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을 길잡이로 삼아 그 형세로 갈 길을 알고, 별빛이 비추는 길을 가던 시절은 얼마나 행복했던가 영혼 속의 타오르는 불길은 運星과 同體였기에, 세계는 광활하지만 내 거처나 다를 바 없었다." ---루카치, {소설의 이론}
1. 루카치의 생애 : 1885-1971
(1) 성장기(1885-1919)
1885년 4월 1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부다페스트에서 출생. 유태계인 아버지는 은행장으로 귀족 작위를 받았음.
김나지움 재학 시절인 10대 후반부터 연극운동에 관계. 집필활동 시작. 루카치는 극작가가 되고자 했으나, 자신의 재능이 모자란다는 것을 알고 1903년에 그의 모든 수고(手稿)를 불태워버림. 이후 연극비평에 몰두. 1909년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드라마의 형식]에 대한 연구로 철학 박사학위 받음.
베를린 유학 시기에 짐멜(G. Simmel)의 강의에 '개인적 제자'로서 출석하는 한편, 독일 고전철학(칸트, 피히테, 셸링, 헤겔) 연구. 이 시기 수년 동안에 쓴 논문을 모은 {영혼과 형식}이 1910년에 헝가리어판으로, 다음해엔 독일어판으로 출판되어 주목 받음. 이 시기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짐멜의 절대적 영향을 받음(cf. {돈의 철학}).
그 후 하이델베르그에서는 막스 베버의 사회학 서클에 가입, 독일 사회학에 대한 연구. 베버의 강력한 영향. 헝가리에서는 벨러 바라쥬, 칼 만하임 등과 '일요 서클'에서 문화활동을 하였으며, 무정부주의적-생디칼리즘 및 로자 룩셈부르크 저술 등을 연구. 1916년 {소설의 이론} 발표.
1917년 최종적으로 귀국한 다음, 1918년 12월에 막 결성된 헝가리 공산당(KPU)에 입당. 1919년 2월에 벨러 쿤(Bela Kuhn)이 체포된 뒤 루카치는 KPU 중앙위원으로 선출. 1919년 무장봉기 준비 작업 참여. 3월부터 6월까지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의 교육제도 담당 인민위원. 그 뒤 루마니아의 반혁명군에 맞서 제5사단 정치위원으로 전선에서 활동. 소비에트 정부 붕괴 후 비인으로 망명.
(2) 비인 시절(1919-30): '맑스로 가는 길'
1919년부터 1930년까지 주로 비인에서 체재. 부다페스트에서 비합법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으며, 1920년과 1921년에 코민테른 2차 대회 및 3차 대회 참석. 1923년에는 혁명 실천의 와중에서 썼던 8개의 논문으로 된 {역사와 계급의식} 간행. 1924년 6-7월 코민테른 5차 대회에서 부하린, 지노비에프 등에 의해 '좌익적 일탈'이라고 격렬히 비판 받음.
1928년 비합법적인 헝가리 공산당의 지침을 위하여 기초한 [블룸-테제] 발표. 여기서 루카치는 호르티(Horthy) 장군의 독재정치에 대항하여 투쟁하기 위해서는 과도기적인 민주주의적 슬로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 그러나 이는 코민테른 6차 대회에서 채택한 '사회파시즘론'의 입장을 암암리에 거부하는 것. 코민테른 지도부는 [블룸-테제]를 격렬히 비난. 루카치에게는 당에서 즉각 추방하겠다고 협박. 그는 제명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기 입장을 공식적으로 철회한다고 발표.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후에도 결코 견해를 수정하지 않았음. 오히려 루카치의 30-40년대 미학 저술들은 [블룸-테제]의 정치적 입장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 그 대가로 KPU나 코민테른은 그에게 영구적으로 조직적인 책임을 맡기지 않게 됨.
(3) 모스크바 시절(1930-1944): '도덕적으로 좋은 시대'
1930년 모스크바에서 {맑스-엥겔스 전집(MEGA)}의 편집에 참가. 이 과정에서 맑스의 {경제학-철학 수고}를 처음 접하게 됨. 그 후 베를린으로 가서 작가동맹의 지도에 종사하던 중, 1933년 히틀러 정부에 의해 추방. 다시 소련 망명.
