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09
6월2일[연중 제8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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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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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pk8ryA7NGmQ (이경수 프란치스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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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진정한 의미의 성전 정화 작업!>
큰 도시에서 살다가 완전 시골로 귀촌한 한 교우가 직접 체험한 사건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교적을 옮기려고 가까운 시골 본당을 방문했습니다. 사무실에 들러 일을 마치고 성당 온 김에 성체조배나 하고 가려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성당 안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당 안이 너무 추워 이빨이 딱딱 마주칠 정도였습니다. 왜 이리 추울까, 주변을 살펴보니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유리 창문마저 모두 열려 있었습니다. 단 몇 분도 머물러 있지 못하고 성당을 빠져나오는데 성당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왜소한 체구의 아저씨가 작업복 차림에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큰 마스크를 한 채 열심히 성당 바닥을 닦고 있었습니다. 엄동설한에 홀로 성당 청소를 하고 계시는 초라한 아저씨의 모습을 뵈니 안타깝고 측은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홀로 성당 바닥을 박박 닦던 그분은 바로 그 성당의 주임 신부님이셨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교우가 약 2년의 세월이 흐른 후 어느 토요일, ‘혹시나 오늘도 그 신부님께서 홀로 청소를 하고 계시면 도와드려야겠다.’ 생각하며 성당을 찾았는데, 그 왜소한 체구의 아저씨, 아니 주임 신부님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홀로 성당 청소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성당 안에서 지극정성으로 성당 바닥을 청소하는 그 모습이 그리도 성(聖)스러워 보이더랍니다. 마치도 그 신부님이 성전 마당에 줄지어 서 있던 수많은 장사꾼들 사이에서 홀로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처럼 보이더랍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던 예수님께서 한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마치 시장 한 복판처럼 시끌벅적한 성전 마당을 둘러보시며 통탄하십니다. 조용하고 경건해야 할 성전 마당이 장사꾼들과 환전꾼들, 고리대금업자들로 빼곡했습니다. 제단에 바쳐질 동물들의 울음소리, 물건을 사고 파는 소리로 시끌벅적했습니다.
크게 분노하신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라고 질타하시며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내쫓으십니다. 갖은 물건들이 쭉 놓여있던 진열대를 둘러엎으십니다.
과격한 예수님의 모습에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전 당신 성전을 정화(淨化)시키십니다.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에 바라시는 바가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성전을 정화시켜야 할까 고민해봅니다.
우리끼리 만의 폐쇄적인 교회가 아니라 춥고 고달픈 세상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린 교회가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전 정화 작업이 아닐까요?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좌지우지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자발적인 참여와 구성원 상호 간에 적극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성전 정화작업이 아닐까요?
상상을 초월하는 건립기금으로 건립되는 성전이 아니라 방황하는 양떼를 극진히 사랑하는 겸손하고 예의 바른 사목자의 희생과 헌신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성전을 건설하는 것이 더 시급하지 않을까요?
우리 시대 사회적 약자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도 크게 환영받고 아무런 차별도 느끼지 않는 환대의 교회,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따뜻이 보듬어줄 수 있는 치유의 공동체, 나만 혹은 우리 가족이나 우리 본당만 생각하지 않고 더 큰 사랑을 실천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교회 건설이 시급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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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2)잘 들리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한 할머니와 오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노인성 난청이 와서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았기에 때로 글로 쓰기도 하고, 때로 손짓으로 말을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증세가 워낙 중해서 보청기를 착용해도 거추장스럽기만 하지 별 효과도 없다고, 그리고 특별한 치료방법이 없기에 그저 불편함을 참는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셔서 제 마음이 몹시 무거워졌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제 마음을 몹시 흔들어놓았습니다. 잘 안 들려서 불편한 것, 일상적인 의사소통 잘 안 되는 것은 그럭저럭 참을 수 있노라고, 그러나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한 가지 있는데, 미사 때 마다 신부님들이 하시는 그 좋은 강론말씀을 제대로 못 들으니 얼마나 마음이 괴로운지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저 성체모시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낙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귀가 잘 들릴 때, 건강할 때, 좋은 말씀 듣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기도도 건강할 때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아주 미세한 소리조차도 짱짱하게 들려오는 ‘성능 좋은’ 귀를 지니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 좋은 귀로 매일 선포되는 그 좋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마음에 새길 수 있다는 것, 우리가 건강하기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얼마나 큰 은총인지 모릅니다.
잘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큰 축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위령성월을 맞아 존경하는 원로수사님을 초청해 ‘죽음’을 주제로 한 피정강의를 들었습니다. 꽤 오랜 기간의 병고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던 수사님이셨기에, 한 말씀 한 말씀이 다 소중했습니다.
