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하는 추모 / 한진우
흰 벽에 머리를 대고
에스키모인들은 화가 나면 풀릴 때까지 직선으로 걷는 풍습이 있다 마음이 풀린 곳에 표시를 하고 하룻밤 만에 돌아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 돌아오다가 끝난 사람도 있다
분노는 어떤 자세로 식어 있나 어디까지 걸었니? (묻기 전에 걸어야지)
한 사람의 길을 루틴으로 만들면 잠시가 영원으로 변할 수 있다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곳에 닿아 보려는 염원은 스스로 물에 빠지는 선택지를 만들었다 물방울이 덜 튈수록 예쁜 다이빙의 모양 왕관 모양으로 퍼지는 밤
창문을 보면 다들 입김을 한 번씩 꽂아 두고 갔다 추모의 방식은 제각각이었지만 결국은 투명해지고
풍경을 받아들이라는 압박에 시달린 창문과 외면하고 싶어지면 창문을 찾곤 하는 우리
빙하가 사라지는 이유를 먼 나라 따뜻한 평지에서 생각해 본다
직선거리를 재보면 누가 더 화가 났을까 비교하기 쉽겠지만
목격자는 하얀 대지뿐이었다
저 멀리서 숨을 오래 참는 사람이 간절함과 안간힘을 심해어에게 맡겨 놓고 올라왔다 평생 동안 쉴 숨의 절반만 가지고
식목일. 그렇게 불린 날에 올라왔었지 가슴이 뚫린 채로
온 동네 흙으로도 메꿀 수 없던 깊이 동네에 있지만 동네의 이해를 벗어난 깊이
덮으려 하지 말고 통째로 껴안아 보는 습관만이 따뜻했다 머리와 다리를 덮는 이불이 깨어날 때 가슴에 안겨 있는 것처럼
나도 몸에 깊이란 걸 만들어 보려고 모종삽을 샀다 첫 삽을 뜰 때 멀리서 축하 박수가 들렸다 멀지 않은 곳에 다들 있었다니
물이 고여 있구나
잘린 다리가 흔적을 지우기 편한 것처럼 꽃을 그리는 사람이 언제부턴가 화병에 물만 그렸다 죽음을 투명하게 보려고 다들 유리병을 사 가는 건가
누가 들어오지 않았다길래 똑바로 걸었는데 그 앞은 녹았다는 말
그것은 존재하는 걸까 그것은 발견되는 걸까
흰 벽에 머리를 대면 멀리서 컹컹 짖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자세가 엉킨 뿌리와 닮아 있다고 자기가 무얼 심는지도 모르는데
다 자라고 나서 눈을 떴을 때 여럿인 자신을 보고 어떻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 『문학사상』 2021년 10월호 / 2021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수상작 ---------------------------------------------
* 한진우 시인 1994년 광주 출생. 중앙대 대학원 중퇴. 2021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 현재 대한번역개발원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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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안 가는 시를 감상하는 법>
러시아 "형식주의"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쉬클로프스키일 겁니다. 우리가 시에서 흔히 말하는 "낯설게 하기"를 명명한 분이죠. 형식주의는 간단합니다. 문학을 비문학과 구별되게 해주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바로 형식이라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광주 민주화운동을 내용에 충실하면 역사물이 되지만, 그들이 말하는 어떤 형식에 맞춘다면 문학이 되는 식입니다. 선과 악의 대치, 도덕적 타락, 인간의 존엄성... 이러한 내용을 주제로 시를 쓴다고 가정해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사실 그런 내용은 논문에서나 다루는 게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시의 주제를 살펴보면 상당 부분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랬을 때 우리는 하나의 '사건'으로 보기보다 '예술'로 인식하게 됩니다. 왜일까요? 내용을 다루는 방식이 논문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문학(시)이라는 형식의 옷을 입혔기 때문에 구분되는 식이죠. 이를 바꿔 말하면 즉, 형식의 틀을 버리면 논문이나 다른 해석을 통한 의견일 뿐이지 문학이 아니라는 것이고, 이는 곧 이러한 사건이나 주제가 문학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따라서 결론을 내보면 문학은 무엇을 다루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다루는가가 중요하다는 게 됩니다. 이런 부분이 바로 문학을 철학과 종교, 사상과 구별 짓는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시적 언어는 일상의 언어와 다르다고 말합니다. 일상의 언어는 소통을 목적으로 하지만, 시적 언어는 소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게지요. 오히려 소통과는 반대로 가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도대체 이 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말이 나오는 거고, 이는 당연한 반응이며 형식주의자들이 원하는 것이고 주장하는 요지입니다.
