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6월 23일(금)
* 시작 기도
주님...
풀과 풀의 꽃과 같은 나의 인생입니다.
이처럼 지극히 연약하여 흔들리고 또 흔들려 숱하게 넘어지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그 인자하심은 나의 생명보다 크시기에 주님은 나의 영원한 반석이시며 나의 완전한 기업이십니다.
하여 내가 사모할 이는 오직 주밖에 없나이다.
하늘에나 땅에서 주님은 찬양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새 날을 주셨으니 이 날도 주님과 함께하는 주의 날 되게 하시고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내 안에 있는 모든 죄의 때를 말갛게 벗겨 주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정결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옵소서.
내게서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구원의 기쁨, 하늘의 기쁨이 오늘 이 시간 주님과 말씀으로 교제하는 동안에 가득 채우셔서 온 종일 넘치게 하옵소서.
내 뜻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뜻을 이루는 한 날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행 2:37-47
제목 : 오합지졸의 유대인들이 복음을 통하여 주님 안에서 온전한 영생의 공동체가 되다.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제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3,000이나 더하더라.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 나의 묵상
유대인들이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 곧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아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질문한다.
그 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여러분들이 먼저 회개하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이를 통하여 죄사함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인데 이 약속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하신 약속임을 밝힌다.
베드로는 이 말 외에도 여러 말로 그들에게 권면하고 확증하면서, 이 악한 세대에서부터 구원 받을 것을 말하였다.
베드로의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그날에 믿는 자의 수가 3,000명이나 되었다.
그들이 다 같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서 서로 교제하였으며 또한 떡을 떼기도 하고 온전히 기도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사도들을 통해서 기적과 표적이 계속해서 많이 나타나므로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그 일로 인하여 믿는 사람들이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고 함께 모여서 물건을 서로 공동으로 사용하였으며 자기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으며 또한 가정마다 돌아가면서 함께 모여 기쁨으로 식사를 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모일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의 이 모든 행동을 통하여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구원 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
다윗이 이룩했던 정치적인 해방과 경제적인 번영 그리고 사회적인 정의와 같은 지극히 현세적인 민족과 개인의 회복을 추구하는 그런 민속 메시야를 대망했던 유대인들의 영생의 개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와는 전혀 별개였다.
그들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현실적인 정치 경제 사회적 회복만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결국 자기 개인의 회복의 바탕 위에 세워지는 민족의 해방과 번영 그리고 정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철저하게 만물 안에 회복의 소망을 두고 살던 그들에게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곧 당신들의 죄로 인함이며 또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진 구속사라는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의 일반적인 상식을 깨트리는 국면을 만들었다.
하지만 얼마든지 그들이 이 복음을 거부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들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아 선포된 복음에 복종하게 하셨다.
복음을 들은 수많은 유대인들은 이 복음을 감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찔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에게 나아가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권면했던 말대로 그들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아 성령의 충만함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되심을 믿게 되었다.
이렇게 믿게 된 이들이 무려 3,000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무엇보다 사도들의 가르침에 복종할 줄 알았다.
그리고 서로 교제하였으며 떡을 떼기도 하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이들의 삶이 180도 바뀐 것이다.
사도들이 행하는 표적과 기사를 보면서 두려워하게 되었고 이렇게 믿는 자들이 자기의 재산과 소유를 내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팔아서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주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한 마음으로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돌아가면서 성도들의 집에서 함께 주님의 이름으로 성만찬인 식사를 나누기도 하였다.
이런 일들이 예루살렘에 소문이 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이 자자했으며 무엇보다 이들의 삶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된 것이다.
이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믿는 자의 수가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 아닌가?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권위 앞에 복종할 수 있어야 한다.
사도들이 자기들의 유익을 위하여 사심을 가지고 무엇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복음을 전하여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기 원하였고 그 가르치는 복음 앞에 그들은 머리를 숙여 용납하고 받아들였다.