수사님께서 강의 말미에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투병생활을 하면서 한 가지 느낀 것이 있습니다. 몸이 아프면서 통증이 심해지면, 정신도 집중하기 힘들어지고 그에 따라서 기도도 제대로 하기 힘들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기도도 건강할 때 열심히 바쳐야 되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들, 건강할 때 부디 기도 많이 하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성전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성전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묵상하고, 되새기고, 기도하는 집인데, 당시 예수님께서 들른 성전은 소란한 시장터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제물을 미리 미리 준비해오면 좋을텐데, 겨우 성전 마당에 와서 제물을 준비하려다보니, 성전 앞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습니다. 제물로 바칠 짐승을 파는 상인들, 한 푼이라도 더 깎으려는 사람들, 환전상들, 고리대금업자들, 야바위꾼들, 소매치기들 등으로 우글거렸습니다.
거룩해야할 성전, 조용히 기도 안에 하느님과 일치해야할 성전이 각종 매매행위로 더럽혀진 것을 보신 예수님은 진노하십니다.
그 뻔뻔스런 상인들을 내쫓으십니다.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우리 신앙인 개인 각자 각자도 어떤 의미에서 성전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마음도 성전 정화대상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기초로 한 이웃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보다는 나만 생각하는 극도의 이기심으로 가득 찬 우리 마음 역시 성전정화의 대상입니다.
거룩한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질투심, 시기심, 교만, 음행, 사악함, 거짓으로 가득 찬 우리의 마음은 우선적인 성전정화의 대상입니다. 그토록 좋은 말씀이 선포됨에도 불구하고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리는 우리의 불성실한 모습 역시 성전정화의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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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NOXRG73Hs2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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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의 목적, 전례의 열매>
오늘 복음은 전례가 어떤 목적을 지향해야 하는지 밝혀줍니다. 복음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예수님께서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장면이고 그 다음은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내시는 장면이며 마지막은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가 왜 뿌리째 말라 죽어야만 했는지를 설명하시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서술 방법을 대칭 구조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통해 이스라엘 성전 전례를 비판하신 것입니다. 성전이 돈을 좋아하게 될 때 본래의 전례 목적을 상실하게 되고 그러면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전례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렇게 밝히십니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
특별히 용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용서하게 해 달라고 청하면 반드시 용서할 수 있다는 믿음을 마지막으로 심어주십니다. 강도의 소굴이 된 전례는 서로 돈을 좋아하고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온전한 전례가 이루어지는 성당은 서로 사랑하고 청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충만한 신자들이 많습니다.
1882년 프레드릭 카벤다쉬와 토마스 버크를 찔러 죽인 브라디라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공공연하게 자신을 고발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용서를 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구원 받을 수 없다고 하며 그를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 그것도 잘 알고 있고 자신도 죽어 마땅한 사람임도 알고 있지만 자신을 고발한 그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형 집행 전날, 한 수녀님이 그에게 면회 신청을 했습니다. 수녀는 그를 만나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브라디씨, 저는 어떤 사람을 몹시 미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사실 나의 신앙으로도 그를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수녀에게도 그런 일이 있습니까?” 브라디의 눈빛이 빛났고 수녀는 조용히 말을 계속하였습니다. “아무리 그를 용서해야 되겠다고 다짐하여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를 기회만 있으면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만 더해갑니다. 정말 어쩌면 좋겠습니까?”
수녀는 정중하게 문의했고 브라디는 제법 대견하게 대답했습니다. “안되지요. 용서하는 데는 까닭이 없지요. 그냥 마음을 풀어 버리면 되는 게 아닙니까?” “그게 안 되니까 말이지요.그래서 신앙 생활도 그만 두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나는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천만에, 그러지 마시오. 용서할 수 있도록 좀 더 힘쓰셔야죠!”
이때 수녀는 브라디의 손을 잡으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뵈닉스 공원에서 버크를 죽인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는 바로 나의 오빠입니다.” 그러자 브라디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큰 눈을 한참 감고 있더니, “죄송합니다. 그리고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저를 고발한 사람을 지금 용서합니다. 이제는 마음이 후련합니다. 감사합니다.” 신앙의 평화를 체험하고 브라디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랑과 관련된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용서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받아야만 줄 수 있는 것이 용서입니다. 내가 용서 받았다면 나도 용서해 줄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기 싫고 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브라디가 수녀님을 만나서 용서를 하고 싶고 용서할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처럼 전례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 받는 우리에게 이런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앞으로 아무도 없게 하겠다는 결심이 생겨야 전례에 온전히 참여한 것입니다.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1997년 7월 12일 파키스탄 북서부 스와트 지구의 밍고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두 형제와 자매 중 장남인 수니파 무슬림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말랄라의 아버지인 지아우딘 유사프자이는 교육 활동가이자 학교 소유주로 소녀들을 위한 교육을 장려하는 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말랄라의 삶에 영향력 있는 인물로 봉사하여 그녀에게 교육에 대한 사랑과 학습할 권리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당시 여자는 교육 받을 권리가 없었습니다. 지아우딘은 탈레반의 행동에 반대하며 소녀들을 위한 교육을 공개적으로 장려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의심할 여지 없이 말랄라 자신의 행동 주의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2008년 말랄라가 겨우 11살이었을 때 그녀는 파키스탄 페샤와르에서 “어떻게 탈레반이 교육에 대한 기본권을 빼앗아 갈 수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격려로 말랄라는 BBC에 익명의 블로그를 쓰기 시작하여 소녀들의 학교 출석을 금지한 탈레반 치하의 삶을 설명했습니다.
