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24일(토)
* 시작 기도
주님...
이 아침에 말씀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이 죄인을 외면치 말아 주소서.
주의 너른 품으로 나를 받아 주소서.
주의 품만이 나의 거할 처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의 품속에서 주님과 함께 노닥거리는 자 되기 원합니다.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교제와 사귐의 시간이 내 안에 온전하게 하소서.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나에게 허락하신 무덤 안에서 오직 주의 말씀만이 나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내 안에 있는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고 거룩한 불구자로 주님과 동행하게 하소서.
주님만을 구합니다.
주의 얼굴을 구하오니 나를 그 얼굴빛으로 비추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행 3:1-10
제목 : 도리어 복음 안에서 거룩한 불구자인 앉은뱅이가 되기를 원합니다.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 나의 묵상
베드로와 요한은 오후 3시 정한 기도 시간에 기도하러 성전으로 가려고 미문(美門)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이 구걸하려고 앉아 있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한다.
베드로가 그를 눈여겨보더니 그에게 우리를 보라고 한다.
앉은뱅이는 무언가를 얻을 요량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이나 금은 우리에게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당신에게 절 것인데 그것은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더니 그의 발과 발목에 힘이 생겨서 벌떡 일어나 서서 걸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니까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가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보고 그가 누군지 알아보고 일어나서 걷는 일로 인하여 크게 놀라며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본문에 나오는 앉은뱅이는 이 날만 아니라 그 전에도 매일 성전의 아름다운 문이라 일컫는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자였다.
베드로와 요한 역시 그 날만 성전에 기도하러 간 것이 아니라 그 전에도 매일 정한 시간이 되면 기도하러 성전에 드나들면서 그 앉은뱅이를 보았을 것이다.
앉은뱅이가 그들에게 구걸하는 것이 어디 한두 번이었겠는가?
아마도 귀찮을 정도로 집요하게 돈을 요구했을 것이다.
이 날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앉은뱅이는 여느 날처럼 기도하러 성전으로 들어가고 그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는 그들을 보면서 눈인사 정도 하고 구걸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평소처럼 우리에게는 돈이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무언가 줄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것은 오순절 성령을 받고난 뒤의 그들의 모습이었다.
그 전에는 전혀 그것을 줄 생각도 못했고 그저 불쌍한 마음만 들었을 것인데, 그 날은 성령의 강력한 임재로 인하여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게 은이나 금은 없지만 당신에게 진짜로 줄 것이 있다고 말하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이후에 그 기적을 체험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동선을 좇아서 찾아다녔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 가버나움까지 가서 주님을 만났다.
예수님을 만난 그들은 얼마나 반가웠던지 “아니 선생님, 언제 여기 오셨어요?” 하면서 만면에 희색을 띠면서 인사하였다.
그 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찾는 이유는 표적을 본 것 때문이 아니라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다.
이제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다.
이처럼 사람들은 먹고 배가 부르는 육신의 양식을 위하여 불철주야 일하고 또 일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것에 치심해서 일하고 먹어도 그것은 결국 썩을 양식에 지나지 않는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런 썩을 양식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생명을 주는 것은 아들을 보고 믿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요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믿음이란 그저 관념적이고 지식적으로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믿음은 삶의 실재이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에 연합하는 것이다.
주님의 구속사건에 연합한다는 것은 곧 십자가 죽음과 무덤에 장사됨 그리고 부활에 동참하여 연합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을 통해서 생명으로 나아간다.
(요 6:47)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여기서 믿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
믿는 자가 영생을 얻고, 또한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도 영생을 얻는다.
이는 믿는 것이 곧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를 의미한다.
믿는 것은 곧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것이 진짜 양식이며 그것이 진짜 마실 음료이기 때문이다
(요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가 바로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요 주님 또한 그 안에 거하신다.
주님은 늘 아버지와의 교제 속에서 사셨다.
그래서 아버지로 인하여 사셨듯이 아들을 먹는 자 또한 아들로 인하여 살 것이다.
(요 6:56-57)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육신의 양식을 구하며 그것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한다.
주님께서 이처럼 생명의 양식을 말씀하시는데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모세의 때에 하늘에서 내려와 주린 배를 채워주었던 만나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는 진짜 생명의 양식이 아니라 모형이었을 뿐이라고 하신다.
