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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늙지 않는다
-디팍 쵸프라-
1. 관찰자로부터 독립적인 객관적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실재라고 받아들이는 세계는 딱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성질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물건은 크고 어떤 것은 작고, 어떤 것은 단단하며 어떤 것은 부드럽다.
그러나 이 중의 어떤 성질도 우리 자신의 인식을 벗어나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예컨대 접는 의자와 같은 어떤 물체를 가정해보자. 우리에게는 그 의자는 그리 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개미에게는 그것은 어마어마하게 크다. 우리에게는 의자가 단단해 보이지만, 중성미자(neutrino)는 그 속을 거침없이 지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아원자입자에게는 의자의 원자들이 서로 수마일씩이나 떨어져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의자가 가만히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만약 당신이 외계의 어느 지점에서 그것을 본다면 의자는 지구상의 모든 것들과 함께 돌면서 시속 수천 마일의 속도로 우리의 눈앞을 지나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단지 인식을 바꾸기만 함으로써 우리가 의자에 대해서 묘사할 수 있는 다른 어떤 성질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가 있다.
예컨대 의자가 붉은 색이라면 초록색 안경을 쓰고 봄으로써 검은 색으로 보이게 할 수 도 있다.
만일 의자의 무게가 2.5킬로그램이라면 그것을 달 위에 가져가 1킬로그램 채 안 나가게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밀도가 큰 행성의 중력장 속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수십만 킬로그램의 무게로 만들 수도 있다.
물질세계에서는 절대적인 속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저 밖에' 어떤 독립적인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다.
우주란 그것을 감지하는 감각기관의 반영일 뿐이다.
인간의 신경계는 우주 속에 진동하고 있는 총 에너지의 10억 분의 1도 안되는 지극히 미소한 부분만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박쥐나 뱀과 같은 다른 동물들의 신경계는 우리의 세계와 공존하고 있는 또 다른 세계를 반영한다.
박쥐는 초음파의 세계를 감지하며 뱀은 적외선의 세계를 감지한다.
두 세계 다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진정으로 '저 밖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다만 인식자인 우리가 해석해 주기를기다리고 있는 정형화되지 않은 원시 데이터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사용하여, 물리학자들의 말하는 '지극히 불명확하고 멀건 양자의 수프'를 굳혀서 3차원의 고형 우주를 만드는 것이다.
영국의 뛰어난 신경학자인 존 에쿨스(John Eccles)경은 다음과 같이 놀랍지만 반박할 수 없는 단언으로써 감각이라는 환상을 통찰하고 있다.
"나는 여러분이 자연의 우주에는 어떤 색깔도, 어떤 소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색깔이나 소리와 비슷한 것, 즉 직물, 문양, 아름다움, 향기 등등의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현실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어떤 객관적 사실도 본질적으로는 무효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혼란스럽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 속에는 "단지 당신의 인식을 바꾸기만 함으로써 당신의 우주 - 당신의 몸을 포함한 - 를 당신이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 믿기지 않는 해탈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몸 속에서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미국과 영국에서는 65세에 맞게 정년퇴직이 제멋대로 한 사람을 사회에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65세가 되기 전날까지만 해도 한 직장인은 노동과 가치로써 사회에 기여하지만 그날 이후로 그는 사회의 피부양자가 된다.
의학적으로 이러한 인식적 전이의 결과는 비참하다.
퇴직이후 몇 년 동안에 심장마비와 암의 발병률이 치솟고 퇴직하기 전에 건강했던 사람들이 초기에 죽음을 맞이한다.
소위 '조기은퇴성 사망'이라는 이 증후군은 자신이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존재라는 인식에 기인한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인식일 뿐이지만 그것을 굳게 믿는 사람에게는 질병을 일으키고 사망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비교한 바에 의하면, 노년층이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는 노인들이 지극히 원기왕성하다.
그들은 미국의 노인네들로서는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굽히기, 들기, 오르기 등을 거뜬히 해낸다.
간의 표피세포와 같은 오래된 세포를 고배율 현미경으로 살펴보면 그 광경은 마치 전쟁터처럼 황폐화되어 있다.
