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8 - 개화기 격변하던 메이지유신의 와중에도 선구적인 일본 여성들!
중국은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인 항하문명을 일으켰으며 한자를 발명하고 태극과 8괘에 12간지에
종이와 화약, 나침판이며 비단과 차를 만든 문명국가이며 그 영향을 받은 조선도 찬란한 문화
를 일으킨데 비해 아시아의 변방으로 후진국이던 일본은 서세동점하던 19세기에 메이지유신
을 일으켜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세계 열강에 올라서는 과정에서 일본 여성들도 깨어납니다.
1863년에 조슈번(야마구치)이 “양이의 날” 을 선포하고 5월 10일 미국 상선 펨브룩호를 포격한
것을 시작으로 프랑스 전함에도 포격하니 그후 미국과 프랑스 군함이 보복 포격 을 하고
미 ,영, 프, 네델란드 4개국 함대의 시모노세키 침공 두달전인 1864년 6월 5일 교토에서
조슈번의 요시다 도시마로 등이 막부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암살 을 준비하다가 탄로가 납니다.
아이즈번 이 중심인 막부의 비밀 경찰 신센구미 新選組(신선조) 는 여관 이케다야 의 존왕파 를 습격해
20명 참살 하니 조슈번(야마구치) 가쓰라 고고로(기도 다카요시) 는 간신히 화를 면하고 도망칩니다.
그러자 7월 18일 조슈번(야마구치) 의 기지마 마타베의 유격대 를 선봉으로 중신 후쿠하라 등
후속 부대는 교토로 올라가서 황궁의 서문(금문) 인 하마구리몬 앞에 집결하게 됩니다.
이에 사이고 다카모리 가 지휘하는 사쓰마군 이 아이즈군과 연합 하니 수적 열세로 조슈군
은 전멸하는데 구이치는 전사 하고 겐즈이와 데라지마 주사부로는 자결 하니......
요시다 쇼인 이 세운 쇼카 손주쿠 학숙 4대 제자 중에서 3명이 전사 한 “금문의 변” 입니다!
이때 막부군은 조슈군이 결사적으로 저항하는 공경 저택에 불 을 지르니 교토의 3분지 2 에
해당하는 "800개 마을 2만 7천호 가옥이 전소" 되는 미증유의 대참사 가 벌어집니다.
교토가 불바다 가 된후 1864년 7월 궁궐 대문을 향해 포를 쏜 "조슈번을 토벌" 하라는
일왕의 칙서로 10월 오와리 번주 도쿠가와 요시카쓰 등 30개 번에서 15만명 이 동원됩니다.
서양 4개국 함대 에게 시모노세키가 불바다 가 된 조슈번(야마구치) 은 막부의 15만 대군 에
저항할 힘이 없으니 무비공순 ( 내부적으로는 무력을 키우면서 막부에 복종! ) 항복 합니다.
존왕양이파 중신 마사노스케 와 금문의 변 당시 3중신등 4명이 할복 하고, 참모 4명이 참수
되는 등 "정의파가 실권하고 속론당이 집권" 하니 존왕 양이파 지사 는 테러 를 당합니다.
아에 다카스키 신사쿠 는 10월에 조슈번을 탈출해 은거하다가 11월 시모노세키 산간에
주둔중인 기병대(奇兵隊) 를 찾아가나 군감 아리토모는 궐기 요구에 불응 합니다.
이에 신사쿠 는 도피 중인 처지임에도 기병대 병사를 일대일로 만나 속론당
세상이 되면 기병대는 해체 될 것이고 너희 평민들은 설자리가 없어진다고 설득 합니다!
본대 설득에는 실패했으나 유격대 와 이토 히로부미의 역사대 (씨름꾼 30명) 설득에는
성공하는데 기병대 총독 아키네 다카토는 번청과 교섭중이라 현장에 없었습니다.
역사대 이토 히로부미, 유격대 이시카와 고고로, 군감 다카하시 구마타로 등
병력 80명 으로 번의 정규군 4천명 을 제압하고 막부군 10만명 을 대적하게 된 것이지요?
이때 낮은 신분의 이토 히로부미 는 성공확률 이라고는 없는 불확실한 거사에 목숨 을
거는데 그는 적지 교토 잠입시에도 옷에 독약 을 품고 간 결단의 소유자였습니다.
