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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비바사론(五事毘婆沙論) 상권
법구(法救) 지음
현장(玄奘) 한역
1. 분별색품(分別色品) ①
부처님과 법과 승가에게 경례합니다.
이제 저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아비달마[對法]의 바다에 대하여
작으나마 바른 뜻을 살피보고자 합니다.
제자 등을 가엽게 여겨서
마땅히 해석하여 지혜가 생기게 하고
『오사론(五事論)』에 대한 어리석음을 소멸시켜
저들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게 하고자 합니다.
세우(世友) 존자께서 유정들의 이익을 위하여 『오사론』을 지으셨고, 이제 나는 해석을 하고자 한다.
【문】왜 이 『오사론』을 해석하고자 하는가?
【답】깊이 감추어진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만약 이 깊이 감추어진 뜻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지 못하였을 때 세간에서 기쁘게 받아 쓸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이 깊이 감추어진 뜻을 드러낸다면 감추어진 것을 드러낼 때 세간에서 기쁘게 받아 쓸 수 있는 것과 같다. 또한 해와 달이 비록 밝게 빛나지만 구름 등으로 가리워졌을 때는 밝게 비추지 못하고, 그 가린 것이 제거되면 밝게 비추게 되는 것과 같다. 본 논서의 문장도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비록 이미 간략하게 갖가지 수승한 뜻을 밝혔으나 이를 넓게 해석하지 않는다면 광명이 드러나지 않으므로 광명이 드러나게 하고자 하여 나는 마땅히 해석을 한다.
【문】이제 모름지기 『오사론』을 해석해야 할 원인을 알았다. 존자는 어떠한 연유로 이 논설을 지었는가?
【답】제자들이 자세히 들어 지니는 것을 두려워하므로 간략한 것에 의지하여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저 존자는 항상 이렇게 생각하였다.
‘어떻게 모든 제자들이 일체법의 자상과 공상에 대하여 간략한 문장에 의지하여 명료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명료한 깨달음은 금강산과 같아서 모든 사악한 견해[惡見]의 바람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명료하지 않은 깨달음은 갈대꽃 같아서 사악한 견해의 바람이 불어오면 흔들려 공중으로 휙 돌아 날아가 버리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제자들이 견고한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하여 이 논서를 지었다.
【문】무엇을 모든 법의 자상과 공상이라고 하는가?
【답】딱딱함[堅]ㆍ습기[濕]ㆍ따뜻함[暖] 등이 모든 법의 자상이고, 영원하지 않음[無常]ㆍ괴로움[苦] 등이 모든 법의 공상이다. 세간에 비록 모든 법의 자상에 대해서는 능히 아는 자가 있을 수 있지만, 공상에 대해서는 모두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이 모든 제자들이 법의 두 가지 모습에 대해서 여실하게 알게 하고자 이 논서를 지었다.
【문】이제 모름지기 『오사론』을 해석해야 할 연유를 알았다. 이것을 어찌하여 『오사론』이라고 이름하는가?
【답】이 논서 가운데서 다섯 가지 일[五事]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이 논서를 『오사론』이라고 이름하는 데, 경우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일의 뜻은 차이가 없다.
아비달마의 모든 위대한 논사들이 다 이렇게 말한다.
일에는 다섯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성의 일[自性事), 둘째는 소연의 일[所緣事], 셋째는 묶임의 일[繫縛事], 넷째는 원인이 되는 일[所因事], 다섯째는 거두어들임의 일[攝受事]이다. 이 가운데서 오직 자성의 일만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무슨 까닭에 다섯 가지 법을 말하는가?
【답】그것의 일과 법의 뜻이 또한 차이가 없다.
【문】무슨 까닭에 이 논은 오직 다섯 가지 법만을 다루는가?
【답】어떤 이가 말한다.
“이 질책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줄어든다거나 늘어난다고 하면 다 힐난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말한다.
“이 논서는 간략하게 모든 법의 체(體)와 종류, 차별을 드러내어 모든 법을 서로 혼잡하지 않게 거두어들이고자 오직 다섯 가지만을 말한다.
만약 이 다섯 가지를 통틀어 한 가지 법의 이름으로 세운다면, 비록 이 간략하게 말한 것 속에 모든 법을 다 거두어들일 수는 있지만, 심(心) 등의 다섯 가지 법의 체와 종류, 차별을 서로 혼잡하지 않게 드러낼 수 없다. 만약 유루(行漏)와 무루(無漏) 등을 말하여 두 가지로 하고, 유학(宜學)ㆍ무학(無學)ㆍ비유학무학(非有學無學) 등을 말하여 세 가지로 하고, 욕계ㆍ색계ㆍ무색계, 이 삼계(界)에 묶이지 않는 것 등을 말하여 네 가지로 한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문】어찌 이름을 열거하지 않고 다섯 가지 법이 있음을 알겠는가? 무슨 까닭에 논의 맨 앞에 다섯이란 숫자를 세웠는가?
【답】마치 실로 꽃들을 연결한 것은 쉽게 지니고자 하기 때문이다. 실로 여러 가지 꽃들을 연결하여 쉽게 지닐 수 있어 몸과 머리를 장엄하는 것처럼, 숫자라는 실로 뜻이라는 꽃을 연결하여 쉽게 지니고 있다가 마음의 지혜를 장엄하는 것도 그와 같다. 혹은 먼저 숫자를 세우고 뒤에 그 이름을 열거한다. 이것을 지은 이가 뒤의 의식(儀式)을 따랐기 때문이다.
법이라는 소리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떤 곳에서는 설해진 것[所說]을 법이라고 한다. 마치 계경(契經)에서 “그대들은 잘 듣기 바란다. 나는 이제 그대들을 위하여 묘한 법을 말하고자 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어떤 곳에서는 공덕(功德)을 법이라고 한다. 마치 계경에서 “필추(苾芻)들이여, 법은 바른 견해[正見]이고, 삿된 견해는 법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어떤 곳에서는 무아(無我)를 법이라고 한다. 마치 계경에서 “모든 법은 무아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 가운데 무아를 법이라고 함을 알아야 한다.
법이란 지닐 수도 있고, 기를 수[長養]도 있다. 스스로에 대해서는 지닐 수 있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기를 수가 있다.
【문】무슨 까닭에 이 논 가운데서 먼저 색법(色法)을 다루는가?
【답】모든 법 가운데 색이 가장 거칠기[麤] 때문이다. 이는 모든 식의 소연(所緣)인 대상이기 때문이고, 불법(佛法)에 들어가는 중요한 문이기 때문이다. ‘불법에 들어간다’는 것은 두 개의 감로문이 있다. 첫째는 부정관(不淨親)이고, 둘째는 지식념(持息念)이다.
부정관에 의지하여 불법에 들어간 자는 만들어진 색[所造色]을 관(觀)하고, 지식념에 의지하여 불법에 들어간 자는 만드는[能造] 바람[風]을 관한다.
【문】무슨 뜻에 의지하여 그것을 색이라 하는가?
【답】차츰 쌓이고, 차츰 깨어지고, 종자를 심어 자라게 하고, 원수와 친한 이를 만나게 하여 능히 깨어지게 하고, 능히 이루어지게 하는 모든 것이 색의 뜻이다. 부처님께서 “변하고 무너지기[變壞] 때문에 색이라고 이름한다”고 말씀하셨다. ‘변하고 무너진다’는 것은 곧 괴롭고 무너질 만하다는 뜻이다. 어떤 설명에서는 “변하고 장애[變礙]가 되기 때문에 색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문】과거ㆍ미래의 극미(極微)와 무표색(無表色)은 모두 변하지도 않고 장애가 되지 않으므로 색이라고 하지 않아야 되는 것이 아닌가?
【답】그들도 역시 색이다. 색의 모습[色相]을 갖기 때문이다. 과거의 모든 색은 비록 변하지도 않고 장애도 되지 않으나, 이미 변하고 장애가 되었기 때문에 색이라고 이름한다. 미래의 모든 색도 비록 변하지도 않고 장애도 되지 않으나, 앞으로 변하고 장애가 될 수 있기에 색이라고 이름한다. 마치 과거와 미래의 눈은 보지 않지만, 이미 보았거나 앞으로 볼 수 있기에 눈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으니, 그 모습을 갖기 때문이다. 이도 역시 그와 같다.
하나하나의 극미는 비록 변하거나 장애가 되지 않지만, 모이게 되면 변하고 장애가 되는 뜻이 이루어진다. 모든 무표색도 비록 변하고 장애가 되지는 않지만, 의지하는 바에 따르므로 변하고 장애가 될 수 있다. ‘의지하는 바’란 무엇인가? 4대종(大種)을 말한다. 저들이 변하고 장애가 되므로 무표색이라고 한다. 마치 나무가 움직이면 그림자도 따라서 움직이는 것과 같다. 혹은 많은 부분을 따르므로 단식(段食)이라고도 하며, 혹은 마음 안에 표시하기 때문에 색이라고 이름한다. 혹은 이전의 업[先業]을 표시하기 때문에 색이라고 한다.
색이란 무엇인가?
【문】존자는 무슨 까닭에 다시 이런 말을 하는가?
【답】앞에서 간략하게 말한 것을 이제 넓게 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혹은 볼 수 있고 유대인 색[可見有對色)이고, 혹은 볼 수 없고 유대인 색[不迦有對色]이고, 혹은 볼 수도 없고 무대인 색[不迦見無對色]이다. 모두 거두어들여서 ‘모든 존재하는 색[諸所行色]’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란, 이 모든 색에 색이 거두어들여져 남음이 없음을 말한다.
4대종(大種)을 말해 보자.