섬유질이 이리 저리 얽혀 있고 지방질 노폐물과 처리되지 않은 순환노폐물이 보기 흉한 덩어리로 엉켜 있다.
리포푸신(lipofusin)이라 불리는 암황색 색소가 세포내부의 10내지 30퍼센트까지 축적되어 더럽혀져 있다.
이 황폐한 광경은 아세포 기능의 이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물질적인 렌즈가 아니라 정신적인 렌즈로 들여다 보면, 이 오래된 세포들이 그 사람의 경험이 기록된 지도와 같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준 일들과 함께 우리를 괴롭힌 일들이 거기에 각인되어 있다.
의식 층에서는 오랜 전에 잊혀진 일들이 마치 감춰진 컴퓨터 마이크로칩처럼 여전히 외부로 신호를 보내어 우리를 초조하게 하고 긴장하게 하며 지치고 근심스럽고 후회스럽고 의심스럽고 실망스럽게 만든다.
이러한 반응들은 심신의 경계막을 넘나들면서 우리의 일부가 된다.
오래된 세포 속의 독성 노폐물 덩어리들이 누구에게나 같은 형태로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유전적인 차이가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나타난다.
70세에 이를 즈음이 되면 당신의 세포는 독특한 형태를 띠게 될 텐데, 그 형태는 당신이 자신의 신체조직과 내장기관에 대사작용으로 변화시키고 처리시킨 독특한 경험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모습이 될 것이다.
혼돈스럽고 거칠게 진동하는 '양자의 수프'를 다루어서 의미있고 질서있는 현실의 단편들도 만들 수 있게 되면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오직 당신이 그것을 알고 있을 때에만 존재한다.
당신이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도 , 당신의 의식의 거의 대부분이 당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몸을 만들어 내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소위 자율신경계는 당신의 의식을 빠져나간 기능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가 멍한 상태로 길을 걸어가더라도 뇌 속의 자율신경 중추는 여전히 위험한 순간을 살펴서 긴장반응을 발동시킬 태세를 갖추고 외부세계에 대처하고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수많은 일이 행해지고 있다.
숨쉬고, 소화시키고, 새로운 세포를 키우고 손상된 오래된 세포를 고치며, 독성을 순화시키고, 호르몬의 균형을 유지하며,
지방을 혈당으로 바꿈으로써 저장된 에너지를 변환시키고, 눈동자의 조리개를 조절하고 혈압을 높이고 낮추며,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걷는 동안에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가장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근육으로 혈액을 보내 주고, 주변의 소리와 움직임을 감지하는 등의 일을 끊임없이 진행하고 있다.
이 자율적인 과정이 노화 현상에 아주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나이가 먹어갈수록 이러한 기능들을 조절하는 능력이 떨어져 가는 것이다.
한평생 무의식적인 생활을 이어가면 수많은 노후작용이 일어나고 한평생 의식적으로 활동하면 노화를 예방할 수 있다.
신체의 기능을 자동운전 상태로 내버려두는 대신에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 그 자체가 당신이 어떻게 나이를 먹느냐에 변수가 될 것이다.
심장박동과 호흡으로부터 소화와 호르몬 조절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른바 자율기능들은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가 있다.
바이오피드백(biofeedback)과 명상의 시대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엇다.
여러 가지 일 중에서도 예컨대 심신건강 연구실에서는 심장질환자가 의지로서 혈압을 내리거나, 위궤양환자가 위산의 분비를 줄이는 훈련을 받고 있다.
이러한 능력을 노화현상에 활용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우리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자율신경게에 영향을 미치는 기법은 얼마든지 있다.
2. 우리의 신체는 에너지와 정보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의 패턴을 변형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우리의 몸은 분자와 원자로 쪼개어지는 고형의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자물리학은 모든 원자의 99.99999퍼센트가 텅 빈 공간이며, 실제로는 진동하는 에너지의 덩어리인 아원자 입자가 이 공간 속을 빛의 속도로 돌아다니고 있다고 말한다.
이 진동은 무작위적이고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한덩어리의 진동은 수소원자의 정보를 지니고, 또 다른 덩어리의 진동은 산소원자의 정보를 지닌다. 사실 모든 원소들이 하나의 고유한 정보이다.
