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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web속에 나를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나를찾아서
한 나라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 화가의 출신 국가와 그 화가의 작품 속 느낌들이 닮은 경우가 많습니다. 태어나서 몸으로 배운 정서라는 것이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때문에 그림을 보고 거꾸로 화가의 출신 국가를 상상해보는 경우도 있는데, 이번에는 이탈리아 화가라고 단정을 했지만 스페인 화가였습니다. 꼭 스페인 화가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라이문도 데 마드라소 이 가레타(Raimundo de Madrazo y Garreta, 1841-1920) 이야기입니다.
잠깐의 휴식 A Rest along the Way, 97.8x72.4cm
옷차림으로 봐서는 막일을 하는 여인 같지는 않은데, 옆에 놓인 빈 바구니를 보니 뭔가 할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꽃이라도 따러 온 것일까요? 가는 길이 힘이 들었는지 길옆에 놓인 통나무 위에 앉아 올라온 길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 눈길에 여러 가지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꽃 장식이 달린 모자에서부터 구두에 이르기까지 아주 멋쟁이인 이 여인의 상념은 무엇일까요?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하늘의 검은 구름이 혹시 여인의 마음은 아닐까요? 저라도 옆에 앉아서 여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습니다.
스페인 화가들을 만나면 이름이 참 어렵습니다. 라이문도의 아버지 이름이 페데리코 데 마드라소이니까 아마 뒤에 있는 가레타는 어머니의 성을 가져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스페인 화가라고는 하지만 라이문도가 태어난 곳은 로마였습니다. 화가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생각한다면 혹시 그의 아버지가 로마에 체류했을 때 그를 그곳에서 낳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추억을 찾았어 Fond Memories, 91.44x81.28cm
사진첩을 넘기다가 기억 속에서 잊어버리고 있었던 사람의 사진을 찾은 여인의 표정이 환합니다. 그 반가움에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고 눈은 이미 그때를 회상하는 듯합니다. 간혹 사진첩을 넘겨 볼 때가 있습니다. 사진은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어 당시를 내 앞에 가져다줍니다. 더구나 그 순간의 감정도 함께 가져다주는 마법을 펼치죠. 요즘은 예전보다 사진을 훨씬 더 많이 찍고 있지만 컴퓨터 하드에 두는 바람에 사진 보는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추억은 한 장 한 장 손끝으로 넘기는 맛이 있어야 하거든요.
할아버지 때부터 이름난 화가였던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라이문도에게 미술공부의 첫 스승은 아버지가 됩니다. 물론 할아버지도 그에게 그림을 가르쳤다고 하니까 아카데믹 화풍의 기초는 확실하게 다졌겠지요. 일찍부터 라이문도는 마드리드에 있는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학교에서 공식적인 미술공부를 시작합니다.
화장 La Toilette, c.1890~1900, 92.4x73.3cm
여신에서부터 평범한 여인에 이르기까지 여인들의 화장하는 모습은 화가들의 좋은 주제입니다. 약간의 화장으로 느낌이 달라져 보이는 과정은 언제 봐도 경이롭습니다. 간혹 ‘변장’이나 ‘위장’ 수준의 화장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배반의 느낌도 받지만요. 어렸을 때 어머니의 화장대 앞에서 화장품 냄새를 맡곤 했는데, 오히려 아내와 딸의 화장대에는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언젠가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상의 ‘날개’가 그 원인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소설 속에서 아내가 출근하고 나면 아내의 화장품 냄새를 맡는 장면이 어린 저에게는 대단한 ‘의식’을 치르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화장은 ‘의식’이지만 화장품 냄새를 맡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열아홉 살이 되던 1860년, 라이문도는 파리로 거처를 옮깁니다. 여행 겸 그림공부를 계속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후 라이문도는 거의 평생을 파리에서 살게 됩니다. 스페인을 떠날 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요. 살다보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삶이 흘러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장무도회를 준비하며 Preparing for the costume Bal, 58.4 x40.9cm
검은 마스크를 얼굴에 쓰자 여인의 얼굴이 사라졌습니다. 가장무도회가 매력 있는 것은 자신을 감출 수 있기 때문 아닐까요? 문제는 모두가 자신을 감추고 있으니 진짜 얼굴을 서로 모른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사랑은 그렇게 얼굴을 감춘다고 함께 감춰지는 것이 아니니까 무도회가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문득 얼굴이 아니라 마음을 감추는 무도회도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생각해보면 지금 사는 세상은 얼굴보다는 마음을 감추는 무도회 아닌가요?