앞서 쉬클로프스키가 명명한 "낯설게 하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형식을 난해하게 함으로써 대상을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그것을 온전히 이해(소통)하는데 시간을 최대한 증대시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척 보면 바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이게 무슨 말이지? 하면서 다시 두 번, 세 번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더라도 사실 무슨 말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원래 형식주의 자체가 소통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인 소통 불능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철학, 종교, 사상과 다른 예술의 역할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문동, 문사, 창비의 작품을 보고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시를 보는 눈이 없는 게 아니라 형식주의를 모른다면 오히려 정상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 연 걸침이나 행 걸침도 낯설게 하기의 한 방식인데 제가 생각하는 흔한 방식은 전혀 관련 없는 대상들을 나열하는 식입니다. 이는 쉬클로프스키가 "대상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것을 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죠. 우리는 예술이 특히 시적 화자는 새로운 시선을 통한 어떤 통찰을 일반에게 제공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알고 보면 그런 역할은 철학이나 종교, 혹은 각종 사상이 해왔지, 예술의 역할은 아니었습니다. 쉬클로프스키의 주장대로 일반에게 무엇을 전달하겠다는 내용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며, 단지 낯설게 하기와 같은 형식을 얼마만큼 충실히 구현하느냐, 만 남습니다. 즉, 문학의 내용은 그러한 기법(형식)을 나타내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는 왜 백 년이 넘은 러시아 형식주의를 오늘날까지 중요하게 여기는 걸까요? 그건 바로 예술이 갖는 특수성을 형식주의가 아니면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시에서뿐만 아니라 소설이나 수필, 미술, 조각 등 모든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성과를 냈기 때문이며 따라서 오늘날까지도 예술의 범주에서 러시아 형식주의를 논하지 않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형식주의가 태동하기 이전의 리얼리즘이나 상징주의는 내용을 신비롭거나 사실적 감동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형식을 봤지만, 이는 곧 형식주의자의 등장으로 비판을 받습니다. 예술적 언어가 그들이 말하는 신비로운 것이 아니며 뮤즈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내용을 신비한 것으로 포장하는 것은 거짓일 뿐이며 오히려 예술은 무엇(내용)을 말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형식) 말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같은 내용으로도 이렇게 말하면 사상이 되지만, 또 저렇게 말하면 철학이 되는 것처럼 예술 역시 예술이라는 형식을 통해서만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러시아 형식주의의 성격을 가장 잘 설명한 사람이 바로 쉬클로프스키였으며 시는 정신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에 가깝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예술은 물질적 기법에 따른다고 했고요. 소설을 예로 들어도 이는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아는 위대한 작품을 떠올려보세요. 내용(스토리)이야 뻔합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불같은 사랑을 꿈꾸는 유부녀가 바람피우다 결국 자살하는 내용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좌와 벌>도 간단하지요. 가난한 청년이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괴로워하지만, 연인의 사랑으로 극복해가는 이야깁니다.
이렇게 간단한 내용임에도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스토리가 아닌 플롯의 형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스토리는 인과관계에 의한 시간순으로 나열하지만, 플롯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특정한 목적을 위해 재구성하는 식입니다. 여기서 스토리와는 다른 플롯만의 차별성이 나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같은 내용을 어떤 형식으로 구현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주장과 통하는 부분입니다. 범위를 확대하면 미술 역시도 그렇습니다. 새로운 사조의 등장은 매번 형식의 전복에 있으니까요. 마르셀 뒤샹이 소변기를 놓고 현대미술의 전환점을 이뤘다고 평가받는 것도 형식의 파괴이자 새로운 형식을 보였기 때문이죠.
제가 처음에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러한 형식이 말하는 <낯설게 하기>인데 그러한 형식이 가장 잘 구현된 게 이른바 S급 문예지라고 불리는 문동, 문사, 창비 등의 작품들입니다. 한번 읽어서는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내가 잘못 읽었나, 싶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지요. 그리고 하나하나 문장을 해석하면서 상상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독자와 소통하지 않는 시라면서 불평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말했듯이 이는 러시아 형식주의가 추구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들은 소통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일반 언어와 문학적 언어는 달라야 하며 소통을 목적으로 하려면 역사서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형식이라는 틀에 넣음으로써 인식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것이 목적이니까요. 내용은 무엇을 말하든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S급 문예지의 작품을 보시면 하나의 주제로 밀고 가는 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목도 특정한 하나를 말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죠. 궁금하시면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제목부터 선명한 이미지로 들어오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니까요. 이는 우리가 흔히 이해하기 쉬운 시와 비교해보면 극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시는 리얼리즘이나 상징주의에 가깝지만, 이들 작품은 형식주의에 기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특성은 시에서 하나를 말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1연에서 A에 대해서 말하다가 2연에서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B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 C에 대해서 말하죠. 이런 식으로 계속 다른 것을 말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것'이 '상관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대상의 동질성이나 혹은 차별성으로의 변주로 보면 되겠습니다. 예전에 제가 올린 게시글에도 적었지만, 이들의 특징은 계속 다른 것을 말하지만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각자가 갖는 이미지만 얕게 살짝 건드리기만 하는 식이죠. 그리곤 결론에서 처음에 말한 A로 돌아가는 식입니다. 그에 반해 리얼리즘이나 상징주의는 한 가지 주제로 제목에서부터 분명하게 적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에 대해서만 깊이 있게 말하죠. 그리고 반전이나 마무리를 짓습니다.
