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바 가야
풍랑을 뚫고 높이 튀어 올라 영혼털이를 끝낸 블랙파이어렛은 다시 통나무배를 끌고 질주했다.
그러나 도치씨를 수중동굴까지 끌고 갈 때의 파워와 현저히 달랐다.
100m쯤 질주하면 도치씨의 브레이크에 멈추었다.
한번 채고 나가는 거리도 50m로 줄었다.
원줄에 전해져 오는 저항도 훨씬 덜했다.
차고 나간 만큼의 원줄을 감으면 고분고분 딸려오다 30m정도 치고 나갔다.
그 거리도 20m로 줄었다.
마음만 먹으면 정면승부도 가능하다고 판단했지만, 도치씨는 무리하게 서두르지 않았다.
블랙파이어렛을 굴복시킨다 해도 초속20m이상의 강풍과 높은 파도위에서 작은 통나무배 하나로 블랙파이어렛을 처리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만약 폭우가 다시 쏟아진다면 상황이 급변하게 변할지도 모를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도치씨는 블랙파이어렛이 완전히 지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원줄을 감았다 블랙파이어렛이 조금이라도 저항하면 풀어주었다.
똑 같은 패턴이 계속될수록 극한의 강렬했던 손맛도 차츰차츰 무뎌졌다.
긴장감은 완전히 사라졌고, 반복되는 블랙파이어렛의 저항은 오래 길들여 진 손맛처럼 익숙해졌다.
때로 블랙파이어렛이 강하게 저항해도 도치씨는 원줄의 데드라인을 100m 이내로 책정하고 항상 그 범위 안에서 원줄을 풀거나 감았다.
시간이 흘렀다.
도치씨가 브레이크를 걸면 블랙파이어렛은 즉시 저항을 멈추었다. 마치 순종하는 애완동물 같았다.
지루한 생각마저 든 도치씨는 아시발을 뒤돌아봤다.
아시발은 선두의 용머리를 껴안고 꾸뻑꾸뻑 졸고 있었다.
졸고 있는 아시발을 보는 순간 도치씨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눈물이 날 정도로 큰 하품을 했다.
서서히 눈꺼풀도 무거워졌다.
낚시를 하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입질이 없어 졸거나 하품해 본적은 있었지만 물고기를 히트시켜 놓고 이렇게 느슨해보기는 처음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기상에 출조할 수도 없었겠지만, 이제는 파도나 바람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잔잔한 수면보다 변화무쌍한 파도타기를 즐기는 기분이었다.
문득, 낚시와 사랑은 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트시킨 물고기의 종류에 따라 손맛의 느낌이 다르듯, 수많은 인연들 중 승화하는 사랑을 찾아내면 그 기쁨은 삶의 희열이기 때문에 낚시나 사랑은 동질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쉽게 만날 수도 없고 쉽게 끌어 낼 수도 없고, 쉽게 끌어내서도 안 되는 블랙파이어렛을 시바 가야에 비교했다.
어서 셈프로나로 돌아가 가야를 만나고 싶었다.
어떤 경우라도 이번엔 가야에게 프러포즈하리라 다짐했다.
20분 째 블랙파이어렛의 저항은 없었다.
긴장감 없는 대치상태만 계속되었다.
눈꺼풀이 더 무거워졌다.
깜빡 졸았다.
그 짧은 순간에 가야가 환히 웃고 있었다.
가야를 만난 건 뜻밖의 운명이었다.
마닐라에서 말레이시아로 날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도치씨는 단호하게 결심했다.
이번엔 꼭 가야에게 프러포즈 하리라고 매번 다짐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프러포즈할 기회가 되면 혀가 굳어버리거나 꼭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다.
그래서 매번 실패했다.
해변을 끼고 드라이브할 때도 그랬고, 셈프로나 해변의 카페에서도 그랬다.
시바 가야와 함께 있으면 한없이 행복했지만, 프러포즈할 찬스엔 언제나 고백을 못했다.
가야를 처음 만난 곳은 셈프로나가 아니었다.
도치씨는 일 년간의 업무평가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포상은 4일간의 패키지휴가였다.
일 년간 거의 낚싯대를 잡지 못했던 도치씨는 트롤낚시를 선택했다.
푸른 바다를 누비며 마음껏 낚시 즐길 화려한 상상으로 일주일을 보낸 후, 마침내 타히티로 날아갔다.
폴리네시아군도는 업무여행으로 몇 번 다녔지만 타히티는 처음이었다.
수상리조트는 해변에서 수평선을 향해 거의 100m를 잔교로 걸어가야 있었다.
리조트의 창문을 열자 탁 트인 바다가 한눈에 펼쳐졌다.
가방을 풀기 전에 낚시채비부터 시작했다.
워밍업 겸, 루어낚싯대에 웜을 끼우고 테라스로 나갔다.
캐스팅한지 1분도 안되어 첫 입질을 받았다.
주둥이가 길쭉한 트럼펫피시가 딸려 나왔다.
금방이라도 루이암스트롱처럼 재즈를 연주할 듯 긴 주둥이를 뻐끔거렸다.
