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1코린 3,1-9; 루카 4,38-44 /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2024.9.4.
김대건 신부 탄생 2백주년이었던 지난 2021년의 묵상 주제는 "당신은 천주교인이오?"였습니다. 관장이 김 신부를 고문하면서 던졌던 이 물음은 오늘날 천주교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천주교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천주교인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의 신성을 믿고 그 신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천주교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계시 진리는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시는 하느님을 가장 닮으신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유대교나 이슬람교, 불교나 유교 등 다른 종교에서도 가난한 이들을 도우라고 가르치지만, 천주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이라는 것, 그래서 가난한 이들을 돕는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며, 그 십자가를 얼마나 짊어졌는지에 따라 현세에서는 복음화의 성취를 할 수 있고, 또 내세에서는 심판의 상급을 받을 것임을 믿는 이들이 천주교인입니다.
이 믿음이 천주교인들이 계시 받고 있는 믿음입니다. 2천년 전 보편교회의 초대교회 신자들이나, 2백년 전 한국교회의 초대교회인 교우촌 신자들은 이 믿음을 깨닫고 목숨 바쳐 가난한 이들과 이루는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이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야 하는 또는 적어도 신앙에 대한 박해를 받으며 자손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해주는 십자가를 짊어져야 했지만 그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믿는 이들과 함께 하시겠다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런데도 천주교인들이 당당하게 천주교인임을 밝히지 못하고 자신의 종교적 신원을 숨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데 소홀했기 때문일 것이고,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교우들에게,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을 들려드립니다. 자신도 스스로 노력해서는 이룬 것이 없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창조주로 모시고, 예수님을 우리에게 오신 구세주로 믿으면 믿지 못할 것이 없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세상의 편견 때문에 주저할 것도 없습니다.
사실,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면 그네들에게 현세적 혜택이 돌아가기도 하겠지만 진짜 영적으로 귀한 영혼 성숙의 열매는 그 복음 전파의 십자가를 다소라도 짊어진 이들에게 고스란히 돌아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이러한 이치를 반신반의하다가 뒤늦게나마 선교의 이 비밀을 알았던 행운을 차지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는 제자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도라고 부릅니다.
오늘 미사의 복음을 준비시키는 복음 환호송에서는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천명하신 사명 선언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행하신 복음선포의 일상을 집대성해서 보여주는 대목이 나왔습니다. 고향인 나자렛 회당에서 사명을 천명하신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가 살던 카파르나움으로 가셔서 하신 활동이 그 대표적입니다. 아픈 이들은 고쳐 주시고 마귀 들린 이들은 마귀를 쫓아내서 제 정신을 차린 자유인으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렇듯 치유와 구마 활동은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행하신 아주 일상적인 복음선포 활동이었습니다. 하도 많은 이들이 고침을 받고 해방되었기에 베드로가 살던 마을 카파르나움은 ‘예수의 마을’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습니다.
복음이 전해주는 내용이 일상적인 씨줄에 해당된다면, 독서가 전해주는 내용은 사도 바오로가 복음을 선포한 코린토 공동체의 교우들이 성장해 온 과정을 회고하는 역사의 날줄에 해당됩니다. 바오로도 예수님처럼 치유와 구마의 사도직으로써 복음을 선포했을텐데, 젖먹이에게 단단한 음식을 먹일 수 없듯이 믿음이 어린 상태에서는 아프다면 고쳐주고 마귀 들려서 오면 그 마귀를 쫓아내주는 정도의 일방적인 베풂만 할 수 있었겠지만, 믿음이 성숙한 후에는 다른 이의 신체적 아픔에도 눈을 돌리게 되고 심지어 다른 이들의 정신적 아픔도 낫게 해 줄 수 있는 등 치유 사도직에도 동참할 수 있었을 테고 마귀 들린 이들을 해방시켜 주는 것만이 아니라 그 가족들이 겪었을 상처에도 눈을 돌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부마 상태에서 해방된 이들에게 아직도 마귀 들려 고생하는 이들에게 봉사하는 삶으로 인도함으로써 온전한 해방이 될 수 있게끔 노력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일상적인 씨줄과 역사적인 날줄이 엮여져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하나의 옷감처럼 완성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죽임의 칼날 앞에서 당당하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답변할 수 있었던 김대건 신부처럼, 천주교인들의 일상은 매일의 가족 기도로써 짜여지고 인생의 역사는 가난한 이들에게 또는 적어도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관심과 희생을 나누어 주는 선행으로써 짜여질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의 인생과 세상의 역사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창조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뿌려진 믿음의 씨앗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굳이 잘 하려고 할 필요도 없고,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하느님께 맡겨드리면 우리의 삶과 일은 하느님의 것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