이후 모스크바에서 문학잡지 편집 및 과학아카데미에서 연구에 몰두하면서, 맑스주의 미학에 입각하여 주로 19세기 리얼리즘 소설을 다룬 문학론 다수 집필. 이 시기 루카치의 입장이 발단이 되어 1937년에 표현주의 논쟁 발발. 숙청의 회오리 속에서 한 때 스탈린 정부에 체포되기도 했지만, 곧 석방.
(4) 부다페스트 시절(1944-1971): 헝가리 봉기의 지적 지도자
2차대전 종전 후 헝가리에 귀국하여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미학과 문학철학 강의. 1948년 {청년 헤겔}, 1954년에 {이성의 파괴} 등을 간행.
1956년 6월에 최초로 공개적으로 스탈린주의 공격. 당사(黨史) 연구소에서 [블룸-테제] 다시 거론. 본질적인 점에서는 그 테제가 인정됨. 예전의 자아 비판을 부분적으로 번복. 10-11월에 KPU 중앙위원. 너지 정부에서 인민교육부 장관. 너지가 바르샤바 협정에서 헝가리의 탈퇴를 천명했을 때 당을 떠남. 1956년 헝가리 봉기 좌초후 나지 정권의 인민교육부 장관으로 일했던 것 때문에 소련군에 의해 탄압받은 후, 루마니아 억류를 거쳐서 부다페스트에 은거.
1958년 이후 동독과 헝가리에서 루카치의 저술 출판이 중단되고 그의 이론에 대한 공공연한 비판 시작. 반면 루카치의 주요 저술은 연속적으로 프랑스어로 번역되었으며, 서독에서도 {역사와 계급의식}의 해적판이 나돌기 시작. 68년 봉기에 루카치가 미치는 영향력 짐작. 1968년 이후에는 '프라하의 봄'의 실천적 결과와 인민민주주의 국가들에서 행해진 신경제정책의 결과를 자료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재규정 시도.
1969년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당 재입당. 만년에는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 등 체졔적인 저작에 몰두. 1971년에 부다페스트에서 암으로 사망.
(5) 평가
이처럼 루카치의 생애는 초기의 문학사회학으로부터, 헤겔철학을 통해 맑스주의 철학을 독창적으로 재구성하는 {역사와 계급의식}의 청년 시절, 그리고 이후 반히틀러 전선에서 스탈린과 정치적으로 타협하여 리얼리즘 미학, 문학비평이론에 주력했던 모스크바 시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차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2차대전 이후 시기 등 크게 네 개의 시기로 나누어진다. 그는 자신의 삶을 "맑스로 가는 길"이라고 즐겨 표현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다. 이는 특히 루카치 자신의 수차례에 걸친 자기비판과 정치적 입장의 번복(당 노선에 대한 순응, 반히틀러 투쟁 명분에 대한 스탈린주의와의 타협, 문화적 비관주의, 노년의 점증하는 보수주의 경향 등등)으로 인해 더욱 논란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길이 시종일관 철학적인 길이었으며, 헤겔을 경유하는 길이었다는 점이다(이 점에서 똑같이 철학적 우회로에 매진했으면서도 철저히 비헤겔적 반헤겔적 길을 걸었던 알튀세르의 "이론의 우회"는 그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따라서 루카치의 사유에 대한 평가는 1945년 이후 서구에서 발흥했던 '헤겔주의적 맑스주의의 창시자'에 대한 정당한 평가의 문제에 다름아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우리는 --루카치의 끊임없는 자기변신의 정치적 역정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의 역사 속에서 가장 뚜렷한 영향을 남긴 하나의 작품인 {역사와 계급의식}(1923)의 저자인 청년 루카치를 주요한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며, 따라서 루카치의 미학 및 문학비평이론은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2. 청년 루카치 혹은 {역사와 계급의식}에 대하여
(1) 역사적 배경
*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승리. 그러나 독일, 헝가리 등지에서의 혁명은 1919-1920년을 경과하면서 모두 실패. 러시아 혁명은 승리하였지만, 서구와 동구에서는 혁명이 비극적으로 패배한 직후에 쓴 것.