정보는 추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우주와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추상적인 것이다.
인체의 물리적 구조를 궁극적인 근원으로 추적해가면 분자가 원자로, 원자가 아원자 입자로, 아원자 입자는 텅 빈 공허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유령같은 에너지로 꽁무니를 감추어 버려서 마침내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게 된다.
신비스럽게도 이 공허에는 어떤 정보가 표현되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기억 속에 소리 없이 존재하는 것처럼, 양자의 장은
표현되지 않은 형태로 온 우주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수 십 억의 은하계가 이 문장 끝의 마침표보다 수백만 배나 작은 공간 속에 압축되어 있었던
대폭발(Big Bang)의 순간 이래로 늘 그래 왔었다.
그러나 무한히 작은 그 점 이전에도 우주의 구조는 나타나지 않은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을 포함한 우주의 근본 질료는 비질료(non-stuff)이다. 그러나 그것은 범상한 것 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질료이다.
모든 원자 내부의 공허는 보이지 않는 지능으로 맥동하고 있다.
유전학자들은 이 지능이 본래 DNA 속에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생각을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DNA가 정보화된 자신의 지능을 쌍둥이 격인 RNA에 전해 주고 RNA는 나아가서 세포 속으로 들어가 수 천 개의 효소들에게 그 지능의 조각들을 전달해주고, 그러면 효소는 그 특정한 지능의 조각을 단백질을 만드는 데에 사용함으로써 생명이 전개된다.
이러한 과정의 모든 순간에 에너지와 정보가 교환되어야 하며, 이것이 없이는 생명 없는 물질로부터 생명이 생겨나지 않는다.
인체는 주로 글루코스나 혈당의 형태로 세포에 전달되는 당분을 연소함으로써 에너지를 뽑아낸다.
글루코스의 화학구조는 우리가 먹는 설탕인 자당(sucrose)과 매우 가깝다. 하지만 설탕을 태운다고 해서 복잡하고도 정교한 구조를 가진 살아있는 세포를 만들 수 잇는 것은 아니다.
시꺼먼 숯덩어리와 물과 이산화탄소의 흔적만이 남을 뿐이다.
물질대사는 단순한 연소과정 이상의 어떤 것이다. 각설탕 속에 비활성 상태로 들어 있는 당분이 그 에너지로써 생명을 지탱하는 것은 인체 세포가 그것에 새로운 정보를 불어넣기 때문이다.
당분은 그 에너지를 예컨대 신장, 심장, 혹은 뇌의 세포에 줄 수 있다. 이 세포들은 모두가 자신만의 독특한 형태의 지능을 지니고 있다.
심장세포의 율동적인 수축운동은 뇌세포의 전기적 방전작용이나 신장세포의 나트륨 교환작용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 지능의 풍부성과 다채로움은 놀라운 것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온 신체가 공유하고 있는 단일한 지능이 있다.
이 지능의 흐름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하며, 사망의 순간에 이 흐름이 끊기면 우리의 DNA 속에 저장된 그 모든 지식도 쓸모없게 된다.
우리가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이 흐름은 다양한 방법으로 손실된다.
면역계통과 신경계통, 내분비계통의 특유한 지능이 모두 쇠퇴하기 시작한다. 생리학자들은 이 세 가지 계통이 인체의 가장 중요한 제어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면역세포와 내분비선은 뉴런과 마찬가지로 뇌의 신호를 받아들이는 수용체(receptor)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확장된 뇌와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노화란 단순히 우리의 잿빛 물질덩어리 속에 한정된 하나의 질병으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면역계통이나 내분비계통의 지능이 상실되면 온몸의 노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차원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말기 단계까지 진행되어 신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날 때까지도 그 손상은 눈에 띄지 않는다. 오감은 노화를 일으키는 수 십 억의 양자의 교환작용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깊이 침투해 들어가지 못한다.
그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 빠른 동시에 너무나 느리다.
각각의 화학반응이 일어나는 데에는 10,000분의 1초도 걸리지 않기 때문에 너무 빠르다는 것이며, 여러 해가 지나도록 그 누적된 효과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너누 느리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들에는 한 개의 원자보다 수백만 배 작은 규모의 정보의 에너지가 개입된다.