【문】무슨 까닭에 대종이 네 가지뿐인가?
【답】협존자(脇尊者)가 말한다.
“이러한 질책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만약 늘어나거나 줄어든다면 의심이 있기 때문이다. 법상(法相)과 어긋나지 않게 네 가지를 말함이 과실이 없다.”
어떤 이가 말한다.
“외도(外道)가 대종에 다섯 가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하여 오직 네 가지만을 말하였다. 그들은 허공도 역시 대종이라고 집착한다.”
【문】어찌하여 허공은 대종이라고 이름하지 않는가?
【답】허공은 대종의 모습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커다란 허공은 크지만 종(種)이 아니다. 상주하는 법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덕 묘음(妙音) 존자도 역시 이와 같이 말하였다.
“허공과 대종은 그 모습이 각기 다르다. 허공이 비록 크다고 하지만 본체는 종이 아니다. 또한 모든 대종이 몸을 이룰 수 있다면 많은 부분이 유정의 업의 이숙(異熟)에 포섭되지만, 허공은 그 업의 이숙의 모습이 없다.”
이런 까닭에 허공은 결코 대종이 아니다.
【문】말한 대종의 뜻은 무엇인가?
【답】종이면서 또한 커다란 것을 대종이라고 한다. 마치 세간에서 대지를 대왕(大王)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문】이 말한 것 가운데서 종이란 무슨 뜻인가?
【답】많이 쌓여서 장애가 되고 커져서 사건으로 판별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종이라고 이름한다.
【문】이 4대종은 어떤 일을 하는가?
【답】이 4대종은 모든 만들어진 색을 만든다. 이 4대에 의지하여 쌓인 것을 색이라 한다. 커다란 장애하는 색은 모두 자라난다. 이와 같은 것을 대종의 일이라 한다.
【문】만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원인[因]인가? 조건[緣]인가? 만약 이것이 원인의 뜻이라면, 4대종은 만들어진 색에 대하여 다섯 가지 원인[因]은 모두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만든다는 것이 원인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것이 조건의 뜻이라면, 모든 만들어진 색의 경우 자체를 제외한 나머지 법들이 모두 증상연(增上緣)이다. 이는 오로지 4대종이 능히 만드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가 말한다.
“만든다는 것은 원인의 뜻이다. 비록 4대종이 만들어진 색에 있어서 상응하는 등등의 다섯 가지 원인의 뜻은 없으나, 다시 따로 생인(生因)ㆍ의인(依因)ㆍ입인(立因)ㆍ지인(持因)ㆍ양인(養因) 등의 다섯 가지 원인이 있다.”
또한 어떤 이가 말한다.
“만든다는 것은 조건의 뜻이다. 비록 만들어진 색의 경우 그 자성을 제외한 나머지의 모든 법이 증상연이지만, 4대종은 이 만들어진 색의 가까운 증상연이다. 나머지의 법들은 가깝지 않다. 마치 눈과 색이 안식(眼識)의 조건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뛰어난 조건을 말하는 것과 같이 이것도 또한 그와 같다.
【문】4대종이 아닌 색이 있는가? 또한 대종은 만들어진 색이 아닌가?
【답】있다. 1대종 혹은 2대종 혹은 3대종이라고 말한다. 이 1ㆍ2ㆍ3대종은 4대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모든 대종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어찌된 까닭에 대종은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답】원인인 색과 결과인 색의 모습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혹은 모든 대종이 만들어진 것에 포섭된다면, 4대종이 1대종을 만드는가? 3대종이 1대종을 만드는가? 만약 모든 대종의 경우 4대종이 능히 1대종을 만든다면, 땅[地] 등도 역시 땅 등을 또한 만들어야 한다. 이는 모든 법이 응당 자성을 기다리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법은 자성을 기다리지 않는다. 다만 다른 조건들이 모여서 작용이 있다. 만약 모든 대종의 경우 3대종이 모여서 1대종을 만든다면, 원인인 요소가 이미 없으므로 능히 만들 수가 없다. 만들어진 색과 같이 원인은 반드시 대종을 갖추어야 한다.
【문】이미 대종과 만들어진 색을 다 알았으나, 또한 이 두 종류의 차별된 모습도 듣고자 한다. 무엇을 대종이라고 하는가? 그 모습은 어떠한가?
【답】땅 등의 계를 대종이라 하고, 딱딱함 등의 성질을 그 모습이라고 한다.
【문】만약 딱딱한 성질 등이 이 땅 등의 모습이라면, 만들어진 모습[所相]과 만드는 모습[能相]은 어찌하여 하나가 되지 않는가?
이 둘이 하나라고 할지라도 어떤 과실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비바사부(毘婆沙部)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성과 나, 물건의 모습인 본성 등은 이름과 말은 비록 다르지만, 뜻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모든 법은 자성을 떠나서 모습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마치 열반(涅槃)이 적정(寂靜)을 모습으로 삼고 적정을 떠나서 따로 열반이 있지 않는 것과 같이 이도 또한 그와 같다.”
그러므로 과실이 없다. 이 가운데 딱딱함의 성질은 딱딱한 부분이고, 딱딱함이란 본체는 종류를 나누어서 말한 것이다. 딱딱한 성질은 땅의 경계이다. 그러나 이 딱딱한 성질의 차별은 한이 없다. 내법(內法) 가운데서는 손톱과 머리카락 등의 차이가 있고, 외법(外法) 가운데서는 구리와 주석 등의 차이가 있다. 또한 내법 가운데서도 손과 발 등의 딱딱함에 차이가 있고, 외법에서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딱딱한 성질의 차이는 한이 없다.
【문】만약 딱딱한 성질이 공통된 모습[共相]에 포섭된다면, 어찌하여 땅 등의 자신만의 모습[自相]이라고 말하는가?
【답】딱딱한 성질이 비록 않지만 전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마치 땅의 많은 부분이 변하고 장애가 됨을 전체적으로 나타내어 색온이라고 한 것처럼, 나타난 것은 이미 하나이므로 공통된 모습은 아니다.
어떤 이가 말한다.
“딱딱한 성질은 두 가지 모습에 다 통한다. 3대종을 관찰하면, 즉 자신만의 모습이 이루어진다. 만약 딱딱한 성질의 종류를 관찰하면 내법, 외법 등의 한없는 차별이 있어 다시 공통된 모습을 이룬다. 마치 변하고 장애가 되는 성질이 두 가지 모습에 다 통하여 포섭되는 것과 같다. 나머지 4온(蘊)을 관찰하면 자신만의 모습이 이루어진다. 만약 색의 성질을 관찰하면 열한 가지 종류의 차별이 있어 또한 공통된 모습이 이루어진다. 또한 괴로움의 진리[苦諦]의 경우, 그 모습은 핍박인데 나머지 세 가지 진리를 관찰할 때 이것은 자신만의 모습을 이룬다. 만약 유루(有漏) 5온의 차별을 관찰하면 이 핍박은 다시 공통된 모습을 이룬다. 딱딱한 성질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두 가지 종류의 모습에 다 통한다.”
【문】만약 이와 같다면, 어떻게 공통된 모습과 자신만의 모습을 세워서 서로 뒤섞이지 않게 하였는가?
【답】그들을 관찰하기 때문에 뒤섞임의 과실이 없다. 만약 그들을 관찰하여 자신만의 모습을 세운다면, 그들을 관찰하여 공통된 모습을 세우지 않은 것이다. 만약 다시 이들을 관찰하여 공통된 모습을 세운다면, 이들을 관찰하여 자신만의 모습을 세우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공통된 모습과 자신만의 모습은 그들을 관찰하여 세운 것이다.
【문】이미 대종의 모습이 각각 차이가 있음을 알았다. 대종이 하는 일의 차별은 무엇인가?
【답】지계(地界)는 머뭄[住]과 행동함[行]의 두 가지 종류를 지니고 있어서 추락하지 않게 한다. 수계(水界)는 어긋나는 일들을 포섭하여서 서로 흩어지지 않게 한다. 화계(火界)는 익지 않은 종류의 물건들을 익게 하여서 부패하지 않게 한다. 풍계(風界)는 모든 물건들이 자라게 하고 혹은 다시 흘러가게 한다. 이를 대종이 하는 일의 차별이라고 말한다.
【문】지ㆍ수ㆍ화ㆍ풍은 각각 두 가지 성질이 있으니, 딱딱함 등의 성질 및 색의 성질에 포섭되는 것을 말한다. 어찌하여 하나의 법에 두 가지 모습이 있을 수 있는가?
【답】하나의 법에 많은 모습이 있으면 이것은 어떤 과실이 있는가? 가령, 계경에서 “하나하나의 취온(取蘊)은 병(甁) 등과 같이 한없는 모습이 있다”고 하였다. 혹은 딱딱한 성질 등의 성질은 이 지계 등에 포섭되는 자신만의 모습이고, 그 가운데 색의 성질은 이 지계 등의 공통된 모습에 포섭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법에 두 가지 모습이 있다. 첫째는 자신만의 모습이고, 둘째는 공통된 모습이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있어도 또한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
【문】이와 같이 4계(界)는 서로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답】이 4계는 전개되고 전변하여서 결코 서로 떠나지 않는다. 어찌하여 그런 줄을 아는가? 계경에서 말하였기 때문이다. 『입태경(入胎經)』에서 말하였다.