* 제2인터내셔널의 경제주의에 반대. 이데올로기 문제에서 서구 자본주의의 예상하지 못한 안정성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견해에 도달. 이에 따라 혁명의 어려움의 원인을 노동계급의 대부분이 자본주의를 자연적으로 주어진 불변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찾는다. 즉 노동계급의 대부분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성격,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성격'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영구성의 베일을 벗기는 것이 이 책의 목표.
(2) 물상화/사물화(Verdinglichung)
* '총체성'의 방법론적 원리
--> 사회생활의 개별적 사건들은 전체 사회적 재생산의 맥락 안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의 진술을 통해 '사실'로 된다.
--> 구체적 분석이란 단순히 경험적 자료의 수집과 요약에 몰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사회', 즉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전체연관으로서의 사회와 관계짓는 것. 즉 '변증법적 총체성 고찰'.
--> 여기서 총체성이란 경제적 토대의 규정에 의해 파악된 사회구성체를 가리키는 것. 즉 "사회발전의 특정한 수준에 있는 생산질서와 그것을 통해 야기된 사회의 계급편성"을 가리키는 표현.
* '상품 물신성'에 대한 맑스의 연구에서 출발.
cf. [상품의 물신성과 그 비밀]이라는 {자본}의 절에서 "전체 유물론적 사회이론의 이론적 및 역사적 입장의 가장 분명하고 가장 정확한 정식화"를 보았던 Korsch와 마찬가지로 루카치는 맑스 수용의 새로운 전통을 개시.
-->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은 "전체 사회적 존재의 보편적 범주."
--> 따라서 상품물신의 수수께끼는 세계의 수수께끼.
--> 자본주의 사회의 어떤 문제도 궁극적으로 상품과 관련
--> "하나의-형식적으로-통일적인 의식구조"를 발생시킨 하나의 "통일적 경제구조" 존재
*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에게 있어서 사회적 존재의 객관적 현실은 직접성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즉 자본주의적 상품교환 사회에서 양 계급의 재생산 조건은 상품운동에 결부되어 있다. ex -자본가: 시장에서 가치를 가치화할 것을 강제
-노동자: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할 것을 강제
--> "각종 인간노동이 질적으로 동등하다는 것은 노동생산물=가치라는 양적으로 동등한 객관성의 형태를 취하며, 인간노동력의 지출을 그 계속시간에 의하여 측정하는 것은 노동생산물의 가치량이라는 형태를 취하며, 끝으로 생산자들의 노동의 사회적 성격이 실현되는 생산자들 사이의 관계는 노동생산물의 사회적 관계라는 형태를 취한다. 그러므로 상품형태의 신비성은 다만 상품형태가 인간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산물들 자체의 물적 성격으로 보이게 하며, 따라서 총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그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물건들의 사회적 관계로 보이게 하는 데 있다."(맑스)
--> 전도된 이미지 형성. 즉 개인들의 사회적 관계는 사물들의 운동의 결과로 여겨짐. 인간은 스스로 생산한 사물세계의 운동법칙에 자신이 운명적으로 의존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
--> 오늘날 '순수한' 사실을 추구하는 자연과학의 방법이 매혹적인 것은 자본주의의 발전 자체가 그러한 고찰방식을 받아들일 소지가 아주 많은 사회구조를 산출하는 경향성을 띠기 때문.
* 물상화는 사회적 사건과 발전을 자연법칙적인 경과로 보게 함.
--> 자연관계로 신비화된 사회적 형태들은 인간에게 완성된 불변의 소여
--> 인간은 사회의 자연법칙을 기껏해야 이용할 수 있을 뿐. 그것의 대상구조를 인간은 파악할 수는 있지만 결코 전복시킬 수 없다.
--> 부르주아 과학은 자본주의 현실의 인간들에게 특징적인 이러한 일상관념을 체계화.
--> 프롤레타리아트의 경험적 의식 역시 자본주의사회의 구조에서 기인하는 이 전도된 이미지에서 애초부터 벗어나 있지 못함. 이 물상화는 자본주의 상품교환 사회의 무수한 구성원들에게(프롤레타리아트도 포함하여) 특정한 목적합리적 태도를 강요하기 때문. 따라서 지배계급의 편에서 피지배자를 통합시키기 위한 특수한 활동은 불필요. 왜냐하면 물상화의 '표현(Ausdruck)'을 통해 모든 사회구성원들의 의식 안에 자발적 복종이 맹목적 효과로 형성되기 때문. 예컨대 법과 국가와 같은 폭력조직이 일종의 '자연력(Naturmächte)'으로 인식되는 것.
