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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우리는 주님에 대한 희망과 사랑으로 죽음의 두려움에 충분히 맞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우리의 죽음을 진지하게 묵상하고 성찰하도록 초대하는 사순 시기에 큰 도움을 줄 명저가 출간되었습니다. ‘남겨진 단 하나의 사랑’ ‘발타사르, 예수를 읽다’ ‘세계의 심장’ 등 불멸의 저서로 유명한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1905~1988)가 지은 ‘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가톨릭 출판사)입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대한 대 신학자로서 그의 신학 사상은 제2차바티칸공의회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이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표현으로 198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했지만, 안타깝게도 수여식 이틀 전에 선종하고 말았습니다.
‘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를 우리 말로 번역하신 분은 존경하는 윤주현 베네딕토 신부님이십니다. 가르멜 수도자이신 윤신부님 역시 대단한 신학자이십니다.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지만, 다들 엄두도 못 내는 신학 서적들을 꾸준히 번역하고 출간하는데 진심인 신부님의 노력 앞에 큰 감사와 박수를 보냅니다.
옮긴 이의 말에서 윤신부님은 아주 간략하고도 명쾌하게 죽음의 신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죽음은 인간이 존재하면서부터 떠안을 수밖에 없는 존재 방식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으로 각인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인생에 ‘영원’을 각인하려는 염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형태로든 각자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영원’의 조각을 새기려 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이러한 모든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합니다. 마치 냉엄한 사형 집행인처럼 말입니다. 영원을 갈망하지만 그 시작부터 사형 선고를 받은 비극적인 존재, 인간의 이러한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 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풀 해결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있습니다. 성부에게서 인류 구원을 위한 사명을 위임받아 이 세상에 강생하시고, 친히 우리가 겪을 죽음의 무게를 짊어지심으로써 죽음을 인생의 마지막이 아닌 영원을 향한 희망의 아이콘으로 바꿔 주신 분, 그리스도야말로 결국 한 줌의 재로 영원히 사라질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향한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선사해 주신 분이자, 인류의 진정한 ‘구세주’이십니다.”
윤신부님께서는 오늘 우리 각자를 향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두려움 앞에 신앙인들은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해도, 죽음은 여전히 이승에서 우리의 존재를 최종적으로 마감하며 해체하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괴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죽음에서 부정적인 측면보다 더 강한 긍정적인 의미를 봐야 하고 또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신비적으로 변화되어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에 동참함으로써 죽음 속에서 부활의 빛을 발견할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희망과 사랑으로 죽음의 두려움에 충분히 맞설 수 있습니다. 죽음을 긍정적인 실제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과 깊이 일치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신앙인에게 죽음은 자신을 ‘결정적으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과 결합시키는 기쁨과 희망의 사건이 될 것입니다.”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부담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에 대해 깔끔하고도 명료하게 선을 그어주신 신부님께 큰 감사를 드립니다.
“만일 우리가 죽음에 직면해서 두려워 떤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지닌 가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 앞서 죽음의 의미를 바꾸기 위해 친히 죽음을 끌어안으신 주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분께서는 한 개인으로서 우리와 함께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이미 당신 자신 안에 우리의 죽음을 간직한 채 수난하고 돌아가셨다. 무엇보다도 그분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 존재가 간직한 고뇌와 무능함 그리고 당신을 향한 열망이 부족한 우리의 내면을 제대 삼아 당신 자신을 성부께 온전히 봉헌하셨다.”(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2)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내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는 근거는?>
세라 애드킨스는 오하이오에 사는 약사입니다. 그녀는 샘슨과 솔로먼이라는 어린 두 아들을 남편 트로이와 함께 키웠습니다. 그런데 남편 트로이가 우울증과 불안 발작 증세를 보였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 증세는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나중에는 직장도 그만두고 가족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강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세라와 트로이는 이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며 치료법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한동안은 노력의 효과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가 각각 여덟 살과 여섯 살이던 2000년 어느 가을 날이었습니다. 주말을 맞아 세라는 오랫동안 계획을 세웠던 골동품 여행을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떠났습니다. 일요일에 세라는 여러 번 트로이에게 전화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호수에 배를 타러 나갔거나 다른 일로 바쁜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일요일 다섯 시쯤 집에 돌아와서는 우편물이 현관 앞에 방치된 걸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들에게 주려고 주문했던 장난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문을 열고 들어가서 “엄마 왔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두 아들을 죽이고 자살을 한 것이었습니다. 트로이는 이런 쪽지를 남겼습니다.