인체가 단순한 물질이라면 노화에 의한 쇠약은 불가피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은 엔트로피(entrpy), 즉 질서있는 체계로부터 점점 무질서하게 되어 가는 경향성의 희생물이기 때문이다.
엔트로피는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폐차장에서 녹슬어가는 고물차와 같은 것이다.
엔트로피는 잘 돌아가던 기계를 찌그러진 고물로 망가뜨려 놓는다. 이러한 과정은 결코 반대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녹슨 고철 무더기가 저절로 재조립되어 새 차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엔트로피의 법칙이 지능에까지 적용되는 갓은 아니다.
우리의 보이지 않는 부분은 세월의 약탈에 영향 받지 않는 것이다.
현대과학은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을 지금 막 밝혀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신체의 젊음을 유지해 온 스승들의 영적인 전통 속에 이미 수 천 년 동안 전해져 내려왔던 것이다.
인도와 중국, 일본, 그리고 그보다 좀 희귀하긴 하지만 서양의 기독교권에서도 자신의 진정한 본질이 지능의 한 흐름임을 깨달은 현자들을 배출해 왔다.
이 흐름을 유지하고 해가 갈수룩 풍부하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연계의 심층적 차원에서 앤트로피를 극복해냈다.
인도에서는 이 지능의 흐름을 프라나(흔히 '생명력(氣)'으로 번역된다)라고 한다.
이것은 의지로써 증가시키거나 이곳 저곳으로 움직일 수 있으며, 육신을 젊고 순조롭게 유지하도록 조종할 수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 프라나를 접하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안에 있다.
요기(yogi)는 다름아닌 의식의 집중을 이용하여 프라나를 움직인다. 심층적 차원에서 프라나와 의지의 집중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의식이며 의식이 곧 생명이다.
3. 몸과 마음은 떼놓을 수 없는 하나이다.
지능은 그것을 가리고 있는 물질이라는 가면보다 훨씬 더 융통성이 있다.
그 자신을 사념으로 표현할 수 도 있고, 혹은 눈에 보이는 아드레날린 호르몬의 분자로 묘사될 수도 있다.
느낌이 없이는 호르몬도 없으며, 호르몬이 없이는 느낌도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통증을 전달하는 신경신호가 없으면 통증도 없고, 통증의 수용체에 꼭 들어맞아서 통증의 신호를 차단시키는 엔도르핀(endorpin)이 없으면 통증으로부터 해방될 수도 없다.
심신상관 의학(Mindbody medicine)이라고 불리는 혁명은 이 단순한 발견 위에 근거한 것이다.
생각이 가는 곳에 화학물질이 동반된다. 이러한 통찰이 남편을 최근에 사별한 여성들에게 유방암이 일어나는 확률이 왜 두 배나 더 높은지, 또 오랫동안 우울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병을 얻는 혹률이 왜 네 배나 높은지 등을 이해하는데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정신적인 압박상태가 질병을 일으키는 생체화학물질로 변환된 것이다.
나의 임상 경험에서도, 쥐어짜는 듯이 숨 막히는 통증을 유발하는 심장계통의 대표적인 질환인 협심증 환자가 두 사람 있었는데 한 사람은 통증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전혀 느끼지도 않고 달리기와 수영, 심지어는 등산까지도 즐기는데 비하여
다른 사람은 팔걸이의자에서 일어나려고만 해도 거의 까무러칠 정도의 통증을 시달리는 사례를 목격할 수 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 두 사람의 신체적인 차이를 조사해 볼 것이지만, 그것을 발견할 수도 있고 전혀 발견 못할 수도 있다.
심장병 전문의들은 세 개의 관상동맥 중에서 최소한 하나가 50퍼센트 이상 막혔을 때 협심증의 통증이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혈관이 막히는 것은 대부분이 죽은 세포, 응고된 혈액, 지방질이 낀 혈소판 등이 혈관내벽에 끼어서 이루어진 동맥경화의 형태이다.
그러나 50퍼센트라는 수치는 단지 어림짐작일 뿐이다.