* 물상화에 대한 부르조아 사상가들의 비판의 한계: "인간을 황폐화시키는 사물화의 영향력을 다소간 뚜렷이 의식하고 있는 사상가들조차도 마찬가지로 단순히 물상화의 직접성을 분석하는 데에 사로잡혀 있을 뿐, 이들은 이 공허한 현상형식들을 그 자본주의적 지반으로부터 분리시켜서 이 현상형식들을 인간적 관계의 가능성 일반이라는 식의 무시간적 유형으로 독립시키고 영원한 것으로 만든다(짐멜 비판). 이들 사상가는 "자본 영감과 토지 부인께서 사회적 인물이자 동시에 곧장단순한 사물로서 야단법석을 떠들어대시는, 모든 게 온통 물구나무를 선, 전도되고 마법에 걸린 세상"({자본})을 단순히 기록할 따름이다."
cf. 사물화의 전사회적 확산에 대한 막스 베버의 통찰: "근대국가와 공장은 그 근본제도에 있어서 전적으로 동류적이다. 근대국가는 공장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경영'이다. 이 점이 바로 근대국가의 역사적 특징이다." "근대 자본주의적 경영은 내적으로는 무엇보다도 계산에 기반을 두고 있다."
(3) 계급의식과 프롤레타리아트
* '계급의식'의 정의(cf. 막스 베버의 '이념형'적 방법)
--> 생산과정에서의 특정한 유형적 상황에 귀속되는 합리적이고 적합한 반응.
--> 계급을 형성하는 개인들의 의식을 총합한 것도 평균한 것도 아님. 오히려 자신의 사회역사적인 경제적 상황에 대한 계급적으로 규정된 무의식.
--> 여기서 문제는, 총체성과의 현실적 연관을 통찰하는 것이 특정한 계급상황의 관점에서 자각될 수 있는가 하는 점.
--> 부르주아지는 이러한 총체적 통찰을 수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경우 부르주아지는 자기들의 지배를 자발적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 따라서 부르주아지의 허위의식은 객관적인 것. 그 한계는 계급상황 그 자체. 따라서 '허위의식'이나 '가상'은 결코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 경제적 구조의 사유상의 표현.
*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총체적 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
-->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서 자본주의의 근본구조에 대한 총체적 통찰은, 지배계급의 권력에 대항하기 위한 전제.
--> 그들은 가치와 잉여가치의 생산과 관련하여, 자신들의 노동력의 결과가 타인에게 전유된다는 것에 대해 의식을 발전시키게 되면, 결국 자신의 이해상황에 관한 자기인식을 넘어서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적 원리의 인식을, 총체성의 인식을 획득하게 될 것.
cf.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계급으로 되지 않으면 안된다.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의 경제적 필연성을 의식적 의지로, 효과적인 계급의식으로 고양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맑스)
--> 프롤레타리아트는 특수한 계급 이해가 동시에 보편적 계급 이해가 되는,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계급.
* '보편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 "의식화(Bewußtwerden)가, 역사과정이 그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내딛지 않으면 안되는 결정적인 발걸음을 의미할 때, 사회의 올바른 인식이 어떤 계급에게는 투쟁에서 자신을 유지하는 직접적인 조건으로 되는 그러한 역사적 상황이 주어질 때, 이 계급에게 있어서 그들의 자기인식이 동시에 전체 사회의 올바른 인식을 의미할 때, 따라서 그러한 인식에 있어서 이 계급이 인식의 주체이며 동시에 객체이고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이론이 사회의 변혁과정에 직접적이고 적합하게 개입할 때, 그럴 때 비로소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 이론의 혁명적 기능의 전제가 가능하게 된다."
--> 역사상 존재한 모든 계급 모순의 결절점에 위치한,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그 자신의 해방이 곧 모든 계급의 해방이 되는 보편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 "자본주의의 최후의 공황이 일어나면 혁명의 운명(이와 함께 인류의 운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적 성숙도, 즉 그들의 계급의식에 달려 있다."