포획한 대상어와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는 도치씨가 트럼펫피시와 눈을 마주쳤다.
“너, 루이암스트롱 알지?”
트럼펫피시가 꼬리를 흔들었다.
“야! 좋은 음악 연주하라고 보내주는 거야. 알았지?”
트럼펫피시의 주둥이에 입을 맞추고 바다로 돌려보냈다.
워밍업을 끝낸 도치씨는 투어 백을 열고 차근차근 여장을 풀기 시작했다.
“따르륵 따르륵!”
수화기를 들었다.
맑은 목소리로 데스크직원이 저녁식사예약에 관해 물었다.
잠깐 망설이던 도치씨는 예약을 하지 않았다.
테라스에서 가져온 라면을 끓이기로 했다.
라면을 이런 분위기에서 먹는다면 바다가재풀코스보다 더 진수성찬일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도치씨의 오판이었다.
해가지고 밤이 되어 가스버너로 라면을 끓였지만 리조트포트의 물도 끓이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바람 때문이었다.
객실주방으로 들어와 간신히 라면을 끓이긴 했지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도치씨의 예감은 적중했다.
라면을 다 먹었을 때는 바람이 거세지고 파도가 높아져 테라스를 넘실거렸다.
자정 무렵 리조트직원들의 비상안내를 받아 리조트의 본건물인 호텔로 이동했다.
직원들은 아침이 되면 비취 같은 바다와 찬란한 태양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날이 밝으면서 바람은 80mm의 강우를 동반한 풍속27m의 싸이클론으로 변했다.
타히티가 폭풍에 날려가는 것 같았다.
도치씨뿐만 아니라 타히티를 찾은 관광객 거의 하루 종일 호텔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뒤집힌 바다를 내다보며 도치씨는 호텔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거나, 게임장을 들락거렸다.
발생지역의 태풍은 경로이동이 빠른 것이 통상이지만, 밤새 발생한 싸이클론은 이틀 동안 타히티에 머물렀다.
작은 섬나라에서 폭풍에 갇힌 도치씨는 호텔 캐노피 밑에도 나갈 수 없었다. 맞바람을 차단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시설물 때문이었다.
지루하다 못해 짜증으로 이틀을 보냈다.
출국전날 오후.
도치씨의 낚시계획을 무참하게 짓밟아버리고 거짓말처럼 사이클론은 타히티를 떠났다.
원래의 아름다운 섬나라로 되돌아왔지만 모든 것은 끝난 후였다.
호텔 앞의 바다위에 호텔직원의 말처럼 찬란한 태양이 무지개를 동반하고 나타났지만 그 모든 광경은 저주스러웠다.
혹시나 하고 세워두었던 낚시장비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낚시를 체념했기 때문에 새 팬티도 입었다.
“똑 똑 똑!”
노크소리에 문을 열었다.
함께 낚시하려던 가이드였다.
가이드가 미안한 표정으로 두 장의 티켓을 내밀었다.
“멋진 낚시를 기대했을 텐데 정말 아쉽습니다. 만약 다음에 오시면 꼭 만족한 낚시가 되도록 약속드리겠습니다.”
티켓을 받아 들고 도치씨가 물었다.
“이게 뭔가요?”
“사이클론 때문에 취소되었던 타히티댄싱콘서트를 오늘 밤 정상적으로 오픈한다는군요. 위로해드리려고 준비했는데 같이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야외공연장은 호텔에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도치씨가 여행 중 경험했던 민속공연장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규모면에서 엄청 크고 훌륭한 시설이었다.
콘서트의 시작은 타히티전통악기시연부터 시작됐다.
곧이어 타히티역사극이 파노라마오페라스타일로 펼쳐졌다.
스페인군대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타히티전사들의 이야기였다. 파괴된 섬을 복구하는 타이티원주민들의 스토리가 무척 낯익었다.
도치씨는 관람하는 관광객들 중 제일 요란하게 박수를 쳤다.
가이드가 엄지를 세우며 웃었다.
전사들이 퇴장하고 하와이안기타 연주가 붉은 꽃이 핀 하비스커스 숲에서 흘러나왔다.
하와이안기타 연주는 마법의 연기처럼 관광객들을 환상에 빠지게 했다.
도치씨도 연주에 취했다.
숲에서 붉은 하비스커스 꽃을 머리에 꽂은 무희들이 전통악기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쏟아져 나왔다.
가이드가 말했다.
“뚱뚱한 폴리네시아 여자들 중 유독 타히티여자들만 날씬한 이유가 뭔지 아세요?”
“?”
“스페인군인들이 침략했을 때 동굴이나 바위틈에 숨을 수 없었던 여자들은 전부 뚱보였거든요.”
도치씨는 가이드를 보고 웃었다.
“그러고 보니 타히티엔 뚱뚱한 여자가 안보이더군요. 나는 다이어트를 잘해서 그런 가 했지만, 전쟁 때문에 요요현상이 없었던 거네요?”
