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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의 명시감상
울음방
한이나
건축가 K가 집을 지을 때 명심하는 것은
그 집 가장 깊고 어둔 곳에
울음방 하나를 꼭 만드는 것이다
들키지 않고 숨어들어 맘놓고 마음껏 울음을 우는 골방
스무 살 때 친구 대학 기숙사에 가서
두 평 남짓한 그런 방을
본 적 있다
세상에 상심한 자 오뇌에 짓눌린 자
누구든 들어가 음악 크게 틀어놓고 목놓아 우는
크라잉 룸
슬픔의 제 몸 훤히 드러내놓는,
내가 어른 되어 그런 집 한 채 지으리라
마음 깊이 별렀다
그러나 아직도 사통팔달인 내 작은 아파트
오후 네 시의 햇볕에 떠밀려난 한 남자가 한 의자에 붙박혀 있다
우는 방이 없어 나의 울음소리는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한다
속눈썹조차 적시지 못한다
----한이나, [울음방]({능엄경 밖으로 사흘 가출}, 문학세계사, 2007년) 전문
인간의 울음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기뻐서 기뻐서 우는 울음이고, 두 번째는 슬퍼서 슬퍼서 우는 울음이다. 대학시험에 합격했을 때에도 울고, 사법고시에 합격했을 때에도 운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에도 울고, 잃어버린 아이를 찾았을 때에도 운다. 전쟁터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을 때에도 울고, 오십 년만에 남북이산가족이 상봉했을 때에도 운다. 기뻐서 기뻐서 우는 울음이란 희열의 울음이며, 이 희열의 울음이란 모든 장애물들이 다 걷히고, 비록,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삶의 최고의 정점에서의 신적인 상태의 울음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1945년 일제가 물러가고 그토록 학수고대했던 해방의 기쁨과,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정점에서 모든 국민들이 보여주었던 감격의 울음들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러나, 이에 반하여, 슬퍼서 슬퍼서 우는 울음이란 우리 인간들의 삶의 의지가 송두리째 꺾여버리고 그 절망적인 삶의 밑바닥에서 솟아나오는 울음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대학입시에 떨어졌을 때에도 울고, 사법고시에 떨어졌을 때에도 운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했을 때에도 울고,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을 때에도 운다. ‘저비용--고효율 구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해고통지를 받았을 때에도 울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뜻밖에 흑자부도를 낼 수밖에 없었을 때에도 운다. 울음은 생리적인 현상이며, 살아 있음의 구체적인 증거이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이 울음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며, 오히려, 거꾸로, 이 울음을 통해서 희로애락이 겹쳐지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은 울음의 바다이며, 눈물의 바다이다. 기뻐서 기뻐서 우는 울음은 타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도 하지만, 그러나 때로는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기뻐서 기뻐서 우는 울음은 그 기쁨에 동참할 수 있는 자에게는 감동을,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적대적인 감정들을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슬퍼서 슬퍼서 우는 울음 역시도 타인의 마음을 감동시키기도 하지만, 그러나 때로는 싸늘한 냉소와 함께,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슬퍼서 슬퍼서 우는 울음이란 그 슬픔에 동참하는 자에게는 공감의 감정을,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싸늘한 냉소와 경멸의 감정들을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은 왜 우는가? 또, 그리고, 도대체 눈물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전자의 물음은 이미, 앞에서 해명되었지만, 눈물이란 눈물샘에서 나오는 투명한 액체를 말한다. 눈물은 각막과 결막을 항상 적셔서 모든 이물질들을 씻어냄과 동시에, 각막의 상피에 포도당과 산소를 공급한다고 한다. 