-->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만이 자본주의의 위기에서 벗어날 길을 보여줄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한, 위기는 영원히 계속되고 그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며 같은 상황을 되풀이한다."
-->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의 담지자로서의 공산당.
3. 청년 루카치의 헤겔주의적 맑스주의가 제기하는 세 가지 문제들
(1) 헤겔 철학과 맑스주의의 관계에 대하여: 소외/대상화, 변증법/유물론
(2) 철학적 맑스주의는 가능한가: 사물화/총체성, 이데올로기/과학
(3) 철학/정치의 관계: 보편의식의 담지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외부로부터의 주입.
4. 헤겔주의적 맑스주의의 비극적 운명
(1) '맑스주의'로부터 '헤겔주의'로
* 거듭된 비판과 자기비판에도 불구하고 {역사와 계급의식}은 서구와 동구의 맑스주의 철학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끼쳤던 철학 문헌. 러시아혁명의 모티브를 유럽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찼던 하나의 독특한 이론적 정치적 상황 속에서 출현, 서구 맑스주의의 하나의 강력한 경향을 형성. 코르쉬(Korsch), 그람시(Gramsci)도 동시대의 유사한 문제의식의 산물.
* 한편으로는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 등의 '수정주의'가 횡행하던 맑스주의의 위기(제2인터의 수정주의 논쟁), 다른 한편으로는 신헤겔주의, 비합리주의 등 주관주의적 부르조아 철학의 융성. 루카치는 기계론적 필연성 도식에 대한 극도의 혐오 속에 맑스주의의 정통성에 대한 보증을 철학/방법론에서 발견하고자 함. 통속적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망각된 맑스주의의 철학적 실체의 복원 노력이자, 맑스주의 사상 최초의 철학적 대작을 쓰고자 의도.
* {역사와 계급의식}의 철학적 토대는 헤겔의 {정신현상학}: "{정신현상학}은 헤겔 철학의 열쇠."(맑스) 절대지에 이르는 현상지의 역사적 도정. 역사과정을 유한/무한, 개별/보편, 현상/물 자체, 주관/객관, 차안/피안의 분리를 통일시키는 거대한 정신사적인 목적론적 원환운동으로 파악. cf.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대한 맑스의 찬사와 비판.
--> {역사와 계급의식}에 담겨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론적 명제 가운데 두 가지가 맑스 것이라기보다는 헤겔적인 것.
① '역사의 주객 동일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개념: 순수하게 헤겔적인 사유내에서는 성립 불가능한 개념(헤겔 철학에서 대상 사물은 오직 자기의식의 외화로서만 실존, 따라서 주체의 대상 회수는 대상적 현실의 종말이자 현실성 일반의 종말 . 동시에 모든 현실성을 사상--Pt의 계급의식--으로서 초월할 수 있다는 발상은 유물론의 관념론으로의 재전도.
② '소외(alienation)'와 '대상화(objectification)'의 동일시: 헤겔에 있어서는 소외=외화=대상성의 정립.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적 소외를 몰가치적 개념인 대상화와 동일시함으로써 영원한 인간 조건으로 간주.
--> 이는 {경-철 수고}에서 청년 맑스의 헤겔 비판의 핵심적 테마.
--> "헤겔의 초헤겔화". 헤겔적 범주를 맑스주의 안으로 도입하기보다는 맑스 사상의 기본 범주를 헤겔 사상에서 재발견하고자 노력. {청년 헤겔}(1938)은 그 연장선상에서 헤겔과 맑스 사상에 존재하는 직접적인 연속성을 찾으려는 노력의 산물. 그 작업은 모스크바에서 {경철 수고}를 분석한 결과와 헤겔 초기 저술에서 노동과 같은 경제적 개념이 수행한 역할에 대한 분석에 기반을 둔 것.
