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선포의 십자가
1코린 4,6ㄴ-15; 루카 6,1-5 /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2024.9.7.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기쁨과 행복의 길로 가는 구원을 주시는 분이시지만, 세상이 하느님을 모르고 심지어 적대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고자 하거나 단지 하느님을 믿고 섬기려 하는 이들에게 고난을 주곤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길에 맞닥뜨리는 십자가는 메시아에게 있어서나 그를 따르는 사도직에 있어서나 공통적으로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복음을 선포하는 활동 자체에서 오는 실존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을 선포받는 이들이거나 또는 이 복음선포 활동을 반대하는 이들로부터 오는 관계적인 것입니다. 독서와 복음 공히 오늘 말씀에서 실존적인 십자가는 굶주림이며, 관계적인 십자가는 위화감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종류의 십자가 모두를 짊어지게 만드는 부활의 힘은 정체성에서 옵니다. 하느님 때문에 생겨나는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운으로만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존적인 십자가인 굶주림은 복음선포자가 지닌 정체성의 근원인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풀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 일행은 일정한 생업도 없고 또 든든한 후원자가 제공하는 그 어떠한 보장도 없이 하느님 나라를 위한 삶을 시작했으므로 수시로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찾아와서 치유를 받거나 구마를 받고 나면 베풀어주던 잔치에서야 마음껏 먹을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날은 쫄딱 굶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혈기왕성한 나이의 제자들이 배고픈 나머지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밀 이삭 몇 개를 손으로 비벼 먹는 일이야 인정상 눈감아 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행을 뒤따라오면서 감시하던 바리사이들이 트집을 잡았습니다. 하필 그날이 안식일이었고,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정해 놓은 안식일 규정에 의하면 남의 밀밭에서 추수를 도와주는 품앗이도 생업에 해당되는 일이어서 금지사항에 해당되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제자들이 만성적으로 겪고 있던 굶주림이 보이지 않았던 게지요. 진실에 눈먼 그들의 처사는 이런 얄궂은 질문으로 송곳처럼 제자들에게 꽂혔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 6,2ㄴ)
동서양을 막론하고 구도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식은 호흡에 의한 양생입니다. 들숨과 날숨을 가능한 한 천천히 그리고 길게 하는 수련을 하면 자연의 기를 섭취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자연의 동식물이 제공하는 음식에서 기를 취하지 않아도 생존이 가능합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께서는 밀 이삭에 손도 대지 않으셨는데, 수련 내공이 아직 몸에 배지 못했고 단지 배고팠던 제자들이 눈치 없이 남의 밀밭에서 밀 이삭을 뜯어서 비벼 먹다가 일이 생겨버렸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들이 제기한 논리로 맞받아 치셨습니다. 바로 안식일 논쟁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마르 2,27)이라든가, ‘예수님께서 안식일 법을 제정하신 주인’(루카 6,5ㄴ)이라는 계시가 이렇게 해서 나왔습니다. 진실에 눈 먼 종교인들로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진리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느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찾아와서 잔치가 벌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실존적인 십자가는 정체성의 근원인 하느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는 이치가 그래서 나옵니다.
그 다음, 관계적인 십자가는 하느님께로부터 충전받은 기운으로 자기 정체성에 기대어 풀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두 번째 선교여행에서 그리스 선교를 개척하면서 코린토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선교여행에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 사이 몇 년 동안에 이 공동체는 교우들도 늘어났고 그들의 신앙도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바오로가 개척하고 난 다음에 아폴로가 와서 성경을 가르쳤는데, 바오로 편과 아폴로 편으로 나뉘어 분열상을 보인 것입니다. 그들 코린토 교우들의 눈에는 이 두 사도가 전한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은 눈에 보이지 않고 두 사도의 인간적인 모습만 보였던 게지요. 사도마다 인간적인 관계의 친소(親疏)가 생기기 마련인지라 요즘 말로 하면 각 사도의 열성 지지자들이 끼리끼리 따로 모이는 현상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소식을 에게해 건너 편 에페소의 차가운 돌감옥에서 전해 들은 바오로가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기록된 것에서 벗어나지 마라. 한 쪽을 편들고 다른 쪽을 얕보지 마라. 우쭐대지 마라.”(1코린 4,6ㄴ) 그러면서 사도 바오로가 꺼내들 수 있는 비장의 무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복음을 선포하느라 겪었던 고생담이요 무용담입니다.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우리 손으로 애써 일합니다. 사람들이 욕을 하면 축복해 주고 박해를 하면 견디어 내고 중상을 하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1코린 4,11-13)
이렇게, 관계적인 십자가는 자기 정체성의 체험으로 수습할 수 있습니다. 코린토 공동체의 어느 교우도, 사도 바오로가 겪어야 했던 고생의 1/100도 겪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대접을 받을 정도로 교양 있던 그리스 시민도 아니었고, 권세를 누리던 로마 시민권자들도 아닌, 보잘 것 없는 가문 출신들이었고 무식하고 가진 것 없는 처지에서 사도 바오로를 만나 공동체를 꾸렸던 이들이기 때문에(1코린 1,26 참조)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공동체를 건설하느라 들인 고생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꼼짝 못하고 승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오로가 지닌 사도적 정체성의 힘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짐작하건대, 복음선포의 십자가가 굶주림과 같은 실존적인 것이거나 또는 위화감과 같은 관계적인 것이거나 간에, 박해시대 우리 신앙선조들도 똑같이 겪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실존적인 십자가를 견디어 내려는 내공에서 영성이 진화되었을 것이고, 관계적인 십자가를 견디어 내려는 내공에서 공동체의 친화력과 일체감이 더욱 굳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박해가 닥치면 신앙은 더 순수해지고 단단해집니다. 배교자나 낙오자도 나오겠지만 말입니다. 적어도 남은 교우들은 절절히 깨달은 진실입니다, 박해와 시련은 신앙의 정체성을 성숙시키고 성장시킨다는 것. 그러니 복음 선포 활동이나 신앙 생활에서 겪게 되는 경제적이거나 관계적인 십자가를 통해서 전에는 보이지 않던 진실에 눈을 뜨고, 이 진실의 힘으로 신앙의 정체성을 성숙시켜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일이 우리에게는 은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