파리에 도착한 라이문도는 레옹 코니에의 학생이 됩니다. 제 생각이지만 이미 마드리드에서 충분히 교육을 받았던 그였기에 코니에의 화실에 입학한 것은 파리의 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그의 아버지와 매형이었던 마리아노 포르투니의 영향에 대한 것만 있기 때문입니다.
러브레터 The Love Letter
러브레터를 우리말로 옮기면 ‘연애편지’가 가장 어울릴 것 같은데 ‘연애’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 쓰이는 경우를 생각하면 뭔가 부족한 2%가 있습니다. 러브레터는 그냥 러브레터로 옮기는 것이 상상의 폭을 더 크게 하는 것 같습니다. 꽃과 함께 도착한 편지를 보는 것인지 아니면 편지를 보내기 전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보통 같으면 편지를 받았다고 보고 싶은데, 편지를 봉인한 붉은색 마크 때문에 판단이 쉽지 않습니다. 보낸 사람의 인장이겠지만 자꾸 붉은 입술이 어른거리기 때문입니다. 그나저나 편지 봉투를 보는 여인의 표정이 심드렁합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또 보냈어? 이제 그만하지…’ 아니면 ‘이번에도 답장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 어떻게 보이시는지요?
파리에 오던 그 해 라이문도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작품을 출품합니다. 그의 대표적인 장르는 초상화였습니다. 즐겁고 낙천적인 표정이 작품에 담겼고 당대 가장 뛰어난 초상화가 중 한 명으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특히 그의 모델이자 연인이었던 알린 마송(Aline Masson)을 그림 속에서 우아하면서도 관능적으로 묘사했는데 그의 대표작들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는 화가의 눈빛을 상상하는 것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러브레터 The Love Letter, 81.28x66.04cm
편지와 함께 온 꽃다발을 의자에 올려놓고 바로 편지를 열었습니다. 마음이 얼마나 급했으면 편지 봉투는 바닥에 떨어져 있습니다. 편지를 읽고 난 여인의 표정이 아주 오묘합니다. 앞날에 대한 상상으로 꿈에 젖은 것 같기도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다음 단계의 전략을 생각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상상과 전략이 결합되면 사랑을 얻기 쉬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있다고 해서 사랑이 늘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돌아보면 사랑은 참 많은 과정을 요구했던 것 같습니다.
그 후 매형인 마리아노 포르투니의 조언과 파리 사람들의 사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은 라이문도는 역사화와 풍속화에도 관심을 갖게 됩니다. 여가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그의 풍속화는 작은 크기와 친숙한 내용으로 파리 사람들에게 많은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는 파리에 거주하고 있던 스페인 출신 화가들의 리더가 됩니다.
음악수업 The Music Lesson, 50.8x76.8cm
제목과는 달리 참 낭만적인 풍경입니다. 음악수업을 받으러 온 사람은 노래를 부르는 여인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등을 돌리고 피아노를 치는 남자인 것 같은데 여인을 보고 기타를 치는 남자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여인을 바라보는 눈빛이나 자세가 아주 친숙한 사이임을 보여줍니다. 이런 두 사람을 외면하고 있는 여인의 입에 걸린 미소도 재미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썩은 미소’처럼 보이거든요. 상상은 자유이지만 화려한 배경 속에 뭔가 불온한 느낌도 있습니다. 저만 그런가요?
그러나 라이문도와 포르투니는 스페인 화가들의 생활과는 다른 길을 걷습니다. 두 사람은 스페인에서 열리는 어떤 박람회에도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고국에서 열리는 전시회에는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말입니다. 왜 그런 결심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이런 두 사람이 괘씸했는지 스페인 정부는 두 사람의 작품을 직접 구입하지 않는 것으로 대응합니다.
결혼식 La Boda
결혼을 하는 누나가 어린 동생을 안았습니다. 누나는 어린 동생과 이별하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동생은 누나가 떠난다는 생각뿐입니다. 금방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꾹 참고 있는 모습입니다. 한 손으로 누나의 팔을 잡고 있는 모습에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느껴집니다. 요즘이야 아무 때나 전화를 하고 얼굴을 볼 수 있지만 이 시절만 해도 그럴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소년의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동생에게 누나는 누나라는 이름만으로도 늘 안타깝고 그리운 것이죠.