어떤 협심증 환자들은 오직 관상동맥의 한 군데에만 혈행을 방해하는 작은 병변을 가지고도 통증으로 장애인이 되는 반면,
다른 환자들은 관상동맥을 85퍼센트까지 막고 있는 덩어리들을 여러 군데에 지니고도 마라톤 코스를 뛴다고 알려져 있다.
(덧붙일 것은, 협심증은 반드시 어떤 물질이 낄 경우에만 발병되는 것은 아니다. 고나상동맥에는 근육세포층이 붙어 있는데,
이것이 경련을 일으켜서 혈관이 닫혀 있을 때에도 박동하여 통증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에 따라 반응이 매우 다르다.)
심신상관 의학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나의 두 환자는 통증에 대한 각자의 서로 다른 해석을 표현하고 잇는 것이다.
모든 환자들이 자신의 상황에 대해 자신만의 특유한 낙인을 찍는다. 그리고 통증(혹은 기타의 증상)은 심신체게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과거의 모든 영향들과 상호작용한 다음에야 의식 속으로 떠오른다.
모든 사람이, 아니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일에 항상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없다.
통증의 신호는 다양한 용도로 변환될 수 있는 원시 데이타일 뿐이다.
장거리 달리기 같이 많은 체력을 소모하는 경기는 선수로 하여금 고통을 성취의 신호('고통 없이는 성취도 없다'라는 속담을 보라)로 해석하게끔 만들지만,똑같은 고통이 다른 상황에서 주어지면 전혀 달갑지 않을 것이다.
육상선수들은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코치를 존경하지만, 신병훈련소에서 그와 같은 훈련을 받으면 교관을 증오한다.
의학은 이제 막 심신의 상관관계를 치료에 이용하기 시작하고 있다. 통증 치료가 그 좋은 보기이다.
플라시보, 즉 가짜 약을 투여하면 30퍼센트의 환자는 정말 진통제를 투여한 것과 같은 진통효과를 경험한다.
그러나 심신의 상관효과는 이보다 훨씬 더 전일적이다.
똑같은 가짜 약으로써 진통을 겪게도 하고, 위궤양 환자의 과다한 위산분비를 멈추게도 하며, 혈압을 낮추기도 하고, 항암제 역할도 한다.
(설탕으로 만든 약을 환자에게 주면서 강력한 항암제라고 믿게 하여 머리가 빠지고 구토증이 나는 등 화학요법이 일으키는 모든 부작용이 나타나게 할 수도 있으며,생리식염수 주사로 말기의 악성 종양을 실제로 완화시킨 예도 있다.)
약효가 없는 동일한 약물로써 이처럼 다른 반응을 이끌어 낼 수가 있으므로, 마음에 적당한 암시만 주면 인체는
'그 어떠한' 생화학 반응이든지 만들어 낼 능력이 잇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
가짜 약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 프라시보 효과를 나타내는 힘은 다름 아닌 암시의 힘이다.
이 암시가 인체가 자신을 치유하려는 의지로 변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짜 약으로 환자를 속이는 짓을 그만두고, 바로 그 '치유의 의지'로 접근하는 것이 어떨까?
만약 우리가 늙지 않으려면 의지를 효과적으로 발동시킬 수만 있다면 인체는 그것을 자동으로 실행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매우 흥미로운 증거를 가지고 잇다.
노인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병 중의 하나는 파킨슨병이라는 신경장애로서, 근육운동을 조절할 수 없어서 걷기와 같은
신체동작이 극도로 느려지다가 결국은 전혀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로 뭄이 경직되게 만드는 병이다.
파킨슨병은 도파민이라는 뇌의 매우 중요한 화학물질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고갈되는 것이 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젺다.
한편 어떤 종류의 약물에 의해 도파민을 생산하는 뇌세포가 파괴되어서 일어나는 파킨슨병 증상도 있다.
이 두번째 형태의 증상이 심화되어 거동이 거의 불가능한 환자를 가정해보자.
그는 안간힘으로 겨우 한두 걸음을 옮기고는 다시 동상처럼 뻣뻣이 얼어붙는다.
그러나 바닥에다 금을 그어 놓고 "이 금을 발ㅂ아 보세요." 하고 말하면 그 사람은 마치 기적과도 같이 그 금 위에 설 수가 있다.
