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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맣고 웨이브 진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넘실거리는 여진은, 특유의 동그랗고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며 2층 여민의 방으로 향했다. 어제 저녁,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는 여민을 기다리다 늦잠을 잔 통에 아침 수업까지 제껴야 했지만 그 정도는 별 상관이 없다는 듯 여진의 얼굴은 연신 미소로 넘쳐 났다. 어릴 적부터 가문에 하나 뿐인 여 손이라는 이유로 식구들의 사랑을 독차지 했는가 하면, 예쁜 얼굴을 무기 삼아 뭇 남성들의 맘을 홀리고 다녔던 탓에 여진의 얼굴은 사랑 그 자체였다. 어느새 여민의 방문 앞에 선 여진은 똑똑- 하며 노크를 해도 대꾸가 없자 벌컥 문을 열었다.
"오라버니!!"
여민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쓴 채로 술에 절여 잠이 들어 있었다. 여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를 막으며 가지고 왔던 꿀물을 침대 옆 선반에 놓는다. 그리고 이불을 그대로 걷어 버렸다.
"오라버니.. 일어나세요."
"아~ 여진아 오늘은 깨우지마."
"일어나지 않으면 저 동우 선배 만날 거에요~"
"뭐?"
동우 선배를 만나겠다는 여진의 말에 여민의 눈이 확 떠지며 몸이 벌떡 세워졌다. 여민의 눈이 무섭게 반짝이자 여진은 배시시 웃으며 꿀물을 앞에 내민다. 이상하게도 동우에 관해선 민감한 여민이었다. 특별히 동우가 그에게 잘못한 것은 없는데도, 기생 오래비 처럼 생겨서 기분이 나쁘다는 둥 외모에만 혹한 바람둥이라는 둥 그 이유도 제법 그럴 싸 했다. 그런 탓에 여진은 특별히 동우를 맘에 두고 있지 않지만 지금처럼 그를 요리 해야 할 때면 꼭 동우의 이름을 꺼내곤 했다. 그게 의심 많은 오라버니, 정여민에게 가장 잘 먹히는 협박이니..
"동운지 서운지 아무튼 그 녀석은 절대 안돼!"
"아우 알아요. 그러니까 어서 꿀물부터 마시세요."
"넌 내가 정해주는 남자만 만나란 말이야.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얼굴이나 배경만 보고 달라붙는 녀석들이 얼마나 많은데..."
"제가 예뻐서 그렇잖아요. 헤헤헤. 어서 마시세요."
인형 같은 얼굴의 그녀는 여우였다. 특히나 여민과 같은 남자를 다룰 때에는 더더욱, 자신이 예쁘다는 걸 알고 있기라도 한 건지 남자들이 외모에 혹해 접근 해오면 그녀는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의 본색을 드러내며 그들의 혼을 쏙 빼놓곤 했다. 그건 어린 시절부터 사랑만 받고 자란 그녀의 특기이자 전문이었다. 물론 그걸 알리 없어 매일 같이 걱정에 또 걱정인 여민 이었지만..
여민은 꿀물을 받아 마시고는 여진을 자신의 앞에 세웠다. 여전히 여민의 눈에 여진은 물가에 내놓은 오리처럼 나약해 보였다.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좀 알아야 해!"
"오라버니도 참..."
"무서워도 한번 참아 봐야 해!"
"아이참 오라버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오늘 수업은 몇 시에 끝나?"
"
"무슨 건물에서 수업 받는데?"
"교양 수업이라.. 자연대에서 받을 것 같아요. 왜요? 데리러 오려고요?"
"흠흠 아니야. 이제 나가봐. 나 좀 씻어야겠다."
"저기.. 오라버니, 저 용돈 좀 주세요."
