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우리가 탕자의 비유라고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팀 켈러 목사님은 ‘탕부 하나님’을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을 남김없이 다 퍼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소위 ‘탕자의 비유’라고 불리는 이 비유는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라고 불리는 것이 맞습니다. 이 이야기는 전체 2막으로 되어 있습니다. 1막의 제목은 ‘잃어버린 둘째 아들’이고, 2막의 제목은 ‘잃어버린 맏아들’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면서 이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뭔가 하면, 유산의 분배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만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아들이 유산을 지금 당장 달라고 한 것은 완전히 무엄하고 패륜적인 행위였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도 유산을 달라고 하는 말은 곧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원합니다.’라는 말과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아버지의 반응은 아들의 요청보다도 더 충격적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아주 심한 가부장 사회였기에, 아버지가 당연히 보여야 하는 반응은, 이런 못된 자식을 호되게 꾸짖고 나서 집에서 내쫓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그러기는커녕 그냥 그 살림을 나눠 주었습니다. 아들을 사랑해서 그가 원하는 그대로 해줍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로부터 사랑을 거부당한 고통뿐 아니라, 그로 인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는 것도 참고 견딥니다.
자기 몫의 재산을 챙겨 나온 이 아들은 얼마 못 되어 전 재산을 날려버립니다. 순식간에 아주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여, 부정한 짐승 돼지를 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이미 유산을 받았으니, 아들로 갈 수는 없고, 품꾼이 되어 아버지의 빚을 갚아가자고 생각합니다. 저 멀리 아들이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아버지가 그를 보고 달려갑니다. 보고, 측은히 여기고,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당시 한 집안의 어른은 자신의 다리를 드러내면서 달리지 않았지만, 이 아버지는 아들에게 달려가서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내보입니다.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들은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려 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무시하고,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줍니다. 둘째 아들의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는 그 어떤 죄나 허물도 다 용서하고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모할 정도로 사랑을 헤프게 낭비하시는 탕부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납니다.
아버지가 사랑으로 둘째 아들을 끌어안은 시점은 그 아들이 자신의 변화된 마음을 증명하기 전이었습니다. 말도 다 안 했는데 아버지가 끌어안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어떤 공로나 뼈저린 참회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깊은 회개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는 죄인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선물입니다.
일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온 맏아들은 동생이 돌아왔고, 아버지가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주었다는 말을 듣고 화를 냅니다. 아버지가 베푼 잔치 자리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불만을 표현합니다. 이에 아버지는 잔치 자리에서 밖으로 나가는 결례를 범하면서까지 맏아들을 설득합니다. 맏아들은 자신의 유산을 다 챙긴 동생을 막 받아주냐고 아버지에게 따집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에게 무례하게 대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맏아들을 사랑으로 설득합니다. 이에 대한 맏아들의 반응이 어떠한지가 생략되면서 예수님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예수님은 왜 이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누가복음 15:1-2를 보면,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들었고, 그것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투덜거리면서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그것을 아신 예수님이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를 시작하신 겁니다. 이 이야기의 진정한 청중은 맏아들과 같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잃어버린 상태와 구원의 올바른 의미를 알려주시면서 청중,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거기에 대해 올바른 반응을 하며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죄와 잃어버린 상태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제대로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아간다면 잃어버린 상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을 정말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밟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기에 올바른 반응을 하며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조건 없는, 한없이 탕진하시는 그 사랑 앞에 손들고 나와 그 사랑을 충만하게 체험하시기를 소원합니다.
[함께 나눌 질문]
1. 나는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2.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행한 일은 무엇입니까?
3. 아버지와 다르게 돌아온 동생을 맏아들은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4. 우리의 모습 속에서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은 없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