2012년 10월, 당시 15세였던 말랄라는 그녀의 행동주의와 유명세 때문에 탈레반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한 탈레반이 그녀의 학교 버스에 올라타 그녀의 이름을 묻고 그녀의 머리에 총을 쐈습니다. 그녀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파키스탄에서 초기 치료를 받은 후 치료를 위해 영국 버밍엄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말랄라는 이 잔인한 공격에서 살아남았고, 그녀를 침묵 시키는 대신 그녀의 삶에 대한 시도는 그녀의 결심을 강화했습니다. 회복 후 그녀는 전 세계 소녀 교육을 옹호하면서 더욱 활기차게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2014년 17세의 말랄라는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한 억압에 맞서고 모든 어린이의 교육권을 위해 투쟁한 공로로 최연소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평생 동안 말랄라와 그녀의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녀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영향력과 지원은 그녀의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그녀가 말하도록 격려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며, 극도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 사회의 문화적 규범에도 불구하고 지아우딘은 그의 딸을 세상을 바꿀 잠재력이 있는 개인으로 대했습니다. 그는 딸과 여자들의 인권 성장을 위해 자신의 딸부터 날개를 꺾지 않았고 그것이 한 나라의 교육 제도를 변화 시키는 큰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말랄라가 아버지를 만남으로써 불가능이 없다고 믿게 된 것처럼 우리도 할 수 없다는 내가 죽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나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하느님과의 만남인 미사입니다. 이러한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면 우리 전례도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는 저주를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가 세상 종말일 것입니다. 용서와 능력의 열매가 맺히는 전례가 되도록 힘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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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성지순례를 다녀오면서 ‘감기’가 친구처럼 따라왔습니다. 긴 비행시간과 긴장 때문에 몸의 면역력이 약해 진 것 같습니다. 몸져눕지는 않았지만 생활에 불편이 있었습니다. 목소리가 변해서 강론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침을 삼키면 목이 불편했습니다. 콧물과 가래가 있어서 주머니에 휴지를 가지고 다녀야 했습니다. 감기는 약을 먹으면 1주일, 약을 안 먹어도 1주일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번에는 약을 먹었어도 10일이 넘었습니다. 다행히 목소리도 돌아오고, 목에 이물감도 없어지고, 콧물과 가래도 그쳤습니다. 감기 덕분에 집에 머물면서 성지순례의 기쁨과 감격에 좀 더 머물 수 있었습니다. 함께 했던 분들이 ‘광야’에서 봉헌했던 미사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했습니다. 그 미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함께 광야에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렸던 모습을 떠올린 것 같았습니다. 저도 그날 광야에서의 미사가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바위, 바람, 모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순례자들, 서쪽으로 기울어가던 태양이 생각납니다.
한때 ‘삼포세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 삶의 근간이 되는 것들입니다. ‘연애, 결혼, 자녀’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우리의 현실이 결코 녹녹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삼포를 넘어 오포와 칠포세대라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연애, 결혼, 자녀, 인간관계, 집, 꿈, 희망’을 포기하는 세대를 이야기합니다. 우리 사회가 ‘재물, 성공, 권력’이라는 바벨탑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무한 경쟁의 시대에 도태되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소확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의미합니다. 복지와 나눔, 연대와 협력으로 상생의 길을 찾는 다면 우리는 ‘소확행’의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가 성지순례를 가는 것은 ‘길’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길을 찾았다면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걷기 위해서입니다. 혼자서는 외롭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장애물을 만나면 쉽게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강을 건넌 사람은 굳이 배를 가지고 가지 않습니다. 더 이상 배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라는 ‘강’을 건너지 않았기에 우리는 아직도 신앙생활을 하고, 성지순례를 다니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주님께 자비를 청하는 ‘바르티메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르티메오는 눈이 보이지 않는 소경입니다. 주님께서는 예전처럼 보고 싶다는 바르티메오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이제 눈을 뜬 바르티메오는 주님의 길을 따라갑니다. 팬데믹 3년을 지내면서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신앙의 지표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지표는 ‘성사 생활’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가 이루어지는 ‘미사’의 참례자 수가 줄었습니다. 예전에는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던 고백성사도 줄었습니다. 복음 선교의 결과인 세례성사도 줄었습니다. 현장에 있는 사목자의 고민은 깊어가지만 영적인 눈을 뜨려고 하는 신앙인의 열정은 식어갑니다.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동전, 되찾은 양,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목자들은 신발 끈을 다시 매고 길을 나서야 합니다. 봉사자들은 기름을 준비했던 열 처녀처럼 불을 밝혀야 합니다. 팬데믹의 파도에 주저앉은 이웃들을 주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저희가 그릇된 가르침을 물리치고 참된 믿음을 굳게 지켜 나가게 하소서. 주님의 업적은 그분의 말씀으로 이루어졌고, 그분의 결정은 선의에서 나왔다. 그분께서는 지나간 일과 다가올 일을 알려 주시고 숨겨진 일들의 자취를 드러내 보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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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1,11-25: 하느님을 믿어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정화하신다. 성전에서 나와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았을 때 제자들은 놀랐을 것이다. 무화과나무는 수분을 듬뿍 머금고 있어서 잘라 낸 다음에도 완전히 마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무화과나무는 다른 나무들보다 훨씬 먼저 물이 오르고 부드러워진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들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이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마태 24,32; 마르 13,28; 루카 21,30)