“갈뢰람(羯賴藍) 시기에 지계만 있고 수계가 없다면, 그 성품은 건조하여 흩어져버릴 것이다. 이미 흩어지지 않았으므로 수계에 능히 포섭되어 있는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수계만 있고 지계가 없다면, 그 성품은 녹아버려서 흘러내릴 것이다. 이미 흘러내리지 않았으므로 지계가 있어 지탱해주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수계만 있고 화계가 없다면, 그 성품은 승기 차서 썩어버릴 것이다. 이미 썩지 않았으므로 화계가 능히 익게 하고 있는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화계만 있고 풍계가 없다면, 그 성품은 자라나는 뜻이 없을 것이다. 이미 점점 자라고 있으므로, 풍계가 있어 움직이게 해주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경에서 말한 것과 어떻게 통하겠는가? 계경에서 “필추들이여, 마땅히 알라. 이 몸 가운데서 화계가 발생하게 되면, 목숨을 잃게 되거나 혹은 죽음의 고통에 가깝게 가게 된다”고 말하였다.
【답】경의 말은 더욱 성장한 것에 의하여 말하는 것이고, 더욱 성장하지 않은 것에 의한 말은 아니다. 불의 본체[火體]가 몸에 본래 없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문】지계와 지(地)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지계는 딱딱한 성질이고, 지는 현색(顯色)과 형색(形色)을 말한다. 지계는 만드는 주체[能造]이고, 지는 만들어진 것[所造]이다. 지계는 촉처(觸處)로 신식(身識)이 분별해 아는 것이고, 지는 색처(色處)로 안식(眼識)이 분별해 아는 것이다. 이를 지계와 지의 차별이라고 한다. 수ㆍ화도 역시 그렇고, 또한 풍과 풍계도 그렇다.
【문】이미 딱딱함ㆍ축축함 따뜻함ㆍ움직임의 4대종의 모습들이 전개하고 전변하여 어긋나는 것이, 마치 네 마리 독사가 하나의 몸에 들어 있는 것과 같음을 알았다. 저 만들어진 색의 모습을 또한 듣고자 한다. 우선 어찌하여 ‘저 만들어진 색’이라고 부르는가?
【답】‘저 만들어진 색’이란, 눈의 감각기관[眼根] 등을 말한다. 눈이 곧 근본[根]이므로 눈의 감각기관이라고 말한다. 마치 청련화(靑蓮華)와 같다. 나머지 감각기관도 이와 같다.
【문】눈 등의 다섯 가지도 역시 계(界)와 처(處)에 포섭된다. 어찌하여 이 가운데서 홀로 나타내어 감각기관이라고 부르는가?
【답】색 등의 바깥 대상[外境]을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눈 등의 계와 처를 말한다면, 곧 감각기관[根]과 감각기관의 뜻[根義]의 차별을 알기 어렵다. 이런 까닭에 이 가운데서 홀로 나타내어 감각기관이라고 부른다. 이는 곧 만들어진 색 가운데 안[內]을 감각기관이라고 부르고, 바깥[外]을 감각기관의 뜻이라고 부르는 것을 나타낸다.
【문】이 가운데서 말한 감각기관의 뜻은 무엇인가?
【답】보다 높음[增上]ㆍ가장 뛰어남[最勝]ㆍ현재 보임[現見]ㆍ광명(光明)ㆍ기쁨ㆍ묘함을 봄[觀妙] 등이 모두 감각기관의 뜻이다.
【문】만약 ‘보다 높음’이라는 뜻이 감각기관의 뜻이라면, 모든 유위법은 전개하고 전변하여 보다 높고, 무위법도 역시 유위보다 높아서 모든 법이 곧 감각기관이라야 하지 않겠는가?
【답】수승함에 의지하여 감각기관을 세우기 때문에 이러한 잘못은 없다. 증상연에 수승한 것과 열등한 것이 있으니, 수승한 것을 세워서 감각기관이라 하였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문】어떤 감각기관이 무엇에 대하여 몇 가지가 보다 높은 것인가?
【답】다섯 가지 감각기관[五根]은 각각 네 가지 일에 있어서 보다 높다. 첫째는 장엄신(莊嚴身)이고, 둘째는 도양신(導養身)이고, 셋째는 식(識) 등이 생김이고, 넷째는 공통되지 않는 일[不共事]이다.
먼저 눈의 감각기관을 살펴보겠다.
‘장엄신’이란, 몸이 비록 여러 부분을 갖추고 있으나 나머지의 감각기관을 결여한다면, 눈의 감각기관이 다시 추하고 누추해지기 때문이다.
‘도양신’이란, 눈이 능히 안전한 것과 위험한 것을 볼 수 있어 모든 색의 위험을 피하고 안전한 것을 택하게 하여 몸을 오래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식 등이 생김’이란, 눈의 감각기관에 의지하여 모든 안식(眼識) 및 이에 상응하는 법이 모두 얻어지기 때문이다.
‘공통되지 않는 일’이란, 색을 보는 작용은 오직 눈의 감각기관에만 속하고 스물한 가지 감각기관은 이런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귀의 감각기관을 살펴보겠다.
‘장엄신’이란, 귀머거리는 소리를 좋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양신’이란, 귀는 능히 좋은 소리와 나쁜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모든 소리의 나쁜 쪽을 피하고 좋은 쪽을 택하게 하여 몸을 오래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식 등이 생김’이란, 귀의 감각기관에 의지하여 모든 이식(耳識) 및 이에 상응하는 법이 모두 얻어지기 때문이다.
‘공통되지 않는 일’이란, 소리를 듣는 작용은 오직 귀의 감각기관에만 속하고 스물한 가지 감각기관은 이런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코ㆍ혀ㆍ몸의 감각기관을 살펴보겠다.
‘장엄신’이란, 눈과 귀에서 말한 것과 같다.
‘도양신’이란, 이 세 가지 감각기관은 단식(段食)을 받아들여 몸을 오래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식 등이 생김’이란, 세 가지의 감각기관에 의지하여 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 및 이에 상응하는 법이 모두 얻어지기 때문이다.
‘공통되지 않는 일’이란, 맛을 보고, 향기를 구분하고, 촉감을 느끼는 작용은 이 코ㆍ혀ㆍ몸의 감각기관에 속하는 것이고, 다른 감각기관에는 없기 때문이다.
【문】이와 같이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어떤 수승한 덕이 있으며, 무엇을 자성으로 삼고, 행위의 작용[業用]은 무엇인가?
【답】눈의 감각기관의 덕은 안식 및 그에 상응하는 법에 의지하는 바가 되기 때문이다. 눈의 감각기관의 자성은 청정한 색이다. 모든 색을 능히 볼 수 있는 것이 눈의 행동양식이다. 나머지 감각기관의 세 가지 일도 눈과 같은 방식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이 가운데 또 행위의 작용이 있는 감각기관을 말한다. 모든 감각기관이 식(識)이 의지하는 바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색은 밝고 청정하기 때문에 청정한 색[淨色]이라고 한다. 또한 이 가운데 안식 등에게 의지하는 바가 된다는 것은 동분(同分)의 감각기관을 나타내는 것이고, 청정한 색을 말하는 것은 피동분(彼同分)을 나타내는 것이다.
【문】어떤 것을 동분이라 하고, 어떤 것을 피동분이라고 하는가? 각각 기관에 이와 같은 두 가지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행위의 작용이 있다는 것을 동분의 감각기관이라 하고, 행위의 작용이 없는 감각기관을 피동분이라고 한다. 마치 색을 능히 볼 수 있는 것을 동분의 눈이라고 하고, 색을 볼 수 없는 것을 피동분이라 한다. 피동분의 눈은 네 가지 차별이 있다.
첫째는 과거의 피동분의 눈이 있는 것으로 이미 소멸한 모든 색을 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현재의 피동분의 눈이 있는 것으로 지금 소멸하는 모든 색을 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미래의 피동분의 눈이 있는 것으로 앞으로 소멸할 모든 색을 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넷째는 미래에 눈이 결코 생기지 않는 것이다. 이 동분의 눈은 오직 세 가지 차별이 있으니, 미래에 결코 눈이 생기지 않는 것을 제외한다.
귀의 감각기관 등의 네 가지에서도 눈의 경우와 같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혹은 다시 다섯 가지 식[五識]은 각각 두 가지 의지하는 바가 있다. 첫째는 함께 생겨나는 것[俱時生]으로 눈 등의 다섯 가지 등이고, 둘째는 생기자마자 바로 소멸하는 것[無間滅]이니 , 즉 의근(意根)을 말한다.
오직 식의 의지라고 말하면, 생기자마자 바로 소멸하는 의근이 식에 퍼지게 되고, 다만 청정한 색을 말하면 다섯 가지가 본체가 같게 된다. 그러므로 청정한 색을 말함은 생기자마자 바로 소멸하는 의근을 간별하는 것이고, 눈 등의 식에게서 의지하는 바가 된다는 말은 눈 등의 감각기관을 차별하여 다섯 가지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다섯 가지 식이 의지하는 바와 등무간연(等無間緣)을 차별하여 각각 4구(句)가 있다고 말한다. 함께 생겨나는 눈 등의 감각기관으로 제1구로 삼고, 생기자마자 바로 소멸하는 심소(心所)로 제2구를 삼고, 생기자마자 바로 소멸하는 심(心)으로 제3구로 삼고, 앞의 것들을 제외한 나머지 법으로 제4구로 삼는다.
【문】무엇이 능히 색을 보는가? 눈의 감각기관이 보는가? 안식이 보는가? 안식과 상응하는 지혜가 보는가? 심과 심소가 화합하여 보는가?
그대가 의심하는 것은 모두가 잘못이 있다.
만약 눈의 감각기관이 본다면, 나머지 식이 작용할 때는 어찌 색을 볼 수 없는가? 어찌 다 함께 모든 대상들을 취하지 않는가?