그것을 먹었던 조상들은 결국 다 죽었다.
그러나 내가 주려고 하는 양식은 그런 육신의 양식이 아니다.
내가 주기 원하는 양식은 썩을 양식이 아니라 썩지 않는 영생하도록 있는 생명의 양식이다.
이와 같이 베드로도 앉은뱅이에게 은이나 금과 같은 썩을 양식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생명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었다.
그래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사람들은 이 앉은뱅이와 같이 은과 금을 구한다.
그것이 자기의 굶주림과 부족함을 채워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에서 크게 벗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나도 할 수 있으면 많은 돈을 벌기를 원하는 자였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사업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어서 주를 위하여 사용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물질보다 더 귀한 양식을 주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사업을 하는 나의 길을 돌려서 목회의 길로 이끄셨고 나는 그에 순종하여 늦깎이로 신학을 하게 되었다.
신학을 마치고 목회를 하면서도 나는 그런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목회 역시 눈에 보이는 것에 치심하여 더 많이 더 크게 더 높이 올라가려는데 온 마음을 쏟았다.
더 큰 목회를 위해서 더 많은 교인들을 끌어 모아야 했고, 남들에 비해서 더 큰 예배당을 지어서 목회에 성공했다는 말을 듣기를 원했던 것이다.
거기에 매몰되어 있던 나는 내 영에 자유함이 없었다.
주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주의 영광 가운데서 내가 어떠한 상황과 형편에 있든지 상관없이 주님으로 만족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나의 삶이 아니었다.
주님의 인정은 사실 관심이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것에 초미의 관심을 가졌다.
사람들이 인정해 줄 때 내가 더 잘했고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목회를 하면서도 이처럼 철저히 세속에 빠진 자였던 것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베드로와 요한이 여느 날 만나던 앉은뱅이가 전혀 새롭게 보였으며 그가 요구하는 은과 금이 아니라 생명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 강력하게 일어났는데, 나는 성령의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잘 몰랐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는 그저 눈에 보이는 은사 정도로만 치부하였던 것이다.
주님의 뜻은 앉은뱅이에게 은이나 금을 주는 것도, 그가 일어나서 걷고 뛰어다니는 것도 아니다.
물론 돈 몇 푼 쥐어주는 것보다 일어나 걷게 하는 것이 효율 먼에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그로 하여금 물고기 한두 마리보다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생명을 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평생 앉아 있던 자가 일어나서 걷고 뛰는 것을 보며 거기에만 관심이 있었지만, 주님의 관심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가 만물 안에 있는 아담의 생명으로 사는가 아니면 만물 위에 있는 아들의 생명으로 사는가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나에게도 주님의 이름으로 전해진 복음이 들어왔다.
나는 그동안 은과 금을 더 많이 모으려고 했던 것, 목회를 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육신에 속한 것들 곧 만물 안의 것들에 매몰되어 있던 것을 다 내려놓았다.
아니 내려놓을 수밖에 없도록 주님께서는 만드셨다.
그리고 오직 복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나아가는 일에 매진하였다.
그리고 나의 진정한 바램은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걷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앉은뱅이가 되는 것이다.
오늘도 일어나 걷지도 못하고 뛰는 것은 생각도 못할지언정 거룩한 앉은뱅이가 되어 오직 주의 발치에 앉아서 주님과 노닥거리는 마리아처럼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썩지 않고 영생하도록 있는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육신의 앉은뱅이에서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아름다운 일인지요.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온전한 뜻이 아님을 압니다.
눈에 보이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게 하소서.
내게 주신 주님의 크고 놀라우신 은혜가 나를 온전히 뒤덮게 하시고 오직 주님의 은혜 안에서 거룩한 앉은뱅이가 되어 주님과 노니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지금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마음을 허락하시고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자로 살게 하소서.
입술의 찬양을 넘어 내 영으로 진짜 기뻐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참 자유가 있사오니 내 안에 날마다 주의 복음이 흘러넘치게 하시고 그 복음이 있는 곳에 주의 영이 역사하셔서 생명의 기쁨으로 가득 채워지게 하옵소서.
오늘도 거룩한 앉은뱅이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이 작은 종이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주님과 노닥거리오니 나를 받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