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힘겹고 위험스럽더라도 아름답게 느껴지던 아이스폴(Ice Fall)이었다. 웨스턴쿰에서 시작된 빙하가 가파른 사면으로 밀려 떨어지면서 형성된 아이스폴은 네팔쪽 에베레스트 정상의 관문이다. 해발 5,400m의 베이스캠프에서 C1(6,000m) 부근의 빙하까지 이어지는 아이스폴은 눈과 얼음이 자아낼 수 있는 절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반면 거대한 빙탑(氷塔)이 수없이 솟구치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어두운 크레바스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어 셰르파들조차 매우 조심하는 구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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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0일 베이스캠프에 도착해 라마제를 지내고 첫 등반에 나선 4월14일은 고소에 시달리면서도 그 아름다움에 감탄해 너무도 기뻤다.
그로부터 한 달이 조금 더 지난 5월18일. 지금 이 순간은 너무도 냉랭한 얼음덩이에 지나지 않는다. 음습한 기운만 느껴지는 빙하에 놓인 두 개의 플라스틱 판에 두 후배 오희준과 이현조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누워 있다. 나흘 전만 해도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웃고 떠들던 후배들이었는데…. 김창호는 시신에 얼굴을 파묻고 두 후배의 이름을 부르며 너무도 슬프게 운다.
짐 나를 야크와 포터 없을 만큼 많은 원정대 몰려
트레킹은 어느 누구 못지않게 여러 차례, 특히 ‘고난도 트레킹’에 관해서는 수준급이라 자부하지만 이렇게 기간이 긴 원정은 처음이었다. 지난해 초 5대륙 최고봉 등반을 계획했으나 에베레스트는 언제 이루어질지 장담할 수 없는 대장정이었다. 무엇보다 봉급쟁이에게 두 달이란 기간은 그야말로 사무실에서 책상을 빼내기 전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뜻밖에 기회는 빨리 왔다. 조선일보-한국산악회 공동주최 실버원정대 취재에 동참하는 거였다. 단, 실버팀을 취재하되 대원들과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온 남서벽팀과 함께 등반하고, ABC(C2·6,500m) 이후로는 기자가 택한 남동릉 노멀루트를 따르는 한국도로공사팀과 동행하기로 했다. 하도 이 팀 저 팀과 오르내리다 보니 ‘앵벌이 등반’이라 불릴 만큼 복잡한 원정이었다.
에베레스트를 오른다는 것은 누구나 그렇듯이 오랜 세월 간직해온 꿈이다. 하지만 베이스캠프 가는 길이 평범한 트레킹처럼 낭만적일 수만은 없었다. 트레킹할 때는 일정에 쫓겨 바삐 걷더라도 순간순간 풍광에 취하고 쏟아지는 별빛에 취하다보면 어느 샌가 하루가 지나곤 했다.
하지만 캐러밴은 원정이다. 무엇보다 6톤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장비와 식량을 옮기는 일이 함께 진행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번 시즌은 30개를 넘는 여러 팀이 비슷한 시점에 한꺼번에 몰리다보니 원정대가 루클라에 도착했을 때는 짐 운반용 야크도 포터도 바닥난 상태였다. 해서 카트만두에서 기껏 비행기로 옮긴 취사구와 식량은 뒤쫓아온 야크에 실려와 남체를 출발할 때서야 사용이 가능했다.
“와~ 카트만두 공항이나 별 차이 없네요.”-이현조
“루클라 공항이 이렇게 좋아요?”-김영미
4월2일 루클라를 향한 첫번째 시도는 무참히 깨졌다.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짐을 통관시킨 뒤 오전 10시부터 공항 대합실에 앉아 졸다 깨다 지루함을 달래려고 노트북 키보드를 두들긴다. 점심도 건너뛰고 오후 2시가 넘어 겨우 열댓 명 타는 경비행기에 올라탔건만 비행 40분쯤 지나 비행기는 안개 낀 루클라 상공을 한 바퀴 선회하더니 방향을 180도 돌려 카트만두로 돌아왔다. 절벽을 끼고 있는 데다 활주로가 짧은 루클라 공항에 안착하는 게 어렵다는 조종사의 판단 때문이다.