주님께서 찾으셨던 무화과는 율법의 잎은 달고 있지만, 실천의 열매가 없는 회당의 열매였다. 주님께서는 그때가 무화과 철이 아님을 잘 알고 계셨다. 시장하신 주님께서 나무에서 무언가를 찾으셨을 때, 그분은 무엇인가에 굶주리시면서 다른 어떤 것을 찾고 계셨다.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고 나무를 저주하셨고 즉시 말라버렸다. 율법이라는 잎은 무성하지만, 실천이 없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결국 말라버리고 말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세속적인 사업이 벌어지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야바위꾼들을 내쫓으시고, 장사하기 위해 나르던 물건들과 함께 그들을 모두 내쫓으셨다.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17절). 이 말씀은 “하이에나가 나의 소유를 탐욕스레 바라보느냐?”(예레 12,9)는 말씀과 같다. 하이에나는 밤에만 나타나는 동물로 피를 먹고 썩은 고기를 청소하는 짐승이다.
성전을 정화하시고 나서 제자들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있는 것을 보았다.”(20절) 우리는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의 종말을 겪지 않도록 포도 줄기와 굳건히 연결되고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언젠가 우리가 그분을 만났을 때, 이렇게 외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하느님 집에 있는 푸른 올리브 나무 같아라. 영영세세 나는 하느님의 자애에 의지하네.”(시편 52,10)
주님께서는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믿는”(23절) 이의 기도는 열린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 부서진 마음의 열매이며(참조: 시편 34,19; 이사 66,2) 뉘우치는 마음의 결실을 말한다. 기도는 헤아릴 수 없는 선의 뿌리요 샘이며 무수한 축복의 어머니이다. 우리는 기도의 힘으로 우리가 청하는 것을 이미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알아주시고 청하는 바를 즐겨 들어 주시리라 믿는 그만큼 청하는 바도 얻고 응답도 받게 된다. 진정한 믿음을 갖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그러면서 용서를 통한 사랑의 기도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여야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이러한 삶으로, 이러한 기도로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이다.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25절) 우리의 삶이 항상 용서를 통하여 사랑의 기도를 주님께 바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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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경고>
“이튿날 그들이 베타니아에서 나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시장하셨다. 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멀리서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셨지만,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하여 이르셨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마르 11,12-14) 이 이야기와 루카복음에 있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6-9)
여기서 ‘올해’는 회개하라고 주신 마지막 기회를 뜻하고 ‘내년’은 심판의 날을 뜻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올 것입니다. 그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스러지며, 땅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2베드 3,8-10)
‘지금’이라는 시간은, 주님께서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시간인데, 이 시간이 언제까지인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회개는 ‘지금’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르코복음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 회개할 시간도 안 주시고 곧바로 심판의 말씀을 하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고,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은 것을 발견한 때가 그 다음날 아침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마르 11,20), 곧바로 심판하신 것은 아니고, 회개할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 또는 신앙인입니다. 잎은 무성한데 열매가 없다는 것은, 겉으로만 잘하고 속은 그렇지 않은, 즉 ‘쭉정이’처럼 살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위선자들을 뜻하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도 있는데, 주님의 심판은 인간이 정한 때가 아니라, 주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지금은 회개할 때가 아니라, 먹고 놀고 즐기는 때다.”라고 말하는 것은 주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모독죄입니다. ‘부르심’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지금은 제가 다른 일로 바쁘니까, 나중에 좀 한가해지면 그때 다시 불러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오만한 사람의 경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은 여러 가지로 바빠서 신앙생활을 못한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그때 하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 회개, 응답에 ‘나중’이란 없습니다. ‘나중’은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간입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르 13,32-33)
‘무화과나무 이야기’ 뒤에 있는 ‘성전 정화’ 이야기도
심판하신 이야기가 아니라 회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성전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예수님께서 쫓아내신 일을 심판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세속적인 장사를 하는 것을 금하셨을 뿐이고, 사람들을 ‘파문’하신 것은 아닙니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마르 11,17)라는 말씀도 심판하신 말씀이 아니라 회개하라고 꾸짖는 말씀입니다.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전락시키지 말고,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회복시켜라.”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북적대는 모습만 보면, 성전에 활기와 생동감이 넘치는 것으로, 또 ‘살아 있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 사리사욕을 채우는 짓이었으니, 그 성전이 바로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혹시 잎은 무성한데 열매는 없는 위선자는 아닌지, 또는 겉만 그럴듯하고 속은 그렇지 않은 ‘쭉정이’는 아닌지, 각자 스스로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 나아가십시오."(2베드 3,13-15ㄱ.18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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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를 꽤 당혹스럽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발견하시고 거기에서 허기를 채울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가까이 다가가십니다. 그러나 아무 열매도 없다는 사실에 곧바로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대로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무화과가 열리는 철도 아니었는데, 아무리 시장하셨다고 하여도 너무 매정하게 보입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셨을까요?
