며 관세음보살에게 말했다.
“보살님, 제가 이겼습니다. 그러니 제 소원을 들어 주셔야 합니다. 제 소원이 무엇인지 아시죠. 예쁜 색시한테 장가보내 주시는 겁니다.” 총각은 관세음보살님한테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다. 비가 그치고 저녁노을이 들기 시작했다. 총각은 기분 좋게 휘파람을 불며 산을 내려왔다. 그날 밤 심총각은 꿈에 하얀 옷을 입은 귀부인이 나타나 “나는 지조암에 있는 관세음보살이다. 오늘 너하고 꼬니를 두어서 졌으니 약속대로 예쁜 색시를 얻어 주겠다. 내일 약초를 가지고 장에 나가면 어떤 처녀가 약을 구하러 올 것이다.
그 처녀에게 약을 팔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꿈을 깨니 벌써 아침이었다.
총각은 약초를 들고 장에 나가 전을 펴고 앉았다. 조금 있으려니 처녀가 약을 사러 왔다.
“이 약이 두타산에서 캐온 것인가요? 지금 저희 아버지께서 몹시 위중하신데 이 약을 달여 먹으면 나을 수 있답니다. 저에게 이 약을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하겠습니다.” 처녀는 약을 외상으로 달라고 했다. 급하게 나오느라고 돈을 가지고 오지 못했으나 반드시 갚겠다며 막무가내로 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심총각은 할 수 없이 얼굴도 모르는 처녀에게 약을 외상으로 주고 빈손으로 돌아왔으나 왠지 기분이 좋았다. 며칠 뒤, 날이 어둑어둑 지는데 문밖에서 사람 찾는 소리가 났다. 총각이 밖으로 나가 보았더니 며칠 전 장에서 만난 처녀와 아버지로 보이는 노인이 서있었다. 노인은 죽을 사람에게 약을 공짜로 준 총각을 치하하며 약값을 갚으러 왔다며 약값을 물었다.
“약 값이 좀 비쌉니다. 노인장의 딸을 저에게 주시면 약값으로 받겠습니다.” 뜻밖의 제안에 노인은 약간 주저하는 듯 했다. 그러나 심총각을 찬찬히 살펴보니 몸도 건강하고 마음씨도 착해 보였다. 노인은 그 자리에서 혼인을 승낙했다. 이리하여 심총각은 드디어 장가를 들게 됐다. 드디어 꿈같은 첫날밤, 심총각은 아내의 옷고름을 풀며 지나간 세월의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지조암 관세음보살하고 꼬니를 둔 얘기며, 그날 밤에 꾼 꿈 얘기를 털어놓았다. 남편의 얘기를 들은 아내도 비슷한 사연을 털어놓았다.
“사실은 저도 지조암 관세음보살님한테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백일기도를 했지요. 기도가 끝나던 말 꿈을 꾸었는데 어떤 귀부인이 나타나 장에 가보라고 해서 간 것입니다.” 얘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날이 밝자 손을 잡고 절을 찾았다.
법당에 들어가서 세 번 절을 하고 관세음보살의 상호를 살펴보니 두 사람의 꿈에 나타난 귀부인의 얼굴과 똑 같았다. 그제서야 지조암 관세음보살 앞에 무수히 절을 하며 소원을 이루게 해준 것에 감사했다. 그 후부터 이 암자에는 관세음보살님께 기도를 하면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여 기도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6. 지장 · 약사 · 문수 · 나한기도성지
지장 · 약사 · 문수 · 나한기도처로서 이름난 곳이 이곳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국의 사찰이 기도도량이며, 이 도량에 얽힌 창건설화와 많은 영험설화들을 간직하고 있다. 보개산 심원사 ·도솔산 도솔암 · 상왕산 개심사 · 팔공산 갓바위 · 운문사 사리암 · 관악산 연주암 · 팔공산 거조암 · 와룡산 고산사 등이 그 대표적이다.
보개산 심원사
강원도 철원 심원사는 ‘생지장보살 도량’으로 불린다. 애초에 심원사가 개창된 곳은 지금의 심원사에서 서남쪽으로 약20km떨어진 경기도 연천 보개산이다. 647년 영원조사가 영주산에 흥림사로 창건하였다. 그 후 무학대사가 주지로 주석하며 삼창하고 산이름을 영주산에서 보개산으로 절이름을 심원사로 고쳐 불렀다.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상노1리 72번지에 위치한 심원사는 ‘생지장보살 도량(生地藏菩?道場)’으로 불린다. 애초에 심원사가 개창된 곳은 지금의 심원사에서 서남쪽으로 약20km떨어진 경기도 연천군 보개산(寶蓋山)이다. 647년(신라 진덕여왕 원년)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영주산(靈珠山, 보개산의 옛이름)에 흥림사(興林寺, 심원사의 옛 이름)로 창건하였다.