만약 안식이 본다면, 모든 식은 다만 요별하는 것으로 모습을 삼고 보는 것을 모습으로 삼지 않는데, 어찌 색을 볼 수 있겠는가? 만약 안식과 상응하는 지혜가 본다면, 이식(耳識)과 상응하는 지혜는 듣는 것이어야 한다. 저것은 이미 듣는 것이 아닌데, 이를 어찌 보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만약 심과 심소가 화합하여 본다면, 모든 심과 심소의 화합은 정해져 있지 않다. 선한 안식은 스물두 가지 심소와 상응하고, 선하지 않은 안식은 스물한 가지 심소와 상응하고, 유부무기(有覆無記)의 안식은 열여덟 가지 심소와 상응하고, 무부무기(無覆無記)의 안식은 열두 가지 심소와 상응한다. 이미 결정되어있지 않는데, 어찌하여 화합이라고 하겠는가?
【답】눈의 감각기관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안식과 합해진 경우이고, 나머지 경우는 아니다. 마치 안식이 색을 요별함에 의하여 눈이 바야흐로 있게 되는 것과 같다. 또한 느낌[受] 등의 받아들임 등은 반드시 마음[心]에 의하는 것과 같다. 이것 또한 응당 그러하다. 이러한 이치로 나머지 식들이 작용할 때 눈은 이미 식이 없어져[空] 색을 볼 수 없다. 또한 함께 모든 대상을 취한다는 오류가 없다. 하나의 상속 가운데 두 가지 마음의 전변이 없기 때문이다.
【문】무슨 까닭에 여섯 가지 의지하는 것과 연이 되는 것을 갖추었는데, 하나의 상속 가운데 6식(識)이 함께 전변함이 없다고 하는가?
【답】등무간연(等無間緣)은 오직 하나만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머지 뜻이 있다. 만약 안식이 본다면, 어떤 것이 다시 능히 분별하겠는가? 만약 지혜가 본다면, 어떤 것이 다시 능히 알겠는가? 만약 심ㆍ심소의 화합이 능히 본다면, 모든 법은 하나하나가 행동과 작용이 같지 않아 그 가운데 화합이 본다는 뜻은 결정코 없다.
또한 마땅히 하나의 본체에 두 개의 작용이 있다면 능히 보는 주체와 받아들여지는 대상 등을 허락해야만 한다.
또한 다른 뜻이 있다. 만약 식이 본다고 하면 식은 상대하는 것이 없으므로 마땅히 보는 주체 모든 색의 장애와 부딪칠 것이다. 지혜와 화합도 역시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까닭에 눈의 감각기관만을 보는 주체라고 한다.
【문】이미 눈의 작용이 오직 눈의 감각기관에만 있음을 알았다. 눈이 색을 볼 때는 한 눈으로 보는가? 두 눈으로 보는가?
【답】이는 결정할 수 없다. 만약 두 눈을 뜨고 모든 색을 볼 때면 두 눈이 함께 본다. 한 눈을 뜨고 한 눈을 문지를 때는 눈 앞에 두 개의 달처럼 겹쳐져서 보이게 되고, 한 눈을 가리고 한 눈을 문지를 때 이는 보는 일이 없다 이런 까닭에 어떤 때는 두 눈이 함께 본다.
또 『발지론(發智論)』에서 보는 원인을 함께 말한다.
“두 눈을 모두 뜨고 있을 때에 보는 작용이 명료하고, 두 귀, 두 코도 또한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문】무슨 까닭에 두 눈 두 귀ㆍ두 코는 각각 양쪽에 있는데, 하나의 감각기관이라고 하는가?
【답】두 곳의 눈 등이 본체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둘이 취한 대상이 하나의 세계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둘이 능히 의지하는 식이 하나의 식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또한 둘이 함께 있을 때에 능히 대상을 취하기 때문에, 비록 두 곳에 있으나 하나의 감각기관이라고 한다. 여근(女根)과 남근(男根)은 몸의 감각기관에 포섭된다. 이런 까닭에 이들은 따로 감각기관을 세우지 않는다.
안근의 극미는 눈의 수정체에 널리 퍼져 있고 대상을 대하고 있으면서 향능화(香菱花)처럼 머문다.
이근의 극미는 귀의 구멍 안에 고리를 둘러싸고 있고, 화피(樺皮)를 말아놓은 것처럼 머문다.
비근의 극미는 코 안에 있고, 콧등 위와 얼굴 아래 마치 쌍조갑(雙爪甲)처럼 머문다.
설근의 극미는 혀 위에 널리 퍼져 있고, 형태는 반달과 같다. 그러나 혀 가운데에는 마치 모발처럼 설근의 극미는 한량없다.
신근의 극미는 모든 몸의 부분에 퍼져 있다.
오사비바사론 하권
법구 지음
현장 한역
1. 분별색품(分別色品) ②
【문】만들어진 색의 내근(內根)에 대해서 나는 잘 알았다. 이제 다시 감각기관에 포섭되지 않는 것을 듣고자 하니, 그 모양에 대해 말해주기 바란다.
【답】색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무표색(無表色)이 있다. 이 가운데 색깔은 좋아하는 현색(顯色) 등을 말한다. 만약 청색ㆍ황색 등의 색이 변하지 않고 깨어지지 않는다면 이를 좋아하는 현색이라고 한다. 만약 청색ㆍ황색 등의 색이 변하고 깨어진다면 이를 싫어하는 현색이라고 한다. 만약 평등하다면 둘 사이의 중간이라고 한다. 비슷하게 나타나는 색이기 때문이다.
【문】색처(包處)에는 둘이 있으니, 첫째는 현색이고, 둘째는 형색(形色)이다. 무슨 까닭에 이 가운데서 오직 현색만을 말하는가?
【답】지금 이 가운데 마땅히 “색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현색이고, 둘째는 형색이다. 현색은 청색ㆍ황색 등을 말하고, 형색은 길고 짧은 것 등을 말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말하지 않은 것에 무슨 뜻이 있겠는가? 현색은 거칠고 알기 쉽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색은 6식 가운데서 두 가지 식이 인식하는 것이다. 안식 및 의식이다. 먼저 안식으로 자신만의 모습[自相]을 요별하고, 뒤에 의식으로써 자신만의 모습과 공통된 모습[其相]을 요별한다.
저 모든 색이 현재에 머물 때에 안식은 오직 그 자신만의 모습을 요별하고, 안식이 바로[無間] 분별하는 의식을 일으켜서 거듭 이전의 색에 대한 자신만의 모습과 공통된 모습을 요별한다. 그러나 이 일어난 분별하는 의식은 이전의 안식에 의지하고, 이전의 색의 대상을 반연한다. 이와 같이 의식이 바로 현재 머물 때에 의지하는 것과 반연이 되는 것은 모두 과거에 있다.
이로 말미암아 다섯 가지 대상이 현재에 머물 때에 의식은 저들 자신만의 모습을 요별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색의 대상은 두 가지 식이 인식하는 것이다.
모든 안식이 현재 머물 때에는 오직 현재의 자신만의 모습을 요별하고 공통된 모습은 요별하지 못한다. 만약 모든 의식이 현재 머물 때에는 삼세(三世)의 자신만의 모습과 공통된 모습을 다 요별한다. 모든 의식은 대상에 두루하기 때문이고 분별함이 있기 때문이다.
안식 뒤에 바로 의식이 일어나는 것은 정해지지 않았다. 6식신(識身)에서 허용하는 것에 따라 한 종류가 일어난다. 안식이 바로 의식을 반드시 일으킨다면, 괴로움의 뿌리는 괴로움의 등무간연(等無間緣)이 아니어야 한다. 괴로움의 뿌리는 오직 5식신(識身)에만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다시 근온(根蘊)에서 말한 것과 어긋나게 된다. 가령 괴로움의 뿌리는 괴로움의 뿌리에게 인연(因緣)과 등무간연과 증상연(增上綠)이 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안식에 의지하여 색을 요별하고, 바로 뒤에 분별하는 의식을 끌어와 일으킨다. 그런 까닭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식이 먼저 인식하고 안식이 받아들인 다음에 의식은 따라서 인식한다.”
소리에 두 가지가 있다. 널리 말한 것과 같다.
유집수대종(有執受大種)이란 현재 찰나의 유정의 수에 포섭되는 대종을 말한다. 무집수대종(無執受大種)이란 과거ㆍ미래의 유정의 수에 포섭되는 대종을 말한다. 또한 삼세의 유정이 아닌 수에 포섭되는 것을 말한다.
이 가운데 유집수대종에서 생겨난 소리는 유집수대종을 원인으로 한다고 말한다. 유집수대종이 여기서 생겨난 소리에 대하여 앞에서 말한 생인(生因) 등의 다섯 가지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무집수대종을 원인으로 하는 소리도 역시 이와 같다.
만약 입에서 나는 소리와 손 등을 합쳐서 생기는 소리는 유집수대종을 원인으로 하는 소리라고 한다. 만약 숲의 바람소리나 물소리 등의 소리는 무집수대종을 원인으로 하는 소리라고 한다. 나머지는 앞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
모든 냄새를 지닌 것도 널리 말한 것과 같다. 모든 즐거운 뜻을 주는 것을 좋은 냄새[好香]라고 한다. 즐겁지 않은 뜻을 주는 것을 나쁜 냄새[惡香]라고 한다. 느낌의 장소를 수순하거나 배제하는 것을 평등한 냄새라고 한다.
