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94]“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누구든 언제나 “술을 왜 마시냐?”고 물으면, 즉석에서 즉각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라고 대답하는 술꾼 여성 작가가 있다. 그가 바로 수십 년 전 『빨치산의 딸』(2005년 필맥출판사 복간본 1, 2권으로 펴냄)로 실화소설의 정점을 보여주더니, 지난해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히트를 친 정지아(1965년생)이다. ‘대다난’ 술꾼임을 처음 알았다. ‘혼술’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가인 모양이다. ‘술의 입맛’도 별나게 고급이다. 어느 선지식은 자기를 보려면 3천배를 하고 오라고 했다지만, 그는 ‘조니워커 블루라벨’과 ‘던힐 라이트’ 한 보루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던가. 그가 최근 에세이집을 냈다. 제목이 바로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9월 7일 마이디어북스 발행, 319쪽, 17000원)이다. 아산에 사는 지인형이 “재밌어 죽는 줄 알았다”며, 순전히 나에게 선물할 생각으로 서울로 가지고 올라왔다. 이게 어디 보통 성의인가? 이렇게 글로써 ‘친구’를 사귈 수도 있구나 싶어, 눈물나게 고마웠다. 이런 실례를 ‘이문회우以文會友’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좌우당간, 34편의 ‘술 이야기’는 재밌어도 너무 재밌어 진짜로 단숨에 해치웠다. 토요일 오후, 수원에서 오수까지 오는 버스 안에서 잠시도 한눈 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술 이야기를 이렇게도 재밌게 쓸 수 있구나, 가능하다면 나도 함 써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주졸酒卒도 못되는 주제에 언감생심, 언제나 저 지경(경지)에 오를꼬? 왕 부러웠다. 며칠 있다가 가을걷이를 한 후 차분히 재독할 생각이다. 흐흐.
집에 돌아와, 서가에서 맨먼저 찾은 책이 왕년에 자타가 공인하는 ‘국보國寶’무애 양주동 박사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1962년 신태양사 발행, 1800환)였다. 불행히도 수주 변영로 선생의 ‘명정酩酊 사십년四十年’은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없어 무척이나 서운했다. 술에 관한 한, 위의 두 책은 재밌어도 너무 재밌었다. 일세를 풍미했던 재사才士와 명사名士의 ‘고풍스런’ 술 이야기였다. 이제사 그 뒤를 이은 술이야기가 나타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유튜브에서 작가의 인터뷰 동영상을 몇 편 봤는데, 환갑에 가까운 나이에 아름다운 데도 예쁘지 않다고 말하는 게, 농담이지만, 내가 잘 쓰는 표현으로 ‘겸손의 개수작’같았다. 하하. 구례 반냇골에서 백수의 어머니(물론 당연히 빨치산 출신이다. 아버지 역시 빨치산으로, 역시 그답게 팔십이 넘은 얼마 전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졸지에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는 3박4일의 이야기를 다큐소설로 꾸민 게 ‘아버지의 해방일지’다)를 모시고 사는 촌뜨기 아줌마이자 문학박사 정지아. 나로선 뉘앙스까지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구수한 사투리도 반갑고, 조근조근 풀어내는 그녀만의 독특한 수다가 밉지 않을 뿐 아니라, 하루빨리 만나게 돼 술 한잔 하고 싶다. 블루와 던힐이 지금 당장 수중에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진짜로 그 두 개의 선물을 갖고 가면 반겨줄까? 우리는 친구가 될까(하기야 친구 되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최소한 친해지려면 최소 10년은 걸리는 체질인 모양이다)?
유감이 있다면, 작가는 막걸리를 싫어하는 듯, 주종酒種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어제는 사귄 광주의 여동생이 해창막걸리 12도와 9도짜리 6병 한 박스를 추석선물로 보내왔다. 황감한 일이다. 일반 장수막걸 리가 1병(750ml)에 보통 1500원쯤 하는데, 해창 12도(900ml) 1병에 16000원이란다. 9도는 1만원. 상품차별화도 좀 심했지만, 마셔보면 뭔가 달라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같은 크기 1병에 12만원짜리도 있으니 기찰 노릇이다. 프리미엄 해창막걸리 1병에 12만원, 어디 이해가 되는가? 심지어 160만원짜리도 있으니, 자본주의 만세라도 불러야 할 판이 아닌가.
4부로 구성된 졸라 재밌는 에피소드들은 앞으로도 그가 구례에 살든 서울에 살든 쭈욱 이어질 듯하다. 지리산 행복학교의 버들치시인과 낙장불입 시인처럼. 가난은 뭐 조금 불편할 뿐, 별 것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같은 범생들이야 언제나 절절매여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살지만 말이다. 스승님(소설가 신상웅)과, 존경하는 선배(김사인 시인)와 몇 날 며칠 음주여행 등의 이야기 속에는 술 잘 마시는 것을 자랑하는 게 아니고, 휴매니즘같은 따뜻함이 배어 있다. 스승 그리고 동료와 선후배에 대한 인간적 사랑같은 것 말이다. 어찌 슬픔이 없겠는가? 허나 그 속에는 해학과 위트, 풍자도 있다. “술이 소화제라”라며 날마다 술을 마셔대는 할머니 이야기는 웃프기까지 한다. 빨치산의 딸이어서 슬펐던 때는 성장기의 트라우마처럼 그저 ‘한때’였다. 그런 후로는 줄곧 재밌게 살았지 않았는가. 그저 그렇고 그런 작가가 아닌, 그만이 쓸 수 있는, 그만이 그렇게 살 수 있는 ‘수줍은 자존심’이 있었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의 자당은 그 딸이 문학박사가 되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2년이면 너끈히 보내드릴 수 있겠다싶어 낙향했다는데, 어언 10년이 훌쩍 넘었고, 자당은 온갖 약을 다 끊고 건강하시며 ‘딸바보’라니 행운아가 아닌가.
양주동 박사와 변영로 선생의 실수 연발의 술주정 이야기는 우리를 여러 번 포복절도하게 만들곤 했지만(『문주반생기』와 『명정사십년』 책은 구하기 어려울 것이나, 다행히 범우사 문고판으로 나왔다), 작가 정지아의 술 이야기는 술을 잘 못하는 우리로 하여금 ‘무슨 술을 그렇게 (여자가) 만나게(맛나게가 아니다) 마실까? 원 세상에 참’이거나 ‘술이 그렇게 만날까? 그럼 나도 한번 마셔볼까?’슬그머니 술을 당기게 만든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제목처럼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도 제목 한번 참 잘 지었다. 블루나 '발삼'(발렌타인 30년산) 그리고 던힐 라이트 구입을 위해서라도 조만간 외유를 해야겠다. 흐흐.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