이제 나가 보라고 말하는 여민의 옆에 착 달라 붙어, 여진은 지금껏 감춰왔던 꿍꿍이를 내뱉어 낸다. 용돈이라면 평소 부모님께 타서 쓰긴 했지만 대학생활을 하는 여진에게 더군다나 한참 꾸미기 좋아하는 나이의 그녀에겐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렇듯 가끔 여민의 주머니를 탐내는 것이다. 여민이 지갑에서 수표 몇 장을 꺼내 쥐어주자 여진은 그걸 덥썩 받았다.
"오라버니, 그럼 씻으세요. 헤헤헤"
여진이 특유의 웃음을 뿌리며 나가자 여민은 한숨을 내쉬며 폰을 들었다. 저렇게 사랑스러운 동생을 납치를 하게 하다니.. 잠시 잠깐 여민은 죄책감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이환의 목소리에 여민의 얼굴은 다시 사악한 악마의 그것으로 변했다.
[여보세요.]
"오늘 납치하는 게 좋겠다."
[정여민!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너의 귀엽디 귀여운 동생
"우리 여진일 허접한 자식에게 시집 보낼 수 없어. 안 그래도 동운가 서운가 하는 허접한 자식이 자꾸 집적 된 단 말이야. 이 참에 세상 무서운 걸 가르쳐야 한다고!"
[나 참]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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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민이 일러준 장소에 차를 세운 채, 여진이 나오기 만을 기다리고 있던 이환은 긴장 되는지 담배만 줄기차게 피워댔다. 납치범처럼 보이기 위해 평소엔 입지도 않던 가죽잠바에, 청바지를 갖춰 입었다. 특별히 납치범다운 옷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납치하는 마당에 정장을 입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환은 폰을 열어 여민이 보내준 여진의 사진을 다시 확인한다. 동그란 눈에 새까만 앞머리가 귀엽게 흘러내린 여자 아이가 사랑이 가득 담긴 얼굴로 웃음 짓고 있었다. 이환은 사진 속 여자 아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폰을 닫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업이 끝났는지 학생들이 건물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환은 긴장 어린 한숨을 다시 한번 내쉬며 피우고 있던 담배를 차창 밖으로 던져 버렸다. 여진이 자신을 알아 볼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긴장이 되는 걸 숨길 수가 없었다. 갈색 렌즈의 안경으로 눈을 가린 채 이환은 건물 쪽으로 좀 더 가까이 차를 움직였다. 그러자 그때서야 친구들 사이에 둘러싸여 나오는 여진이 그의 시선 속에 들어왔다. 인형 같은 얼굴의 여진의 옆엔 온통 남자들 투성 이었다.
"저래서 여민이 자식이 밤잠을 설치나 보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이환은 그대로 차문을 열고 여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커다란 키에 합기도와 유도로 단련된 탄탄한 몸매의 이환이 다가오자 웃음을 뿌리고 있던 여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그를 올려 봤다. 여진의 주위에 있던 남자들은 모두 왠지 잘나 보이는 이환을 노려 보고만 있었다.
"누구세요?"
"정여민씨가 데리고 오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어머, 오라버니 가요?"
"네. 함께 가주시죠"
커다란 눈망울 안에 순진함을 가득 담은 채, 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씩 중요한 가족 모임이 있을 때면 여민이 사람을 보내 오곤 했었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 없이 냉큼 그러겠노라 한 것 이었다. 여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환은 최대한 공손하게 여진을 차로 안내했다.
"그런데 아저씨는 처음 보는 분이네요. 옷도 이상하구.."
여진은 아무 의심 없이 이환을 따라가면서도 이상하다는 듯 작게 쫑알거렸다.
여진이 차에 오르자 이환은 자신도 차에 오르며 그대로 차를 출발 시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긴장이 되었는지 이환은 침을 한번 삼키며 운전대를 잡았다. 그렇게 차는 여진이 알지 못하는 외곽지역으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차창을 빤히 바라보며 어리둥절해 하던 여진은 생전 처음 와보는 곳으로 차가 움직이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앞에 있는 이환에게 말했다.
