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지게꾼
67년 전, 열아홉 대한민국 남자면 누구나 가야 하는 군에 징집되어 논산 훈련소로 갔다.
머리 깎고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흉부 X선 촬영 결과 폐결 핵 의심 판정으로 귀가하였다.
훈련소에서 여주까지 돌아갈 여비를 받았으나 논산에서 인천으로 가는 군인 열차에서 인솔 자에게 모두
빼앗겼다.
돈을 주지 않으면 두들겨 맞을 수도 있어 동료 10 여 명이 강탈당하다시피 여비를 털렸다.
인천 역에 내리니 여주까지 갈 차비가 없었다.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어 누군가에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역 광장으로 나갔다. 두리번거리다가 처음 만난 사람이 지게꾼이었다. 그는 훤칠한 키에 얼굴은
거무튀튀하게 그을렸으나 잘생겼다. 그는 기차에서 내린 손님 중 무거운 짐 가진 사람을 기다렸으나 뜻밖에
나를 만났다.
나는 지게꾼을 보자마자 여주까지 가야 하는데 여비가 없다고 사정을 이야기하자,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손에 쥐어 주고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 그가 준 돈은 여주까지 기차 삯으로는 충분하였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수원을 거쳐 여주까지 느린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고맙고 고마운 그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나는 일제 치하 때 깡촌 인 여주에서 태어나 6.25를 겪었으며 지게를 많이 졌다.
산에서 나무도 해오고, 볏단도 져 나르며 고생하였던 옛 시절이 떠오른다.
지금은 사라져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지만, 지게는 살기 어려웠던 시절 달구지와 함께 중요한 운반 수단이다.
어렵게 살던 그 시절, 무시 당하며 무거운 짐을 져 나르고 한 푼 두 푼 힘들게 번 돈을 그리 쉽게 내어준 그분을
생각하면 신이 보낸 천사로 생각한다. 이름도 주소도 모르고 얼굴만 흐릿하게 기억하지만, 67년 동안 그분을
잊어버린 적이 없고,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할지 빛바랜 마음의 빚으로 남아있다.
나름대로 미국으로 이민 와서 사업도 하고 오레곤 주 상원의원까지 했다.
정치인이 되어 방한했을 때 그분을 찾기 위하여 신문사ㆍ방송국ㆍ정부 기관을 통하여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이름도 성도 모르니 찾을 수 없었다.
지금도 그분이나 가족을 만날 수 있다면 감사의 절을 올리고 싶다.
한때는 인천 역 광장에 그분을 기리는 작은 동상을 세울까 생각한 적도 있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분을 잊지 못한다. 내 나이 아흔을 훌쩍 넘겼으니, 지금쯤 그분은 하늘나라에 계실 터인데
편히 영복 누리시길 소망하며, 후손들 모두 다 잘 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임용근 수필가
<받은 메일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