하지만, 왜, 눈물이 슬프거나 기쁠 때 나오는가라는 문제는 현대과학으로도 밝혀진 바가 없으며, 더, 더군다나 왜, 인간의 울음에는 눈물이 동반하는가라는 문제도 해명된 바가 없다. 어쨌든 이 세상은 울음의 바다이며, 눈물의 바다이다. 그 ‘울음의 바다--눈물의 바다’는 하늘을 찌를듯한 환희에의 기쁨으로 출렁거릴 때도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이 가장 처절하고 절망적인 삶의 슬픔으로 출렁거리고 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기쁨의 시간은 짧고 고통의 시간은 길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삶은 우연성과 무력성과 결핍성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연성이란 최선의 노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지의 절단과도 같은 재앙을 만난 것을 말하고, 무력성이란 가난한 자, 힘 없는 자, 물에 빠진 자들을 도와줄 수 없거나 그 궁지에 몰린 인간의 나약함을 말하고, 결핍성이란 사랑과 우정과 재화의 양이 부족하여 만인의 평등과 공정한 부의 분배가 이루어질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고통을 발견하고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욕망의 근절을 역설하고 있지만, 그러나 모든 욕망이 근절된 무사무욕한 세계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극락의 세계도 존재하지 않으며, 천국의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이 되고 싶은 욕망, 전제군주가 되고 싶은 욕망,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되고 싶은 욕망, 세계적인 대학자나 대예술가가 되고 싶은 욕망, 세계적인 대재벌이나 대저택에서 살고 싶은 욕망, 날이면 날마다 축제의 날을 맞이하고 삼천 궁녀들과 함께 음주가무飮酒歌舞를 즐기고 싶은 욕망----. 이러한 욕망과 욕망들이 만인과 만인들의 투쟁을 낳았으며, 모든 인류의 역사를 피 비린내 나는 살육과 전쟁의 역사로 기록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심 없는, 이타적인 말들은 삶의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나쁜 말들이며, 사심 있는, 이기적인 말들만이 인간의 삶의 의지를 북돋아주는 좋은 말들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욕망은 실현될 수 없는 욕망이며,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되는 욕망이다. 욕망은 고통을 생산해 내고, 고통은 절망을 생산해 낸다. 깊이 깊이 고통받는 자는 우는 자이며, 그 우는 자는 자기 자신의 삶에의 의지가 장애를 만나고, 그 절망감 끝에서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게 된다.
한이나 시인은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고, 청주교육대학교를 졸업했다.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으며, {가끔은 조율이 필요하다}, {귀여리 시집}, {능엄경 밖으로 사흘 가출} 등의 시집을 출간한 바가 있다. 한이나 시인은 비록, 한국문단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시인이기는 하지만, 나는 {능엄경 밖으로 사흘 가출}을 읽어보고, 그의 제일급의 시적 수준에 무한한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언어의 사제이며, 그 언어를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의 슬픔과 고통을 치료해주는 시적인 의사이기도 한 것이다. “건축가 K가 집을 지을 때 명심하는 것은/ 그 집 가장 깊고 어둔 곳에/ 울음방 하나를 꼭 만드는 것이다”라고, 한이나 시인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하고 있는 데, 왜냐하면 아무도 모르게 “들키지 않고 숨어들어 맘놓고 마음껏" 울 수 있는 [울음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한이나 시인의 [울음방]의 울음은 어떤 울음이며, 왜, 그는 아무도 모르게 숨어들어가 그 울음방에서 마음껏 울고 싶어했던 것일까? 기뻐서 기뻐서 우는 울음은 자랑스러운 울음이고, 슬퍼서 슬퍼서 우는 울음은 가능하면 타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울음이다. 기뻐서 기뻐서 우는 울음은 울음방이 필요없는 울음이고, 슬퍼서 슬퍼서 우는 울음은 울음방이 필요한 울음이다. 따라서 그는 이 세상에서 “상심한 자”이며, “오뇌에 짓눌린 자”에 지나지 않게 된다. 