"어디 가는 거에요?"
그때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차문이 잠겼다. 차문이 잠기는 소리에 여진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뭐야, 이사람? 여진은 불안함이 가득한 눈동자로 다시 한번 이환에게 말했다.
"어디 가는 거냐고요?"
"조용히 해! 팔려가고 싶지 않으면...."
"뭐, 뭐라고요?"
"조금만 허튼 수작 부리면 그대로 끌고 가서 술집에 팔아버릴 테니까 입 다물고 있어!"
이환의 날카로운 말에 무언가를 예감한 듯 여진은 흔들리는 눈으로 차문을 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굳게 잠긴 차문은 열릴 리가 없었다.
"다 당신 대체 누구야?"
"입 닥치라니까!"
이환의 날카롭고 시린 음성에 바락바락 대들려던 여진의 입이 다물어졌다. 처음으로 사람이 무서운 순간이었다. 덜덜 떨고만 있던 여진은 어느새 촉촉해진 눈망울로 룸미러 속 이환의 얼굴을 바라봤다. 매일같이 사랑만 받고 살던 그녀에게 이런 상황은 낯설고 두렵기만 했다.
이환은 굳은 얼굴을 고수하며 거칠게 차를 몰았다. 왠지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아 찝찝했지만, 부탁하던 여민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는 완벽한 납치범의 가면을 쓰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차를 몰고 도착한 곳은 이환의 옛집 이였다. 여민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 전까지 살던 집으로써, 달랑 방 한 칸에 부엌과 욕실이 합쳐진 형편 없는 곳 이였다. 거진 5년 만에 이곳을 다시 찾게 된 이환은 감회가 새로웠다. 성공을 쫓아 떠난 지 5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5년 만에 그는 대기업의 호텔실장이 되어 돌아왔다. 꼭 성공해서 돌아 오리라 다짐했었는데.. 5년 만에 다시 돌아와 이곳에 서있는 자신이 믿겨지지 않았다.
방금 까지도 납치범의 얼굴을 하고 있던 이환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걸며 감회에 젖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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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순히 내 말을 잘 들으면 일주일 뒤에 풀어줄 수도 있어! 그러니까 도망을 생각 한다 던지 쓸 떼 없는 행동으로 괜히 피곤하게 만들지마. 허튼 수작 부리면 그대로 술집 행이야..."
"도, 도망 가지 않으면 정말 풀어 주는 거죠? 술집에 팔아 넘기지 않는 거죠?"
"그렇다니까, 우선 깨끗하게 씻고 와! 지금 하고 있는 꼴 좀 보라고...."
이환은 그 말을 하며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진의 앞으로 속옷과 옷을 던졌다. 그것은 여민이 미리 보내온 것이었다. 아무리 납치 상황이라고 해도 귀엽디 귀여운 동생이 더럽게 하고 있는 꼴을 보지는 못한다나. 이환에게 옷과 속옷을 받은 여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앉아 있다가 작게 말을 꺼냈다.
"저기.. 정말 씻어도 돼요?"
"어."
"왜요?"
"뭐가?"
"아, 아니에요."
겁에 질려있던 여진은 참 이상한 납치범이라는 생각에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보통 드라마나 소설 속 납치범들은 험악한 얼굴로 인질을 못살게 굴지 못해 안달인데.. 이 남자는 납치범처럼 생기지도 않았을 뿐 더러 자기 보고 씻으란다. 그것도 깨끗하게,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걸까? 혹시 씻으려고 옷을 벗으면 늑대가 되어서 달려 들려고 하는 건가? 순식간에 드는 생각에 여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뭐해? 안 들어가고!"
"드, 들어가요"
부엌과 합쳐진 어정쩡한 욕실, 아니 세면실이라고 해야 더 맞을 것 같은 그곳은 당장이라도 무언가가 튀어 나올 것처럼 지저분한 공간이었다. 얼떨결에 안으로 들어간 여진은 그대로 쭈그린 채 앉아 버렸다.