5. 물상화의 역사적 경향에 맞선 총체성 회복의 인간주의적 기획
(1) 맑스로부터 루카치에게로: 인간주의적 맑스주의의 문제설정
* {자본}의 '상품물신성'론: 청년 맑스의 소외론의 문제설정--> '물상화'로
* 특정한 역사적 조건의 문제설정에 입각, 짐멜의 교환 중심주의 비판.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순의 객체이자 주체인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계급의 발견.
cf.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안에서 그는 비로소 노예가 된다."(맑스)
(2) 짐멜로부터 루카치에게로: 화폐와 근대적 생활양식의 관계에 관한 사회학적 사유
* 짐멜의 {돈의 철학}: 벌금, 매매혼, 매춘 등과 화폐의 관계, 화폐경제가 초래한 감정적 기능에 대한 지적 기능의 우위, 지성과 화폐의 이중적 역할에 의한 초개인화 객관화 및 개인주의화 이기주의화, 법과 논리의 합리주의의 대두, 기술의 지배, 삶의 속도의 변화 등등의 주제들에 대한 미시적인 사회학적 철학적 분석
--> 화폐가 개인의 주관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짐멜의 분석이 가능했던 것은 한계효용학파의 영향을 받은 그의 주관적이고 상대주의적인 가설에 기초. 노동가치설 비판, 추상노동 관념의 허구성 비판. 재화의 교환(분배와 유통) 과정에만 주목, 교환을 전적으로 '사용가치의 소비'라는 관점에서 파악.
--> 파편화 원자화 객체화 물상화 규격화된 근대적 생활양식에 대한 탁월한 해명
* 이러한 짐멜의 자본주의 화폐경제가 낳은 새로운 의식과 생활양식의 창출에 대한 분석은 루카치의 '물상화'에 대한 철학적 논의의 사회학적 기반.
--> (1), (2) 양자 모두 철학적 환원으로 인해 헤겔주의적 목적론으로 함몰.
--> {자본}에 대한 이론적 곡해: {자본}은 미완의 저작. '(잉여)가치'와 '자본'에 대한 분석에만 치중. '사용가치', '노동'에 대한 무관심. 공산주의적 이상주의로부터의 후퇴를 초래.
(3) 루카치 對 하이데거: 현상학과 실존주의로의 철학적 사유
*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하이데거에게 서구 근대의 역사는 자립적 외양을 띤 소여로서의 세계--現前性(Vorhandenheit)--와 그 '현존재(Dasein)'의 비본래성에 대한 과학적 인식에만 몰입해 온, 세인들의 '존재(Sein)' 망각의 역사. 존재/현존재, 본래성(Eigentlichkeit)/비본래성, 존재론/과학, 用具性(Zuhandenheit)/현전성 등등의 이원적 개념틀로 역사 인식. 이는 루카치가 말하는, 자본주의로 인한 물상화 현상에 의한 계급 허위의식의 성립으로 인한 변증법적 인식, '총체성' 인식의 상실 과정과 동일한 정신사적 과정.
--> 하이데거의 '존재/현존재'는 루카치에게 있어서의 '총체성/사물(Sachen)'과 등가적.
--> 하이데거의 '존재' 망각의 역사는 루카치의 '총체성' 상실의 역사와 동일한 과정. 양자 모두에게 역사의 의미는 존재/총체성의 회복에 있다.
* 그러나 양자에 있어서 그 역사적 극복의 과정 및 계기는 전혀 다르다: 하이데거에게 그것은 세인들의 문제가 아닌, 철저히 개인적 차원의 문제, 즉 존재론적 결단의 문제인 반면, 루카치에게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과 그 계급의식의 담지자인 공산당의 조직적 실천의 문제.
--> 따라서 하이데거는 철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루카치와 대척점에 위치. 루카치-스탈린주의의 관계는 하이데거-히틀러주의의 관계와 동형적.
--> 루카치와 하이데거는 헤겔 철학의 쌍생아.
6. 철학의 변증법에서 정치의 동요로
(1) {역사와 계급의식}에 대한 레닌과 코민테른의 반응
* 레닌의 비판: 생디칼리즘을 비롯한 '좌익급진파' 비판의 맥락에서 루카치 비판
--> "{역사와 계급의식}의 논문들은 극히 급진적이고 극히 나쁜 논문들이다. 거기서 맑스주의는 단순한 말뿐인 맑스주의이다.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 가장 본질적인 것이, 즉 부르주아지가 대중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노동분야와 제도들을 정복하고 또 정복할 것을 배워야 할 필요성이 고려되고 있지 않다."
