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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barnabak
가장 좋은 사랑의 길
고린도전서 13:1-13
지난 수요일에 이스라엘 최고의 성군이라고 할 수 있는 다윗의 마지막 말을 살펴보았습니다.(삼하23장)
그는 자신의 삶을 세 가지로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는데요,
첫째가 높이 세워진 자, 둘째가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셋째가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입니다.
‘높이 세워진 자’는 피동사로 자신이 왕이 된 것이 결코 자신의 힘이거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임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이렇게 높이 세워진 데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는 이런 하나님을 늘 찬양하고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참 짧은 말이지만 큰 의미를 갖고 있는 말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으로 아버지의 양을 치는 목동에서 이스라엘의 목자까지 최고의 높이에 오른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고백하였다는 것은 얼마나 솔직하고 훌륭한 모습인지 모릅니다.
거기다가 이렇게 세워주신 데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갔다는 것은 또한 얼마나 귀한 모습인지 모릅니다.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갔다고 하는 것은 다윗의 일생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하나님도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가장 좋아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우리에게 바라시는 가장 좋은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3장을 보통 사랑장이라고 합니다.
사랑에 대한 말씀이 여러 측면에서 많이 언급되고 강조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이 사랑 장을 소개하는 사도 바울의 설명이 12장 마지막 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사도 바울은 사랑을 말씀하기에 앞서 ‘여러 가지 많은 은사 중에 가장 큰 은사요 여러 가지 살아가는 길 중에 가장 좋은 길’이라고 말합니다.
12장에 보면 여러 가지 은사를 설명하고 있는데요, 그 많은 은사 중에 가장 큰 은사는 사랑의 은사라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길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좋은 길이 바로 사랑의 길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이 사랑의 길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좋은 길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성도 여러분들이 가장 좋은 이 길을, 가장 좋은 사랑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길을 걸어갈 때 여러분들도 다윗과 같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가장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아프리카 밀림선교의 선구자인 리빙스턴은 25년 동안 정글 원주민들을 섬기는 헌신적 선교를 하였습니다.
그는 은퇴 후에도 아프리카 밀림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던 중 공교롭게도 자기 생일날 선교지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됩니다.
리빙스턴이 죽은 지 삼 년 후에, 당대의 설교가인 드럼몬드가 아프리카 선교지를 찾아가서 원주민들, 특히 리빙스턴과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에게 물어봤습니다.
“그가 당신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었습니까?
선교사님한테 어떤 설교를 들었고 그에게서 배운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가 여러분에게 남긴 가장 인상 깊은 교훈은 어떤 것들입니까?”
그의 질문에 원주민들은 전혀 뜻밖의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가르쳐준 성경공부나 설교 메시지는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베푼 사랑은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리빙스턴이 성경지식으로, 설교메시지로 선교를 하려고 했다면 그렇게 큰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분의 선교가 오늘까지 언급되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사랑으로 선교를 하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지식도 오래가지 못하고 많은 돈도 오래가지 못하고 뛰어난 미모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감동적으로 읽은 책이나 주일마다 듣는 설교 내용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그런데 자기가 받은 사랑은 결코 잊혀 지지 않습니다.
리빙스턴이 가장 좋은 사랑의 길을 걸어갔기에 오늘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테레사 수녀가 오늘까지 추앙받을 수 있는 것도 그녀가 잘생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가 많은 돈을 남겼기 때문도 아닙니다.
좋은 말을 많이 하였기 때문도 아닙니다.
가장 좋은 사랑의 길을 걸어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인류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것도 가장 좋은 십자가 사랑의 길을 걸어가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영원하고 사랑은 오래 동안 기억되면서 가장 놀라운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사랑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주님이 먼저 가신 가장 좋은 길인 줄 믿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앞부분에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1절부터 3절까지 계속되는 말씀 속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예언의 능력과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과 모든 믿음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다 바쳐 구제하고 심지어 목숨을 바쳐 순교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말씀에 비추어보면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목적을 위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 과시나 자기 자랑이나 자기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서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 할 수 있고 아니면 미래에 자기가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이 배제되고 자기를 위한 이기적인 목적에서 한다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살아가시겠습니까?