사실 이 사건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는 장면과 그 저주가 이루어지는 장면 사이에 의도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시는 이야기를 끼워 넣고 있습니다. 독자들이 두 이야기를 연결 지어 생각하도록 유도하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무화과나무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게 됩니다. 당대의 성전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제구실을 못 하는 지경에 놓여 있었는데, 그 이해 당사자들과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이 그곳을 ‘기도의 집’이 아니라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더 이상 구원의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곧 구원의 기능을 완전히 잃어 버린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7).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19) 이제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시게 된 우리 자신이, 곧 우리의 몸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새로운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새로운 성전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습니까? 혹시 환전상들과 물건을 사고파는 자들이 새 성전의 뜰에도 여전히 넘쳐 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온갖 세속적인 생각들이 우리 머릿속을 어지럽히며 구원의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요? 새 성전이 된 우리는 열매 맺는 무화과나무여야 합니다. 혹시 열매가 열렸을까 다가오시는 분께 실망을 안겨 드리지 않도록 날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정화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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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홍성만 미카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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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신동원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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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용진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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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무슨 숨은 뜻이 있지 않겠나?>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평상시의 삶을 볼 때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닌데 한마디 던지는 소리가 영 비위에 거슬릴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속에 무슨 의미를 담고 그런 소리를 하였을까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하여 숨은 뜻을 찾아내면 오해와 속상함을 넘어 기쁨을 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았으나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마르11,1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는 말라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아닌 일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였단 말입니까?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나무는 많은 열매를 맺는 나무로 존중되었습니다. 평화와 안정, 번영의 표징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꽃 피고 수많은 열매를 맺음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축복해 주는 것으로(요엘2,22 ; 하깨 2,19), 반면에 메마르고 열매 맺지 못함은 하느님의 심판으로 간주되었습니다(예레5,17. 8,13).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쓸 만한 사람이 없음을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열매에 비유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는 저주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당신 뜻을 드러내고자 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보살핌을 충분히 받았음에도 걸맞은 결실을 내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꾸짖은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는 이스라엘에 대한 엄중한 경고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무화과나무는 곧 이스라엘을 상징하며 구체적으로는 성전과 율법학자나 수석 사제, 백성의 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잎은 무성하여 열매가 있을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사라지듯이, 자리만 차지하고 세상과 타협한 종교 지도자들도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허우대는 멀쩡하나 껍데기만 남아있는 하느님 경신례와 각종 행사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사실 성전의 겉은 화려하게 꾸몄으나 하느님의 의로움과 현존을 보여주지 못하는 성전은 이미 성전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 엎으셨습니다(마르11,15). 기도 없는 성전은 건물에 불과합니다.
수석 사제, 율법학자들은 스스로 권위를 내세우고 힘이 있는 듯이 행동하였지만, 하느님보다 돈을 먼저 생각하였으니 그가 몸을 담고 있는 곳이 성전이라 해도, 비록 그가 하는 일이 합법적이라 해도 예수님의 눈에는 강도일 뿐입니다. 여기서 ‘강도’는 칼을 든 개인 강도라기보다는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억압과 착취, 특히 성전 체제를 중심으로 한 지배 권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강도의 소굴을 다시 ‘기도의 집’으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돈벌이와 탐욕에서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분의 뜻을 잘 헤아리고 우리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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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세상에는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풍요와 안정을 누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한 끼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굶주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2020년 조사를 보니 기아 인구가 전 세계에 자그마치 8억 1천만 명입니다. 특히 아프리카의 상황이 좋지 않은데, 인구 5명당 1명이 영양 부족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이 뉴스를 보면서, 마더 데레사 성녀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간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돌보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과 제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주고 추위에 떠는 사람들에 옷을 나누어줄 우리의 손을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즉,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도구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 달라고만 청합니다. 여기에 자기의 어려움마저 해결해 달라고 하면서, 자신이 하느님의 주인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 어려움을 해결해주지 않으면 불공평한 하느님이라면서 불평불만을 쏟아냅니다.
이런 불평불만을 쏟아내기 전에, 하느님의 도구답게 살고 있었는지를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의 손을 필요로 하시는데, “제가 바빠서요. 제가 왜 해야 하는데요? 저한테 뭐 해 준 것이 있나요?” 등의 말을 하면서 손이 되기를, 주님의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거부하는 우리의 모습을 과연 주님께서 좋아하실 리가 없습니다.