귀국 전 장비와 식량 등 엄청난 양의 짐을 싸느라 피로에 지친 대원들 가운데 비행 내내 잠에 빠져 있다 깨어난 이현조, 김영미는 엉뚱한 소리를 해 대원들을 웃게 만든다.
이튿날인 3일 포카라에 도착 이후 터무니없게 부족한 포터와 야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던 대원들이 겨우 여유를 되찾은 것은 쿰부히말에서 가장 큰 라마사원이 있는 탕보체를 도착한 6일 이후였고, 이튿날 페리체(4,200m)에 도착해 에베레스트 등정 30주년을 기념해 베이스캠프 트레킹 중인 ’77 에베레스트 원정대원들의 환대를 받으면서 얼굴빛이 환하게 펴졌다.
9일 로부체(4,930m) 도착 이후 고소증 때문에 고통을 겪는 대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응원단으로 참가한 김태훈(뉴질랜드 거주)은 로부제에서 베이스캠프로 올라오는 날 뒤로 처지더니 끝내 로부제로 되돌아가 여러 날 뒤 올라오고, 대원인 이재용은 베이스캠프 도착 이튿날 고락셉으로 내려서야 했다. 이 대원은 어느 정도 고소에 적응되었다 싶어 14일 베이스캠프에 올라왔으나 15일 아이스폴 등반 중 심한 치통으로 도중에 내려선 다음 이튿날 치료차 남체로 내려섰다가 상태가 오히려 악화되자 카트만두로 내려섰다 결국 귀국해야했다.
기자의 경우 고소적응은 잘 된 듯했으나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큰 등반을 처음 하는 데에서 오는 불안감 때문인 듯했다. 캐러밴 때 이삼 일, 베이스캠프 도착 이후 며칠간 수면 유도제 신세를 지며 잠을 이뤄야 했다. 베이스캠프에서 이틀 사흘을 머물다 보면 여유로울 줄 알았는데 정반대 현상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특히 캐러밴 내내 기사를 쓰느라 마음 놓고 쉴 시간을 갖지 못했고, 또 베이스캠프에 도착해서도 남들 쉴 시간에 기사를 써야 한다는 게 등반하는 데 걸림돌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더라도 이렇게 에베레스트에 와서 두 달간 지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을 편히 먹으려 애를 쓰곤 했다.
베이스캠프를 구축한 다음 대원들을 감탄케 한 것은 아이스폴을 비롯한 에베레스트·눕체 일원의 풍광도 풍광이지만 그보다는 독일인 부녀였다. 남체에서 한 차례 만난 적이 있던 로버트 케블(41)과 딸 페리나(11)의 담담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은 큰 감동이었다. 실버팀이 이른 아침 라마제를 지낸 11일 오후 캠프 옆에 텐트를 치는 부녀를 본 이현조가 저녁식사에 초대했을 때 케블씨는 트레킹에 나서게 된 경위를 설명하여 대원들을 놀라게 했다.
96년 에베레스트 등정 후 악천후를 만나면서 9명의 산악인들이 죽음 속으로 빠져든 얘기를 당시 등반에 참가했던 기자인 존 크라카우어가 쓴 ‘희박한 공기속으로(Into the Thin Air)’가 발단이었다. 아버지가 읽은 그 책을 딸이 보곤 아버지에게 베이스캠프에 가보고 싶다고 부탁했고, 건축디자이너인 아빠도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베이스캠프에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박영석은 두 부녀에게 “10년 후에도 마음이 변치 않는다면 에베레스트 정상에 꼭 데리고 올라가겠다” 약속하며 “대신 그 때는 한국말을 꼭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전제해 부녀를 잠시 ‘고민’하게 만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