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제품의 최종 소비자를 결정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듯 디자인해야
사업 초기단계인 중소기업의 경우는 디자인 업체에 아웃소싱하는 것도 방법
어느 중소 전자업체 사장의 고민
Q: 가정용 전자기기를 해외에 내놓으려는데 소비자 뇌리에 박히는 디자인 개발 힘들어요
안녕하세요? 저는 중소 전자 부품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가정용 IT 시스템에 들어가는 핵심 기술을 개발했으며, 현재 국내 전자업체를 비롯해 해외 IT기업에도 제품을 납품할 정도로 세계적으로 기술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2020년까지 매출 1000억원을 넘는 글로벌 업체가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저희 회사는 완제품 회사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습니다. 중소 완제품 업체에 생산을 위탁하는 방식으로 가정용 IT 시스템을 제작, 해외 시장에 내놓으려는 것입니다. 이에 따른 준비 작업으로 작년부터 기술 및 디자인 개발을 진행 중입니다. 그런데 막상 완제품 시장 진출을 추진해 보니 해외 파트너들을 통해 유통망을 확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데, 새로운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특히 브랜드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디자인 개발이 가장 어렵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디지털 기술을 잘 구현하면서도 아이폰과 견주어도 손색 없을 정도의 세련된 디자인을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까요? 전세계 소비자들의 뇌리에 박힐 수 있는 디자인 콘셉트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궁금합니다.
- ▲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ps@chosun.com
A: 모델 다양할수록 브랜드 정체성 떨어져… 디자인 일관성이 중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듯이 제품을 디자인하라
귀하가 말씀하신 대로, 기업이 신제품을 출시하면서 가장 많이 고민하는 부분 중 하나가 '정체성 있는 브랜드' 만들기입니다. 국내외 수많은 IT 제조기업들이 수십 년간 투쟁하듯이 노력하면서도 이루기 힘들었던 꿈이 바로 그것입니다.
소비자에게 사랑받는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귀사의 제품을 사용할 최종 소비자들을 규정하고, 그들의 생활 방식과 취향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자인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불편을 덜어줌으로써 소비자들이 기억하고 사랑해 줄 수 있는, 브랜드의 '러브 마크'를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소비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듯이 제품을 디자인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4년 전의 일입니다. 어느 화장품 업체에서 콤팩트 케이스 디자인을 의뢰했는데, 아무래도 제게는 생소한 제품이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출장을 마치고 공항에 도착한 저는 마중나온 아내에게 고민을 이야기했습니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아내는 말했습니다. "나는 다른 건 모르겠고 한 손으로도 쉽게 꺼내서 거울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 여자들은 손거울을 따로 가지고 다니지 않고 콤팩트 하나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어 운전을 하다가 잠깐 얼굴을 보고 싶을 때 콤팩트 뚜껑을 열기가 불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마음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뚜껑을 열지 않고도 거울을 볼 수 있는 콤팩트! 바로 이거야!' 이것이 바로 슬라이드 폰처럼 밀어서 쓸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콤팩트인, 아모레 퍼시픽의 '라네즈 슬라이딩 팩트'의 출발이었습니다. 이 제품은 출시 후 1년간 약 200만개가 팔리는 빅 히트 상품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아내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고민했던 것이 아내는 물론이고 많은 여성들을 기쁘게 만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디자인이 비슷한 상품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기능이 같고 어떤 회사나 만들 수 있는 '평범한 상품(commodity)'이 아니라 귀사의 브랜드만이 만들어 낼 수 있고 디자인의 스토리가 담겨 있는 '특별한 상품(specialty)'을 찾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보다 많이 그리고 싸게 만드는 데 치중했다면, 이제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합니다. 보통 디자인 하면 색깔이나 스타일만 생각하는데, 진정한 디자인은 창조적인 작업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입니다.
저는 브랜드와 디자인의 정체성을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제가 1980년대 초에 제시했던 'CIPD(Corporate Identity through Product Design)'라는 이론을 추천합니다. 제품의 디자인을 통해서 기업의 정체성(CI)을 만들어 나간다는 이론입니다.