1869년, 고야의 태피스트리 작업에 라이문도가 참여하게 되는데, 개와 사냥도구가 포함되는 부분을 맡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처음부터 조국인 스페인과의 사이가 그랬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라인문도는 처음으로 금메달과 함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게 됩니다. 중년이 되면서 확실한 명성도 쌓은 것이죠.
교회 밖으로 나오다 Coming out of Church
미사가 끝나고 나오자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교회 문 앞에서 비를 긋는 사람들의 모습이 추레합니다.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은 사람들은 비가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고 동냥을 구걸하는 여인과 아이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지갑을 열고 그런 여인들을 바라보는 여인도 있고 떨어지는 비를 그냥 맞고 가는 여인도 보입니다. 교회 안은 은총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문 하나를 둔 바깥세상은 생존의 문제가 곳곳에 입을 벌리고 사람을 삼키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검은색 덩어리로 남은 여인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기를 기원해봅니다. 돌아봐야 할 곳 이 많은 시대입니다.
라이문도는 화가인 아버지의 가장 훌륭한 후계자라는 말을 들었으니까 화가로서 또 자식으로서 훌륭한 길을 걸은 셈입니다. 자식이 훌륭하게 뒤를 이었다면 부모 된 입장에서 그 이상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라이문도는 일흔아홉의 나이로 파리의 베르사유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로마에서 태어나 스페인에서 자랐고 평생을 파리에서 살았던 특이한 화가입니다. (중간에 뉴욕에서도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좀 더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클로드 모네 '에트르타 절벽의 일몰'
클로드 모네 ‘에트르타 절벽의 일몰’ 1883년경
55x81cm, 캔버스에 유채, 노스캐롤라이나 미술관 USA
모네, 프랑스를 그리다
아무리 그림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인상파나 인상주의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8세기에 그리스-로마의 조각상이 그러했던 것처럼 인상파는 이제 서양을 대표하는 하나의 ‘신화’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인상파는 우리에게 친숙한 화가들이다. 드가의 무희, 르누아르의 누드, 모네의 풍경과 마네의 카페는 한 시대를 대표하던 이미지를 넘어서 서양의 문화 전체를 연상시키는 상징으로 거듭 태어났다고 하겠다. 우리가 보통 유럽 여행을 떠날 때 막연하게 그려보는 이미지들이 인상파의 그림들에서 왔다는 건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면 인상파는 그냥 화가들의 모임에 불과하지만, 평범하게 보이는 이들이 이룩한 일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었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지만, 그 그림이 만들어내는 것은 현실과 다른 세게이다. 이제는 누구도 동의할 이 중요한 사실을 깨닫도록 만들어준 이들이 바로 인상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등장했을 때 인상파는 아방가르드였다. 모든 새로운 것이 그렇듯이 인상파는 그 이름부터가 비평가들이 작명해준 조롱의 이름이었다. 모네가 살롱에 출품한 ‘해돋이, 인상’(1872)이라는 작품을 비웃으면서 비평가들이 붙여준 이름이 인상파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롱은 오늘날 완전히 잊혀졌다. 인상파는 배척받았던 ‘시장’에서 결국 승리했고, 지금은 상업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품목으로 각광받고 있다.
