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환경은 대하드라마를 집필하는데 있어서 남다른 재주를 가진 이야기꾼이다. 역사적 소재를 발굴하고, 인물을 재구성하는 독창성과 구성력, 긴 호흡의 이야기를 아기자기하게 끌어가는 힘은 짧은 글 하나를 쓰기에도 헐떡이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가히 우러러보일만한 수준이다.
그는 용의 눈물과 태조 왕건을 통하여 역사에서 악역의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는 이방원과 궁예를 카리스마의 군주로 재해석시켜놓았고 두 작품모두 사회적 이슈가 될만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현재 국내에서 가장 잘 나가는 방송작가일 뿐 아니라, 현재는 전례를 보기힘든 두 방송국의 두편의 대하드라마 동시집필(제국의 아침, 야인시대)을 하고 있을 정도로 그의 주가는 최고조에 올라있다. 특히 야인시대는 시청률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높은 인기를끌고 있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누구도 그가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방대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대하사극에서 시청률에 따라 에피소드를 너무 질질 끈다는 비판도 많이 받지만 적어도 그의 작품은 언제나 화제가 되어 왔으며, 그의 작품들의 인기속에서 작은 비판은 언제나 소소한 목소리로 묻혀져 넘어왔다.
하지만 반대로 그는 역사왜곡이라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는 작가이기도 하다. 실제 역사에 기초한 대하사극을 주로 집필한 작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작품이 실제로 대중에게 어필한 반향도 만만치 않은 탓이기도 하다.
'용의 눈물'은 97년 15대 대선과 맞물려 이방원(대통령중심제)과 정도전(내각책임제)이라는 두 역사적 인물을 현대의 통치체제에 대입시켜 재해석함으로서 정치권에 까지 논란을 일으켰으며, '태조왕건'은 포악한 군주의 대명사로 알려진 궁예를 지나치게 영웅적으로 포장하고, 전란기였던 후삼국시대에 고통받던 민초들의 삶을 외면하고 전쟁을 미화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문제를 일으켰다.
사실, 사극에서 '역사왜곡'과 '재해석'이라는 가치평가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이환경은 모 방송에서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그저 작가일뿐 역사가가 아니다.''드라마는 드라마로 보아야지, 역사교과서로 생각하고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폈다. 어줍짢은 역사지식을 가지고 이리저리 떠드는 아마추어 역사가들보다 이환경은 적어도 솔직하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했으며, 부분부분 역사적 사실을 수정(그는 '왜곡'이 아니라 수정 내지는 드라마적 재구성이라고 불렀다.)했음도 시인했다.
역사학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조예가 있는 사람들은, 이런 사극을 허접한 상업주의의 산물로 보고 혹평하기 일쑤지만,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환경의 주장에 동의한다.'그럼 당신은 보지않으면 될거 아니냐?'고.
사실 드라마적 재미가 없는 역사이야기는 '역사스페셜'이지 드라마가 아니다. 소소한 야사 하나까지 완벽한 고증과 역사적 사료의 재구성을 원하는 결벽주의자들을 보면 피곤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이환경의 방송작가로서의 상업적 성공이 무엇보다 '역사' 라는 배경에 큰 채무를 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는 언제나 일관되게 대하사극이라는 소재에 도전해왔고, 역사적 실존인물과 사건들을 통하여 이야기를창조해 냄으로서 스스로 이러한 비판에 노출될 소지를 안고 글을 써왔다.
그가 비록 '역사가'는 아닐지언정, '역사이야기'를 통하여 작가로서의 명성을 쌓아왔고, 방송이라는 공익매체에 드라마로써 개인의 역사적 재해석과 가치평가를 내림으로서, 불특정 다수의 대중에게 교과서 못지않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을 소홀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무책임한 처사다.
물론 드라마적 구성상, 완벽한 사료대로의 고증과 이야기전개를 요구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어느 누가 어떻게 전개하더라도 비판의 여지가 있는 것이고, 시청률이라는 또 하나의 골칫거리를안고있는 작가에게 너무 가혹한 요구일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잘난 드라마적 구성을 위해 중요한 역사적 인물들에 제멋대로 영웅의 칭호를 부과하거나 면죄부를 주는 것은 왜곡을 넘어선 호도이다.