복음을 보면, 시장기를 느끼신 예수님께서 마침 길가에서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십니다. 그 열매는 시장기를 끄기에는 충분치 않았겠지만, 허기를 잠재우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열매를 기대했는데, 잎만 무성했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잎이 나기 전에 먼저 열리는 과수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다가갔을 때 그 잎이 무성했다면 이미 열매가 맺어 있어야 하는데 어떤 열매도 달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쓸모없는 나무이지요. 이렇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결국 뿌리째 말라 버립니다.
우리도 열매 맺을 가망이 없어 보이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열매를 원하셔서 다가오시는 예수님인데 철저하게 외면하면서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서 계속 의심합니다. 할 수 없는 이유만을 찾으며 자신이 옳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도구가 되어 열매를 맺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뿌리째 말라 버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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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을 믿어요>
마르코 11,11-25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다, 성전을 정화하시다, 말라 버린 무화과나무의 교훈)
예수님께서 군중의 환호를 받으시면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곳의 모든 것을 둘러보신 다음,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타니아로 나가셨다.
이튿날 그들이 베타니아에서 나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시장하셨다. 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멀리서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셨지만,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하여 이르셨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셨다.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엎으셨다. 또한 아무도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군중이 모두 그분의 가르침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 그분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날이 저물자 예수님과 제자들은 성 밖으로 나갔다.
이른 아침에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는 것을 보았다. 베드로가 문득 생각이 나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보십시오. 스승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
<하느님을 믿어요>
오직
사랑함으로써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믿어요
오직
정의로움으로써
정의로우신 하느님을 믿어요
오직
진실함으로써
진실하신 하느님을 믿어요
오직
자비로움으로써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믿어요
오직
평화로움으로써
평화로우신 하느님을 믿어요
오직
품음으로써
품으시는 하느님을 믿어요
오직
베풂으로써
베푸시는 하느님을 믿어요
오직
함께함으로써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믿어요
오직
이음으로써
이으시는 하느님을 믿어요
오직
살림으로써
살리시는 하느님을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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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저주받는 나무와 축복받는 나무>
오늘 주님 모습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이 분이 과연 주님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당신이 시장하신데 열매 맺지 않았다고 죽으라고 저주하시고, 성전의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난폭하게 쫓아내십니다.
이런 주님이 우리가 알고 있는 주님 맞습니까? 이런 주님을 우리가 믿어야 하고 사랑해야 합니까?
이런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분명 시험하고, 주님의 이런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많이 생각게 합니다.
우선 주님은 우리처럼 당신 입맛에 맞지 않아서 이러신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믿어야 하고, 더 나아가 이런 충격적인 방식을 통해 가르침 주시려고 이러시는 것이라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만약 아무도 없이 당신 혼자셨다면 이러셨을까 우선 생각해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라고 분명히 얘기하는데 이를 보면 제자들이 들으라고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우선 성전의 주인도 주님이시고 모든 생명의 주인도 주님이시라는 것을 제자들을 통해 세상에 천명하시고 알게 하시려고 이리하신 것일 겁니다.
두 번째로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나 성전은 이런 운명이 될 거라는 경고의 뜻으로 이렇게 하신 것일 겁니다.
복음 다른 곳에서 열매 맺지 않는 나무를 주인이 베라고 하시자 나무 재배인이 주인에게 정성을 들여 더 가꿀 테니 한 해만 말미를 달라고 할 것이라는 비유를 주님께서 들려주시는데 여기서 나무 재배인은 주님이시지요.
그러므로 복음서 전체적으로 볼 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없어질 운명이지만 주님은 나무들이 열매를 맺도록 정성을 들이는 분이시고, 정성을 들이셨는데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주님도 어쩔 수 없으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열매를 맺기를 원하실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회개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다시 회개의 열매란 어떤 열매입니까? 사랑이고 선행일 것이고, 사랑과 선행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열매를 맺는 나무였습니까? 지금 우리로 치면 우리의 성당들은 열매를 많이 맺는 나무입니까?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장사꾼과 도둑들이 설치는 곳이었고 그래서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나무와 같았습니다.
지금 우리 성당이나 공동체도 주님 사랑을 나누는 성전이 아니라 자기들의 물건을 사고팔고 이익이나 나누는 곳이라면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이고 주님의 분노를 살 것입니다.
우리 개인도 열매 맺는 나무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도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자들이란 회개하는 사람들이라고 그러니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면서 그러면 오늘 복음의 나무처럼 저주받지 않고 축복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며 자신들의 육신을 그 악습과 죄와 더불어 미워하고,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며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들, 오, 그런 일을 실천하고 그런 일에 항구하는 남녀들은 얼마나 복되고 축복받은 사람들인지!”