그 후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왕사로 유명한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주지로 주석하며 삼창(三創)하고 산 이름을 영주산에서 보개산으로 절 이름을 심원사로 고쳐 불렀다. 이후 수많은 영험이 생기며 사세가 확장되었으며 근세에까지 금강산 유점사에 딸린 말사(末寺)로 석대암 · 지장암 · 남암 등의 산내암자와 250칸의 당우, 1609위의 불상 ·탱화 ·탑이 있었던 대찰의 면모를 지니고있었다.
6 · 25 전쟁의 참화로 본당인 천불전만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천불전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移建)하고 석대암 지장보살상을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고있다. 원래의 절터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8호인 부도 12기와 아미타불 입상 · 사적비 · 공적비 만이 옛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부도 가운데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로 의승군을 이끌었던 제월당 경헌(霽月堂 敬軒)스님의 부도는 옥개석 운룡문(雲龍紋) 조각 솜씨가 빼어나며, 아미타불입상을 포함해 사지(寺址)에 대한 전체적인 문화재조사가 시급하다는 것이 문화재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옛 절터는 군부대 안에 있어 순례하려면 미리 군부대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심원사에는 ‘지장영험비’가 있으며, 지장보살의 영험함을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 사냥꾼 형제의 출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신라 성덕왕 17년(720)의 일로 보개산 아랫마을에 사냥꾼인 이순석(李順碩) 형제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형제는 사냥에 나서 보개산 너머 담터라는 곳을 지나고 있었는데, 마침 큰 멧돼지 한 마리가 눈에 띄었고, 순석은 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화살을 쏘았다.
마치 금란가사를 두른 듯한 누런 멧돼지는 왼쪽 앞다리에 화살을 맞고 보개산 정상인 환희봉 쪽으로 달아났다. 형제는 핏자국을 따라 멧돼지가 멈춘 곳에 이르러 바라보니 금빛 멧돼지는 볼 수 없고 왼쪽 어깨에 화살이 꽂힌 돌로 된 지장보살상이 맑은 물이 넘쳐나는 샘물 가운데 상반신만 내놓은 채 있었다.
화살을 뽑으려 했으나 석상은 태산 같은 무게로 꿈적도 하지 않아 크게 놀란 형제는 깨달은 바 있어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맹세했다.“대성(大聖)이시여! 저희들을 죄에서 구해 주시려고 이 같은 신변(神變)을 나타내신 것임을 알겠나이다. 만약 내일 이 샘물 곁에 있는 돌 위에 앉아 계신다면 마땅히 출가하여 수도하겠나이다.”
다음 날 형제가 그곳으로 가보니 과연 석상이 돌 위에 있으므로 두 사람은 바로 300여 명의 추종자를 거느리고 출가하였다. 샘 옆의 숲 속에 돌을 모아 대(臺)를 쌓고 항상 그 위에 앉아 정진하였으므로 그곳을 석대암(石臺庵)이라고 불렀다. 암자에는 자신들의 화살에 맞은 석상을 모셨다.
견불령(見佛嶺)과 대광리(大光里)라는 지명도 지장보살석상의 영험에서 유래한다. 고려 초의 일로 전해지는 이야기로 심원사 아랫마을에 어려서 열병을 얻어 장님과 앉은뱅이가 된 이덕기와 박춘식이라는 사람이 살고있었는데, 두 사람은 심원사 대종불사를 하기 위해 마을에 내려온 화주스님에게 “대종불사에 시주하면 부처님의 가피로 재앙이 소멸되고, 현생에서 복을 받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화주가 되기로 약속했다. 3년여 동안 이들은 서로의 눈과 다리가 되어 시주를 하였으며, 마침내 대종불사의 타종식 날이 되었다.
첫 타종의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순간 앉은뱅이 박춘식은 오색구름을 타고 밝은 구슬을 손에 지닌 지장보살님께서 하늘에서 심원사 쪽으로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앉은뱅이는 “지장보살님이 보인다”고 소리치며 장님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그러자 두 다리가 쭉 펴지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이덕기 또한 “어디! 어디!”하고 소리치며 눈을 비비자 앞이 보였다.
그들은 산마루 위의 오색구름에 쌓여 큰 빛을 발하고 있는 지장보살님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끊임없이 절하였다.