도파민을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자율적인 기능이며, 저장된 것은 완전히 소모되었다는 사실
(거의 뇌가 다리의 근육에게 한 걸음 더 움직이도록 신호를 보내지 못한다는 사실로써 알 수 있는 것처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걸음을 걷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서 뇌가 깨어난 것이다.
그 사람은 몇 초만 지나면 다시 얼어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그에게 마음속으로 금을 긋고 그것을 밟아 보라고 하면
그의 뇌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부연하자면, 노인들의 쇠약이나 활동력 감퇴는 대부분의 경우 단지 휴지상태일 뿐이다.
목적의식을 가지고 활동적으로 생활하고자 하는 의지만 재확인시켜 주면, 많은 노인들이 운동능력과 체력과 민첩성과
정신반응을 극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다.
의지는 의식집중의 적극적인 동업자이다. 의지는 우리가 자동적인 과정을 의식적인 과정으로 변환시키는 방법이다.
거의 대부분의 환자가 간단한 심신 상관관계 훈련을 이용해서 빠른 맥박과 천식성 기침, 뭔지 모를 불안감을 몇 번 만에
좀 더 정상적인 반응으로 바구어 놓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자신의 통제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도 적절한 기법을 이용하여 다시 통제권 안으로 가져올 수가 있다.
이것이 노화에 대해 시사하는 의미는 매우 크다. 예컨대 '나는 정력과 활동력을 나날이 증진시키고 싶다'는 식의 의지를 사고과정에 주입함으로써, 활동에 표현되는 에너지의 양을 결정하는 대뇌중추에 통제력을 행사하기 시작할 수 있다.
나이가 들어 활동력이 감퇴하는 것은 대부분이 그렇게 감토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대'한 결과이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패배적인 의지를 강한 신념의 형태로 심어 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심신의 상관관계가 이러한 의지를 자동으로 실현하게 된다.
과거에 우리가 지녔던 의지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구시대의 프로그램을 만든다.
사실은, 의지의 힘은 언제든지 다시 각성시킬 수가 잇다.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당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의식적으로 마음을 프로그래밍함으로써. 나이가 들기 전에 일찌감치 그와 같은 손실을 방지할 수가 잇는 것이다.
4. 인체의 생화학작용은 의식의 산물이다.
낡은 패러다임이 지니고 있는 가장 중대한 한계 중의 하나는, 인체 내부에서 일어나고 잇는 일을 설명함에 있어서
그 사람의 의식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전제이다.
그러나 질병의 치료는 그 사람의 신념, 추측, 기대, 그리고 자신에 대한 자아상을 또한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인체를 마음이 없는 기계로 보는 입장이 아직도 서영의학의 주류를 지배하고 있지만, 그와는 반대되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들이 있다.
암이나 심장질환으로 사망하는 비율은 아무래도 심리적인 압박감을 가진 사람들이 더 높고 목적의식이 강하고 행복한 사람들은 더 낮다.
최근 몇 해 동안 이루어진 의학연구 결과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의 하나는 스탠포드 대학의 정신의학자인 데이비드 스피겔(David Spiegel)이 행한 실험이다. 그는 환자의 마음상태가 암의 극복과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는 많은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환자의 신념과 태도에 중요한 의미를 두는 것이 이로운 점보다는 해로운 점이 더 많으리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암을 일으킨 원인은 나에게 잇다는 식의 생각은 죄의식과 자기비판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스피겔은 유방암이 상당히 진전된 86명의 여성(그들의 병은 관행요법으로는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태였다)들을 대상으로, 그들 중의 반수에게 매주 자기최면법 강의와 결합된 정신요법을 행했다. 어느 모로 보나 이것은 최소한의 개입이다.
일주일에 한 시간, 그것도 여러 명의 환자가 함께 하는 요법으로써 죽음이 불가피하게 된 말기 증상의 병과 어떻게 싸울 수가 있었겠는가?