“나는 혼란, 의심스러운 충성, 죄의식, 절망, 상호 의존, 불안정으로 가득 찬 인생으로부터 샘슨과 솔로먼을 지켜 낼 것이다. 이 참혹한 불행의 반복을 나에게서 끝낸다.”
수많은 사람이 세라를 도우려고 힘을 모았다. 그녀는 석 달 동안 부모님과 함께 지내며 그들의 침대에서 함께 잤습니다. 세라가 충격에서 회복하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과 세상과 악에 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나는 그 경험을 통해 성장했습니다. 화가 났거든요. 나는 그 사람이 나에게 하려고 했던 것에 대항해 싸웠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으로 말입니다. 보세요, 그 사람은 나를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한테 내가 해 줄 대답은 바로 이겁니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든 간에, 빌어먹을, 난 절대로 못 건드려!’”
엄청난 자존감입니다. 자존감은 내가 누구냐는 믿음에서 옵니다. 부모와 함께 머물렀던 이 시기에 그녀는 다시 부모의 소중한 딸이라는 자존감을 회복하였을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내나 엄마라는 우울할 수밖에 없는 감정에서 자기를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그녀의 집은 위험 지대로 선포되었고, 모든 것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데 3만 5,000달러가 들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돈이 들지는 몰랐습니다. 그때 세라는 깨달았습니다. 가난한 여성은 자기 아이들이 총에 맞아 살해되거나 폭력으로 자기 집이 난장판이 되었을 때 장례비나 그 밖의 다른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런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직접 카펫에 묻은 피를 닦아 내야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일까요? 그래서 세라는 이런 참담한 일을 겪은 여성들에게 장례식과 청소 비용을 지원하는 재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오하이오대학교와 오하이오주립대학교에서 강의합니다. 또 무료 건강 관리 클리닉에서 일하면서 이런 클리닉을 새로 하나 더 열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웃을 위한 봉사만이 우리 모든 악한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알더라도 내가 누구냐는 정체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진리의 삶을 따를 수 없습니다. 아기가 두 발로 걷는 게 진리라도 먼저 내가 인간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따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려면 아버지, 어머니를 만나야 합니다. 이 시간이 기도입니다. 기도 때 우리는 정체성을 회복하고 진리를 따를 준비를 마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 노릇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당신을 받아들였을 것이라 하십니다. 당신이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라고 하실 때 그들은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라고 하시며 실제로는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임도, 하느님의 자녀임도 믿고 있지 못하기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어야 이웃 사랑의 진리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자녀임을 믿는다는 말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임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인간 아버지의 자녀라고 믿으면 나는 성장하여 아버지가 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믿습니다. 이 믿음이 없다면 진정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그러면 그분의 말씀인 진리를 따를 수 없게 됩니다.