배가 고프면 울고, 엄마가 보고 싶어도 우는 사람은 어린 아이나 바보와도 같은 멍청이에 지나지 않지만, 적어도 다 큰 어른이 울음을 운다는 것은 이 세상의 관습상, 도저히 용납되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린 아이나 바보와 멍청이와도 같은 사람들은 고통에 나약하고 그들을 보살펴 줄 보호자가 필요하지만, 다 큰 어른은 고통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며, 그 모든 어려운 일들을 자기 스스로 해결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운다는 것은 나약한 짓이며, 부끄럽고 창피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생살이 찢어지는 아픔이 있을지라도 그 아픔을 내색하지 말아야 하며, 비록, 사랑하는 아내와 부모형제가 죽어갔을지라도 가능하면 그 울음을 절제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존의 벼랑끝에서 굶어죽어갈 지라도 값싼 동정을 바라거나 구걸을 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도덕은 인간의 감정을 말살하고, 또한 모든 도덕은 인간이 인간을 초극하여 전지전능한 인간이 되기를 강요한다. 도덕은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을 강요하며, 생존의 벼랑끝에서 흘리는 눈물마저도 용납하지를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은 ‘울음바다--눈물바다’ 속의 삶이며, 모든 인간들은 자기 자신의 울음을 울면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몹시 괴롭고 흐느껴 울고 싶을 때에도 그 울음을 울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일지라도 때때로 그는 아무도 모르게 울음방으로 숨어들어가 마음껏 울지 않으면 안 된다. 울음은 생리적인 현상이며, 살아 있음의 구체적인 증거이다. 도덕은 전지전능한 인간, 로버트와도 같은 기계인간을 강요하지만, 울음은 그 도덕과 인간의 의지를 벗어나 있다. 인간은 천하무적의 용기를 지니고 있는 인간이면서도, 다른 한편, 더없이 나약하고 어린 아이와도 같은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양이 있으면 음이 있다. 한이나 시인은 “스무 살 때 친구 대학 기숙사에 가서/ 두 평 남짓한 그런 방을/ 본” 모양이고, 그 울음방에 의해서 너무나도 깊이 있게 감명을 받았던 모양이다. 왜, 무엇 때문에, 청운의 푸른 꿈에 부풀어 있어야 할 스무 살의 어린 대학생이 그 울음방에서 그처럼 깊이 있게 감명을 받게 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상심한” 자이며, “오뇌에 짓눌린 자”에 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상심한 자는 상처를 크게 입은 자이고, 오뇌에 짓눌린 자는 떳떳함의 반대방향에서, 크게 부끄러워하고 있는 자이다. 그의 삶의 토대는 슬픔의 토대이며, 그 슬픔은 내외적으로 겹쳐져 있다. 첫 번째는 사회 역사적인 것이고, 두 번째는 지극히도 사적이며 개인적인 어떤 것이다. 스물 세 살에 청상과부가 되어야만 했던 어머니, 청주고보를 나오고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총살을 당해야만 했던 아버지, 유복녀遺腹女로 태어나 나이 어린 오빠와 함께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채 살아가야만 했던 시인, 유능한 대학교수이었으면서도 혼사를 치루지 못한 어린 자식들을 남겨두고서 백혈병으로 이 세상을 떠나가야만 했던 오빠, 지금, 이 순간에도, 아무도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시골집에서 팔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홀어머니, 오장육부 이외에도 울음보를 더 지니고 있으면서도, 딸로서,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부끄럽고, 또, 부끄러운 삶을 살아가고만 있는 한이나 시인----. 어떻게 그의 삶의 토대가 슬픔의 토대가 아닐 수가 있겠으며, 또한 어떻게 한이나 시인은 자기 자신만의 은밀한 [울음방]을 갖고 싶어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인간은 사회 속의 인간이며, 다른 한편, 탈사회 속의 인간이기도 한 것이다. 삶의 의지가 장애를 만나면 그 주체자는 나약하게 되고, 그 나약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울음을 울게 된다. 하지만, 그러나, 울음은 부끄러운 울음이며, 그는 그 울음을 울면서도 가능하면 그 우는 모습을 들키고 싶어하지 않는다. 남편도 타인이며, 아들과 딸들도 타인이다. 어머니도 타인이며, 그의 친구들도 타인이다. 그는 사회 속에서도 마치, 로빈슨 크루소처럼 고립되어 있는 것이며, 그 고립된 자의 울음을 울게 된다.