중요한 것은 사도로 번역된 헬라어 아포스톨론은 복수형으로써 정확한 번역은 ‘사도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전한 가르침 곧 디다케는 단수형으로 기록되었다.
이것은 복음을 가르치는 사도들은 베드로 외에도 다른 사도들이 모두 가르치는 일에 함께 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러 사도들의 가르침은 여러 가지로 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였음을 잘 보여준다.
이는 사도들이 자신들의 생각이나 개인적인 철학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구원 사역, 곧 복음만을 가르쳤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와 같은 사도들의 복음을 가르치는 자세는 초대 교회가 순수한 복음의 기초를 다지는 밑거름이 되는데 아주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이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서 행한 일이 바로 뒤에 나오는 3가지 행동이다.
그것은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는 일이었다.
여기서 교제하는 것은 믿음을 가진 성도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란 의심할 여지없이 생명의 양식인 말씀으로 교제와 사귐을 갖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말씀묵상이다.
이런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통하여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이 하는 것이 영생의 삶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더 많이 알아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는 것이 곧 영생임을 성경이 확증하고 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 다음 떡을 떼는 것이다.
이는 성도들의 집에 돌아가면서 식사를 즐기는 것인데 이를 가리켜 성만찬이라 한다.
이는 단순히 인간적인 교제를 위함이 아니라 그 차원을 넘어서서 주님과의 영적 교제를 성도들이 함께 나누는 진정한 공동체의 하나됨을 확증하는 것이다.
(요일 1:1-4)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을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마지막으로 기도에 힘쓰는 일이다.
기도는 내가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보다 기도 역시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기도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과 더불어 교제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또한 기도를 통하여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일과 아버지의 온전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도가 아주 단순해지고 주님과의 교제로 나아갈 수 있다.
기도의 최상급은 ‘주님, 내가 원하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원하시는 것만 주십시오.’일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 안에 나의 욕심이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탐욕과 정욕으로 구하는 것은 주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다.
(약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물론 신앙의 수준에 따라서 구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
신앙의 수준과 전혀 상관없이 무조건 우리의 필요를 구하지 말라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신앙이 어린 이들이 구하는 것 역시 관심이 지대하시다.
따라서 그들이 구하는 만물 안에 있는 존재물일지라도 그것에 관심을 가지시고 응답하기도 하신다.
그런 응답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늘 함께하심을 믿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신앙의 연륜이 늘면 늘수록 기도의 방향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신앙의 수준이 높아지면 기도의 수준도 그만큼 높아져야 한다.
여전히 땅의 것만 구하면 안 될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정말 아버지께서 하고자 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 그 일에 함께 연합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일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다.
(요 6:28-29)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느냐고 주님께 묻는다.
여기서 사람들이 물은 하나님의 일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형인 ‘일들, works’로 물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일, work’ 곧 단수형으로 대답하셨다.
사람들은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란 여러 가지가 아니라 단 한 가지 ‘아들을 보고 믿는 것’이라고 하신다.
다시 말하면 아들을 믿는 믿음을 말하는 것인데 여기서 믿음이란 어떤 믿음인가?
그것은 성경이 답을 해준다.
(요 6:47)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이 두 구절을 보면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임하고,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에게도 영생이 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믿는 것은 곧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님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요 6:56-57)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 또한 내 안에 거한다는 말은 다름 아니라 내가 주님의 구속사건 곧 십자가에 죽음, 무덤에 장사됨, 부활에 연합하는 것을 말한다.
주님만 아니라 나 또한 주님의 구속사건에 연합하여 하나가 될 때 그 안에서 새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으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 안에서 한 공동체인 한 교회를 섬기는 이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복음을 한 가지로 가르쳐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나는 신학을 하고 부교역자로 있을 때나 담임목회를 할 때 전혀 그러지 못하였다.
그 때는 물론 복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였지만, 내 생각에 좋은 대로 가르치고 행하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결과만 좋으면 좋은 사역자로 인정을 받았기에 철저하게 결과 위주의 사역에 매달렸던 것이다.