주님께서는 불행해지라고 저주하시는 분이 아니라 회개치 않으면 불행해질 거라고 경고하시는 분이라고 우리는 믿지만 혹여 저주나 경고나 받고 축복은 받지 못하는 우리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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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 열매, 성전, 기도, 용서 -
어제 모처럼 크게 화를 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엉뚱하고 황당한 전화를 아주 자연스럽게 하는 자매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정상인줄 알았는데 후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신분열 환자였습니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과대망상, 정신분열 현상임이 분명해보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화를 낼 일이 아니라 강력히 치유를 권할 내용입니다.
요즘 정신질환 환자들이 너무 많아 보입니다. 특히 주변에서 자주 발견되는 우울증 환자들입니다. 자연과 날로 멀어지고 관계 불통으로 인한 원인이 크겠습니다. 정말 공부의 유무, 학식의 유무를 떠나 건강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합니다. 어느 자리에 살던지 제자리에 깊이 뿌리내리고 제정신으로 제대로 책임을 다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진정 건강한 삶이겠습니다.
어제까지 퇴계평전, 율곡평전, 다산평전을 다 읽었습니다. 두고두고 읽을 평전입니다. 참으로 일류의 선비는 일류의 시인이자 성인이요 소통의 사람, 우정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세 대학자 선비는 정말 온전한 참 사람의 전형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부럽고 감동적인 점은 이분들에게 한시로 나누는 대화는 너무나 자연스런 일상이었다는 것입니다. 깊이 공감하는 진실하고 담백하게 자연스런 한시로 나눈 대화였습니다.
어떻게 온전한 참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이또한 평생여정이자 평생과제입니다. 결국 믿는 이들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하느님의 자녀가, 참나의 성인이 되는 것이겠습니다. 평생 수행과 훈련의 목적도 여기 있습니다. 바로 저는 오늘 복음에서 참사람의 성인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제1독서 집회서도 ‘훌륭한 사람들과 역대 선조들을 칭송하자’ 권하며 존재감 없는 사람들에 대해 간단히 서술합니다.
“어떤 이들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고, 존재한 적이 없었던 듯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태어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되었으며, 그 뒤를 이은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렇게 존재감없이 살다가 사라져갔겠는지요. 요즘도 꿈과 희망을 잃고 무의미한 삶을 견디지 못해 자살로 불행히 세상을 떠나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반면 훌륭한 삶을 살았던 이들 또한 많습니다. 이들에 대한 소개가 집회서 다음에 나오지만 미사독서에는 소개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 사람들은 자비로워, 그들의 행적이 잊히지 않았다. 그들의 자손은 계약을 충실하게 지키고, 그들 때문에 그 자녀들도 그러하리라. 그들의 자손은 영원히 존속하고, 그들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어, 교회의 자녀들이 되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온전한 참나의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새삼 2천년 거룩한 전통에 무수한 성인들을 지닌 가톨릭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늘 보고 배울 삶의 좌표로 삼을 성인들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오늘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후 하루 삶의 일정을 통해 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첫째, “열매를 맺어라!”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일과 말라 버린 무화과 나무의 예화가 나옵니다. 바로 적대자들은 물론 제자들에 대한 경각심을 주기 위함입니다. 나뭇잎들만 무성하고 열매없는 삶이라면 얼마나 허망하겠는지요! 바로 이런 언행불일치의 사람들, 말만 있고 행함이 없는 무책임한 사람들에 대해 주님은 열매를 맺으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열매 “실(實)”자가 들어가는 말처럼, 바로 하루하루 사랑의 섬김과 책임을 다하면서 진실(眞實)하게 성실(誠實)하게 충실(忠實)하게 절실(切實)하게 주님께 불림받은 정주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책임을 다하며 결실(結實)있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비상한 열매들이 아니라 나다운 삶의 열매, 사랑의 열매들입니다. 기도하고 일하고 공부하고가 균형과 조화를 이룬 한결같은 삶에서 자연스런 삶의 열매, 사랑의 열매이겠습니다.
둘째, “성전을 정화하라!”입니다.
보이는 성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성전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에 속해 있는 우리 하나하나가 거룩한 성전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인 나를 성령의 은총으로 끊임없이 정화하고 성화하며 잘 돌보고 관리하는 것입니다. 오늘 무화과나무의 두 비유 사이에 위치한 성전정화 사건이 주는 가르침입니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가시적 성전이 속화와 부패와 타락이라면 거기 전례에 참석하는 신자들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세상을 성화해야 할 거룩한 성전이 속화되어 있다면 각자의 성전도 속화되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제대로 거룩한 공동전례가 이뤄짐과 동시에 각자의 성전도 정화되고 성화될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 충만한 삶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성령의 은총이 거룩한 공동전례는 물론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며 균형잡히고 조화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성령의 인도따라 경청의 분위기에서 거룩한 미사전례 참석은 물론 기본 수행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셋째, “기도하라!”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나중 남는 얼굴은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중 하나일 것입니다. 기도없는 삶은 공허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이 될 위험이 다분합니다. 기도와 삶이 함께 가듯, 기도와 믿음도 함께 갑니다. 기도의 훈련과 습관과 더불어 믿음의 훈련과 습관도 절실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와 믿음입니다. 기도의 힘, 믿음의 힘은 그대로 하느님의 힘입니다. 기도와 믿음을 통해 진리이자 생명인 주님을 만나야 주님과 소통해야 비로소 온전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와 성전정화 사건이 이어 예수님은 믿음과 기도를 강조하십니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받은 줄로 여겨라.”