제가 이 글을 적는 이유는 속칭 말하는 S급 문예지가 대단하다는 걸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런 작품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시를 공부하시는 분들이 그쪽 당선작품을 감상하면서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하면서 이해되지 않는 작품을 억지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별 효과가 없음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시가 어렵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여타 장르처럼 일목요연하게 해석하려 드는 그 의지 때문이기도 합니다. 혹은 강력한 한 줄의 진술을 기대했으나 끝내 그럴듯한 진술이 없을 때 우리는 당황하기 마련인데, 이는 전통적인 서정시와 참여시, 혹은 저항시로 대변되는 형식에서 정답을 골라야만 했던 교육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쪽 문예지의 당선작들은 대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사소한 일상의 단면에서 존재론적으로 통찰하는 시인의 직관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시인은 자신만의 시 세계를 창조하며 일괄적으로 통용되는 문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려는 의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형식주의에 대한 개념이 없다면 이해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심사자들 역시도 낯설수록 새로운 형식으로 보게 되는 것이고, 높은 점수를 주는 식이지요. 더구나 신인상의 주된 가치가 기존 가치의 전복에 있고, ‘시적 언어의 본질은 기성의 언어에 폭력을 가하는 낯설게 하기에 있다’는 슈클로프스키의 전언에서처럼 ‘폭력’이 지닌 미적 긍정성을 되새겨 보는 게 한층 효과적일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폭력'이 바로 우리를 이해시키지 않는 것이 목적인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어불성설이겠죠. 그래서 간혹 심사평을 보면 전혀 말도 안 되는 논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논리는 어려울 수밖에 없고, 우리는 또 좌절하는 식입니다. 그도 아니면 심사평을 생략하고요. 그래서 결론은 그쪽 당선작품을 감상할 때는 형식주의에 기반한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형식을 즐기시면 됩니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에 기반을 두었느냐의 차이일 뿐이니까요. 우리가 흔히 내 마음 나도 모른다고 말할 때가 있을 겁니다. 눈물 나게 슬픈 것도 아니고, 기쁜 건 더더욱 아니고 그렇다고 슬프지 않은 것도 아닌, 복잡미묘한 마음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시로 적으면 아마도 형식주의에 기반한 그런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참고로, 이런 형식주의에 충실한 작품을 많이 접하다 보면 일반 서정시를 쓸 때 한결 수월함을 느끼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그런 작품을 숱하게 배우고 공부하면서 느낀 점을 적어봤습니다. 이러한 형식주의와 연계해서 더 깊이 공부하시고 싶다면 구조주의를 들여다보시면 됩니다. 구조주의는 형식주의와는 다르게 현상에 집중하지 않고 언어의 구조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랑그(규칙)와 파롤(현상)로 설명되는 구조주의는 모든 언어는 개별적인 파롤로 나타나지만 거슬러 가면 랑그에서 비롯된다는 이야깁니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낱말을 하나의 기호라고 칭했는데 그가 말하는 기호학에서 언어는 기표와 기의로 나눠집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는 필연적이 아니라 기호로 규정되는 자의적 해석이라고 주장합니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면 가령 “빨강”이라는 기표는 “정열”이라는 기의를 가질 수도 있고, 그 외에 “혁명”, “피”, “적십자사”, “혈액원”, “공산주의자”, “건강한 자궁” 등 거의 무한대의 개념(기의)을 가지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특정 정당을 지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호등에서 빨강은 자의적으로 멈추라는 기의 하나만을 규정하게 됩니다. 앞서 언급한 형식주의가 '멈추기'라는 하나의 '기의'에 집중했다면 구조주의는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기표'에 집중한 거라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저는 구조주의까지 들어갈 필요 없이 이해되지 않는 작품을 형식주의에 기반해서 보시면 한결 편함을 말하고 싶어서 이 글을 썼습니다. 쓰다 보니 글이 이렇게 길어졌네요. 문학카페니 이런 글도 있으면 좋겠다 싶어 올립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최형만 (시인) / 이해 안 가는 시를 감상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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