마침내 지장보살님의 가피를 입은 것이었다. 그들이 지장보살님을 본 고개를 견불령,
그들이 살던 마을을 부처님의 큰 광명이 머무르는 동네라 하여 대광리라 불렀다.
도솔산 도솔암
도솔암은 선운사와 함께 창건되었다고 <선운사사적기>는 전하고 있다.
신라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선운사의 왼쪽 굴(지금의 진흥굴)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미륵삼존이 바위를 깨뜨리고 나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에 감응받아 중애사, 선운사, 도솔사 등의 여러 사암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도솔암은 선운사와 함께 창건되었다고 <선운사사적기>는 전하고 있다. 신라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선운사의 왼쪽 굴(지금의 진흥굴)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미륵삼존이 바위를 깨뜨리고 나오는 꿈을 꾸고 이에 감응받아 중애사(重愛寺), 선운사, 도솔사 등의 여러 사암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진흥왕의 부인의 이름이 중애였으며, 딸의 이름은 도솔이었다.
진흥왕 당시에는 백제와 신라가 영토를 둘러싸고 심한 대립에 있었던 때라 그 기록은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산과 암자의 이름을 도솔이라고 하고 미륵삼존이 꿈에 출현하였다는 것은 이곳이 미륵신앙과 깊이 관련돼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도솔암 마애불상이 554~598년(백제 위덕왕 재위기간) 사이에 검단선사(黔丹禪師)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검단선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이곳은 상도솔암(上兜率庵), 하도솔암, 북도솔암 등 세 개의 이름으로 불렸다. 상도솔암은 1511년(조선 중종 6)에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하도솔암은 1658(효종 9), 북도솔암은 1703년(숙종 29)에 각각 창건되었다. 1994년 부여문화재연구소의 도솔암 인근 지역조사에서 ‘도솔산 중사’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고려시대 기와가 출토돼 예전에는 중사라는 이름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검단선사에 읽힌 일화 가운데 도적의 무리들을 절복시킨 이야기는 절 아랫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져 오고있다. 선운사와 도솔암이 창건되기 전의 이 지역은 도적들의 소굴이었다. 검단선사는 이들에게 도적질을 하지말고 참되게 살라며 소금 굽는 법과 제지기술을 가르쳐 생업으로 삼게 하였다.
창건설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륵신앙지였던 이곳이 언제부터 지장기도 도량이 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도솔천 내원궁에 지장보살상을 모신 고려후기부터가 아닐까 짐작 할 뿐이다. 도솔암은 본래 상. 하. 동. 서. 남. 북의 6도솔이 있었으나, 상. 북 두 도솔암은 마애불만 남고 나머지는 자취조차 희미해졌다. 지금 지장보살상이 모셔진 상도솔암은 도솔천 내원궁이고, 하도솔암은 마애불상이 있는 곳이며, 북도솔암은 대웅전이 있는 자리이다.
지금의 도솔암은 상 · 하 · 북 도솔암 이 셋을 합쳐 도솔암으로 부르며, 대웅전 · 나한전 · 도솔천 내원궁 · 용사 등의 전각과 마애불상으로 이루어졌다. 보물 제280호로 지정된 도솔암 지장보살상은 도솔천 내원궁에 모셔져 있다. 내원궁은 미륵부처님이 도솔천에서 수행과 교화를 펼치며 머무르는 곳이다. 내원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련도 붙어 있지 않은 작은 전각이다. 여느 사찰처럼 명부전이라 하지 않고 도솔천 내원궁이라 했음은 미륵신앙에 바탕을 둔 창건설화에서 연유한다고 한다.
또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시왕을 배치하지 않고 지장보살상 뒤에 목각탱화로 시왕상을 배치하고 있다. 지장보궁이라 쓰인 문을 들어가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화려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으로 참배객을 맞는 지장보살님을 친견할 수 있다. 지장보살은 팔찌를 두른 오른손으로 엄지와 중지를 살짝 닿을 듯 모아 손바닥을 앞으로 내보이며, 왼손에는 둥근 보륜(寶輪)을 들었다.
내원궁 입구 왼쪽 자연암벽에는 거대한 마애불(보물 제1200호)이 새겨져 있다. 검단 선사가 불상을 조각하고, 그 위 암벽 꼭대기에 공중누각을 지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마애불 머리 위에는 기둥을 박기 위해 뚫은 직사각형의 구멍이 뚜렷하다. 마애불은 낮은 돋을새김(浮彫)으로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치켜 올라간 불거진 눈과 앞으로 내민 입술 때문에 전체적으로 거칠고 소박하다는 느낌을 주지만, 수직의 바위 높이 13m, 너비 3m의 우람한 규모가 고려인의 깊은 신앙심을 짐작케 해준다.