코가 냄새를 맡기 때문에 비근의 대상이라고 한다. 나머지는 앞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
모든 맛을 지닌 것도 널리 말한 것과 같다. 모든 즐거운 뜻을 주는 것을 좋은 맛[可意味]이라고 한다. 즐겁지 않은 뜻을 주는 것을 나쁜 맛[不可意味]이라고 한다. 이 둘과 어긋나는 것을 따르고 버리는 곳[順捨處]의 맛이라고 한다. 혀가 맛을 보기 때문에 설근의 대상이라고 한다. 나머지는 앞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
【문】만약 맛을 보았을 때, 설식(舌識)이 먼저 일어나는가, 신식(身識)이 먼저 일어나는가?
【답】만약 차가움, 따뜻함 등이 더욱 강하다면, 신식이 먼저 일어난다. 만약 짠맛, 신맛 등이 더욱 강하다면, 설식이 먼저 일어난다. 만약 촉감과 맛이 평등하다면, 설식이 먼저 일어난다. 맛보고자 하는 욕망이 더욱 뛰어나기 때문이다.
모든 촉감의 일부분도 널리 말한 것과 같다. 미끄러운 성질이란 부드러운 것을 말한다. 껄끄러운 성질이란 거칠고 강한 것을 말한다. 가벼운 성질이란 무게를 달아서 잴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무거운 성질이란 달아서 잴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차갑다는 것은 저것에 핍박받아 따뜻해지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배고프다는 것은 먹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갈증이 난다는 것은 마시고 싶은 마을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는 모두 촉처(觸處)에 포섭되나니, 만들어진 색으로 자성을 삼는다. 앞의 4대종은 비록 촉처에 포섭되나, 만들어진 색이 아닌 것으로 자성을 삼는다. 이런 까닭에 촉처에는 열한 가지가 있다. 지금의 일곱 가지는 만들어진 색이기 때문에 일부분이라고 한다. 몸이 접촉하기 때문에 신근의 대상이라고 한다. 나머지는 앞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
【문】어떤 대종이 더욱 강해지면 미끄러운 성질이 있는가? 나아가 어떤 대종이 더욱 강해지면 갈증이 나는가?
【답】어떤 이가 말한다.
“치우쳐서 더욱 강해지는 것이 없다. 그러나 4대종의 성질과 종류에 차별이 있어 능히 미끄러운 성질을 만들고 나아가 갈증이 생기는 것까지 능히 만든다.”
또한 어떤 이가 말한다.
“수계와 화계가 더욱 늘어나기 때문에 능히 미끄러움을 만든다. 지계와 풍계가 더욱 늘어나기 때문에 능히 껄끄러움을 만든다. 화계와 풍계가 더욱 늘어나기 때문에 능히 가벼움을 만든다. 지계와 수계가 더욱 늘어나기 때문에 능히 무거움을 만든다. 수계와 풍계가 더욱 늘어나기 때문에 능히 차거움을 만든다. 오로지 풍계만 더욱 늘어나기 때문에 능히 배고픔을 만든다. 오로지 화계만 더욱 늘어나기 때문에 능히 갈증을 만든다.”
여기서 말하는 ‘더욱 늘어난다’는 것은 업과 작용의 늘어남을 말하고, 일과 본체의 늘어남은 아니다. 마치 심과 심소와 같다.
무표색(無表色)은 무엇을 말하고, 나아가 법처(法處)에 떨어지는 색이라고 하는가?
떨어짐에는 여섯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계(界)에 떨어짐이요, 둘째는 취(趣)에 떨어짐이요, 셋째는 보특가라(補特伽羅)에 떨어짐이요, 넷째는 처(處)에 떨어짐이요, 다섯째는 유루(有漏)에 떨어짐이요, 여섯째는 자체(自體)에 떨어짐이다.
계에 떨어짐이란, ‘결온(結蘊)’에서 말한 것과 같다. 모든 묶임은 욕계에 떨어진다. 저 묶임은 욕계 등에 있다.
취에 떨어짐이란, 만약 이와 같은 6취(趣)에 포섭되어 속한다면, 이를 이름하여 취에 떨어진다고 한다.
보특가라(補特伽羅)에 떨어짐이란, 비나야(毘奈耶)에서 말한 것과 같다. 두 가지 보특가라가 있는데, 승수(僧數) 가운데 떨어져서 승가를 화합케 한다.
자체에 떨어짐이란, 여기서 ‘무표색은 무엇을 말하는가? 법처에 떨어지는 색을 말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유루에 떨어짐이란, 이 논에서 ‘무엇을 법에 떨어짐이라고 하는가? 유루법을 말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자체에 떨어짐이란, ‘대종온(大種蘊)’에서 ‘유집수(有執受)란 무슨 뜻인가? 답하자면, 이는 말이 더욱 증가하여 나타나는 바의 자체법에 떨어짐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무표색’이란 선한 계율과 악한 계율이 서로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는 언제나 하나의 식이 인식한 것으로서 의식(意識)을 말하니, 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색깔 등의 다섯 가지 대상은 현재에 다섯 가지 식이 인식한 것이다. 삼세(三世)의 시간에서는 의식이 인식한 것이다. 이것(무표색)은 항상 의식이 인식한 것이다. 눈 등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도 역시 항상 의식이 인식한 것이다.
이 무표색은 모두 두 가지 증류가 있다. 선(善)과 불선(不善)이다. 무기(無記)가 없는 것은 강한 힘으로 마음이 무표색을 능히 일으켜야 하는데, 무기는 마음의 힘이 약하여 무표색을 일으키지 못한다.
모든 선(善)의 무표에는 모두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율의에 포섭되는 것이고, 둘째는 율의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불선(壽)의 무표에도 모두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율의가 아닌 것에 포섭되는 것이고, 둘째는 율의가 아닌 것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율의에 포섭되는 무표색에 또한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이고, 둘째는 정려율의(靜慮律儀)이고, 셋째는 무루율의(無漏律儀)이고, 넷째는 단율의(斷律儀)이다.
별해탈(別解脫)율의란 7중계(衆戒)를 말한다. 정려(靜慮)율의란 색계의 계율을 말한다. 무루(無漏)율의란 유학(有學)과 무학(無學)의 계율을 말한다. 단(斷)율의란 두 가지 율의, 즉 정려율의와 무루율의의 일부분에 의하여 건립한다. 욕계의 오염을 떠나 아홉 가지 무간도(無間道)에 전전함에 따르는 것에 포섭되는 것을 단율의라고 이름한다. 능히 모든 악한 계율을 다스리기 때문이고, 또한 악한 계율이 일으키는 번뇌를 다스리기 때문에 단율의라고 이름한다. 앞의 여덟 가지 무간도에 전전함에 따르는 것에 포섭되는 것은 오직 악한 계율이 일으키는 번뇌만을 다스리고, 제9무간도에 전전함에 포섭되는 것은 능히 악한 계율 및 악한 계율이 일으키는 번뇌를 다스린다.
【문】별해탈율의란 어떤 인연 때문에 얻고, 어떤 인연 때문에 버리는가?
【답】다른 사람의 가르침으로 연유하여 얻고, 네 가지 인연 때문에 버린다. 어떤 것들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배운 계율을 버리는 것이요, 둘째는 두 가지 형태[二形]의 생김이요, 셋째는 선근을 끊음이요, 넷째는 중동분(衆同分)을 잃어버림이다.
【문】정려율의란 어떤 인연 때문에 얻고, 어떤 인연 때문에 버리는가?
【답】색계의 선심을 만약 얻는다면 얻는 것이고, 만약 버린다면 곧 버리는 것이다. 이는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물러남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둘째는 계(界)와 경지[地]가 바뀌기 때문이다.
【문】무루율의란 어떤 인연 때문에 얻고, 어떤 인연 때문에 버리는가?
【답】도(道)와 함께 얻어서 모두 버림이 없는 것이다. 만약 분수에 따라 버린다면 이것은 세 가지 연(緣)으로 말미암는다. 첫째는 물러남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둘째는 과보를 얻기 때문이요, 셋째는 감각기관의 전변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문】단율의란 어떤 인연 때문에 얻고, 어떤 인연 때문에 버리는가?
【답】정려율의에 포섭되는 것은 정려율의에서 말한 것과 같고, 무루율의에 포섭되는 것은 무루율의에서 말한 것과 같다.
율의에 포섭되는 선한 무표색(無表色)의 경우, 만약 강한 청정한 마음이 일으킨 바의 선한 표색(表色)이라면 이 무표색을 얻고, 만약 열등한 청정한 마음이 일으킨 선한 표색이라면 이 무표색을 얻지 못한다. 이 무표색을 버림은 세 가지 연으로 말미암는다. 첫째는 의근의 즐거움이 멈추는 것이요, 둘째는 가행(加行)을 버림이요, 셋째는 세력의 지나침을 한정하는 것이다.
불율의(不律儀)에 포섭되는 불선한 무표색(無表色)이란, 양 등을 도살하는 모든 불율의를 말한다. 이 불율의는 두 가지 연으로 얻는다. 첫째는 업을 지음[作業]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둘째는 일을 받음[受事]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이 불율의는 네 가지 연으로 말미암아 버린다. 첫째는 별해탈계(別解脫戒)를 받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둘째는 정려율의를 얻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셋째는 두 가지 형태의 생김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넷째는 중동분을 잃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색은 간략하게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이숙(異熟)이고, 둘째는 더욱 성장함[長養]이요, 셋째는 평등하게 흐름[等流]이고, 넷째는 찰나(利那)이다. 이 가운데 안처(眼處)에는 오직 두 가지 종류만 있으니, 첫째는 이숙이고, 둘째는 더욱 성장함이다. 평등하게 흐름은 따로 없다. 앞의 두 가지를 떠나 다시 평등하게 흐름의 성질이 따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ㆍ비처ㆍ설처ㆍ신처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색처에는 오직 세 가지 종류만 있다. 첫째는 이숙이고, 둘째는 더욱 성장함이고, 셋째는 평등하게 흐름이다. 향처ㆍ미처ㆍ촉처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성처(聲處)에는 오직 두 가지 종류만 있다. 앞의 세 가지에서 이숙을 제외한 것이다.