논어 위정 편에 "시기소이하고 관기소유하며 찰기소인이면 인언수재" 라......
( 그 하는 행위와 연유 를 살펴보면 어찌 사람이 자기 본모습 을 숨길 수 있겠는가? )
이토 히로부미 는 오랫동안 옆에서 다카스키 신사쿠 를 “視觀察(시관찰)” 했으니
이 때 를 당하여.... 감히 "목숨을 거는 결단" 을 내릴수 있었던 것이지요!
1864년 12월 16일에 신사쿠 는 막부에 굴복한 번의 정규군 4천명 과 막부군 10만명 을
대적하는 반란 을 일으키니..... 고잔지 功山寺(공산사) 절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역사대 와 이시카와 고고로의 유격대, 군감 다카하시 구마타로 병력 80명 으로 출진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이나 전투 를 하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돈" 이니..... 신사쿠 는
전광석화 처럼 시모노세키시 에 있는 조슈번 봉행소 를 습격해 식량과 군자금 을 확보
한 후에는 밤에 호후(防府 방부) 로 이동해서는 조슈번의 군함 3척 탈취 하는 성공을 거둡니다.
이러한 성공에 주저하던 군감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 합류해 300명 으로 늘어난 존왕양이파
반란군 은 1865년 1월 14일 오다 ~ 에도 에서 번의 정규군 3천과 전투 를 벌이게 되는데
조슈군 4천명 중 300명이 반란군 에 합류했다 치더래도 정규군은 3천여명 이상이 있었습니다!
반란에 늦게 합류한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 선봉으로 나서서 포대장 미우라 고로 (후일 명성황후를
시해하게 되는 조선 공사) 의 포격 지원으로 조슈번 선봉대를 격파 하는 기적 을 이룹니다.
무명의 나폴레옹 이 파리 시내를 점령한 왕당파 시위대 에 기상천외하게도 대포를 발사 해서
진압해서 통령 정부의 일원으로 출세했듯, 이 전투의 수훈갑은 포술의 1인자 미우라 고로 였습니다.
탈취한 군함 으로 하기 앞바다에서 무력시위 를 벌이다가 2월 초에 2차 전투에서 기병대는
조슈군 속론당이 지휘하는 정규군 선봉대를 또다시 격파하고 번청을 접수 합니다.
그러자 막부에 굴복 했던 속론당 중신 21명은 할복을 하거나 참수 를 당하고......
요시다 쇼인의 쇼카 손주쿠 학숙에서 동문수학 했던 기병대 3대총독 다카토도 참수 당합니다.
300명에 불과한 반란군 이 3천여명이 넘는 조슈균을 격파한 데에는 아무래도 정신력의 승리
라고 할 것인데, 기적 처럼 전투에서 승리해 메이지 유신 을 이루니 一鞭回天 明治維新
( 일편회천 명치유신, 한번 말을 박차고 나가 형세를 일변시켜 메이지유신을 이루다 ) 이라!
거사 성공후 다카스키 신사쿠 는 이토 히로부미 를 통역으로 대동하고 영국 유학길
에 오르는데..... 나가사키에서 무기 중개상 글로버 를 만나 주선을 부탁
합니다. 스코틀랜드인 글로버 는 무기 중개로 떼돈을 벌어 나가사키에
글로버 가든 을 지은 자로 푸치니의 오페라 인 "나비 부인" 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글로버 는 유학 대신에 시모노세키를 개항 하면 막부로 부터 무역 주도권을 빼앗을수 있다고 설득
하니 다카스키 신사쿠 는 조슈 중신들을 설득하다가 양이파 사무라이 들의 분노 를 삽니다.
목숨이 위태로워진 신사쿠 는 애인인 게이샤 오우노 를 데리고 오사카로 피신
하는데.... 후일 다카스키 신사쿠가 폐결핵으로 죽자 오우노는 야마구치
산간에 도고안 암자 를 짓고는 여승 으로 40년간 신사쿠의 묘 를 지키게 됩니다.