결과는 뻔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험 대상자들을 10년 동안 추적해 본 스피겔은 요법을 받은 그룹이 요법을 받지 않은 그룹보다 평균 두 배나 오래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더욱 놀라운 것은, 최근까지 단지 세 명만이 살아 있었는데, 그들 모두 요법을 받은 그룹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이 연구결과는 연구자가 그 효과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라서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연구자들한테서도
이와 비슷한 연구결과가 쏟아져 나왔다. 예일대학의 젠센(M. R.Jensen)이 보고한 1987년의 신중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감정을 억누르고 절망감에 빠지고 분노나 두려움, 기타 부정적인 감정을 발산하지 못하는 성격을 지닌 여성들에게는 유방암이 빠르게 퍼져 나간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류마티스 관절염이나 천식, 난치성 통증, 그리고 기타의 장애 증상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발견이 보고되엇다.
낡은 패러다임에 빠져 잇는 의사들은 이러한 연구결과에 대해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통찰력이 번득이는 저서 <의학과 의미 {Medicine and Meaning)>dptj fofl ehtl(ㅣㅁㄱ교 Dossey)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의학 회보나 의과대학 강단에서 끊임없이 설교되고 있는 지배적 교훈은 '전래의 병리학'만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며, 느낌, 감정, 태도 등은 한갓 들러리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감정이란 외딴 정신의 공간 속을 스치듯 지나가는 사건이 아니라 의식의 표현이며 생명의 근본적인 질료라는 사실이다. 모든 종교 전통 속에서 생명의 숨결은 곧 영혼이다. 영혼을 고양시킨다거나 저하시킨다는 것은 인체가 반드시 반영해야 할 근본적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의식은 노화현상에 매우 큰 차이를 가져온다. 고등한 생명 형태를 지닌 모든 종이 노화하지만, 오직 인간만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인식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인식을 다시 노화 자체로 재번역한다. 늙어가는 것에 절망을 느끼기 때문에 한층 더 빨리 늙어가는 것이다.
반대로 그것을 아량으로 받아들이면 육체적, 정신적인 많은 불행을 막아낼 수 있다. '자신이 늙엇다고 생각하는 만큼만 늙는다'는 속담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생각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자연계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에너지와 정보의 자극이다.
우리가 나무, 별, 산, 바다라고 부르는 에너지와 정보의 덩어리도 자연계의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은 한 가지 중요한 면에서 이와는 다르다. 자연계는 자신의 생각의 형태가 일단 정해지면 거기에 고정되어버린다.
행성이나 나무와 같은 사물은 생겨나고 발달하고 쇠퇴하고 분해되는 자동적 단계의 성장 사이클을 따른다.
그러나 인간은 생명의 주기 속에 갇히지 않는다. 인식능력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반응에 참여한다.
우리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을 때 문제가 일어난다.
마이클 탤보트(Michael Talbot)는 자신의 저서 <홀로그램 우주(The Holographic Universe)>라는 책에서 이것을 희랍 신화에 나오는 마이더스 왕에 빗대어 재치잇게 이야기한다.
자기가 손을 대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해 버리므로, 마이더스 왕은 사물의 실질적인 재질을 알 수가 없다.
물도, 밀알도, 살도, 깃털도, 모두가 그가 손을 대는 순간 단단한 금속으로 비뀌어 버린다.
이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우리의 의식은 양자의 장을 일상의 물질적 현실로 바꾸어 버리므로 우리는 양자적 현실 그 자체의 재질을 알 수가 없다.
오감을 통해서도 알 수 없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생각 또한 양자의 장을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생각은 공허의 무한한 가능성을 어떤 시공간적(時空間的) 사건으로
바꾸어 놓는다.
우리가 육체라고 부르는 것도 역시 특정한 시공간적 사건이다. 우리는 순전히 추상적인 잠재력을 고형의 물체로 바꾸어 놓은 자신의 행위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5. 인식이란 학습된 현상이다.
만일 모든 인간이 어떤 경험에 대해서 똑같은 반응을 하게 되어 있다면, 의식의 힘은 우리의 삶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분명히 일어날 리가 없다. 어떤 것에 대해서도 두 사람이 똑같은 인식을 공유하는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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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좋은글 감사합니다
무의식과 의식이 변하면 집단의식에도 변화가 옵니다 .우리 각자가 의식 수준을 올리면 결국 집단의 의식수준도 올라가겠지요.....
죽음을 믿지 않고 영생을 믿으며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면 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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