나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서 주님으로부터 칭찬도 받지 못하고 상급도 받지 못한다면 이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살아갔던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고 했지만 주님은 나는 너희를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살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진정 주님의 칭찬이 있고 주님의 인정이 있고 주님의 상급이 있는 무엇이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은 그러기에 진정한 사랑은 5절에 말씀한 대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였다고 하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일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랑은 결국 밝혀질 수밖에 없고 사람들의 비난을 자초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고 남이 기뻐해야 하고 상대방이 즐거워야 합니다.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에서가 아니라 순수한 사랑에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러기에 뒷담화가 없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고 나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면서 내가 끝까지 참으려고 했는데 이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면서 뭐가 섭섭하다고 감정을 폭발시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정말 예의가 없어도 너무 예의가 없다는 이런 말을 한다면 그것은 사랑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면서 내가 진작 알아봤어야했는데 하는 뒷담화가 있다면 그것도 진정한 사랑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정말 사랑으로 한다면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할 뿐 더러 오래 참아야 하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견디어야 합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궁금한 것이 정말 많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왜 집을 떠나게 되었으며 어디 가서 살았으며 무슨 일을 하고 살았는가가 궁금하지 않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제일 궁금한 것은 그 많은 돈을 어떻게 다 까먹고 이렇게 거지가 되어 돌아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업하다 망했는지 다른 사람에게 속아서 망했는지 주식투자를 하다가 망했는지 돈은 좀 벌다가 망했는지 정말 궁금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궁금하면 오백 원이라는 말이 유행했듯이 정말 궁금하면 참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마음 아닙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자기의 유익, 뭔가 궁금증이라도 해소하고 싶은 그런 마음을 구하지 않고 아들의 유익을 구하며 이 모든 것을 묻어두고 오래 참습니다.
끝까지 참을 뿐 아니라 아들을 대하는 태도가 온유하고 무례하지 않습니다.
용서는 한다고 해도 돈을 다 까먹고 들어온 아들에게 얼마든지 차갑거나 냉정하게 대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겠지만 그것을 끝까지 참고 끝까지 견딥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 있을 때 아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거듭나게 되지 않겠습니까?
가정이 화목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회복되고 우리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이런 사랑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 이런 사랑이 필요하냐하면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8절 말씀을 보면,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의 것을 언젠가는 다 폐하게 됩니다.
먼저는,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인 것이 폐하게 됩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예언하던 일들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 그때는 다 폐하여지는 줄 압니다.
온전하신 분이 오셨는데 예수님에 대해 부분적으로 예언하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 폐하여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유치한 것들이 폐하게 됩니다.
우리가 장성하게 되면 어릴 때 하던 유치한 일들은 다 없애버립니다.
저희들이 어릴 때는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를 하면서 놀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초등학교 때까지였지 그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대학 때까지 한다면 그것은 정말 유치한 것입니다.
셋째는, 희미한 것들은 온전하게 보일 때는 다 폐하여집니다.
당시에 거울은 구리로 만든 것이라 보이기는 하여도 희미했습니다.
희미한 거울은 완전한 거울이 등장하면 다 폐하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영원히 폐하여지지 않고 영원하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이 말을 바꿔 이야기하면 사랑은 부분적이 것이 아니라 온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유치한 것들이 아니라 장성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희미한 것들이 아니라 온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신앙적으로 온전해지기를 바라신다면,
유치한 신앙을 버리고 장성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원하신다면,
희미한 신앙이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것 같은 완전한 신앙으로 주님을 섬기시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없으면 아직도 부분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유치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고 희미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온전하고 장성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이 걸어가신 가장 좋은 사랑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가장 좋은 사랑의 길을 걸어갈 때 주님이 바라시는 온전하고 장성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고린도교회처럼 방언하는 것도 귀하고 예언하는 것도 귀하고 치유하는 것도 정말 귀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다 부분적인 것들입니다. 일시적인 것들이고 희미한 것들입니다.
사랑만이 온전하고 사랑만이 장성하고 사랑만이 주님의 삶을 온전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삶을 살아가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간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가장 좋은 길을 간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랑이 빠진 신앙생활은 절대 온전하지도 않고 장성하지도 않고 주님이 원하시지도 않습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갈 때만 온전한 신앙생활, 장성한 신앙생활, 주님이 원하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제물삼아 십자가에서 드린 대속의 제사를 통하여 한 번에 온전한 구원을 이루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의 제사를 통하여 영원히 온전한 제사를 이루신 것이 바로 십자가의 제사입니다.
왜 십자가의 제사가 영원히 온전한 제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제사를 드릴 때 주님은 빌라도가 신기해할 정도로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피고라고 하면 이런 저런 말을 통하여 자신을 변호하고 싶었을 텐데 주님은 아무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우리가 믿겠다고 그렇게 아우성을 쳐도 주님은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욕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할 능력이 있었으면서도 주님은 아무 말씀도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지도 않으시고 욕하지도 아니하시고 그 어렵고 힘든 고난을 다 감당하셨습니다.
그 십자가 사랑이 있었기에 십자가는 영원한 구원이고 완전한 구원입니다.
그러기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하고 장성하게 하고 완전하게 합니다.
사랑은 우리 주님이 먼저 걸어가신 그래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가장 좋은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