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addest Thing - Melanie음악을 들으려면원본보기를 클릭해주세요.
해방이 되자 아버지는 식구들을 데리고 장호원으로 가셨다고 한다.
왜 무엇 때문에 가셨는지는 구체적으로 모른다.
내가 그 해 숭인동에서 태어났으니 그 뒤 일거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그래도 어떻게 해서 사장이 일본인인 토건회사에 취직하셨다.
그것 때문이었을까?
일제에 붙어 먹었다고 할까 봐 눈이 무서워 서울에서 살다 촌으로
피신한 것은 아니었을까?
밑에 동생이 2년 후 삼선교에서 태어났으니 1년쯤 사신 것 같다.
해방되고 친일 했던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1947년에 발간된 <조선교육>에는 이무영 소설 <1년기>가 있다.
그는 아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어쩌면 그가 친일파였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역시 몹시 고통을 받았을데니깐.
친일파였던 주인공이 겪는 이야기이다.
해방되고 나서 좌익,우익, 중도파로 나누어 졌던 시기이다.
한마디로 무질서였다.
그 때 친일파들은 어떤 고난을 겪었을까?
면 징용계원이었던 사람은 도망가서 대신 열 살 먹은 어린 아이를 때려 죽였으며,
그 일로 어머니는 실성했고,
산림주사였던 사람은 귀를 낫으로 도려내서 낫끝에다 찍어가지고 광고를 시켰으며,
구장노릇을 한 죄로 다리를 분질어 버렸고, 네 다섯사람들이 덤벼들어서 산 사람의
눈을 빼어 버렸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잔혹할 수 있었을까?
도망다니는 주인공 역시 일인교장과 면장과 함께 징용간 집을 순방하고 거짓위로를
한 짓뿐이었다.
그를 쫓는 사람들 대부분이 같은 동네에서 어릴 때부터 살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아우츠비츠수용소에서 나치보다 더 악랄한 사람이 유태인이라고 했다.
일제 때 일본인보다 더 잔인했던 것이 앞잡이 노릇했던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했다.
인민군이 쳐들어 왔을 때 미쳐 날뛴 사람은 같은 동네에 살던 사람이었단다.
누가 누구를 죽일 권리가 있단 말인가?
무법천지였다는 것이다.
정당한 심판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성전에 많은 무리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파할 때,
예수를 죽이려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왔다.
모세 율법에는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 있었는데,
예수는 사람의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라, 그들은 예수도 간음한 여인에게
어쩔 수 없이 모세의 율법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먼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들이 도망치듯이 떠나가 버렸습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고 예수앞에 선 사람은 오직 간음한 여인뿐이었다.
이런 여인에게 예수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해방 직후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예수나 여인이나 다 죽지 않았을까?
切忌從他覓.
절대로 남에게 구하지 말라 는
洞山良价(동산양개)(807∼869))선사의 말씀이다.
적은 아주 가까운데 있다.
내 안에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36년동안 일제하에서 친일이나 부일, 협력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사람들 다 죽이고 죄를 물었으면 아마 불과 몇 사람(독립군..)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생계형 및 협박 당한자, 어쩔수 없이 협력한자는 제외시켰다.
그러나 당시 선구자 내지 가장 앞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친일파라고 해서 죄를 물었다.
그들까지 용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