도솔암 스님들이 조석으로 예불을 올리고있으며, 마애불 기도를 올리는 불자들이 많이 찾고있다. 마애불 가슴 주위에 구멍의 흔적이 있는데, 이 마애불의 배꼽 속에 신비한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1890년 무렵 전라감사 이서구(李書九)가 배꼽을 열어보니 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자 두려워 책을 도로 넣고 봉해버렸다고 한다.
그 뒤 동학교도들 사이에 그 책에 세상을 개혁할 비방이 적혀있다는 소문이 나돌아
한 때는 동학교도들의 집회처로 쓰이기도 했고 1892년 동학교도 손화중(孫和中)이 비결을 꺼냈다는 얘기도 전한다.
이 일로 많은 동학교도들이 옥에 갇히고 그 중 세 명은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상왕산 개심사
충청남도 서산 상왕산 자락에 자리잡은 개심사는 ‘마음을 여는 절’이라는 사찰 이름을 가지고 있다.
개심사가 창건된 것은 654년이며, 1300년이라는 유구한 세월의 풍랑을 겪어 온 고찰이다.
당시 혜감스님이 절을 짓고 개원사라 했다. 개심사로 불린 것은 1350년 처능스님이 중건하면서부터이다.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1번지 상왕산 자락에 자리잡은 개심사는 ‘마음을 여는 절’이라는 사찰 이름을 가지고있다. 개심사가 창건된 것은 654년(백제 의자왕 14)이며, 1300년이라는 유구한 세월의 풍랑을 겪어온 고찰이다. 당시 혜감(慧鑑)스님이 절을 짓고 개원사(開元寺)라 했다. 개심사로 불린 것은 1350년(고려 충정왕 2) 처능(處能)스님이 중건하면서부터이다.
1475년 중창, 1740년 중수하였으며, 최근 1955년 전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있다.
중심 당우인 대웅보전과 요사로 쓰이는 심검당(心劍堂) · 안양루(安養樓) 등 당우는
몇 손가락으로 다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규모이지만 충남의 4대사찰로 불릴 만큼 가치 있는 절이다.
절 입구 돌계단에 발을 디디면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는 듯 늘어선 소나무 가지가 그늘을 드리운다. 계단을 다 오르면 직사각형의 연못이 보인다. 풍수지리에서 성왕산은 코끼리의 모양이다. 부처님을 상징하는 코끼리의 갈증을 풀어주기 위해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 3단으로 쌓은 연못의 돌벽이 있다. 연못의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해탈문, 안양루, 심검당, 대웅보전이 차례로 다가온다. 대웅보전은 조선 초기의 건물로 보물 제143호로 지정돼있다. 고려 말 화려했던 팔작지붕 양식에서 조선시대 맞배지붕의 양식으로 넘어오는 시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심검당은 대범함과 소박함을 함께 전해주는 독특한 분위기를 품고있다. 단청을 하지 않은 것도 그러하거니와 휘어진 목재를 그대로 기둥과 대들보로 쓴 것이 그러하다. 심검당 또한 조선 초기의 요사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상왕산 개심사(象王山 開心寺)’라는 예서체의 현판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안양루에 오르면 절과 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현판의 글씨는 유명한 근세의 서화가 해강 김규진(金圭鎭)의 필체다. 안양루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마음을 글씨에 그대로 담아낸 듯 하다. 명부전의 건립시기는 조선 중기로 일찍이 이곳이 지장신앙의 도량임을 알려준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94호인 명부전 안의 지장보살님의 단정한 모습이 근엄한 표정의 장군상과 매우 대조적이다. 개심사는 영험있는 지장기도 도량으로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근대불교사의 큰 봉우리들이 주석하면서 수행했던 참선도량으로도 이름이 높다.
근대 한국불교 선종의 중흥조로 불리는 경허(鏡虛)스님(1849~1912)이 한동안 머물며 두문불출 정진하던 곳이 바로 개심사이다. 어느 날 생사의 절박함을 깨달아 동학사의 강사의 자리를 던지고 깨달음을 얻은 후 이곳에서 보림(保任)했다. 붉은 녹이 슨 함석지붕의 요연선원(了然禪院)은 일엽스님이 세워 비구니 스님들을 정진케 했던 곳이다.