누구에게 좌우될 것 인가가 내가 누구 자녀 인지가 결정됩니다. 참 자유는 나는 그런 것에 좌우될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 뿐입니다. 그 믿음은 나의 아버지를 정하는 데 있습니다. 세라 에드킨스는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석 달 동안 부모와 함께 잤습니다. 다시 자기 정체성을 되찾는 노력을 한 것입니다. 우리를 진정 자유롭게 하는 진리,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그분을 보내신 분을 아버지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하느님이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우리에게도 주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8,31-42: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31절) 말씀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진리와 자유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신앙인은 믿음과 희망으로 사는 이들이며, 진리와 자유를 얻기 위해서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32절) 우리는 진리를 향해 가는 것이며, 진리는 참된 자유를 주시는 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자유는 진리에 온전히 따를 수 있을 때 얻을 수 있다. 이 진리는 우리를 죽음, 곧 죄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롭게 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평화 속에서 진리를 누리지 못하는 한, 어떠한 자유도 누리지 못한다.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죽음, 부패 그리고 변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의미이다. 진리는 그 자체가 죽지 않고 썩지 않고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죽지 않고 썩지 않으며 변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 한 적이 없습니다.”(33절). 이 말은 진실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노예 생활을 했고, 지금도 유대인들은 로마에 세금을 내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34절)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도 게으름으로 소홀한 실천으로 그의 자손이라는 지위를 잃어버릴 수 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39절).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말한다. 전 생애를 통하여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가졌던 관계를 말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그러한 신앙으로 살아가라고 하신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40절).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41절)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41절).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42절) 하느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의 아버지가 아니시다. 예수님께서 사랑받으셔야 하는 이유는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셨고, 그 하느님을 자기들의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아들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또한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자유인으로 태어나는 시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4)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인터넷에서 텀블러를 구입했습니다. 사실 몇 개의 텀블러를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쇼핑몰에서 텀블러 가격이 터무니없이 싼 것입니다. 840원. 그것도 배송비 포함이었습니다. 주문하고 며칠 뒤에 텀블러를 받았습니다. 워낙 가격이 쌌지만, 텀블러의 질이 너무 형편없었습니다. 허접하고 지저분했습니다. 물로 깨끗이 닦다가 글쎄 손을 베고 말았습니다. 텀블러의 입구가 제대로 마감되어 있지 않아서 날카로운 것입니다. 싸게 샀지만, 현재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혹시 입술을 베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렇게 제게 쓸데없는 짐이 또 하나 늘었습니다.
물질적인 것으로 풍요롭게 사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적은 것으로도 매우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결코 지금보다 많은 것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를 떠올렸을 때 결핍을 느끼지 못합니다. 많은 것이 없어서 불행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때를 그리워하지 않습니까?
욕망하는 것이 적을수록 더 풍요롭고, 더 자유로우며, 더 강력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이기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면 ‘나’ 스스로 하는 것이 줄어들게 됩니다. 온전히 나의 노력을 통해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통해 ‘나’를 만들려다 보니 남과 비교하면서 부러운 이유만이 늘어납니다.
미국의 유명한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는 “더 강한 사람일수록 원하는 게 적다.”라는 말을 자기 외투에 새겨놓고 늘 다짐했다고 합니다. 원하는 게 적을수록 ‘나’에 집중할 수 있게 되어, 더 강한 ‘나’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그 모든 모습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분명해집니다. 세상 것에 집착하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사는 삶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늘 사랑하라고 하셨고, 당신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의 삶을 통해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세상 것에 욕망을 두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서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통해서만이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사랑을 실천하는데 더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선으로 다가가려 노력할 때, 악에서 멀어지려 자신을 통제할 때 두 단어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라야 한다. 떳떳하고 평온한 삶을 확보해 줄 그 두 단어는 바로 ‘지속하라’와 ‘저항하라’이다(에픽테토스).
5)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세례로 인하여
우리는
말씀이라는 스승을 모시는
주님의 제자들이 된다네.
날마다
스승의 품안에서
말씀을 들으며
진리를 깨우치고
진리가 일러주는
지혜로
새로운 삶의 주인이 되는
자유를 얻게 된다네.
6)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만일 우리가 하느님 뜻에 충실하다면
우리는 사람들과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나쁜 전통과 관습에 집착하지 않고
정신과 영혼이 빠져나간
법과 규율에 빠져 있지 않고
사람들의 인정과 기대와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가까이 모심으로써
자유를 느껴야 합니다.
가면과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아부와 위선에서 자유로워야 하고
교회가 숨 쉴 수 있도록
나 자신부터가 ‘산소’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에서 산소 같은 존재가 아니라
혹시 타인을 옭아매고 답답하게 만드는
‘탄소’같은 존재는 아닌지...
자유는 오로지 사랑 안에서 실현됩니다.
인간이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다른 이들을 생각하며
다른 이들을 위해 살 때 자유가 실현됩니다.
진리는 타인을 자유롭게 해주는
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말씀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31-42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33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35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37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39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40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41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