“아우 이런 곳에서 어떻게 씻지”
J재단의 귀하디 귀한 여 손
"아우, 정말 미치겠네."
차가운 물에 손가락만 까딱거리며 여진은 입술을 내민 채 한번 더 투덜거렸다. 이런 곳에서 인질로 붙잡혀 생활해야 하다니 생각만 해도 막막했다. 밀려오는 걱정에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을 때 즈음 갑자기 여진의 뒤에서 찍찍-거리는 생쥐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차피 미리 연재가 되었던 소설이었던 만큼,
수정 좀 하면서 세편씩 꼬박꼬박 올리겠습니다.
작가말에 달린 꼬릿말 보고 진짜 놀란 거 아시져?
절 기억하고 계신 분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아
좋기도 하고 책임감이 더 생기기도 하고 ㅎㅎ
모두들 감사합니다.
첫댓글 와우!!! 정말 반가와요. 이젠 쭉 이어지나요? 기대해요.
와~ 저 역시 반갑습니다. 님 기억해요. 아직도 인소닷에 계셨군요. ㅎㅎ 앞으론 잠수 없이 계속 이어가도록 할게요.
역시 소설은, 여우납치사건입니다. 다시 읽는 감회도 색다르네요. 재밌구요. 다음편
다시 읽어주시는 센스~ㅋㅋ 감사합니다. 저 역시 수정도 하면서 다시 읽고 있는데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ㅎㅎ님의 역시~라는 표현이 절 힘나게 하네요. 앞으로 쭈욱 이어가도록 할게요.
다음편빨랑올려주셔용
하루에 세편씩 꼬박꼬박 올리도록 할게요^^ 님도 예전에 함께 독자분이셨죠? 닉넴이 참 낯익어서 좋네요. 앞편 꼬릿말 확인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여기에만 꼬리 달아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연재가 되었던 소설이었던 만큼 하루에 세편씩 거르지 않고 올리겠습니다. 좋아해주시니 저 역시 좋네요. 감사합니다. 앞편 꼬릿말 확인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여기에만 꼬리 달아요.
하루에 세편씩이라니 그럼 저번에 연재한 것 뒷부분 빨리 볼 수 있겠어요
원래는 묶어서 올려도 되는 것 같던데(20편까지),, 왠지 묶어서 올리는 건 싫더라고요. 그래도 매일 세편씩 꼬박꼬박 올리겠습니다. 빨리 그 뒷부분 보여드릴게요. ㅎㅎ 기다려주셔서 감사해요.
꺅그뒷부분너무기대됐었는데>_<
뒷부분을 기다리고 있었던 분들이 많네요ㅜ 괜히 삭제한건가? 하하하; 기다려주셔서 감사해요. 앞편 꼬릿말도 다 확인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여기에만 답꼬리 달아요.
감회가 새롭습니다.
저 역시 수정 좀 하면서 다시 읽고 있는데 감회가 새롭네요. 예전엔 시간에 쫓겨 다시 읽는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ㅋㅋ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전에껀 검색하면 볼수 있으니까 그 뒤부터 올려주시지 ㅜㅜ 넘궁금하잖아요 ㅜㅜ
그 생각을 해보지 못한 것은 아니에요. 천이 넘어가는 조회수가 아까워서 지우기 전에 많이 망설였구요. 그런데 기왕 늦은 김에 수정 좀 하고, 내용 보충도 하면서 다시 시작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저질러 버렸습니다. 최대한 빨리 그 뒷내용 공개할 수 있도록 할게요.
으아ㅋㅋㅋㅋㅋㅋㅋ너무재밋엇요ㅋㅋㅋㅋㅋㅋㅋ다음편언능언능+ㅇ+헤헤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일 꼬박꼬박 세편씩 올리도록 할게요. 앞편 꼬릿말 확인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여기에만 꼬리 달아요.
이히히0 너무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