팔공산 갓바위
팔공산에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준다는 그 유명한 선본사 갓바위 부처님(약사여래)이 계신다. 선본사는 팔공산 동남쪽 주봉인 관봉 아래에 있는데, 본래 절 이름보다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으로 더 알려져 있다. 원래 절집이야 한적한 곳이기는 하지만 선본사는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대구광역시 동쪽의 하양 마을에서 신령 방면으로 향하다 보면 높고 우람한 산봉우리들이 줄지어 늘어선 산이 보인다. 대구 · 경북의 진산(鎭山)인 도립공원 팔공산(八公山)이다. 높이는 1,193m 산자락은 대구광역시와 경북 경산시 ·군위군 · 영천군 · 칠곡군에 걸쳐 있다. 영남의 영산(靈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팔공산은 풍광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신령스런 산으로 숭앙되어왔다.
공산(公山) · 부악(父岳) 등으로 불렸던 팔공산은 신라시대에는 국토의 중앙에 있는 산(중악)으로서 토함산(동악) · 계룡산(서악) · 지리산(남악) · 태백산(북악) 등과 함께 나라를 외호하는 5악의 하나로 신성시되었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는 팔만구천의 절이 있었다는 말이 전할 정도로 산 전체가 도량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경주 남산에 비견할 만큼 산 곳곳에 불교 유적과 유물이 널려 있는 성지(聖地)다. 바로 이 팔공산에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준다는 그 유명한 선본사 갓바위 부처님(약사여래)이 계신다. 선본사는 팔공산 동남쪽 주봉인 관봉(冠峯:갓바위) 아래에 있는데, 본래 절 이름보다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으로 더 알려져 있다.
원래 절집이야 한적한 곳이기는 하지만 선본사는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사람들이 갓바위 부처님 쪽으로 곧바로 향하기 때문이다. 갓바위를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갓바위 시설지구에서 곧바로 올라가거나 선본사를 거쳐 등산로를 따라 약15분 정도 올라가면 된다. 등산로는 상당히 가파른 편인데도
1년 365일 전국에서 몰려오는 기도객들로 붐빈다. 갓바위에는 칠성각 · 산신각 · 용왕각과 요사가 있다.
칠성각 등은 독립된 건물이 아니라 하나의 건물로 되어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이 칠성각이고, 좌우가 산신각과 용왕각이다. 바로 아래는 수각(水閣)으로 사용되고있다. 이곳에서 위쪽으로 나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관봉(冠峯) 정상의 그 유명한 갓바위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 ‘갓바위’란 명칭은 머리에 갓처럼 생긴 판석(板石)이 올려져 있는데다 관봉이 우리말로 갓바위이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이 부처님은 몸, 대좌, 갓 등 전체가 화강암 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불상 뒤에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바위가 광배(光背) 구실을 하는데, 이것도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갓바위 부처님은 통일신라시대의 석불좌상으로 전체 높이는 4m에 이르며 보물 제431호로 지정돼있다. 한국 약사신앙의 대표적 성지인 선본사(禪本寺)는 아쉽게도 창건이나 연혁에 관한 내용은 거의 전하지 않는다.
현재 절에 전승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491년(신라 소지왕 13)에 극달화상(極達和尙)이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창건주로 등장하는 극달화상은 역사서나 주요 문헌에 전혀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도 527년(법흥왕 14)이므로 역사적 근거는 희박하다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이다. 일부 문헌에는 <선본암중수기문(禪本重修記文)>에 극달화상 창건설이 언급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지만 이 자료의 성격이나 현존 여부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인근의 동화사도 극달화상이 493년(소지왕 15)에 창건했다고 전승되고 있어 절에서도 개산조(開山祖)로 모시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현재로는 알 수 없으나 극달화상이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일 가능성은 있다고 할 수 있다. <선본암중수기문>에 의거했다는 자료에 의해 알려지고 있는 연혁은 다음과 같다.
638년(선덕여왕 7) 의현(義玄)스님이 약사여래좌상(갓바위부처님)을 조성했고, 1614년(조선 인조 19) 수청(秀廳)스님이 중창했다. 1766년(영조 41) 기성(箕成)화상이 중건했다. 1802년(순조 2) 국성(國成)스님 등이 신중탱화를 조성했고, 1820년(순조 20) 운암(雲岩)화상이 중수했다. 1877년(고종 14) 낙허(樂虛), 원인(月印)화상이 중수했다. 현대 이전까지의 대략적인 연혁은 이와 같다. 사실 선본사 갓바위 부처님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1962년 한 일간지에 보도되면서부터이다. 1960년대 초반 석굴암이 발견되어 세인들의 관심을 끌던 중 군위의 제2석굴암이 발견되면서 팔공산도 본격적으로 조사되기 시작했는데 그 때 발견된 것이다. 그 후 갓바위 부처님의 영험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운문사 사리암
나반존자의 기도도량으로 널리 알려진 운문사 사리암은 세상에 묻혀 살며 물들여진 온갖 때묻은 것을 떨쳐버리고 일심으로 기도한다면 기도의 감응으로 나반존자님이 던져주는 돌을 받아 쥘 수 있다고 예부터 전해 온다. 사리암이 창건된 것은 937년(고려 태조 20)이다.