자본주의 산업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가치를 표현
세상을 바꾸는 그림은 나름대로 이유를 품고 있는 법이다. 명화란 무엇일까? 쉽게 말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 그림이다. 가치라는 것은 사물의 중요성을 판단하게 하는 주관적인 믿음 체계라고 볼 수 있다. 그림은 경험의 감각을 바꾸어서 이런 믿음 체계를 뒤집는 역할을 한다. 그림이 단순히 그림 한 점으로 끝날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가 옛 그림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사물을 닮은 이미지라기보다는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낯선 가치 체계이다. 인상파는 근대가 시작되는 때에 자본주의 산업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가치를 화폭 위에 표현하려고 했던 화가들이다. 인상파가 근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모네 ‘해돋이, 인상’, 1872
인상파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화가들은 피사로와 모네이다. 물론 다른 화가들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딱히 꼽아보라면 이 둘이다. 피사로는 인상파의 사상을 정립하고 끝까지 그 정신을 포기하지 않은 화가라고 할 수 있고, 모네는 인상파의 혁신을 대중적으로 전파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모네는 인상파 화가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아서 인상파가 제도권 내에서 성공을 거두는 모습을 모두 목격하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말하자면 최후의 증인이었던 셈이다. 피사로는 사상적으로는 견결하고 예술적으로는 혁명적이었는데, 이 말은 모네에 비해 훨씬 덜 복잡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문화비평가 입장에서 본다면, 피사로보다 모네가 더 흥미진진한 대상인 건 어쩔 수가 없다. 피사로가 공공연하게 무정부주의적인 정치적 입장을 표명했다면, 모네는 직접적으로 자신의 정치 성향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르누아르, 드가가 공식적인 왕당파였다는 것과 대조를 이루는 ‘침묵’이었다. 그렇다고 모네가 정치적 입장을 갖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암묵적인 공화주의자였고 이런 측면에서 가장 ‘프랑스적 화가’라고 불러도 무방한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보면 모네는 그림을 그리는 일에서 정치성 자체를 발견한 화가인지도 모른다. 그가 몰두한 것은 그림의 형식이었고, 그 형식의 혁신이 곧 인식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걸 직관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수련이나 성당 같은 사물을 되풀이해서 그린 걸 보더라도 그의 예술정신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모네는 파리 중산층의 생활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화가
무엇보다도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에게 중요한 개념은 바로 ‘여가’였다. 이 여가는 드가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카페 문화와는 사뭇 다른 인상을 풍긴다. 모네의 ‘에트르타 절벽의 일몰’을 보자. 이 화사한 풍경은 분명 마네나 드가가 그려내고 있는 우중충한 파리의 일상과는 다른 것이다. 마네의 ‘늙은 악사’나 드가의 ‘목로주점’은 이런 화사한 색채와 빛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네 ‘늙은 악사’, 1862 드가 ‘목로주점’, 1875~1876
어디까지나 마네와 드가에게 중요했던 것이 ‘실내’였다면, 모네는 ‘야외’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바로 근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던 파리지앵의 생활방식에서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모네가 도시와 농촌이라는 통합적 공간을 표현하고자 하면서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중간계급의 미학을 반영한다면, 마네나 드가는 도시의 거리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근대적 주체에 더 관삼을 보였다. 물론 마네가 노동계급에 더 호기심을 두었다면, 드가는 부르주아에 더 마음이 가 있었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이런 까닭에 나는 모네야말로 인상파의 가치 체계, 나아가서 근대 파리 중간계급의 가치 지향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화가라고 생각한다. 인상파는 중간계급의 감수성을 미학적으로 표현하는 집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평생, 매년 매일 매시간 파리로부터 … 아르장퇴이유와 프와시와 베테이유, 지르베니, 루앙, 르아브르를 거쳐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센 강을 그렸다.”
이 말에서 우리는 모네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를 얻을 수가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모네는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노르망디에 있는 르아브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노르망디는 오트-노르망디와 바스-노르망디로 나뉘는데 이 명칭은 고지대와 저지대라는 지형 조건에서 유래했다. 오트-노르망디에서 절경으로 유명한 곳이 바로 에트르타(Etretat)라는 해안도시에 있는 팔레즈 다발과 다몽(Falaise d'Aval et d'Amom)인데, 모네의 그림은 바로 모파상과 쿠르베가 극찬했던 이곳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모네 그림 속의 풍경과 파리 근교도시와 관계는?
센 강에 대한 모네의 진술은 얼핏 생각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의 통치자였던 나폴레옹 3세의 발언과 겹쳐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라는 팸플릿에서 묘사하고 있는 쿠데타를 통해 공화정을 전복하고 제정을 다시 복권시킨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이다. 그는 집권 이후 대대적인 근대화 개발계획을 추진한다. 그때 만들어진 도시가 오늘날의 파리이다. 나폴레옹 3세는 이렇게 말한다. “센 강이 휘감아 흐르는 르아브르, 루앙, 파리는 하나의 도시이다.” 이 말이 뜻하는 건 간단하다. 파리의 일일 생활권에 르아브르와 루앙이 들어온다는 말이다. 도대체 이런 발언이 모네의 그림과 무슨 관계인 것일끼? 궁금증을 잠시 누르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인상파와 함께 피크닉을 떠나보자.
글 이택광(문화비평가, 경희대 영미문화과 교수) 부산에서 자랐다.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문화연구에 흥미를 느끼고 영국으로 건너가 워릭 대학교에서 철학석사 학위를, 셰필드 대학교에서 문화이론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21>에 글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화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시각예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정치사회 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영미문화 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미술 2009.11.05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1417&category_type=se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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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web속에 나를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나를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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