법처에 떨어진 색에는 오직 두 가지 종류만 있다. 처음의 무루심과, 함께하는 것은 찰나에 포섭되는 것이고, 나머지는 등류(等流)에 속한다.
2. 분별심품(分別心品)
【문】색의 모습은 마치 물거품처럼 미혹에 기만당한 어리석은 범부들이 만지고 더듬을 수가 없음을 알았다. 심법(心法)에 대해 듣고자 한다. 그 모습은 어떠한가?
【답】심(心)ㆍ의(意)ㆍ식(識)을 말한다. 심만을 말하지는 않겠다. 이는 질문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심ㆍ의ㆍ식의 세 가지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이는 차별이 없다. 세간에서 하나를 말하여 여럿이라 하고, 여럿을 하나라고 말하는 경우와 같기 때문이다. 하나를 말하여 여럿이라 하는 것은 사부(士夫)를 인(人), 유동(儒童) 등으로 말하는 것과 같다. 여럿을 하나라고 말하는 것은 새, 콩 등의 같은 이름으로 말하여 다시 짓는 것과 같다. 이 가운데 하나에 같이 의지함을 알아야 한다. 심ㆍ의ㆍ식도 또한 이와 같다.
또한 어떤 말에서는 차별이 있다. 과거(過去)를 의(意)라고 이름하고, 미래를 심(心)이라고 이름하고, 현재를 식(識)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계(界)를 시설(施設)한 것을 심이라 하고, 처(處)를 시설한 것을 의라고 하고, 온(蘊)을 시설한 것을 식이라고 한다.
또한 아주 멀리 행한 업에 의한 것을 심이라 하고, 바로 앞에 행한 업에 의한 것을 의라고 하고, 상속이 낳은 업에 의한 것을 식이라고 한다.
또한 채집(採集)의 뜻으로 말미암아 심이라 이름하여 말하고, 취(趣)의 뜻에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의라 이름하여 말하고, 요별(了別)의 뜻으로 말미암아 식이라 이름하여 말한다. 이는 다시 무엇을 말하는가? 6식신(識身)을 말한다.
【문】이는 어찌하여 오직 여섯 가지만 있고 늘어나지도 줄지도 않는가?
【답】의지하는 것 등이 있기 때문이니, 식이 의지하는 것이 오직 여섯 가지만 있음을 말한다. 만약 식이 줄어서 다섯 가지 식만 있으면, 한 가지 의지하는 것은 식이 없게 될 것이다. 만약 식이 늘어나서 일곱 가지 식이 있으면, 한 가지의 식은 마찬가지로 의지하는 것 등이 없게 될 것이다.
여섯 가지 소연(所緣)도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식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의지하는 것 등에 따랐을 뿐이다. 식에 신(身)이란 말을 한 것은 하나의 식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안식은 안식신(眼識身)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요컨대 안식이 많이 있어야 안식신이라고 말한다. 한 마리의 코끼리를 코끼리 무리[象身]라고 부르지 않고, 요컨대 많은 코끼리가 있어야 코끼리 무리라고 부르는 것처럼, 이것도 이와 같다.
무엇을 안식이라고 말하는가?
눈의 감각기관에 의지한다는 것은 안식의 의지하는 바를 나타내고, 각각의 색을 요별함은 안식의 대상인 소연을 나타낸다.
또한 눈의 감각기관에 의지하는 것은 안식의 원인[因]을 설명하고, 색은 안식의 연(緣)을 설명한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이여, 눈을 원인으로 하고 색을 연으로 하여 안식이 생겨남을 마땅히 알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눈은 안식에게 어떤 원인이 되는가?
【답】이들은 의인(依因)이 된다. 비유하자면 대종(大種)은 만들어진 색에게 의인의 뜻이 된다.
각각 요별하는 것은 안식의 모습을 설명한다. 식은 요별로써 그 모습을 삼기 때문에 이 가운데서 의(意)을 말한다. 눈에 의지하고 색을 연하여 요별하는 모습이 있음을 안식이라 이름한다. 널리 설하여, 뜻에 의지하고 법(法)을 연하여 요별하는 모습이 있음을 의식이라 이름한다.
【문】어찌하여 다만 눈의 감각기관 등에 의지한다고 말하지 않고, 또는 다만 각각 색 등을 요별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답】만약 그런 설에 따른다면. 하나의 뜻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눈의 감각기관 등에 의지한다고만 말하면, 그들에 상응하는 느낌[受] 등의 모든 법도 역시 눈 등의 감각기관에 의지하므로 마땅히 안식 등으로 말해야할 것이다.
또한 다만 각각 색 등을 요별한다고만 말하면, 이미 의식도 색 등을 요별하였으니, 즉 마땅히 의식을 안식 등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눈의 감각기관 등에 의지한다고 설명한 것은, 능히 색 등을 요별하는 의식을 구분한 것이다. 또한 각각 능히 색 등을 요별한다고 설명한 것은, 안식 등의 식과 상응하는 느낌 등을 구분한 것이다.
【문】눈과 색ㆍ밝음ㆍ작의(作意) 등을 연하여 안식이 생긴다. 무슨 까닭에 다만 안식만을 말하고 나머지 것들은 설명하지 않는가?
【답】마치 무염서(無染書)처럼 눈의 감각기관이 가장 중요하기[勝] 때문이다. 눈은 함께 하지 않기[不共] 때문이다. 마치 어떤 종자의 싹과 같다. 눈은 의지하는 바가 되기 때문이다. 북소리 등과 같다. 눈과 가깝기 때문이다. 각지(覺支)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안식ㆍ이식ㆍ신식에는 각각 선(善)ㆍ불선(不善)ㆍ유부무기(布覆無記)ㆍ무부무기(無覆無記)의 네 가지가 있다.
불선은 오직 욕계(欲界)에만 있고, 유부무기는 오직 범천의 세계에만 있고, 선과 무부무기는 욕계와 범천의 세계에 모두 통한다. 그 위의 경지에는 있지 않다. 심사(尋伺)가 있기 때문이다.
비식ㆍ설식의 두 가지 식에는 각각 세 가지가 있다. 유부무기를 제외한다. 오직 욕계에만 있다. 단식(段食)을 연하기 때문이다.
의식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고, 삼계(三界)에 다 통하고, 묶이지 않는다.
【문】만약 초정려(初靜慮) 이상의 모든 경지에서라면 안식ㆍ이식ㆍ신식의 세 가지 식신(識身)이 없는데, 그 경지에 이르면 어찌하여 보고, 듣고, 접촉하는 것이 있는가?
【답】수행의 힘으로써, 초정려의 경지에서 세 가지 식신이 현전하여 그들 세 가지 감각기관으로 하여금 보고, 듣고, 접촉함이 있게 한다. 이와 같은 뜻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문】다른 경지의 몸과 다른 경지의 눈과 다른 경지의 색으로 다른 경지에서 안식이 두루 발생할 수 있는가?
【답】발생한다. 제2정려의 경지에 이르면 제4정려의 경지의 눈으로써 제3정려의 경지의 색을 보고, 그 제2정려의 경지의 몸, 제4정려의 경지의 눈, 제3정려의 경지의 색, 초정려의 경지의 안식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이 가운데 5식신에는 각각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이숙(異熟)이고, 둘째는 등류(等流)이다. 의식신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이숙이고, 둘째는 등류이고, 셋째는 찰나이다. 이 가운데서 찰나는 고법지인(苦法智忍)에 상응하는 의식을 말한다.
【문】도(道)가 현재 앞에 있음으로 인하여 한 찰나 사이에 버려진 마음이 하나라도 있는가? 혹은 이것과 같은 종류의 원인[同類因]의 자성이고 같은 종류의 원인이 없는 것이 있는가? 혹은 같은 종류의 원인이 있고 같은 종류의 원인의 자성이 아닌 것이 있는가? 혹은 같은 종류의 원인의 자성이고 역시 같은 종류의 원인이 있는 것이 있는가? 혹은 같은 종류의 원인의 자성이 아니고 같은 종류의 원인이 없는 것이 있는가?
【답】도류지인(道類智忍)에서는 그때 마땅히 4구(句)를 지어 설명한다. 제1구는 이미 생긴 고법지인에 상응하는 마음을 말한다. 제2구는 미래에 견도(見道)에서 상응할 마음을 말한다. 제3구는 이미 생긴 고법지인에 상응하는 마음을 제외한 모든 나머지의 이미 일어난 견도에 상응하는 마음을 말한다. 제4구는 앞에서의 설명을 제외한 것을 말한다.
【문】도(道)가 현재 앞에 있음으로 인하여 한 찰나 사이에 버려진 마음이 있는가? 혹은 이것은 유루이고, 유루를 연함이 있는가? 혹은 이것은 유루이고, 무루를 연함이 있는가? 혹은 이것은 무루이고, 무루를 연함이 있는가? 혹은 이것은 무루이고 유루를 연함이 있는가?