나반존자(那畔尊者)의 기도도량으로 널리 알려진 운문사 사리암(邪離庵)은 경북 청도군 儲?玲【?동남향으로 약 4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삿된 것을 여읜다는 뜻인 사리암, 세상에 묻혀 살며 물들여진 온갖 때묻은 것을 떨쳐버리고 일심으로 기도한다면 기도의 감응으로 나반존자님이 던져주는 돌을 받아 쥘 수 있다고 예부터 전해 온다. 사리암이 창건된 것은 937년(고려 태조 20)이다. 당시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와 후삼국 통일을 위해 왕건을 도왔던 보량(寶壤)국사가 절을 지은 것이 사리암의 시초다. 이후 세인의 이목에서 멀어져 고고한 산중 암자로만 남아 있던 사리암은 1천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1845년(조선 헌종 11) 정암당 효원대사가 중건하고 신파스님이 천태각(天台覺)을 건립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851년(철종 2) 현재의 나반존자상을 봉안한 후 사리암은 영험있는 나반존자 기도도량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나반존자는 일명 빈두로존자라 한다. 16아라한 중의 한 분으로 흰머리칼과 길다란 눈썹을 하고 계시며, 부처님의 명을 받아 열반에 들지 않고 남인도의 마리산에 있으면서 부처님 열반 후에 미륵불이 출세할 때까지 말세 중생을 제도하려는 대원력을 세우신 존자님이다. 1977년 비구니 혜은스님이 원주로 부임하여, 1978년 전기 불사를 시작으로 1980년, 前부산 거사림회 회장 이인희 거사의 후원으로 3층의 요사를 신축하였다. 1983년 현재의 관음전, 자인실, 정랑 등을 개축하였다.
새로 신축한 법당에는 관세음보살상을 모셨고 천태각에는 나반존자, 그리고 산신각에는 산신이 각각 모셔져 있다. 일년 내내 날씨와는 상관없이 기도하시는 분들이 끊이지 않는다. 운문사 사교과와 사집과에서 다섯 분의 스님이 올라가 기도를 한다. 사분정근 기도를 혼신껏 하고 나오면 마주 보이는 학산이 두 날개쭉지를 너르게 편 채 하나로 뭉쳐져 마음을 푸근히 감싸주니 이 어찌 기도성취를 못하고 힘들여 올라온 아득한 저 길을 차마 내려갈 수 있으리요. 중생들에게 괴로움이 많아서인지 소원이 많아서인지 기도를 하기 위하여 곳곳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절에 전해내려 오는 설화는 옛날에 사리암 바위굴에서는 수행하는 사람이 한 명이면 한 사람분의 쌀이, 두 사람이 공부하면 두 사람분의 쌀이 , 열사람이 도를 닦으면 열 사람분의 쌀이 나왔다. 어느 날 욕심이 생긴 사리암 대중 한 사람이 막대기로 쌀이 나오는 구멍을 들쑤셨다. 그런데 웬걸 나오라는 쌀은 나오지 않고 물만 솔솔 나왔으며 그 후로는 쌀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한다. 또한 조선 고종황제가 심열로 고생하던 중에 청우스님이 사리암에서 백일기도를 주관하였는데, 꿈에 선인이 나타나 임금님의 머리에 침을 꽂아주니 깨끗이 나았다는 효험담도 전해져 온다. 지금도 사리암에는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것은 모두 나반존자에게 의지하는 사람들의 마음인 것이다.