자신만의 브랜드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제품 디자인에 일관성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애플의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를 보면 다른 기업들보다 확실한 제품의 정체성(product identity)을 확보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공 뒤에는 일관된 리더십과 기업문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기존 대기업들의 디자인 관(觀)은 '제품의 종류는 많을수록', '모델은 다양할수록', '디자이너의 수는 많을수록'이라는 생각에 여전히 머물고 있습니다. 반면 애플은 디자인의 '질(質)'을 우선시하는 경영을 통해 애플만의 '디자인 DNA'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다른 대기업들은 수백 명의 디자이너들을 채용해서 온갖 스타일을 연구하고 있는데, 애플은 그 10%도 안 되는 디자이너들로 누구보다 강한 브랜드를 확립했습니다. 귀사와 같은 중소기업에 고무적인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경험·소통 능력 갖춘 디자인 업체와 협업하라
사업 초기 단계인 중소기업이라면 이미 능력을 검증받은 디자인 전문 업체에 아웃소싱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세계적인 수준의 디자인을 창출하려면 최고 수준의 전문가가 필요한데,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으로선 확보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디자인 전문업체와 협업하기로 했다면 다음의 세 가지에 주의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디자인 콘셉트의 일관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애플의 경우 소비자들이 디자인만 보고도 한눈에 애플 제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고유의 캐릭터를 갖고 있습니다. 반면 다른 전자업체들이 쏟아내는 대부분의 제품들은 유행에 따라 디자인 콘셉트가 바뀌면서 정체성을 만들지 못하고 있지요.
따라서 만일 외부업체에 디자인을 위탁할 경우 그 회사는 무엇보다 귀사와 장기적인 협업을 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제품 하나로 승부를 보려고 하기보다, 일련의 제품을 지속적으로 공동 개발하면서 브랜드 정체성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둘째, 디자인 전문업체의 경험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특히 귀사가 개발을 의뢰하려는 제품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상품들을 디자인해 본 경험이 있는지, 그리고 한국 시장에 머물지 않고 세계 시장 소비자들을 위해 디자인했던 경험이 있는지를 잘 봐야 합니다. 귀사 제품의 최종 시장은 세계 전 지역이기 때문에 디자인 업체는 지역별로 다른 소비자들의 취향을 잘 파악해 아우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 소통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디자인 업체가 귀사의 비전을 잘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마케팅 전략, 기술, 개발, 생산 프로세스 등에 대해서도 긴밀하게 협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귀사의 직원들과 디자인 회사의 디자이너들이 제품 개발 과정에서 일심동체가 되는 것이야말로 성공의 핵심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디자인 입체 경영'을 펴라
디자인은 모든 비즈니스에서 거대한 기계를 움직이는 '창조의 엔진'입니다. 디자인이 좋은 제품은 소비자들에게 많이 팔리므로 자연히 재고가 쌓이지 않고 제품 가격도 내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디자인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광고를 많이 해도 시장에서 외면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 경영 전반에는 디자인 마인드가 배어 있어야 합니다. 즉 기업 경쟁력의 핵심을 디자인에 두고 기획·개발·생산·마케팅·영업·홍보 등 거의 모든 활동에서 디자인을 먼저 생각하고 움직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하는 '디자인 입체 경영'입니다.
귀하처럼 새로운 제품을 론칭하려는 경우에도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디자인 전략입니다. 그래야 기술·개발·제조·마케팅·유통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결정도 일관되게 내릴 수 있습니다.
CEO는 그렇게 세워진 디자인 전략이 제품 개발 과정에서 지켜지고 있는지 늘 점검해야 합니다. 기술과 관련된 결정은 물론, 부품 구매나 생산 과정에 관련된 결정, 마케팅과 관련된 결정, 심지어 자금에 관한 결정을 할 때도 디자인 전략을 중심에 둠으로써 최상의 전략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무리 세상이 급변해도 변하지 않는 하나의 원칙은, 디자인도 비즈니스도 모두 사람, 그리고 사랑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조언
외부의 좋은 아이디어 소개한 회사 직원에 인센티브 제공을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서는 절대로 창의성이 발현되지 않습니다. 늘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자기가 보지 못했던 점을 보고, 서로 협력하고 부딪히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게 됩니다.
디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조적인 디자인에 결정적인 걸림돌은 다른 회사나 다른 부서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조차 '나와 상관없다'는 'NIH(Not Invented Here)' 증후군입니다.
디자인 프레젠테이션을 해보면 회사 분위기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창의적 분위기의 회사는 디자인 시안을 보여주면 좋은 점은 받아들이고 고쳤으면 하는 점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합니다. 하지만 경직된 분위기의 회사에서는 서로 눈치만 보다가 어떤 한 사람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순식간에 너도나도 문제점만 지적하기 바쁩니다.
그래서 저는 귀하에게 'FBM(Found By Me)'라는 보상제도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외부에서 좋은 아이디어를 찾아서 회사에 소개해 준 직원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입니다. 직원들이 회사 내부에서만 아이디어를 구하지 않고, 외부에서도 적극적으로 찾아나서도록 하자는 취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