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반도체 / 김순진
문인들의 번개모임에 나갔는데
한 원로 작가께서 저서 두 권과 소금 한 봉지를 주신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건네니
소금을 선물로 주는 분이 다 있느냐며 신기해한다
술이 깬 새벽 물 먹으러 거실에 나왔다가
식탁 위에 올려진 소금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소금은 파도의 기억을 온몸에 새기고
태양의 뜨거움에 밑줄을 긋고 있었다
분수로 밀어 올린 혹등고래의 산통産痛과
태풍을 잠재운 심연의 슬기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소금은 하루에도 수만 번을 철썩이며
뭍을 동경하던 파도의 소원이었을까
멸치며 정어리 고등어의 지느러미에 채인
미세한 파도의 떨림이 알알이 기록되어 있다
주꾸미와 오징어 낙지의 많은 발로 주무르고 매만진
물의 포말이 고스란히 정제돼 고형으로 갇혀 있다
넉가래에 밀리고 밀리며 염전을 구르던 바닷물의 기억을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저장한 정육면체의 반도체 칩
어느 방향이든 최선이 되는 저 백색 주사위는
궁핍한 인간을 먹이며 간드러지게 했다
봉지를 찢어 한 알갱이를 입에 넣으니
장화 신은 어부의 발자국이 저벅저벅 내 몸을 훑고 지나간다
- 『월간문학』 2024-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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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진 시인
1961년 경기도 포천 출생, 방송통신대 국문과 졸업 및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학 전공
1984년 시집 『광대 이야기』로 등단,
시집 『더듬이주식회사』 『복어화석』 『박살이 나도좋을 청춘이여』
장편소설 『너 별똥별 먹어봤니』
단편소설 『윌리엄 해밀턴 쇼』
수필집 『리어카 한 대』 『껌을 나눠주던 여인』
칼럼집 『천만에 만만에 콩떡』
장편동화 『태양을 삼킨 고래』
평론집 『자아 5, 희망 5의 적절한 등식』
시창작이론서 『좋은 시를 쓰려면』 『효과적인 시창작법』
문인탐방기 『시문학파를 만나다』
가곡작시악보집 『깻잎반찬』
편저 『애인』 외 다수
대한민국예술문화대상, 2013년 수필춘추문학대상, 2023년 박건호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