관악산 연주암
관악산 연주암은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에 위치하고 있다. 연주암의 창건은 해동 화엄 초조 의상스님에 의해서다. <연주암중건기> 등 사찰에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스님은 문무왕 17년(677)에 관악산에 의상대를 세우고 그 아래에 관악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관악산 연주암(戀主庵)은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에 위치하고 있다. 연주암의 창건은 해동 화엄 초조(初祖) 의상스님에 의해서다. <연주암중건기> 등 사찰에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스님은 문무왕 17년(677)에 관악산에 의상대를 세우고 그 아래에 관악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이 관악사가 연주암의 본래 이름이고 의상대는 지금의 연주대이다. 그러나 의상스님이 연주암을 어떤 이유로 창건하게 됐는지, 또 이곳에서 어떻게 수행 정진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의상 스님이 연주암을 창건했다는 기록을 <중건기> 외에서는 찾아 볼 수 없고, 경내에도 의상스님의 창건과 관련된 유물이 전혀 전하지 않는다. 관악사는 고려 말, 조선 초에 이르러 ‘연주암’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는데, 그 동기와 관련해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하나는 고려가 망하자 강득룡(姜得龍), 서견(徐甄), 남을진(南乙珍) 등 유신들이 관악산에 은신하며 의상대에서 고려 왕조를 그리워 한데서 유래한다는 것으로 임금을 뜻하는 ‘주(主)’를 써서 ‘임금을 그리워한다’는 뜻의 연주(戀主)’를 관악사의 새 이름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다른 이야기는 조선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과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과 관련된 것으로 태종이 왕위를 셋째인 충녕대군(세종)에게 물려주려고 하자 유랑길에 나선 이들은 관악사에 머물며 왕위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리고자 했다고 한다.
이 때 지은 건물이 40여 칸에 이르렀는데, 후대 사람들이 이들 대군의 심정을 기리기 위해 의상대를 연주대로, 관악사를 연주암으로 이름을 고쳐 불렀다는 것이다.
효령대군은 연주암을 중건했고 숭유억불로 침체일로에 있던 불교의 중흥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로 조선의 역대 왕비나 빈들이 불교에 귀의하게된 것도 효령대군의 그 같은 노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효령대군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각종 법회개최나 사찰중건, 경전간행 등 여러 방면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연주암에는 효령대군의 영정을 모신 효령각이 있어 효령대군을 기리고있다. 고려의 유신들이 개성을 그리워하며 은거했다거나 양녕, 효령 두 대군이 머물렀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까지 믿을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어찌됐든 연주암이 조선왕조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태조는 즉위 원년(1392)에 연주암을 신축했다. 약사여래와 미륵불, 5층탑을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조성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그러나 이 같은 조선 초의 중건과 신축이 이후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연주암의 역사는 거의 알려진 바 없고 별다른 성보문화재도 없다. 가장 오래된 것은 3층석탑을 들 수 있는데,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계승하고 있어 학계에서는 고려후기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각 부분의 비례가 균형 잡혀있고, 그 수법이 매우 정교한 우수한 석탑이다.
연주암에서 4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영험 있는 나한기도처로 유명한 연주대가 있다. 기도는 백척간두에서 뛰어내리듯 간절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깎아지른 절벽에 자리잡고 있다. 나한을 모셨음을 나타내는 응진전(應眞殿)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응진전 바로 옆에는 약사여래불이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부처님 또한 영험하기로 소문이 나있다고 한다.
팔공산 거조암
나한 기도선지로 유명한 팔공산 거조암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북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팔공산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본사인 은해사에서 30여분정도 올라가면 질박한 돌담 안에 거조암이 자리하고 있다. 거조암은 기도도량으로서의 명성과는 달리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나한 기도선지로 유명한 팔공산 거조암(居祖庵)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북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팔공산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본사인 은해사에서 30여분정도 올라가면 질박한 돌담 안에 거조암이 자리하고있다. 거조암은 기도도량으로서의 명성과는 달리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693년(신라 효소왕 2)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경덕왕 때(742~765) 왕명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이 전해올 뿐이다. 그러나 원효스님은 686년(신문왕 6)에 입적했으므로 신빙성이 문제가 있고, 경덕왕이 창건했다는 설 또한 정확한 근거가 없다고 한다. 거조암이 우리나라 불교사에 이름을 드러낸 것은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1158~1210)스님이 이곳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시작하면서부터다. 지눌스님은 1182년(명종 12) 개성 보제사(普濟寺)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하여 뜻을 같이 하는 도반들과 함께 <정혜결사문>을 지어 후일을 기약했다.
그 <정혜결사문>은 “우리들이 아침저녁으로 행하는 자취를 살펴보면, 불법을 빙자하여 아상(我相)과 인상(人相)만을 키우며 이양의 길에서 구구(區區)하며 풍진 세상에 골몰하여 도덕을 닦지도 아니하면서 의식을 허비하니, 비록 출가했다 하나 무슨 덕(德)이 있겠는가. 아! 대저 삼계(三界)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티끌을 멀리할 행은 없고 헛되이 남자의 몸이 되어서 대장부의 뜻은 없으니, 위로 도를 넓히지 못하고 아래로 중생을 이롭게 하지 못하며 가운데로 사은(四恩)을 저버리니 참으로 부끄럽도다.” 당시의 타락한 불교교단의 실태를 엄중하게 비판한 지눌스님은 경북 예천 하가산 보문사에서 은거하며 수행에만 전념하기를 몇 년, 마침내 1188년(명종 18) 봄 거조암 주지 득재(得才)스님의 청으로 거처를 옮긴 스님은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을 규합하여 본격적인 수행결사에 나선다.