복음 안에서 보면 결과가 좋지 않았어야 주님 안에서 나를 바르게 볼 수 있었을 텐데 결과가 좋으니 내가 잘해서 그런 것인 양 나의 의로 대변되는 자기주장의지가 하늘을 찔렀다.
그러다 보니 사역을 잘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인 줄 알고 더 열심히 내 의지와 노력으로 일했던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주님께 물었던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들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과 어쩜 그렇게 똑같은지.....
나는 사역을 나의 남편 삼아 그리도 열심히 최선을 다하였다.
중요한 것은 나의 노력과 의지로 열심을 다하다 보니 다른 교역자들이 동역자가 아니라 경쟁자가 되고 말았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사역을 잘하면 시기심이 발동하여 견디지 못하였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끌어내리고 내가 올라가야 했던 것이다.
물론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도록 교묘하게 했지만 말이다.
이런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가 아니던가?
이렇게 열심을 인정 받은 나는 교회를 개척해서 기존의 교회와는 전혀 다른 교회를 만들려는 풍운의 꿈을 안고 개척하였다.
그러나 전혀 다른 교회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고 알 수도 없었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이 기존의 교회밖에 없었으니 알 턱이 없었다.
결국 나의 열심과 노력으로 이루어보려고 했던 그 일이 무언가 되려고 하면 문제가 생기고 또 이루어지는가 싶으면 문제가 생기곤 하였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간섭하심이요 만지심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저 현상만 보았기 때문에 좋지 않은 현상 앞에서 좌절하고 낙심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하였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왜 내게 이렇게 하시느냐고 말이다.
이렇게 부침을 계속하다가 통합복음을 알게 되었다.
복음을 알고 나서 내가 그동안 겪었던 부침의 연속이 무슨 의미였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십자가요 무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무덤을 뛰어 넘어 십자가에서 바로 부활로 건너려고만 애를 썼던 자였다.
그러니 나의 삶이 변할 리 만무하였다.
무덤이라는 3일 간의 장사됨이 없으면 부활은 상징만 남을 뿐이다.
그 부활의 생명은 결국 관념이요 지식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그 이후로 지금까지 줄곧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이 무덤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래서 좁은 문이 아니라 넓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다.
정말 가슴이 찢어지고 마음이 아파도 이들을 바른 길이요 주님이 원하시는 좁은 길로 인도하여야 할 책임이 바로 나에게 있다.
자식이 낭떠러지로 가는 것을 보면서 그 길을 가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는 부모가 있겠는가?
나는 목사요 선교사로서 이를 관망할 수 없다.
그들을 바른 길, 온전한 길, 주님이 원하시는 좁은 길로 인도해야 한다.
그 길이 비록 가시밭 길일지라도 말이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좁은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지만 그 길만이 생명으로 가는 길임을.....
* 묵상 후 기도
주님...
주님의 말씀 안에 답이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얼마나 헤매고 다녔는지요?
한 공동체는 한 복음을 가르치고 그 한 복음을 받아서 온전한 한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주님, 이 종을 불쌍히 여기소서.
인간적으로 용납하고 그들을 이해하려고 했던 이 종의 불충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뜻보다 인간적인 생각을 앞세웠던 이 종의 악함을 주의 공의로 심판하소서.
내가 먼저 주님의 무덤 안에 들어가게 하시고 그 안에서 온전히 주님과 더 깊은 교제를 나누게 하소서.
그 자리가 생명으로 나아가는 자리임을 사람들이 알게 하셔서 그것이 부담스러워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주님과 영적 교제를 통하여 날마다 주님과 함께 누리는 영생의 삶을 살기를 소망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교회가 온전한 영적 공동체, 영생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숫자가 적어도 괜찮습니다.
그저 육신적으로 편한 것만을 추구하고 그것이 이루어질 때 즐기는 fun이 아니라 비록 좁은 길일지라도 그 길을 걸어가면서 누리는 참된 하늘의 기쁨인 Joy를 날마다 맛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