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1974년 8월 15일 프랑스 유학 중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서거 소식을 접했다. “대사관 직원이 와서 공항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수만 볼트의 전기가 훑고 지나가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SBS 힐링캠프-박근혜 편)
▲육영수 여사 영결 행렬에 추모하러 나온 인파. ⓒ소장자 이현표
귀국 후 박 당선인은 어머니 대신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시작했다. 새로운 퍼스트레이디가 첫 외교 무대에 등장한 것은 제럴드 포드 미국대통령이 방한했을 때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닉슨의 뒤를 이어 1974년 8월 10일 대통령으로 취임한 포드는 그해 11월 22~23일 방한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과 2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11월 19일 박 당선인은 포드 대통령 국빈방문 시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하도록 확정되었고,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1974년 중앙청에서 베풀어진 민속공연 관람.ⓒ소장자 이현표.
1974년 12월 청와대는 국문과 영문이 혼용된 탁상용 달력 <1975 데스크다이어리>를 제작했는데, 위 두 장의 사진을 게재함으로써 육영수 여사 추모와 함께 새로운 퍼스트레이디의 등장을 알렸다.
이 데스크다이어리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단란했던 모습을 담은 사진도 1장 등장한다. 두 분 사진은 다정해 보이면서도 어딘지 쓸쓸해 보인다. 이는 육 여사의 환한 웃음과 진돗개 목을 잡고 있는 박 대통령의 근엄한 미소가 주변의 녹색 배경과 어우러져 나타난 절묘한 효과로 보인다.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 부부와 진도개.ⓒ소장자 이현표.
당시 22세의 퍼스트레이디는 <1975 데스크다이어리>를 친분이 있는 인사들에게 “o o o 귀하, 1974년 12월 박근혜”라고 친필로 서명하여 증정했다.
▲1974년 박근혜 친필 서명 (수신인 성명은 생략했음). 8월15일 적의 총탄에 어머니를 잃고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은 박근혜의 첫 공싱서명이다. ⓒ소장자 이현표.
친필 서명은 정치인들에게 중요한 홍보 도구로 활용돼 온지 오래다. 거의 40여 년 전에 시작된 친필 서명은 박근혜 당선인에게도 무엇보다 효과적인 홍보수단이었다.
▲ 2004년 4월 4일 수원 팔달.
▲2011년 9월 8일 국회 헌정기념관
한나라당이 국민의 신뢰를 잃자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총선에 임해서 승리를 쟁취할 때,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친필 서명은 그 위력을 발휘했다.
▲총선 후,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친필 서명을 받고 즐거워하는 대전시의 상인(사진: 뉴시스)
18대 대선에서도 박근혜 후보는 가는 곳 마다 국민들로부터 친필 서명을 요청받았다. 수첩과 펜을 준비해 온 수없이 많은 유권자들뿐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역대 대통령과 박근혜 후보의 사진을 모은 앨범에 사인해달라는 지지자도 있었다. 박근혜 후보는 18대 대선에서 유력 정치인이자 인기 연예인이었다.
▲충주시를 방문, 사진첩에 사인하고 있는 박근혜 후보(사진: 연합뉴스)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서명
박근혜 당선인의 친필 서명은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서 전수받은 유산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1961년 5.16군사혁명에 성공한 박정희(1917~1979) 장군은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멜로이(Guy S. Meloy, 1903~1968) 대장에게 친필로 서명하여 증정했다.
▲박정희 소장이 주한 유엔군사령관 멜로이 대장에게 건넨 친필 서명 사진ⓒ소장자 이현표.
당시 박정희 장군은 나이 44세, 계급은 한국군 소장이었다. 반면 멜로이 사령관은 나이 58세, 계급은 미군 대장이었다. 더구나 당시 한국의 혁명군 지휘부는 미군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도 박정희 소장은 자신의 사진에 의연하고 당당한 필치로 서명하여 선물했다.
1961년 8월, 중장으로 진급한 박정희 장군은 아래와 같이 또 다른 친필 서명 사진을 익명의 주한 미군 장성에게 선물했다.
▲박정희 중장이 친필 서명한 사진ⓒ소장자 이현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케네디 대통령 초청으로 1961년 11월 12~24일 기간 미국을 방문했다. 이는 미국이 대외적으로 한국의 군사정부를 승인하는 역사적인 제스쳐였다.
▲박정희 의장과 케네디 대통령의 환담(1961)ⓒ소장자 이현표.
케네디 대통령의 바로 옆에 앉은 미국인은 폴 크레인(Paul Crane, 1919~2005)이다. 그는 미국 선교사의 아들로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다시 한국에 와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전주 예수병원장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2차례 미국방문(1961년, 1965년)시 미국 측 통역을 담당했다.
케네디 대통령과 2차례 정상회담을 가진 박 의장은 뉴욕에 가서 11월 18일 한국방위의 위인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장군을 만났다. 맥아더는 “나의 전우를 만나 영광이다”라고 환영했다.
▲박정희 의장과 다정하게 팔짱을 낀 맥아더 장군ⓒ소장자 이현표.
1963년 12월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해 청와대에 입성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박 대통령’으로 통일) 가족사진을 AP 통신사는 1964년 1월 전 세계에 타전했다. 야무지게 입을 꼭 다문 박근혜 당선인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대통령이 된 박정희 가족사진.(1963)ⓒ소장자 이현표.
박 대통령은 취임 후 해외의 많은 수집가들로부터 친필 서명 요청을 받았다. 아래에 소개하는 사진은 1966년 3월 16일 친필 서명이 있는 사진이다.
▲1966년 3월 박 대통령이 친필 서명한 사진ⓒ소장자 이현표.
아래는 박 대통령이 미국의 초등학교 교장에게 증정한 사진이다.
▲1975년 10월 박 대통령이 친필 서명한 사진ⓒ소장자 이현표.
박 대통령은 사진에만 서명한 것이 아니고, 아래와 같이 서명용 카드를 별도로 제작해서 활용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1967년 2월 28일 서명한 카드 (날짜는 청와대 비서관이 기재) ⓒ소장자 이현표.
수신인에게 우편으로 발송했던 가로 14.3cm, 세로 8.5cm 크기의 이 카드에는 맨 위에 청와대 문장을 새겨 넣고 영문으로 ‘Park Chung Hee,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라는 문구가 인쇄되었으며, 날짜를 적어 넣을 수 있도록 빈 칸도 있다.
증정 받는 이가 누구인지는 기재되어 있지 않았지만, 보통은 청와대 비서관이 수신인에게 별도의 서한을 써서 박 대통령의 친필 서명이 있는 카드를 동봉해 보냈다.
드문 경우지만, 박 대통령은 책자에 친필로 서명하여 선물하기도 했다. 자신의 주요연설을 영어로 번역한 책 <Major Speeches by Korea’s Park Chung Hee>에 아래와 같이 친필로 서명하여 험프리(Hubert Humphrey, 1911~1978: 미국 부통령 역임)에게 증정한 것이 그중의 하나다.
▲험프리 부통령에게 증정한 책 내지의 박 대통령 친필 서명 ⓒ소장자 이현표.
또한 박 대통령은 1977년 존 글렌(John Glenn, 1921~: 미국 최초로 우주 궤도를 돈 우주인) 상원의원에게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간한 영어와 한글이 병기된 <한국미술오천년>이란 제목의 도록을 증정하면서 내지에 다음과 같이 서명했다.
▲박 대통령이 미국 존 글렌 상원의원에게 친필 서명하여 기증한 박물관 도록 표지와 내지 서명(위사진) ⓒ소장자 이현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