--> 특히 레닌의 {좌익소아병}에서의 의회 참여의 문제에 대한 비판에 대해 루카치는 전적으로 자신의 오류를 인정.
* 코민테른의 평가: "공산주의 세계운동의 수정주의 경향을 둘러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내부의 논쟁에서 중심적인 공격지점의 하나가 되었다."(Rosenberg)
--> 1924년 중반 코민테른 제5차 세계대회에서 부하린, 지노비에프 등이 루카치의 입장을 "좌익적 일탈"이라고 격렬하게 비판.
(2)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문제
* [블룸 테제]: 사회민주주의와 파시즘이 쌍둥이라고 주장한 코민테른 6차 대회의 노선에 대항하기 위한 양동 전술. '노동자-농민의 민주주의적 독재'를 내건 1905년의 레닌의 슬로건을 부활시켜 적응시킴으로써 헝가리 공산당이 좀더 현실적인 정책을 입안하게 하려 한 것.
-->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그것이 진정한 혁명인 한에서는, 서로 만리장성에 의해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의 완성을 의미. 민주주의를 향한 이데올로기적 발전의 길.
--> 벨러 쿤 일파에 의해 "우익적 일탈"로 비판, 당 중앙위에서 축출.
*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경제 발달 자체는 결코 사회주의를 생산하지 않는다. 즉 사회주의는 그 체제에 적합한 '경제적 인간'을 동시에 생산하지 않는 최초의 역사적 경제구성체.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이행기 형태, 즉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 끼어 있는 과도기이므로.
-->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역할은 바로 그 성원들을 사회주의에 맞게끔 교육하는 것. 이 역할은 전례가 없는 것. 어떤 부르주아 민주주의와도 다른 것.
--> 중요한 것은 1871년의 파리 코뮨, 1905년 러시아 혁명 및 10월 혁명 등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난 모든 때에 발생한 노동자 계급의 민주주의 체제인 소비에트를 부활시키는 것.
(3) 루카치의 정치적 동요
* 루카치의 이론적 목표는 제2인터내셔널의 경제주의 및 스탈린주의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사명과 주체 형성을 목표로 한 것(cf. 계급과 계급의식의 분리,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역할 등).
--> 좌익적 일탈, 우익적 일탈. 이론적으로는 로자의 대중적 역동성에 대한 믿음과 레닌의 전위당/'외부로부터의 주입' 테제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 '정치학의 부재.'
--> 이는 헤겔철학적 개념화의 산물. '주객 동일성'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총체성' 개념 등은 결국 총체적인 계급의식의 담지자로서 공산당의 위치를 설정할 수밖에 없음. 이는 결국 대중의 이질적 구성의 문제, 일상생활에 존재하는 다양성들을 끊임없이 보편적인 '계급의식'이라는 추상적 관념적 총체성으로 환원할 우려.
--> 이러한 동요는 비현실적 관념 철학의 현실정치 인식의 필연적 귀결.
cf. Louis Althusser의 '인간주의적 맑스주의' 비판 참조.
cf. 동독에서 1980년대 후반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의 계기로 루카치 복권.
7. 맑스주의의 역사 속에서의 이후의 영향
(1)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 청년 루카치를 토대로 헤겔주의적 관념 철학의 급진화. 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아도르노 {부정의 변증법}, 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등등.
(2) (초기) 알튀세의 구조주의적 맑스주의: '맑스로 돌아가자'. 인간주의적 주의주의적 헤겔주의적 맑스주의에 맞서 과학자로서의 맑스의 자생적 철학--변증법에 맞선 유물론--에 대한 옹호. '철학적 인간주의'로부터 '이론적 반인간주의'로의 역사적인 '막대 구부리기'.
(3)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의 경제인류학: 19세기의 '백년평화'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승리. 시장에 의한 사회의 자기조정기능의 파괴. "악마의 맷돌에 맞선 사회의 자기방어"로서의 사회주의, 파시즘, 뉴딜이라는 3대 '거대한 변환(Great Transformation)'에 착목. 이후 시장과는 다른 경제활동 모델을 발견하기 위한 경제인류학적 작업 전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