이때 신사쿠 를 따라간 죄로 이토 히로부미 도 도망자 신세가 되어 우메코 라는 게이샤 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는데.... 당시 히로부미는 쇼카손주쿠 동문인 이리에 구이치의 여동생과 결혼한 상태 였습니다.
도피생활 중에 정이 깊어져 이토 히로부미 는 1866년 본처와 이혼하고 우메코와 재혼을 하는데
그녀에게 조선 옷 을 입혀 사진 을 찍기도 했으며..... 훗날 조선 여인 첩 도 두었다고 합니다.
조슈번 지사인 가쓰라 고고로 ( 후일 메이지 유신 3걸로 조슈 번주에게서 성을 하사받아
기도 다카요시 로 이름을 바꾼다 ) 도 교토에서 신센구미에게 쫃기다가....
숨겨준 게이샤 이쿠마쓰와 결혼 하게 되는데 요정에서 밀담이 잦다보니 벌어지는 현상
으로 우리나라도 5.16후 군부출신 정치인들이 이를 배워 서울에서 요정정치 를 하게됩니다.
조슈번에서 메이지 유신 주역인 다카스키 신사쿠와 이토 히로부미에 기도 다카요시
등 세명 모두가 게이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결혼까지 한 것입니다?
게이샤 말이 나왔으니.... 1890년에 료운카쿠 라고 불리는 높이 52m 12층
짜리 일본 최초의 서양식 전망 타워 가 세워져 3일만에 2만명 의 손님이 몰렸습니다.
개업한지 1년후 엘리베이터가 고장 이 나서 관람객이 줄자 도쿄 게이샤 100명 을 모아 사진 콘테스트
를 하였는데.... 일종의 미스 일본 선발대회로 1위는 타마가와야의 타마기쿠 (玉菊, 17세) 였다나요?
각 층계마다 게이샤 사진 을 나누어 붙였으니, 손님들은 사진들을 보며 품평 하다
보니.... 고된줄도 모르고 계단을 올라 자연스럽게 최고층으로 오르는 것 이라!
타마기쿠 는 우키요에 에서 튀어나온 듯한 전형적 일본식 미인 이라서 인기가 있었다
는데.... 입상을 놓친 게이샤 중에는 오츠마 (お妻 18세) 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머리를 감은후 묶을 시간이 없어 촬영장으로 달려갔다는데 머리를 묶지 않고
나서는 것은 상스럽다 고 여겨졌던 시대 임에도.... "요염하다는 평" 을 받았습니다.
당시 일본의 초대 내각 총리대신이던 이토 히로부미 도 오츠마의 소문 을 듣고
게이샤인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요정 요시다야(吉田屋) 를 찾았다고 합니다.
1891년 오츠마 로 부터 시작해서 일본 여성들이 머리를 자주 감고 샴푸 를 쓰며....
비로소 풀어헤친 머리 가 유행하기 시작했다나요? 그전에 여성들은
머리를 감는 대신에 빗으로 빗고는 냄새가 나면 향유를 발라 단정히 묶었던 것이라!
이 무렵 집안에만 갇혀지내던 여성들 중에 사회활동에 도전 하는 여성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마술의 여왕” 이라고도 불린 쇼쿄쿠사이 텐카츠 가 있었습니다.
마술의 여왕 쇼쿄쿠사이 텐카츠 는 귀여운 외모 로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과 유럽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으며..... 또 일본 최초의 여성 비행사 에 효도 타다시 가 도전합니다.
그외 결혼을 택할 것인가, 일을 택할 것인가 하는 고민에 빠진 신여성들 이 있었으니
일본 여자 교육 의 선구자인 츠다 우메코 와 사교계 의 오오야마 스테마츠 입니다.
메이지 유신 성공 4년째인 1871년 11월에 일본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배 에 사족(士族) 의 딸인
우메코(7세) 와 스테마츠(11세) 가 타고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정치인과 성년 남자는
물론이고 어린 소녀들까지도 미국에 보내 서구문명 을 배워오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어린 소녀들은 워싱턴에 도착해 미국인 가정 에 거두어져 학교에 다니게 되는데.... 여성 이
수학과 과학 등 남성과 같은 레벨의 수업 을 듣고 전문지식 을 살리는데 매우 놀랍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일본 사무라이 계급의 자녀 인 우메코와 스테마츠 는 자연스레
"일본에 돌아가 일본 여성들을 위한 학교 를 만들자" 는 같은 꿈 을 꾸게됩니다.