【답】있다. 도류지인에서는 그때 마땅히 4구를 지어 설명한다. 제1구는 색계ㆍ무색계에 묶인 견도에서 끊는 유루의 연과 수면(隨眠)에 상응하는 마음을 말한다. 제2구는 색계ㆍ무색계에 묶인 견도에서 끊는 무루의 연과 수면에 상응하는 마음을 말한다. 제3구는 멸도인지(滅道忍智)에 상응하는 마음을 말한다. 제4구는 고집인지(苦集忍智)에 상응하는 마음을 말한다.
【문】사건 없는[無事] 번뇌를 다스려서 도(道)가 현재 앞에 있음에 한 찰나 사이에 버려진 마음이 있는가? 혹은 무루의 연이 있고, 무루의 연의 연이 없는가? 혹은 무루의 연의 연이 있고, 무루의 연이 없는가? 혹은 무루의 연과 또한 무루의 연의 연이 있는가? 혹은 무루의 연이 아닌 것이 있고, 또한 무루의 연의 연이 아닌 것이 있는가?
【답】이와 같은 4구에 준해서 뜻을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문】찰나의 마음이 현재 앞에 있음에 없어진 마음이 있는가? 혹은 그르게 정해진 원인과 그르게 정해진 조건이 있는가? 혹은 그르게 정해진 원인과 옳게 정해진 조건이 있는가? 혹은 옳게 정해진 원인과 옳게 정해진 조건이 있는가?
혹은 옮게 정해진 원인과 그르게 정해진 조건이 있는가?
【답】이와 같은 4구에 준해서 뜻을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문】찰나의 마음이 현재 앞에 있음에 없어진 마음이 있는가? 혹은 이미 발생하였고 이미 발생한 것이 아닌 마음이 원인이 되는 것이 있는가? 혹은 이미 발생한 마음이 원인이 되고 이미 발생한 것이 아닌 것이 있는가? 혹은 이미 발생하였고 또한 이미 발생한 마음이 원인이 되는 것이 있는가? 혹은 이미 발생한 것이 아니고 또한 이미 발생한 것이 아닌 마음이 원인이 되는 것이 있는가?
【답】이와 같은 4구에 준해서 뜻을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3. 분별심소법품(分別心所法品)
【문】이미 하나의 주체와 대상이 아님을 알았다. 행상(行相)이 전전하는 것이 마치 환상의 일과 같아 포악하게 날뛰는 코끼리나 말처럼 극히 다스리기 어렵다. 탐욕 등의 차별의 마음이 있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지금 또한 심소법의 모습을 듣고자 한다. 어떤 것들을 심소법이라 하며, 어떻게 차별이 있음을 알겠는가?
【답】느낌 등을 심소법이라고 이름한다. 경전으로써 기준을 삼기 때문에 따로 본체를 가짐을 안다. 가령 부처님께서 “눈과 색의 두 가지 조건은 안식을 발생한다.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촉(觸)이 있고, 촉과 함께 수(受)ㆍ상(想)ㆍ사(思)가 일어난다”라고 말씀하셨다.
살타벌저계경(薩他筏底戒經) 가운데에서 말씀하셨다.
“또한 사유가 있다. 모든 심소법은 마을에 의지하여 일어나 마음에 속박된다.”
또한 사리자(舍利子)가 구지라(俱胝羅)에게 물었다.
“무슨 까닭에 상상과 생각을 마음의 작용[意行]이라고 하는가?”
구지라가 말하였다.
“이 두 가지 심소법은 마음에 의지하여 일어나고 마음에 속박된다.”
이와 같은 한없는 계경 등으로 말미암아 심소법이 따로 본체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심소법이 만약 따로 본체를 가지지 않는다면, 사마타(奢摩他)와 비발사나(毘鉢舍那), 선근의 식주(識住), 모든 식념주(食念住), 모든 온(蘊)과 6근ㆍ6경ㆍ7각지ㆍ8정도와 모든 번뇌를 깨뜨리는 법 및 유지(有支) 등이 계경에서 마땅히 감소했을 것이다. 또한 마땅히 대지법(大地法) 등도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전에서 말씀하신 법문은 감소하지 않았고, 대지법 등도 잘 건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심소법이 따로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어떻게 심소법은 마음과 상응함을 알 수 있는가?
【답】경전으로써 기준을 삼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보는 것이 근본이 되고, 믿음ㆍ지혜의 증득과 상응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심소법이 상응의 뜻이 있음을 안다.
【문】‘상응’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
【답】아비달마의 모든 위대한 논사(論)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상응이 란 말은 평등의 뜻이다.”
【문】마음이 일어나는 지위에 심소법이 많이 있기도 하고, 마음이 발생할 때에 심소법이 적게 있기도 하다. 어찌하여 평등이 상응의 뜻이라고 하는가?
【답】본체의 평등함에 의지하여 이와 같이 말한다. 만약 하나의 마음 가운데 두 가지 느낌과 한 가지 상상이 있다면 평등한 상응의 뜻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마음 가운데는 한 가지의 느낌과 한 가지 상상만이 있다. 생각 등도 역시 이와 같다. 그러므로 평등이 상응의 뜻이라고 말한다.
또한 평등하여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이 상응의 뜻이다. 평등하여 떨어지지 않는 것이 상응의 뜻이다. 평등하게 운전(運轉)하는 것이 상응의 뜻이다. 마치 수레의 여러 부분과 같기 때문에 상응이라 이름한다.
또한 같은 시간, 같은 인식 주체[所依], 같은 행상, 같은 인식대상, 같은 결과, 같은 평등한 흐름, 같은 이숙(累熟)이 상응의 뜻이다.
이는 또한 무엇을 말하는가? 수ㆍ상ㆍ사 등을 말한다.
【문】무슨 까닭에 수를 먼저 말하고, 상 등을 먼저 말하지 않는가?
【답】행상이 거칠기 때문이다. 수가 비록 장애가 없고, 공간에 머물지 않으나 행상이 거칠기 때문에 색처럼 먼저 시설(施設)하였다. 그러므로 세간에서 “나는 지금 손이 아프고, 발이 아프고, 머리가 아프다”고 말한다. 상ㆍ사ㆍ촉 등은 이와 같은 일이 없다.
무엇을 수라고 하는가?
받아들이는 성질을 말한다. 받아들임이 있음으로써 받아들이는 성질이라고 말한다. 즉, 이는 인식대상인 대상을 받아 느낀다는 뜻이다. 이것에는 즐거운 느낌[樂受]ㆍ괴로운 느낌[苦受]ㆍ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의 세 가지 종류가 있다.
만약 능히 모든 감각기관의 대종을 기르게 하고 평등한 느낌의 성질이라면, 즐거운 느낌이라 말한다. 만약 모든 감각기관의 대종을 감소하게 하고 불평등한 느낌의 성질이라면, 괴로운 느낌이라 말한다. 이 두 가지와 서로 어긋나고 평등한 것도 아니고 불평등한 느낌의 성질도 아닌 것을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라고 말한다.
또한 만약 이 느낌에서 탐욕과 수면(隨眠)의 두 가지 연을 따라 증가하게 한다면, 이를 인식대상이라고 말하기 때문이고, 혹은 상응하기 때문에, 이를 즐거운 느낌이라고 한다.
만약 이 느낌에서 성냄과 수면의 두 가지 연을 따라 증가하게 한다면, 이를 인식대상이라고 말하기 때문이고, 혹은 상응이기 때문에, 이를 괴로운 느낌이라고 한다.
만약 이 느낌에서 어리석음과 수면의 두 가지 연을 따라 증가하게 한다면, 이를 인식대상이라고 말하기 때문이고, 혹은 상응이기 때문에, 이를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라고 말한다.
비록 어리석음과 수면이 모든 느낌에서 두 가지 연들로 하여금 따라 증가하게 하지만, 어리석음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에 의지하여 발생하고, 자신의 힘으로 전환하여 대부분이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과 함께 한다. 나머지는 명료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흔쾌한 것[可意]과 흔쾌하지 않은 것[不可意]으로써 대상을 받아들이고 버림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세 가지 받아들이는 성질을 세운다.
이런 까닭에 다만 세 가지 종류의 느낌만을 말하지만, 실제로 느낌의 성질은 무한히 많은 종류가 있다. 어떤 곳에서는 즐거운 느낌과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실제 없다고 하기도 한다.
【문】그들은 어떤 연으로 즐거운 느낌이 실제로 없다고 말하는가?
【답】경전으로써 기준을 삼기 때문이다. 계경에서 “모든 느낌은 괴로움이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한다. 또한 계경에서 “그대는 마땅히 괴로움으로써 즐거운 느낌을 관(觀)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만약 즐거운 느낌의 성질이 실제로 있다면, 어찌하여 부처님께서 모든 제자들에게 즐거움이 바로 고통임을 관하게 하였겠는가?
또한 계경에서 “괴로움을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것은 뒤바뀐 것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고 “만약 즐거운 느낌이 있다면, 마땅히 괴로움을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생각의 뒤바뀜, 마음의 뒤바뀜, 견해의 뒤바뀜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계경에서 “모든 유루의 느낌은 고제(苦諦)에 포섭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포섭된다는 것은 이것의 자성(自性)이 포섭되는 것이고, 실제로 즐거운 느낌이 포섭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느낌)은 괴로움이 자성이다.
어찌하여 이것이 고제에 포섭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미 고제에 포섭된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실제 즐거운 느낌이 없다. 또한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다. 모습을 핍박하는 것을 괴로움이라 이름한다고 말한다. 즐거운 느낌이 실제하는 것이 아니어서 모습을 핍박한다.
어찌하여 모든 유루의 느낌이 다 고제에 포섭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또한 관하여 나타나기[現觀] 때문이다. 모든 유루가 다 괴로움이라고 관하는 것을 이름하여 관하여 나타난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실제로 즐거운 느낌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아비달마의 모든 위대한 논사들은 말하였다.