인위적으로 다이어트 하는 게 아니라 침략군의 약탈에서 살아남기 위해 살을 빼는 전통이 계승됐다면 다른 폴리네시안 들보다 수명도 길어졌을 것 같아 가이드에게 물었다.
“평균수명도 길죠?”
“수명뿐 아니라 타히티여자들의 춤은 다른 섬나라보다 훨씬 관능적이 됐죠.”
전통연주가 무르익었다.
타히티민속춤 오리타히티가 끝나는 순간까지 도치씨는 타히티공연에 올인했다.
낚시로 인해 서운했던 감정도 해소되었다.
공연이 끝나고 무희들이 관람석으로 다가왔다.
야자나무 잎으로 만든 무희들의 바구니를 가리키며 도치씨가 물었다.
“저 바구니 속의 꽃은 무슨 꽃인가요?”
가이드가 웃었다.
“티아레를 모르세요?”
도치씨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폴리네시아를 출장여행하면서 레이로 받았던 꽃이었지만, 야자바구니에 담긴 티아레는 레이로 만든 꽃보다 색감이 낯설어 보였던 것이다.
“레이로 만드는 꽃이란 건 알지만 느낌이 생소합니다.”
가이드가 도치씨에게 하트를 그려 보이며 말했다.
“타히티여자들이 사랑을 선택한 남자에게 던지는 꽃이었지만, 지금은 관광객들을 환영한다는 의미로 바뀌었답니다. 허지만 던지지 않고 손으로 건네주면 지금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도치씨가 농담했다.
“그렇다면 저 3번째 여자한테 티아레 한번 받아 봤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그런 행운이 따를 것입니다.”
무희들이 객석 앞에 일렬로 섰다.
공연마스터가 말했다.
“타히티아가씨들이 던지는 티아레를 잡으시면 사랑의 행운이 옵니다. 아직 사랑을 모르시거나 죽도록 사랑 받고 싶은 분은 목숨 내걸고 티아레를 잡으세요.”
“우우우우.”
관광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마스터가 카운트했다.
“트리! 투! 원! 고!”
무희들이 일제히 티아레를 던졌다.
18송이의 타이레가 하얀 나비처럼 하늘을 날았다.
떨어지는 티아레를 잡으려고 관광객들이 손을 높이 쳐들었다.
요행이 도치씨는 두 송이의 티아레를 잡았다.
마스터가 핸드마이크를 들었다.
“잡으신 분은 앞으로 나와주세요. 타히티사랑을 나눠 드리겠습니다.”
도치씨는 가이드에게 티아레 한 송이를 내밀었다.
가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 아내가 있으니까요.”
그때 바로 앞자리에 앉았던 히잡 쓴 여자가 뒤돌아봤다.
여자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검은 눈동자의 깊은 곳에 신비함이 고여 있었다.
도치씨가 티아레를 내밀었다.
마스터 앞으로 나간 28명의 관광객중 도치씨의 파트너로 추첨된 사람은 도치씨의 티아레를 받아든 히잡 쓴 여자였다.
무희들과 어울려 오리타히티를 전수받은 후 공연마스터의 리드로 타히티댄스가 시작됐다.
그날 밤 도치씨는 잠을 설쳤다.
오리타히티파트너가 됐던 히잡 쓴 여자의 환상이 눈만 감으면 레이저화상처럼 떠올랐다.
다음날 아쉬움과 서운함을 남기고 도치씨는 트랩을 올라갔다.
17A.
도치씨의 좌석이었다.
체크아웃직전 17B 좌석의 주인이 나타났다.
도치씨는 스프링처럼 일어섰다.
어제오후 타히티댄스를 함께 추었던 히잡 쓴 여자였다.
도치씨가 고개를 먼저 숙였다.
“Ah! I met you again. nice to meet you.”
“Yes, nice to meet you.”
“Would you like to sit on the window if you feel uncomfortable in the middle?”
여자가 낯선 두 남자의 가운데 앉으면 불편할 것 같아 묻는 도치씨의 말에 히잡 쓴 여자가 미소로 대답했다.
“정말이에요? 고맙습니다.”
도치씨가 깜짝 놀라 말까지 더듬었다.
“하 하 한국말을 잘하시네요.”
여자가 대답했다.
“저는 한국어를 전공했어요. 현재 면세쇼핑몰에서 연수중이구요.”
자리를 바꿔 앉아 착석한 후, 인천공항에 도착하기까지 5시간동안 도치씨의 영혼은 주전자의 물처럼 수증기로 증발해버렸다.
히잡 쓴 여자의 깊고 검은 눈동자와 뺨에서 번지는 미소가 그녀의 식물성체향과 믹스되어 도치씨의 존재자체를 완전히 허물어트렸다.
도치씨는 첫눈에 반한 것이 아니고 첫 만남에 사랑해버렸던 것이다.
그 여자가 블랙파이어렛과 대치하다 상상한 시바 가야였다.
.
|
첫댓글 소설 낚시가 갈수록 흥미를 돋구내요
잘보았슴니다.
장편 소설 낚시 잘보았슴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