10년이 지난 1882년에 귀국 해 18세의 우메코 에게 혼담 이 들어오니 그녀는 사회의
가치관과 결혼에 휘둘리지 않고 여성을 위한 학교를 만든다는 꿈 에 매진합니다.
당시 22세 의 스테마츠 에게도 혼담이 오가고 있었으니 상대는 메이지유신 을
성사시킨 사쓰마번(가고시마) 출신의 육군대장 오오야마 이와오 라!!!
그는 스테마츠 보다 18세 연상 이었고 병사한 전처와의 사이에는 3명의 딸 이 있었으니
고민 끝에 데이트 를 하는데 오오야마 이와오도 유럽 유학파 라 서로 말이
통합니다. 1883년 스테마츠는 오오야마 이와오와 결혼하고는 사교계에 데뷔 해
정부가 만든 사교장인 로쿠메이칸 에서 미모 와 영어, 불어, 독일어를 구사 해서는....
서양 외교관들과 담소 를 나누며 미국에서 12세 부터 익혔던 사교댄스 를 보여주었고 큰 키에
센스있게 드레스를 입어 냄으로 인해... 백작 부인 은 "로쿠메이칸의 꽃" 이라고 불립니다.
외톨이 가 된 우메코 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 가서는 브린 마워 컬리지에 입학해 생물학
을 전공하고 졸업후 1892년 일본에 귀국해 화족(귀족) 여학교의 교수 가 됩니다.
이후 미국에서 헬렌 켈러 를 방문하고 영국에서는 나이팅게일 을 만나니 나이팅게일 은
"영국에서도 40년 전 까지는 부모는 딸에게 결혼만을 기대 했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미래는 얼마든지 바꿀수 있다” 는 나이팅게일의 말을 듣고 용기를 얻어 귀국해 1900년에
女子英学塾 (여자영학숙) 을 설립하니 츠다쥬쿠 대학으로 여자 동경대학 이라 불립니다.
여교사의 양성 을 위해 스파르타식 교육 을 하는데 이는 “여성은 능력이 있고 신뢰를
얻을수 있음을 증명 하고 난 다음 에야 비로소 책임, 자유, 권리 가 주어진다”
하지만 자금난으로 폐교 위험 에 몰리자 친구였던 백작 부인 스테마츠 가 학교 고문에 취임해
사교계 인맥을 살려 지인들에게서 운영 자금을 모금해 주어서 비로소 궤도에 오릅니다!
더욱 파워풀한 여성 은 최초의 여성 기자 인 하니 모토코 니 여성의 채용을
거부하는 신문사 에 따지며 담판을 지어서는 강제로 입사(?) 합니다.
사내 연애 를 통해 교제한 남편과의 결혼이 인정되지 않자 남편과 함께 퇴직해 여성의
지위향상 을 목표로 한 잡지 “부인의 친구 (婦人之友,부인지우)” 를 창간합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은 재봉 을 아이에게 상냥하게 가르치는 여성, 꽃꽃이 로 방을 품위
있게 장식 하는 여성 등 현모양처의 몸가짐 에 대해 설명하며.... 그런 내용이
그려진 풍속화가 대세 를 이루던 시절에 저런 개회된 신여성들이 출현 했던 것이지요?
일본 신여성이 1890년대에 출현 했다면 조선은 30년 늦은 1920년대에 등장 하는데 1910년대
후반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여성 들로 애정없는 부부생활은 매음 이라고 말한 김명순 에
정조 취미론의 나혜석, 신정조론의 김일엽 등 관습 타파와 자유 연애론 을 부르짖었습니다.
하지만 윤심덕이 연인 김우진과 자살 하는등 비극으로 막을 내리고 30년대는 소멸 해버리는 것이라!
조선 여성은 일본 보다 30년이 늦은데다가 여학교 설립이나 잡지사 창간등 건설적인 일 은 전혀
못하고 자유연애만 부르짖다 그마저 이루지 못하고 자살로 끝내고 이땅에서 소멸해 버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