아무것이나 원하는 것을 청할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입니다. 정말 꼭 필요로하여 청할 것은 성령이요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여 알 수 있는 지혜이겠습니다. 참으로 간절히 항구히 기도할 때 튼튼한 믿음에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충만한 삶에 하느님의 뜻에 따른 기도라면 그대로 응답될 것입니다.
넷째, “용서하라!”입니다.
서로 살기위해 용서입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우리도 주님께 용서를 받습니다.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연민과 배려, 존중과 배려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용서입니다. 숨쉬듯이 밥먹듯이 사랑의 용서입니다. 새삼 용기있는 행위가 용서요, 용서도 부단한 의식적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
유다인들은 일반적으로 서서 기도했습니다. 서로 용서를 통해 화해하고 소통해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의 소통이라는 것입니다. 아, 이런 용서의 훈련과 습관에 앞서 부단 회개의 훈련과 습관이 전제되어야 함을 봅니다. 정말 나부터 살기위해 의식적 회개와 용서가 필수입니다. 용서가 안되더라도 용서한다고 고백하며 일단 던져놓고 보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용서의 은총이 주어질 것입니다.
참나의 성인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싶습니까?
평생은총과 더불어 평생과제의 수행이 뒤따라야 합니다. 물론 성령의 도움이 절대적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는 언행일치의 삶을 사십시오. 성령의 은총으로 자신의 성전을 끊임없이 정화하고 성화하면서 잘 보살피고 관리하십시오. 끊임없이 간절히 항구히 기도하며 믿음을 굳세게 하고, 이어 끊임없이 용서하십시오. 용서도 의식적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참 좋으신 주님의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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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마르11,17)
<성전의 의미!>
얼마 전 배둔공소의 성전 봉헌식(5.13)이 있었습니다.
새성전을 지어야겠다고 최종적으로 마음을 먹고 추진하게 된 지 약 10개월 만에 새성전이 건립되었습니다.
배둔 공동체만을 위한 성전이 아니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전은 모든 이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기 때문에 믿는 모든 이들을 생각하면서 지었습니다.
그런 성전이라는 것이 타교구에서 많은 형제자매님들께서 도움을 주신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지난 5월23일 날짜로 결산 마무리를 하고 결산보고서를 작성했는데, 부족함 없는 충분한 사랑을 보내주셨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제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이 새 성전이 성전으로써의 기능을 다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성전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곳입니다. 성전은 답답하고 힘이 들 때 들어와 쉬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성전에서 힘을 얻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면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이 큰(???) 성전을 우리가 어떻게 관리할 수 있는가? 관리비도 제법 들어갈텐데, 우리가 어떻게 감당하라는 말인가?'
이 말에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하느님의 성전을 친목모임의 장소 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보여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성전이 성전으로써의 기능을 다한다면, 돈을 뛰어넘는 큰 은총을 받을텐데.
성전이 세상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강도의 소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전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는 곳'이고, 그래서 '나도 하느님의 사랑이 되는 곳'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집이 우리 곁에 있음에 깊이 감사드리면서, 나의 발길이 이런 하느님의 성전으로 늘 향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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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cmXkaFx7Jf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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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마르 11, 17)
기도로
아침이
열립니다.
기도가
중심이 되는
기도의 집입니다.
매일의 삶이
기도이며
기도는 우리의
매순간이 됩니다.
회개의 삶이
바로 기도의
집이 됩니다.
회개로
이루어지는
기도의
열매입니다.
기도처럼
열매도
알차게
자라납니다.
세상은
기도를 통해
더욱
따뜻하여 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길을 잃게 되는
신앙인의 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기도입니다.
우리를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
기도임을
깨닫습니다.
가장 멀리
계신 하느님이
가장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이 되십니다.
기도는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의
편이 됩니다.
기도가
기도를
위로합니다.
기도가
예수님처럼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기도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맑고
아름답습니다.
우리에게는
기도가 있고
기도로
이겨낼 수 있는
삶의 무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신
기도라는 이름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기도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기쁨입니다.
기도의 주님이신
예수님께
우리의
공동체를
맡깁니다.
끊어진 관계를
이어주시는
주님께서
기도의 열매를
다시 맺어 주십니다.
모든 일의
시작과 끝에는
기도가 있습니다.
주고받는
간절한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기도의 집은
강도들의 소굴이
아닙니다.
기도의 집은
하느님을 향한
기도로
아름다워집니다.
기도의 열매는
용서와 사랑
감사와
이루어짐의
열매입니다.
기도를 믿고
기도할 수 있게
도와주시는
하느님을
믿고 따릅니다.
기도의 집은
기도의 집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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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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