누구든 들어가 음악 크게 틀어놓고 목놓아 우는
크라잉 룸
슬픔의 제 몸 훤히 드러내놓는,
내가 어른 되어 그런 집 한 채 지으리라
마음 깊이 별렀다
이제, 울음은 그의 소원이며, 희망 그 자체가 된다. 얼마나 울고 싶었으면, “누구든 들어가 음악 크게 틀어놓고 목놓아 우는/ 크라잉 룸”을 갖고 싶었던 것이며, 또한 얼마나 울고 싶었으면 “슬픔의 제 몸 훤히 드러내놓는/ 내가 어른 되어 그런 집 한 채 지으리라/ 마음 깊이 별렀던” 것일까?
한이나 시인의 [울음방]은 자기 자신의 슬픔을 과장하는 울음도 아니고, 이 세상에서 원한 맺힌 자의 복수감정의 울음도 아니다. 또한 [울음방]의 울음은 나약한 자의 감상적인 울음도 아니고, 사회주의자들의 혁명을 호소하는 울음도 아니다. 그 울음은 실존적인 고뇌의 울음이며, 이 세상의 울음바다에서 그 울음을 울 수밖에 없는 진정성의 울음이다. 인간은 우는 인간이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다. 울음의 인간은 정직한 인간이며, 때때로 그 울음의 인간을 만나게 되면, 그에 대한 앙심이나 적대적인 감정도 눈 녹듯이 사라지게 되고, 어느덧 자기 자신도 모르게 그를 용서하게 된다. 울음의 인간은 고뇌하는 인간이며, 너무나도 솔직하고 정직한 인간이다. 고독한 인간, 고뇌하는 인간, 자기 자신이라는 무인도에 갇혀서 그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 삶은 불모지대인 극북지방에서의 삶이며, 너무나도 어렵고, 힘들고, 무거운 질병과도 같은 삶이다. 그러나 그 울음은 뜨거운 울음이며, 극북지방의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주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울음은 그 주체자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어루만져주며, 그 발가벗은 삶의 밑바닥에서 그의 삶의 의지를 강화시켜준다. 요컨대 울음의 효과는 ‘진정제 효과’와 ‘승화의 효과’로도 설명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이나 시인은 자기 자신의 울음방을 마련하지 못한다. 울고 싶은 일도 쉽지가 않은 것이고, [울음방] 하나 갖고 싶은 소망 역시도 결코 쉽지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오후 네 시의 햇볕에 떠밀려난 한 남자”, 즉, 너무나도 때 이르게 명예퇴직을 당한 남편과 타인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고, 다른 한편, 대한민국 사회의 주거의 여건 상, 상당한 고수익이 보장되지 않으면 그 울음방을 마련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울고 싶은 욕망과 그 울음을 울 수 없는 현실, 꿈과 꿈의 상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꿈이 한이나 시인의 진정성에 의하여 이처럼 뛰어나고 아름다운 [울음방]으로 탄생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는 방이 없어 나의 울음소리는/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한다”의 기적, 내 울음은 “속눈썹조차 적시지 못한다”의 기적이 그의 [울음방]을 가장 아름답고 거룩하게 성화(승화)시켜 놓은 것이다. [울음방]은 이상적인 성소이며, 이 세상의 삶의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는 성소이다. [울음방]은 우주적인 멋진 숨쉬기가 가능한 성소이며, 내가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 성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상처받고 괴로워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여, 다, 이, 한이나 시인의 [울음방]으로 가라! 작고 초라한 시집 한 귀퉁이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남녀노소의 차별도 없이, 오늘도, 내일도, 영원불멸의 그 공간으로 모든 그대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건축가 K는 그의 이상적인 사표 師表이며, 그의 또다른 분신이다. 그 건축가 K는 시인 자신이며, 그의 [울음방]에서 만인들의 삶을 진정시켜주고, 언제, 어느 때나 삶의 의지를 처방해주는 시적인 의사라고 하지 않을 수가 것이다.
‘나는 운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나 울음방은 너무나도 멀리 있고, 나의 슬픔만이 너무나도 처절하고, 또, 처절하다.
아아, “슬픔의 제 몸 훤히 드러내놓고” 있는 울음방이여!
아아, “슬픔의 제 몸 훤히 드러내놓고” 있는 울음방으로 모든 인간들의 슬픔을 치료해주고 있는 한이나 시인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