이환경의 최근 드라마 경향에서 시청률의 상승이면에 두드러졌던 것은 영웅주의의 강화이다. 현대는 영웅이 없는 시대라고 한다. 민주주의 시대,아직도 대중들은 국가와 사회의 주인이라는 인식보다는 초월적인 영웅에 의하여 '지배받고 싶어하는'혹은 '구원받고 싶어하는' 의존성을 가지고 있다. 현재의 지도자 계층에게서 느낄수 없는 존경심과 구원감을 텔레비전속의 영웅들을 통하여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이방원, 정도전, 왕건,궁예,견훤...그리고 김두한에 이르기까지, 교과서에서 기껏 한두줄의 설명으로 지나쳤던 우리의 역사적 인물들은 이환경의 글속에서 생동감있는 난세의 영웅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작품속에서 이환경의 영웅주의 사관은 종종 민중의 가치를 실종시키거나 폭력과 권위에 의존한 지배를 카리스마로 왜곡시킨다.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지는 참혹한 전쟁의 모습도 백성의 고통보다는 지도자의 승리를 위한 작은 시련정도로 그려지고, 자신의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무고한 신하들을 죽인 군주의 모습은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선각자가 짊어진 고난의 십자가 정도로 그려진다.
개인보다는 국가, 우매한 대중보다는 현명한 지도자(영웅)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이환경의 글속에서는 지극히 폭력적 남성성의 우월함에 대한 동경이 담겨져 있다.
이러한 경향성은 최근의 '야인시대'에서 두드러지는데 여기서 이환경이 그려내는 김두한은 말 그대로 주먹과 의리를 통하여 난세를 헤쳐나가는 마이너리티 영웅으로 그려진다. 일자무식 건달에서 일약 종로의 주먹세계를 평정해나가는 젊은 청년의 성공스토리에 일본과 맞서싸우는 거리의 독립군이라는 민족주의적 배경이 끼어든다. 그에게 목을 매다는 미인들과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고수 건달들은 부록이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대하사극이라기 보다는 무협지의 성격을 띄고있는 드라마라고 할수 있다.여기서는 '야인'이라는 표현으로 노골적 숭배의 냄새를 약간 피해보려고 하지만,김두한은 이환경이 추종하는 영웅주의의 가장 전형적인 표현이라고 볼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김두한은 '장군의 아들'이고 격동의 세월을 헤쳐온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요소가 매력적이긴 하지만, 영웅으로 숭배받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인물이다. 그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조직폭력배'의 원조로 꼽히는 사람인데다가(시사저널) 광복 이후 좌우익 사상대립이 극심하던 시절에 양 진영을 오가며 테러리스트로 악명을 떨쳤던 기록도 있다. 각종 사건과 인명피해에 김두한의 이름이 깊숙히 거명되고 있는데, 다른 것은 몰라도 그가 무고한 사람들까지 다수 살해한 청부살인자라는 전력은 그가 주체적으로 저지른 짓이든, 정권의 하수인으로서 저지른 짓이든 간에 용서받을 수 없는 역사적 중범죄이다.
1930년대 종로통에서 일본 야쿠자와 맞섰던 시절의 무용담만 가지고 그의 일생을 조명하기에는 그가 가지고 있는 결점과 사회적 폐해가 너무 커보인다. 더구나 그가 종로통 보스였던 시절에도, 야인시대 극중의 구마적처럼 말년에는 야쿠자들과 공생하고, 그들의 수하로 들어갔다는 이야기까지 들릴 정도다.
이런 결점에도 불구하교, 드라마는 줄곧 김두한 영웅만들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물론 드라마의 인기는 좋다. 곳곳에서 김두한 신드롬이 일어나고 있다. 중고등학생들은 야인시대를 보고, 극중 누가 제일 강한지를 놓고 입씨름을 벌이고 있고, 신마적, 쌍칼, 김무옥 등 극중 인물들에 몰입하여 자신의 환상속에 동일화시킨다. 멋진 조폭을 꿈꾸는 학생들은 강한 힘을 갈망하고 폭력을 우상시한다. 지금도 극중 장면에서는 한 회 2-3회 정도의 강도높은 폭력씬이 빠지지 않는다.
이쯤되면 이환경의 '역사를 이용한 상업주의' 노선이 얼마나 위험수위에 도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시청률이 높은 한, 이런 방식은 게속될것이고, 이환경은 계속 역사적 인물들과 사건들을 우려먹으면서도, 아무런 채무의식없이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라는 입장을 고수할 것이다.
역사가만이 역사의식에 대한 책임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방송작가는 어쩌면 역사가보다 현 세대에 국한해서는 더 높은 파괴력을 지니는 공인임에 틀림없다. 마음대로 역사를 이야깃거리로 다루면서 책임지려고 하지않는 태도를 보인다면 그는 이미 작가로서의 직업윤리를 잃어버린 방송 장사꾼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나' 역사를 이야기할 권리를 가지고는 있지만 '아무나' 역사를 해석할 권리는 없다. 오늘날 같은 미디어 우위의 시대에 방송은 곧 새로운 교과서이자, 그 자체로 역사적 진실이 되어버릴수 있기 때문이다.