“실제로 즐거운 느낌은 있다.”
경전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계경에서 부처님께서 대명(大名)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색이 오로지 고통이고 즐거움이 아니라면 즐거움이 따르지 않으니, 유정은 모든 색에 마땅히 탐닉하거나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계경에서 “즐거움과 함께 기쁨과 함께 4성제(聖諦)에 대해서 나는 관하여 나타나는 것을 말하였다”고 말한다.
또한 계경에서 “세 가지 느낌이 있으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계경에서 “모든 즐거운 느낌이 생겨날 때, 즐거움에 머물 때, 즐거움은 무상하기 때문에 허물과 근심이 있다. 모든 괴로운 느낌이 생겨날 때, 괴로움에 머물 때, 괴로움은 무상하기 때문에 허물과 근심이 있다”고 말한다.
만약 즐거운 느낌의 성질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마땅히 괴로움과 같이 한 가지 종류의 설명을 하지 않아야 할 것이고, 마땅히 즐거운 느낌에 대해서 다른 종류의 설명을 하여야 할 것이고, 마땅히 괴로운 느낌에 대해서 다른 종류의 설명을 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만약 즐거운 느낌의 성질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마땅히 경안(輕安)이 없어야 하리니,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계경에서 “기쁨이 있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가볍고 편안하다[輕安]”고 말한다.
만약 가볍고 편안함이 없다면 마땅히 즐거움도 없어야 할 것이고 그렇게 전전하여 마땅히 열반도 없어야 할 것이다.
다음에 순서대로의 원인도 없다. 결과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논사들은 이것에 대해서 뜻을 구하여 반박하는 의미의 말을 한다.
“설사 뛰어난 경지[十地] 가운데 비록 기쁨이 없어도 몸과 마음의 가볍고 편안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증거로 제시한 말은 결정적이지 않다.”
그들이 반박하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뛰어난 경지 가운데는 모두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이 뜻을 관하여야만 할 것이다.
마치 건달박(乾達縛)에게 먹는 일[食]ㆍ명색(名色)ㆍ식(識)의 세 가지가 화합하는 것과 같다.
또한 계경에서 “부모의 교합이 있어야 건달박이 바로 현재에 존재할 수 있으나, 어떤 때는 부모의 교합이 없어도 건달박이 현재에 존재한다. 가령 습생(濕生) 및 화생(化生)으로 태어나는 것들은 태생(胎生)과 난생(卵生)의 두 가지 유정의 존재들과 달리 부모의 교합을 떠나서 태(胎) 가운데에 들어가는 뜻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경전에서 “세 가지가 화합한 것을 목숨[壽]ㆍ따뜻함[暖]ㆍ식(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무색계에는 비록 따뜻함이 없으나 목숨과 식이 있다. 욕계와 색계가 아닌 세계는 따뜻함을 떠난 목숨과 식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경전에서 “몸은 식주(食住)에 의지하고, 색계와 무색계의 두 가지 세계가 아닌 것은 세 가지 식[三食]으로 말미암아 머무른다. 욕계 또한 그와 같다. 욕계가 아닌 것 가운데서는 네 가지 식[四食]으로 말미암아 머무른다. 그 위의 세계도 역시 같다”고 말한 것과 같다.
또한 경전에서 “명색은 식을 연하고, 식은 명색을 연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무색계가 아닌 것은 비록 색이 없으나 명(名)과 식이 전전(展轉)하여 서로 연이 된다. 욕계와 색계 가운데서도 역시 이 뜻이 있게끔 한다.
이 가운데서도 역시 그와 같다.
만약 기쁨이 있는 곳이라면 기쁨이 있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가볍고 편안함이 있음을 얻는다. 만약 기쁨이 없는 곳이라 할지라도 가볍고 편안함이 역시 있다면 나머지 연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틀렸다고 비난받지 않는다.
어떤 것들을 ‘나머지 연’이라고 말하는가?
먼저 욕계에는 수승한 기쁨의 느낌이 있어 미지정(未至定)을 이끌어서 가볍고 편안함이 일어나도록 한다. 초정려(初靜慮)와 제2정려에는 수승한 기쁨의 느낌이 있어 그 위의 경지까지 이끌어서 가볍고 편안함이 일어나도록 한다.
만약 기쁨이 전혀 없다면 가볍고 편안함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증거로 말미암아 즐거운 느낌이 결정코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처음의 과보가 위의 두 가지 세계에 있어 비록 그 과보를 얻을 수 없으니, 그들은 아라한(阿羅漢)의 과보를 얻는다. 앞의 힘이 이끌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응당 그러하니 마땅히 틀렸다고 비난받지 않는다.
또한 지팡이로 먼저 수레를 막아두었다가 후에 지팡이를 빼내었을 때 그 수레가 굴러가는 것처럼, 이것도 역시 이와 같다. 먼저 기쁨의 힘이 뒤의 가볍고 편안함을 이끌어오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가볍고 편안함은 기쁨이 있음으로 생겨남을 알아야 한다. 기쁨은 곧 기쁜 느낌과 즐거운 느낌에 포섭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즐거운 느낌이 실제로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즐거운 느낌으로 말미암아 희망(希望)이 있기 때문이다. 계경에서 “만약 즐거움이 있다면 법(法)에 대해서 희망이 있다. 만약 즐거운 느낌이 없다면 법에 대해서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까닭에 즐거운 느낌이 실제로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좋아할 만한 업[可愛業]에는 과보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즐거운 느낌이 없다면, 모든 좋아할 만한 업은 마땅히 공(空)하여 과보가 없다. 모든 좋아할 만한 업은 반드시 즐거운 느낌을 그 과보로 삼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좋아할 만한 업은 모든 즐거운 도구를 이숙과(異熟果)로 한다고 말할 수 없다. 즐거운 도구는 다만 증상과(增上果)이기 때문이다. 모든 즐거운 도구는 증상과이지 이숙과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찌된 까닭인가?
즐거운 도구는 다른 이들과 함께 받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숨이 끊어져도 깨어져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즐거운 도구를 다른 유정들과 함께 받아 이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모든 이숙과는 다른 이들과 함께 받아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 결코 없다. 자신의 상속에 떨어져 다른 이들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즐거운 도구는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더라도 마치 코끼리와 말 등과 같이 오히려 깨어져 없어지지 않는다. 모든 이숙과는 몸과 목숨이 함께 한다. 몸과 목숨이 만약 없다면 그들은 반드시 깨어져 없어진다. 그러므로 좋아할 만한 업에 만약 즐거운 느낌이 없다면 마땅히 공하여 결과가 없다. 이 이치는 결정되어 있다. 또 포섭하는 이익 때문이다. 만약 즐거운 느낌이 없다면 모든 감각기관의 대종(大種)들도 마땅히 포섭하는 이익(攝益)이 없을 것이다. 만약 ‘포섭하는 이익은 모든 유정이 대상인 바깥 경계를 분별하기 때문이고 즐거운 느낌 때문은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이치 역시 그렇지 않다. 포섭하는 이익은 마치 괴로운 느낌과 같이 손해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바른 가행(加行)은 반드시 과보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즐거운 느낌이 없다면 바로 바른 가행은 마땅히 공하여 결과가 없다. 바른 가행이란 것은 마땅히 괴로운 느낌으로서 이숙과를 삼아야 한다. 즐거운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삿된 가행처럼 반드시 괴로운 느낌으로서 이숙과를 삼기 때문이다. 바른 가행은 마땅히 즐거운 느낌으로서 이숙과를 삼는다. 이들은 다시 밝음과 어둠, 빛과 그림자 등처럼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또한 즐거운 느낌으로 말미암아 악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약 즐거운 느낌이 없다면 악행도 마땅히 없을 것이다. 모든 유정들이 즐거운 느낌에 탐착하기 때문에 모든 악행을 저지르고 괴로운 느낌의 결과를 감수한다. 악행이 만약 없다면 괴로운 느낌도 마땅히 없을 것이다. 괴로운 느낌이 이미 있으므로 악행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미 악행이 있으므로 즐거운 느낌도 반드시 있다.
또한 법수(法受) 때문이다. 계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네 가지 법수가 있으니, 혹은 현재는 즐겁지만 뒤에는 괴로운 법의 느낌이 있는 것, 혹은 현재는 괴롭지만 뒤에는 즐거운 법의 느낌이 있는 것, 혹은 현재도 즐겁고 뒤에도 즐거운 법의 느낌이 있는 것, 혹은 현재도 괴롭고 뒤에도 괴로운 법의 느낌이 있는 것이다. 만약 즐거운 느낌이 없다면 법의 느낌도 마땅히 한 가지이고, 네 가지일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은 등등의 갖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즐거운 느낌이 반드시 있다.
【문】만약 즐거운 느낌이 있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즐거운 느낌과 어긋남이 있을 것이다. 경에는 어떠한 이치가 있는가?
【답】다른 이치가 있다. 또한 처음 경전에서 “모든 지닌 느낌은 괴로움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 경전에 의지하여 세 가지 괴로움을 말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어떤 것 등을 세 가지 괴로움[三苦]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고고(苦苦)이고, 둘째는 괴고(壞苦)이고, 셋째는 행고(行苦)이다.
만약 모든 괴로운 느낌이라면, 고고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괴로움이라고 한다. 모든 즐거운 느낌이라면, 괴고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괴로움이라고 한다. 모든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라면, 행고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괴로움이라고 한다. 마치 계경에서 ‘영원하지 않기[無常] 때문에 괴롭다’고 말한 것과 같다. 그 경전들은 이러한 이치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