이후 송광사로 결사도량이 옮겨가지만 결사의 시작은 바로 이곳이었다. 지눌스님이 거조암에서 정혜결사의 횃불을 치켜든 것은 결코 우연의 일만은 아니다. 거조의 조(祖)는 조사(祖師), 즉 일대사를 해결한 수행의 종장(宗匠)을 가리키는 말이거니와 그것은 바로 나한이라고 한다. 나한은 '진리에 계합한 이'라 하여 응진(應眞)이라 하고, 그리하여 공양을 받을 만한 존재이므로 응공(應供)이라 한다.
정혜결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수행자가 응진 · 응공 · 나한인 것이다.
결사도량 거조암은 그 뒤 1298년(충렬왕 24) 정월에 원참스님이 밤중에
낙서(樂西)라는 도인을 만나 본심미묘진언(本心微妙眞言)과
극락왕생의 참법(懺法)을 전수 받아 기도도량으로 크게 부각되기에 이른다.
거조암은 나한기도성지답게 오백나한전인 영산전이 절의 중심을 이루고있다. 영산전은 건축학적으로 군더더기가 없는 간결미의 극치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특히 나뭇결의 자연스러움이 그대로 살아있고 흙벽의 질감이 부드럽게 다가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국보 제14호로 지정되어있다. 영산전 후불탱화인 영산탱은 색조나 화풍이 이채로운 불화로 평가받고있다.
조선시대 불화들의 대부분은 녹색이나 청색 또는 적색이 화면을 지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탱화는 적색을 바탕으로 하였지만 붉은색이 그다지 전면에 나서지 않는 느낌이다. 거조암의 백미는 역시 영산전에 안치되어 있는 오백나한상이다. 오백나한이 안치되어 있다고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모두 5백 26위의 나한이 봉안돼있다. 학계에서는 영산전이 건립될 당시 오백나한상이 조성됐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와룡산 고산사
고산사는 충주시와 단양군을 이어주는 국도변에 있는 와룡산 정상 반장재에 자리하고있다.
높을 고(高), 뫼 산(山)이란 이름처럼 산꼭대기에 절이 있다.
고산사는 875년 도선국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이곳에서 8년간 머물렀다고 한다.
고산사는 충주시와 단양군을 이어주는 국도변에 있는 와룡산 정상 반장재에 자리하고있다. 큰길에서 절까지 오르내리는 길이 있기는 하지만 만만치 않다. 높을 고(高), 뫼 산(山)이란 이름처럼 산꼭대기에 절이 있다. 고산사는 875년(신라 헌강왕 5) 도선국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 이후의 연혁은 알 수 없고,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이곳에서 8년간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나 절의 모습은 1100여 년 무심한 세월 속에서 망국의 왕일 망정 한 나라의 국왕이 기거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초라하다.
10평이 채 안되는 응진전(應眞殿)과 스레이트 지붕의 요사채 그리고 흙벽돌로 만든 선방(禪房)과 해우소가 도량의 전부다. 응진전은 함현(含玄)스님이 새로 지은 것이다. 그 전에는 다 쓰러져 가는 듯한 법당 위에 비닐 한 장을 덮어 비바람만 겨우 막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새로 단장하여 편안하게 참배할 수 있다. 응진전이란 당호(堂號)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곳엔 나한들이 계신다. 응진전은 보통 주존불이 석가모니 부처님인데 이곳은 관세음보살이 양옆으로 각각 세 분 나한들의 외호를 받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화관을 쓰고 흰색 가사를 걸치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다. 충청북도에서는 유일한 석조관음상이다. 여섯 분의 나한은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 모습이 정겹고 재밌다. 눈을 반쯤 감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나한, 흰색 눈썹이 유난히 빛나는 나한, 한쪽 어깨를 비스듬히 치켜세운 나한, 눈을 부릅뜨고 딴 생각을 못하게 하는 나한이 있다.
옛날에 일곱 분의 나한이 계셨다고 하나 지금에는 여섯 분만이 자리를 지키고 계실 뿐
나머지 한 분은 어디로 가셨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
첫댓글 세해 복 많이 받으시고 성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